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0-52)
본문
누가복음 2장은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가르치기를 시작한 때"-(눅 3:23)-곧 공생애 이전까지의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 생 기사는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져 있으나, 탄생 후 공생애까지 그 사이의 기록은 없다. 일부 불교계에서 그 사이의 기록이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예수님이 불교에 입문하여 수 도를 닦고 새롭게 새운 종교가 기독교라고 하기도 한다. 아마도 또 다 른 종교에서도 예수님의 기록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하튼 공생애 이전까지의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쉬웁게도 성경에서는 이 누가복음 2장의 두 번 성전에 올라간 기록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중 12세 때에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가셔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신 기록이다. 열 두 살은 "율법의 아들"이 되는 해이다. 곧 율법을 따라 절기 금식 등을 지키게 된다. 오늘의 교회 로 말하자면 세례 교인이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유대인의 자녀 교육에 대하여 살펴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신앙 교육을 받게 된다. 6세 때 부터 쉐마 구절이나(신6:4-9), 시편의 중요 구절을 암송하게 되고, 10세 때부터 미쉬나(율법을 해석한 책)를 배우고, 12세 때부터 "율법의 아들" 이 되어 본격적으로 배우고 지켜야 한다. 18세 때부터 게마라(완전한 율법서)를 공부하게 되고 20세 때부터는 성인이 된다. 열 두 살이라 함은. 지금까지 부모님의 그늘에서 신앙 생활하던 것을 벗어나 자신이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하는 자발적인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육적인 예수님의 신앙 생활은 유월절에서 시작이 되어서 유월절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의 삶 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성도들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의 인간 예수 그 육신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성도가 본받아야 할 모습들을 생각해 보고져 한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이 지키셨던 첫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주님의 모습 가운데 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라고 본다.
1.예수님은 우리의 표상이시다. 요한복음 13: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땅 위에서의 주님의 삶은 한 인간으로써 "완전한 삶"이었다. 한 사람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완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표상"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었다(롬5: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분의 순종의 모습, 사랑의 모습, 희생의 모습, 의의 모습, 거룩의 모 습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하시던, 그 온전하신 모습을 친히 보여 주셨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열 두 살 이후의 모습을 살펴 보고져 한다. 공생애 이전으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생애에 들어가셔서의 삶의 모습은 이적과 기사로 우리가 본받 기에 너무 벅찬 가슴이 되게 한다.
⑴.자라가는 모습 본문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주님의 자라가는 모습은 우리 성도들의 표상이다. 그 자라가는 모습 은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의 장성의 충만한 분량"으로 증거 되어진다. 바로 성도가 바라보고 자라가야 할 표상이요, 목표이다.
1.아기가 자라며 육적인 성장 모습을 말한다.
2.강하여 지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하고 담대하여져 감을 말한다
3.지혜가 충족하며육적인 지혜, 영적인 지혜가 성장해 감을 말한다
4.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나타나 보인 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 생각, 삶 속에, 그리고 삶의 결과로 남들의 눈에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져야 한다.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보여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눈에도, 전옥의 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 위에 있음을 보았다(창39장).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그 신앙 생활이 자라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신자에게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눈에도 보여야 한다. 보디발이나 전옥은 하나님 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⑵.유월절을 지키시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본문 42-42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 니 예수께서 열 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 를 좇아 올라갔다가/
1.부모가 해마다 부모는 그 자녀에게 교육의 선생이요, 산 표본이다. 말로서 가르치고 행함으로 본을 보이는 입체적 교육이요, 산 교육이 요, 전인 교육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삶의 모습에 따라 자녀의 모습도 달라진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그 부모가 해마다 절기를 당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 예배하는 삶의 모습을 본으로 보인 것이다. 이 또한 중요한 일이다.
2.열 두 살 때에 이제 예수님도 율법의 아들이 되어 자신이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모 습으로 자랐다. 그 자란 모습이 나타나 보이는 부분이다. 열 두 살 어린 나이에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예배에 참석하는 일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120km 되는 거리이다. 이 먼 길을 걸어서 예배 드리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그 주님처럼 열 두 살 짜리 우리의 자 녀들이 예배 드리려 찾겠는가 그것도 걸어서.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다 이것이 학생들의 사고방식이요, 우리 부모들의 사고방식이다. 불신 부모들은 고사하고, 교회의 직분을 가진 부모들도 고3의 열병 속에 자녀들을 공부방으로 몰아 넣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님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120km의 먼길을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셨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언젠가는 죽으셔 야 할 그 유월절 절기를
⑶.교제를 나누심 본문 42-43절/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그 부모와도 달랐다. 고향에 서 함께 올라왔던 사람들과도 달랐고, 일가친척들과도 달랐다. 저들은 전례를 쫓아 성전을 찾았다. 남들이 올라가니 올라가야 했고, 유대인 은 누구나 3대 절기에는 성전에 올라가 예배 드려야 하니 그 율법대 로 예배 드린 것이다. 전례를 쫓아 올라갔다가 마치고 돌아갔다 저들은 1주일간의 유월절 절기 "날들"을 마치고 돌아갔다. 마치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예배 드리려 왔다가, 예 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부류의 성도들이 많다. 주님의 모 습과는 다른 모습들이다.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다 떠나고난 성전이다. 부모도, 친척도, 친구도, 함께 온 고향 사람들 도 모두가 떠나고난 성전에 주님은 머무셨다. 하루도 아니요, 이틀도 아니요, 사흘 동안이나 머무셨다. 성전의 선생들 중에 앉아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 머무셨다. 듣기도 하시 고, 묻기도 하시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셨다. 듣는 자가 다 기이히 여기더라 그 교제에서 모인 자가 다 기이히 여기는 신선한 충격을 주셨다. 우리도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가 뒤돌아보 자.
2.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본문 46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전례를 쫓아 올라왔다가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주님의 부모들도 그러했다. 의레껏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 길을 갔다. 밤이 오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모고 의레껏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교회에 두고 온 신앙생활이다. 나와 함께 하시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 신다. 밤이 와서 주를 찾을 때는 있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없다는 사 실을 깨닫게 된다. 주님의 부모도 그제야 예수가 없는 사실을 알고서 친족들 중에서도, 아는 자들 중에서도 찾지 못하고 사흘 후에야 예루 살렘 성전에서 두고 온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때 주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하신 일이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바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계신 것이다. 그것도 말씀을 가지고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오 락을 금하고, 사사로운 말을 금하라는 말씀 그대로이다(사58:13).
⑴듣기도 하시며 예수님은 먼저 남의 말을 들으셨다. 말씀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의사 소통의 수단이 "말하기"와 "듣기" 이다. 그 중에서 주님은 "듣기"를 먼저 하신 것이다. "말하기" 보다 "듣 기"를 소중히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살펴 보면 "듣기" 보다는 오히려 "말하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자신이 앞에서 말을 해야 지도자가 된 것 같 고,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남의 말을 들으셨다. 이 사실은 오늘의 상담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부분이다. 상담 학에서는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들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하라고 한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바로 오늘날의 상담학을 통달하신 분이 되고 있다. 선생들 중에 앉아서 말씀을 나누셨는데 기이히 여기는 "해답"을 찾게 된다. 본문 47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서 가지신 대화의 결과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이 그들의 질문에 신통하게 대답해 주신 일 이 없다. 그러나 저들의 고백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 히 여기더라"이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신통한 대답"을 주신 일이 없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또 묻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가 "해답"을 찾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듣는 자가 다 기이하다는 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성도의 교제"에 대한 표상입니다. 형제가 기쁠 때에는 동참하면 됩니다.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하는 자책에 빠지지 않으면 됩니다. 성도의 교제에서 문제는 형제가 슬플 때, 형제가 괴로울 때, 형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에게 아무리 좋은 묘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형제를 판단하고, 결정하고, "해답"을 제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에게 "신통한 묘책"이 없어서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가 아닙니다. 스스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듣기도 하시 며 묻기도 하시니로 하신 것입니다.
⑵.묻기도 하시니 예수님은 들으신 후에 물었다. 묻는 것이 바로 "말하기"에 해당한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듣기" 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의 뜻을, 자 신의 입장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상담학에서는 "말 하기"도 "듣기"를 위한 질문을 하라고 한다. 바로 주님이 보여 주시는 방법이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듣기"를 위해서 "질문" 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스스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해 가는 질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3.선생들 중에 앉아서 본문 46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여기서 말하는 선생들은 유대 랍비들로서 율법을 비롯해서 다양한 학 문을 가르쳤다. 이 랍비들의 교수 방법이 주로 문답식이었다고 한다. 열 린 교육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본문 47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듣는 자가다 바로 함께 앉은 랍비들을 말한다. 왜 그 랍비들이 기이히 여겼을까 그들의 가르침을 유심히 듣고 묻는 질문을 통해서 그들이 빠트린 부 분, 그들이 모르는 부분, 그들이 잘못 가르친 부분들을 일깨워 주는 질 문을 하지 않았나 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상대방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배우는 일에도 필요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보세요. 듣고 보고 배우며 또 모르는 것은 묻기도 하지요.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그렇게 살아갑시다. 전례를 쫓아 올라왔다가 마치고 돌아갔다 이런 삶이 되지 않 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성전에 머물며 말씀으로 성도의 교제를 통해 각자가 스스로 기이히 여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형제의 아픔을 들어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말만 떠들어 오히려 형제에게 마음에 부담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남 의 어려움을 섣불리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의문"이 남아 있는 성도의 교재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의문"은 성도를 둘로 갈라놓는 중간에 막힌 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듣기도 하 고 묻기도 하여 오해의 소지를 미리 미리 제거해야 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가장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입니다. 공생애로 접어들어 "가르쳐 가라사대" 하시는 주님의 모 습에는 모두가 놀라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넘볼 수 없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공생애 이전의 인간적인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성도가 본받아야 할 표상입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 드시더라(본문51절). 순종의 사람으로 표본이 됨도 우리 성도가 잊지 말 아야 합니다(롬5:19).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열 두 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습. 우리 모두의 표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1.예수님은 우리의 표상이시다. 요한복음 13: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땅 위에서의 주님의 삶은 한 인간으로써 "완전한 삶"이었다. 한 사람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완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표상"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었다(롬5: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분의 순종의 모습, 사랑의 모습, 희생의 모습, 의의 모습, 거룩의 모 습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하시던, 그 온전하신 모습을 친히 보여 주셨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열 두 살 이후의 모습을 살펴 보고져 한다. 공생애 이전으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생애에 들어가셔서의 삶의 모습은 이적과 기사로 우리가 본받 기에 너무 벅찬 가슴이 되게 한다.
⑴.자라가는 모습 본문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주님의 자라가는 모습은 우리 성도들의 표상이다. 그 자라가는 모습 은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의 장성의 충만한 분량"으로 증거 되어진다. 바로 성도가 바라보고 자라가야 할 표상이요, 목표이다.
1.아기가 자라며 육적인 성장 모습을 말한다.
2.강하여 지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하고 담대하여져 감을 말한다
3.지혜가 충족하며육적인 지혜, 영적인 지혜가 성장해 감을 말한다
4.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나타나 보인 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 생각, 삶 속에, 그리고 삶의 결과로 남들의 눈에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져야 한다.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보여져야 한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눈에도, 전옥의 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 위에 있음을 보았다(창39장).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그 신앙 생활이 자라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 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신자에게 뿐만 아니라 불신자의 눈에도 보여야 한다. 보디발이나 전옥은 하나님 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⑵.유월절을 지키시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본문 42-42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 니 예수께서 열 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 를 좇아 올라갔다가/
1.부모가 해마다 부모는 그 자녀에게 교육의 선생이요, 산 표본이다. 말로서 가르치고 행함으로 본을 보이는 입체적 교육이요, 산 교육이 요, 전인 교육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삶의 모습에 따라 자녀의 모습도 달라진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그 부모가 해마다 절기를 당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 예배하는 삶의 모습을 본으로 보인 것이다. 이 또한 중요한 일이다.
2.열 두 살 때에 이제 예수님도 율법의 아들이 되어 자신이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모 습으로 자랐다. 그 자란 모습이 나타나 보이는 부분이다. 열 두 살 어린 나이에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예배에 참석하는 일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120km 되는 거리이다. 이 먼 길을 걸어서 예배 드리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그 주님처럼 열 두 살 짜리 우리의 자 녀들이 예배 드리려 찾겠는가 그것도 걸어서.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다 이것이 학생들의 사고방식이요, 우리 부모들의 사고방식이다. 불신 부모들은 고사하고, 교회의 직분을 가진 부모들도 고3의 열병 속에 자녀들을 공부방으로 몰아 넣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님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120km의 먼길을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셨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언젠가는 죽으셔 야 할 그 유월절 절기를
⑶.교제를 나누심 본문 42-43절/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주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그 부모와도 달랐다. 고향에 서 함께 올라왔던 사람들과도 달랐고, 일가친척들과도 달랐다. 저들은 전례를 쫓아 성전을 찾았다. 남들이 올라가니 올라가야 했고, 유대인 은 누구나 3대 절기에는 성전에 올라가 예배 드려야 하니 그 율법대 로 예배 드린 것이다. 전례를 쫓아 올라갔다가 마치고 돌아갔다 저들은 1주일간의 유월절 절기 "날들"을 마치고 돌아갔다. 마치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예배 드리려 왔다가, 예 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부류의 성도들이 많다. 주님의 모 습과는 다른 모습들이다.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다 떠나고난 성전이다. 부모도, 친척도, 친구도, 함께 온 고향 사람들 도 모두가 떠나고난 성전에 주님은 머무셨다. 하루도 아니요, 이틀도 아니요, 사흘 동안이나 머무셨다. 성전의 선생들 중에 앉아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 머무셨다. 듣기도 하시 고, 묻기도 하시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셨다. 듣는 자가 다 기이히 여기더라 그 교제에서 모인 자가 다 기이히 여기는 신선한 충격을 주셨다. 우리도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가 뒤돌아보 자.
2.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본문 46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전례를 쫓아 올라왔다가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주님의 부모들도 그러했다. 의레껏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 길을 갔다. 밤이 오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모고 의레껏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교회에 두고 온 신앙생활이다. 나와 함께 하시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계 신다. 밤이 와서 주를 찾을 때는 있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없다는 사 실을 깨닫게 된다. 주님의 부모도 그제야 예수가 없는 사실을 알고서 친족들 중에서도, 아는 자들 중에서도 찾지 못하고 사흘 후에야 예루 살렘 성전에서 두고 온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때 주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하신 일이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바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계신 것이다. 그것도 말씀을 가지고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오 락을 금하고, 사사로운 말을 금하라는 말씀 그대로이다(사58:13).
⑴듣기도 하시며 예수님은 먼저 남의 말을 들으셨다. 말씀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의사 소통의 수단이 "말하기"와 "듣기" 이다. 그 중에서 주님은 "듣기"를 먼저 하신 것이다. "말하기" 보다 "듣 기"를 소중히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살펴 보면 "듣기" 보다는 오히려 "말하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자신이 앞에서 말을 해야 지도자가 된 것 같 고,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남의 말을 들으셨다. 이 사실은 오늘의 상담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부분이다. 상담 학에서는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들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하라고 한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바로 오늘날의 상담학을 통달하신 분이 되고 있다. 선생들 중에 앉아서 말씀을 나누셨는데 기이히 여기는 "해답"을 찾게 된다. 본문 47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서 가지신 대화의 결과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이 그들의 질문에 신통하게 대답해 주신 일 이 없다. 그러나 저들의 고백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 히 여기더라"이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신통한 대답"을 주신 일이 없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또 묻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가 "해답"을 찾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듣는 자가 다 기이하다는 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성도의 교제"에 대한 표상입니다. 형제가 기쁠 때에는 동참하면 됩니다.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하는 자책에 빠지지 않으면 됩니다. 성도의 교제에서 문제는 형제가 슬플 때, 형제가 괴로울 때, 형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에게 아무리 좋은 묘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형제를 판단하고, 결정하고, "해답"을 제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주님에게 "신통한 묘책"이 없어서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가 아닙니다. 스스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듣기도 하시 며 묻기도 하시니로 하신 것입니다.
⑵.묻기도 하시니 예수님은 들으신 후에 물었다. 묻는 것이 바로 "말하기"에 해당한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듣기" 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의 뜻을, 자 신의 입장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상담학에서는 "말 하기"도 "듣기"를 위한 질문을 하라고 한다. 바로 주님이 보여 주시는 방법이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듣기"를 위해서 "질문" 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스스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해 가는 질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3.선생들 중에 앉아서 본문 46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여기서 말하는 선생들은 유대 랍비들로서 율법을 비롯해서 다양한 학 문을 가르쳤다. 이 랍비들의 교수 방법이 주로 문답식이었다고 한다. 열 린 교육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본문 47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듣는 자가다 바로 함께 앉은 랍비들을 말한다. 왜 그 랍비들이 기이히 여겼을까 그들의 가르침을 유심히 듣고 묻는 질문을 통해서 그들이 빠트린 부 분, 그들이 모르는 부분, 그들이 잘못 가르친 부분들을 일깨워 주는 질 문을 하지 않았나 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상대방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배우는 일에도 필요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보세요. 듣고 보고 배우며 또 모르는 것은 묻기도 하지요.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그렇게 살아갑시다. 전례를 쫓아 올라왔다가 마치고 돌아갔다 이런 삶이 되지 않 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성전에 머물며 말씀으로 성도의 교제를 통해 각자가 스스로 기이히 여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형제의 아픔을 들어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말만 떠들어 오히려 형제에게 마음에 부담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남 의 어려움을 섣불리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의문"이 남아 있는 성도의 교재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의문"은 성도를 둘로 갈라놓는 중간에 막힌 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듣기도 하 고 묻기도 하여 오해의 소지를 미리 미리 제거해야 합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가장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입니다. 공생애로 접어들어 "가르쳐 가라사대" 하시는 주님의 모 습에는 모두가 놀라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넘볼 수 없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공생애 이전의 인간적인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성도가 본받아야 할 표상입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 드시더라(본문51절). 순종의 사람으로 표본이 됨도 우리 성도가 잊지 말 아야 합니다(롬5:19).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열 두 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습. 우리 모두의 표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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