디베랴의 아침 (요21:3-6)
본문
오늘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기인 부활의 아침입니다. 성탄절보다 더 큰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그런 아침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수많은 예언들이 있는데 그 모든 예언들이 완벽하게 성취된 날이 바로 오늘 이 아침입니다. 일찍이 기독교에 이 날이 없었다고 하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하르낙은 “부활이 없는 나 자신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W. M 베어드라는 사람은 “우리가 전도를 할 때는 반드시 부활을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부활의 아침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주어진 그런 아침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온갖 희망을 다 가지고 따랐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그 날이 되면 그 때는 지금의 이 모든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불평없이 뒤를 따랐습니다.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이 다음에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을 가졌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허망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자살해서 죽어 버렸고, 어떤 제자는 엠마오로 떠나 버렸고, 또 어떤 제자는 다락방으로 은신해 버렸고, 베드로 일행은 고향으로 돌아가 모두 뿔뿔이 헤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드로 일행은 금의 환향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실패자가 되어서 낙향을 했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초라하고 왜소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가서 옛날 버려 두었던 그물을 다시 챙겨 가지고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실패한 그들에게 고긴들 잘 잡혀 주었겠습니까 그날 밤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밤을 새워서 고기를 잡았건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걸려들지 않습니다. 아마 그날 밤 제자들의 심정은 암담했을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은 살 맛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안팎으로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하리 만큼 침체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은 예리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 날 그 곳에 몇 가지 현상이 일어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그 곳까지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이를테면 실패자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그 곳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아주 철저하게 배신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먼저 만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를 먼저 만나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찾아가서 “당신 너무했어”하고 한 마디쯤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한번쯤 큰 소리를 쳐 주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눈길조차도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지금 실의에 빠져 있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도 않으셨습니다. 배신한 사람을 징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자마자 완전히 실패해서 주저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 디베랴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는 누구입니까 그 분은 실패한 사람을 잊지 않고 친히 찾아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덤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삶에 낙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무력을 느끼는 사람들 때문에, 병들어 죽게된 사람들 때문에, 죄로 멸망을 당할 사람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이생만을 위해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경제위기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나라 이 민족을 때문에 오늘 평강교회 성도들 때문에 무덤에 그냥 있지 않고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친히 디베랴 강가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셨다는 사실은 이 같은 뜻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제일 먼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 곳에 인간의 철저한 무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곳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고기를 잡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밤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부가 밤을 새워가며 고기를 잡았는데도 단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말입니다. 이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의 무능함, 무력함, 빈약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낸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무능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물고기를 잡으러 많이 다녔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꼭 큰 그릇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어미니께서 그러십니다. “어디 눈 먼 고기가 그렇게 많다더냐.” 그러면 저는 그럽니다. “염려 마시고 저녁 준비나 하세요”
그런데 가서 잡으면 어디 잡힙니까 고기들이 나 잡아 달라고 기다려 줍니까 큰 그릇을 가지고 자신 있게 동네를 가로 질러서 나왔는데 이제 돌아갈 일이 큰 일입니다. 빈 그릇을 들고 동네로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해가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어두원진 후에 빈 그릇을 들고 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이나 무지나 내용 없음을 보이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이렇게 솔직한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존심이나 체면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그대로를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지하면 무지한 그 모습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력이 없으면 없는 그래로를 보이는 것이 좋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주님앞에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지은 그대로를 고백하면 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씻김을 받습니다. 채워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솔직합니까 “우리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빈 그릇입니다. ” 별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 때 주님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그물을 채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래서 제자들이 그 방법대로 하니까 한 번 그물을 던졌는데도 고기들이 가득 가득하게 잡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를 내 놓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의 아침에 디베랴 강가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세 번째는 오른편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을 때는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고기들이 그물 가득히 잡혀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른편 정신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른편은 복된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는 영광의 자리고, 승리자가 앉는 자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양이 앉는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앉는다고 했습니다. 또 전도서 10:2을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왼편은 실패자의 자리입니다. 헛수고의 자리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우매한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염소들이 있는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왼편은 부정의 자리, 어둠의 자리, 불의의 자리, 욕망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는 왼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왼편에서 욕망을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가을에 낙엽 지듯 사정없이 마구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떳떳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다 보니까 이런 세상도 다 살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이 모두 불 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 때 멀리서 불 구경을 하고 있던 거지 아들이 말합니다. “저 사람들 참 안됐습니다.” 그 때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 봐라, 우리들은 불에 탈 것이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게 다 애비 잘 둔 덕분인 줄 알아라.” 아마 이들이 이 시대의 양심인들인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그 날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오른편에 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른편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은 은혜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기쁨을 거두는 곳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오른편 사상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부활하신 그 날 아침에 이 같은 교훈을 배웠습니다. 네 번째는 순종입니다. 주님이 그 날 아침 모두 실패하고 지쳐 있는 그들에게 오신 것도 축복입니다. 또한 그 곳에 솔직한 고백이 있던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좋은 교훈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무엇보다도 더 좋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많이 알고 많이 배웠어도 순종하지 않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배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현대 지성인들에게 죄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성을 자부하기만 하고 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성인은 남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지성인들은 아는 것은 많은데 지식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지성인의 죄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아는 바를 남에게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은 아는 것은 많은데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려는 책임 의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간섭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랑을 베풀지도 않지만 사랑을 줘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이기주의입니다. 어떤 여인이 교통 사고로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여인은 비관을 하면서 남편에게 자꾸만 이혼하고 자신을 떠나서 재가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위로를 합니다. 전보다 더 사랑을 합니다. 전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인은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죽습니다.”라고 편지를 써 놓고 자살해서 죽어 버립니다. 언뜻 보면 이 여인은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교만한 여인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남편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고 괴로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는 사랑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똑같은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오라는 것인데 못가겠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고 교만입니다. 히브리 격언에는 하나님을 최상으로 영화롭게 하는 길은 하나님께 나가서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죄송하고 미안하고 염치없는 생각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교만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너무 염치없이 달라는 기도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주 그럴 듯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교만한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하나님께 달라는 말 빼놓고 기도를 해 보십시오. 얼마를 기도할 것입니까 기도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도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할 때 자세히 보십시오. 어디 미안해 합니까 아주 당연하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셨고,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주님을 위해서 순종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는 거두는 축복이 있고, 채워지는 기쁨이 있고, 그물 가득히 잡아들이는 행복의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에 배우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을 가졌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허망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자살해서 죽어 버렸고, 어떤 제자는 엠마오로 떠나 버렸고, 또 어떤 제자는 다락방으로 은신해 버렸고, 베드로 일행은 고향으로 돌아가 모두 뿔뿔이 헤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드로 일행은 금의 환향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실패자가 되어서 낙향을 했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초라하고 왜소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가서 옛날 버려 두었던 그물을 다시 챙겨 가지고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실패한 그들에게 고긴들 잘 잡혀 주었겠습니까 그날 밤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밤을 새워서 고기를 잡았건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걸려들지 않습니다. 아마 그날 밤 제자들의 심정은 암담했을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은 살 맛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안팎으로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회생이 불가능하리 만큼 침체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은 예리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 날 그 곳에 몇 가지 현상이 일어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그 곳까지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이를테면 실패자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그 곳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아주 철저하게 배신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먼저 만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를 먼저 만나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찾아가서 “당신 너무했어”하고 한 마디쯤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한번쯤 큰 소리를 쳐 주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눈길조차도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지금 실의에 빠져 있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도 않으셨습니다. 배신한 사람을 징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자마자 완전히 실패해서 주저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 디베랴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는 누구입니까 그 분은 실패한 사람을 잊지 않고 친히 찾아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덤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삶에 낙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무력을 느끼는 사람들 때문에, 병들어 죽게된 사람들 때문에, 죄로 멸망을 당할 사람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이생만을 위해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경제위기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나라 이 민족을 때문에 오늘 평강교회 성도들 때문에 무덤에 그냥 있지 않고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친히 디베랴 강가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셨다는 사실은 이 같은 뜻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제일 먼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 곳에 인간의 철저한 무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곳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고기를 잡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밤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부가 밤을 새워가며 고기를 잡았는데도 단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말입니다. 이 말은 겸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의 무능함, 무력함, 빈약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낸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무능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물고기를 잡으러 많이 다녔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꼭 큰 그릇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어미니께서 그러십니다. “어디 눈 먼 고기가 그렇게 많다더냐.” 그러면 저는 그럽니다. “염려 마시고 저녁 준비나 하세요”
그런데 가서 잡으면 어디 잡힙니까 고기들이 나 잡아 달라고 기다려 줍니까 큰 그릇을 가지고 자신 있게 동네를 가로 질러서 나왔는데 이제 돌아갈 일이 큰 일입니다. 빈 그릇을 들고 동네로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해가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어두원진 후에 빈 그릇을 들고 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이나 무지나 내용 없음을 보이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이렇게 솔직한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존심이나 체면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그대로를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지하면 무지한 그 모습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력이 없으면 없는 그래로를 보이는 것이 좋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주님앞에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지은 그대로를 고백하면 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씻김을 받습니다. 채워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제자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솔직합니까 “우리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지만 빈 그릇입니다. ” 별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 때 주님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그물을 채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래서 제자들이 그 방법대로 하니까 한 번 그물을 던졌는데도 고기들이 가득 가득하게 잡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를 내 놓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의 아침에 디베랴 강가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세 번째는 오른편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잡을 때는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고기들이 그물 가득히 잡혀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른편 정신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른편은 복된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는 영광의 자리고, 승리자가 앉는 자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양이 앉는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앉는다고 했습니다. 또 전도서 10:2을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왼편은 실패자의 자리입니다. 헛수고의 자리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우매한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염소들이 있는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왼편은 부정의 자리, 어둠의 자리, 불의의 자리, 욕망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는 왼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왼편에서 욕망을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가을에 낙엽 지듯 사정없이 마구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떳떳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다 보니까 이런 세상도 다 살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이 모두 불 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 때 멀리서 불 구경을 하고 있던 거지 아들이 말합니다. “저 사람들 참 안됐습니다.” 그 때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 봐라, 우리들은 불에 탈 것이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게 다 애비 잘 둔 덕분인 줄 알아라.” 아마 이들이 이 시대의 양심인들인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그 날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오른편에 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른편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은 은혜를 체험하는 곳입니다. 기쁨을 거두는 곳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오른편 사상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부활하신 그 날 아침에 이 같은 교훈을 배웠습니다. 네 번째는 순종입니다. 주님이 그 날 아침 모두 실패하고 지쳐 있는 그들에게 오신 것도 축복입니다. 또한 그 곳에 솔직한 고백이 있던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좋은 교훈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무엇보다도 더 좋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많이 알고 많이 배웠어도 순종하지 않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배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현대 지성인들에게 죄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성을 자부하기만 하고 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성인은 남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지성인들은 아는 것은 많은데 지식대로 행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지성인의 죄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아는 바를 남에게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은 아는 것은 많은데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려는 책임 의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간섭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랑을 베풀지도 않지만 사랑을 줘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이기주의입니다. 어떤 여인이 교통 사고로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여인은 비관을 하면서 남편에게 자꾸만 이혼하고 자신을 떠나서 재가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위로를 합니다. 전보다 더 사랑을 합니다. 전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인은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죽습니다.”라고 편지를 써 놓고 자살해서 죽어 버립니다. 언뜻 보면 이 여인은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교만한 여인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남편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고 괴로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는 사랑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똑같은 교만입니다. 그러니까 오라는 것인데 못가겠다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고 교만입니다. 히브리 격언에는 하나님을 최상으로 영화롭게 하는 길은 하나님께 나가서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죄송하고 미안하고 염치없는 생각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교만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너무 염치없이 달라는 기도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주 그럴 듯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교만한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하나님께 달라는 말 빼놓고 기도를 해 보십시오. 얼마를 기도할 것입니까 기도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도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할 때 자세히 보십시오. 어디 미안해 합니까 아주 당연하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셨고,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주님을 위해서 순종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는 거두는 축복이 있고, 채워지는 기쁨이 있고, 그물 가득히 잡아들이는 행복의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에 배우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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