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4:1-9)
본문
저는 찬양 잘하시는 분이나 음악하는 분들이 너무너무 부럽더라구요.
왜냐하면 이분들은 천국 가서도 실업사태가 없습니다. 천국에서 찬양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저는 천국에 가면 실업자가되요. 설교가 없쟎아요. 천국에 가면 예수님 계신데 그 앞에서 설교할 수도 없고. 그러나 저에게도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음치가 치유될 줄 믿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사회에서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던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흥의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부흥의 시대가 되면 그때는 설교가 특별한 것이 됩니다. 부흥의 시대의 설교는 최고의 특권이었고, 사람들은 설교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처럼 설교가 영향력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설교의 위기 시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정적인 인상으로 남아있느냐하는 것은 이런 경우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두 사람이 한창 싸움이 붙어서 그 시비가 높아지다 보면 흔히 이런 소리가 나오죠 '야, 나한테 설교 하지마.'설교하지마, 이런 말의 뉘앙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설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설교의 위기. 이것은 설교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설교를 듣는 청중 때문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두가지 차원에서 다 접근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먼저 설교자의 책임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그 인격이 실추될 때 그 메시지도 그 설득력을 상실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그 자체가 그 내용이 빈곤하다, 천박한 설교들, 이 시대에 유행하는 천박한 설교들은 설교의 위기를 가져온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 때문만은 아니고, 저는 청중들도 상당히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늘의 청중들이 설교에 대해서 진지한 자세를 갖고 있겠습니까 청취의 자세, 이것이 설교의 질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설교가 영향력을 상실한 한 중요한 원인이 청중들에게 있다는 쪽에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하고 시비를 걸 수가 없잖아요 설교자로서의 예수님, 흔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나는 예수는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보고는 뭐라고 그럴 수는 없고, 어떤 사람이 예수의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았다. 그건 전적으로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건 청중의 책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리켜 우리는소위 '씨 뿌리는 비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크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라는 그런 일련의 메시지의 한 토막을 형성합니다. 예수께서 해안 가에 띄운 배를 강단으로 삼아 말씀을 증거하시고 청중들은 해안 육지가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는 그들,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바람직한 변화의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보다 진지한 청취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주께서 역설하고 계십니다. 자,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 마가복음 4장 9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들으라 이것이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씨, 하나는 밭, 하나는 열매입니다. 씨와 밭과 열매. 자, 이 씨는 똑같은 씨였습니다. 똑 같은 씨가 다양한 밭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밭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씨가 떨어졌는데 어떤 밭에서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밭이 잘못 가꾸어 졌다. 자, 네가지 밭을 주께서 말씀하시죠 네 가지 종류의 밭,
첫째는 무엇입니까 길 가.
둘째는 돌짝밭, 세번째는 가시 떨기밭, 네 번째는 좋은 땅입니다. 자, 이 네가지 우리 마음 밭을 대표하고 있는 말씀을 반응하는 마음 밭을 대표하고 있는 네가지의 유형의 밭 가운데 오늘 설교를 청취하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 밭은 어느 밭에 속할까요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 자수해서 광명찾아요. 나는 어느 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길가를 생각해 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 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이들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예요.
왜냐하면 적어도 이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 문제예요. 일단 말씀을 들었다는 면에서 이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우리가 간주할 수가 있습니다. 교인이라면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은 어떤 교인 이었을까 명목상의 기독교인. 이름뿐인 기독교인, 그러나 실제로 말씀에 대한 열정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말씀이 그의 삶 속에 전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가라는 것은 주로 팔레스타인에서는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마의 영향으로 그 당시 이미 하이웨이가 닦아지고 있었습니다마는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길가라는 것은 밭과 밭 사이로 난 그런 길였습니다. 거기에 농부들도 다니고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다닙니다. 또 지나가는 여행객들도 다닙니다. 한참 다니다보면 그 길은 아주 빤들빤들해지고 아주 굳은 땅이 됩니다. 여기에 씨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씨가 떨어지자 마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씨가 떨어지자 마자 새가 그것을 쪼아 먹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 9절이 끝난 후에 9절이 끝나면 몇 절이죠 10절 이하에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친히 주님 자신이 해석을 하십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시는가 보세요. 자, 이 길가에 대한 주님 자신의 해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입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이것이 주님의 해석이예요. 말씀이 길가에 뿌리워 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듣는 순간 즉시로 뭐가 찾아왔습니까 사단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간 사람들. 이것이 바로 길가와 같다. 이게 무슨 얘기냐 도대체, 새를 무엇에 비교한 것이예요 새가 사탄이다. 새가 그 씨를 쪼아 먹듯 내 마음에 말씀이 떨어져서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 말씀을 낚아채 갔다는 말이죠. 마귀가 그렇게 했다. 그러면 마귀에 의해 말씀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 그래서 말씀을 정말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오늘 같은 교회 상황에서 어떤 사람일까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습관적으로 교회에 오면 조는 사람. 이것이 바로 길가를 대표하는 사람. 네, 존다는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예요. 졸 수도 있죠. 교회에 와서 너무 피곤해서 졸 수도 있죠. '아 그렇구나, 내가 저분들을 이해해 줘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다 마귀가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설교가 중간 쯤 진행 되었을때 조는 분들은 이 설교자인 제가 상당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오죽하게 설교를 했으면 중간에 졸음에 빠지겠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앞에 앉아서, 뒤에 앉아서 졸면 괜찮은데, 앞에 빤히 보이는데서 조니까 어떤 설교자가 열을 받은 모양이예요. 목사님이 그 옆에 있는 사람보고 '집사님, 좀 깨워요, 깨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깨우면서 중얼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자기가 재워 놓고 누구보고 깨우래' 그러니까 설교자도 굉장히 책임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가 하면 초장부터 존다. 그리고 어쩌다 피곤해서 한번 조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존다. 뭐 잘못된 것 아니예요 그래서 전혀 말씀이 들어 오지 못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재미있는 것이 뭐냐하면 설교가 딱 끝나면 용하게 깨어나요. 저는 이런 사람들, 그래서 말씀을 도무지 자기의 것으로 삼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사탄의 역사도 있지 않으냐 진짜 마귀의 역사도 있지 않느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사탄의 역사도 있을 수가 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쳤던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 변증 서적들을 쓰기도 하고, 어린이 문학을 많이 쓰기도 했죠.
그런데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분이 쓴 책 가운데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쓰는 편지예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거기에 사탄의 전략이 아주 투명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노신사, 아주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노신사 한 분이 도서실에 갔어요.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기독교 책이 하나 손에 잡혔어요. 그래서 기독교 책을 읽다가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나도 이젠 제대로 믿어야 돼. 제대로 신앙 생활 해야돼. 내 일생이 얼마 남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해야지. 뭐 이런 도전을 막 받으면서 숙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결단을 하고 새로와 져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입니다. 이 생각 때문에 이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운명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생각이지요.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나냐하면 점심 시간이 다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나요.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식당에 들어 가서 밥을 먹는 거예요. 밥을 먹다보니까 식권증도 오고, 밥을 먹고 나니까 인생이 다 그런거지뭐. 나라고 뭐 특별하게 이 나이에 와서 내가 다시 인생의 길을 바꾸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점심 먹고 나서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 옵니다. 돌아 올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것처럼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때 악마는 이 버스 타고 집에 돌아가는 이 노신사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습니다. 그런 얘기예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오늘날 교회당을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 교회와서 주일날 아침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날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은 그래도 좀 마음에 말씀이 와 닿습니다. '맞았어, 나도 새로워져야지. 나도 좀 제대로 믿어보고, 나도 신앙의 길을 추구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딱 드는 순간에 '오늘 설교가 길다. 왜 안 끝나나 오늘 점심 메뉴가 뭘까 점심이 괜찮더라 식당에 아주. 이천원 경제위기메뉴, 값도 싸고 그래서 식구들이 함께 내려가서 예배 끝나고 식사하고 이분이 교회 출석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설교에 대한 관심 보다 점심 시간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분도 있데요. 어떤 자매님이 '목사님 저희 남편은 점심 먹는 취미로 나와요.' 그것도 안 나오는 것 보다 나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다 바뀔 수가 있으니까. 헌데 점심 먹고 이제 집으로 가면서 마치, 잘 들으세요. 아무 일이 일어 나지 않았던 것처럼 집으로 갑니다. 그때 이 사람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신이, 이 세상 신.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 마귀는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인것처럼 행세합니다. 바로 그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가지 못하도록 사단이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오지 못하고 이 말씀이, 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사단의 역사가 개제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무지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씀을 빼앗긴채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고 견고하고 굳어진 마음 그 상태로 오늘도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 길가가 아니겠어요 길가와 같은 마음 밭. 두 번째는 무슨 밭입니까 돌짝 밭입니다. 돌짝밭. 저는 길가가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면 돌짝 밭은 피상적 기독교인입니다. 피상적 기독교인. 깊이가 없는 피상적 기독교인. 진정으로 이 사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기독교인을 대표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이 피상적 기독교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설명을 하셨느냐 16절 17절 한번 보세요. 16절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난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옛날 청교도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3가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3가지 적.
첫째는 사탄 마귀.
둘째는 크리스챤의 적은 육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이기심.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 이것이 신앙생활의 적이 예요. 또 하나 적이 있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이 잘못된 가치체계를 갖고 있는 이 세상. 이 3가지가 바로 크리스챤의 3대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 길가와 같은 마음밭을 공격하고 있는 사탄 마귀라면 돌짝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육신입니다. 육신.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 부패한 이기심. 쉬운 것.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 그래서 이것이 더 이상 나에게 편리하지 않다면 쉽게 신앙을 포기할 수가 있는 사람들. 이것이 돌짝밭 같은 마음밭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돌짝밭이 아주 많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석회석이 많아요. 그러니까 실제 돌짝밭이 많고 돌짝 밭은 깊이가 없어요. 깊이가 없으니까 이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자. 처음엔 어떤 신앙생활에 대한 반응을 보였어요. 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 다시 한번 보시면 여기 돌짝 밭. 16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받았다고 그랬어요 기쁨으로 받았다. 정적 반응이 있었어요. 아. 맞아말씀에서 동의도 되고 또 같이 웃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서 울기도 하고 그리고 나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간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이 돌짝밭은 교인의 이런 스타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것 같아요. 간증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습니다. 그는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바람을 몰고 등장해요. 근데 어느날 보면 없어졌어요. 바람과 함께 나타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게 돌짝 밭과 같은 교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근데 왜 사라졌느냐 나중에 알고 보면 아주 치사하고 사소한 이유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와서 누구하고 싸웠다. 아. 나 그인간 보기 싫어 안 믿어. 정 보기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요. 그렇다고 신앙을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근데 아예 신앙을 저 버린 사람들이 있어요. 실제로 이런 사람도 있더라구요. 어떤 분이 안 나와서 왜 교회 안나오냐고 물으니까 그 부인이 아주 계면쩍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나중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구.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아서 안나온데요. 참아. 근데 그런 것들이 실제로 신앙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일 수 있어요. 어떤 분은 또 4층이라 못 오겠데요. 엘리베이터가 충청도산이라 너무 느려 못 오겠다는 사람도 있고. 우리 옛날 선배들은 어떻게 믿었을까 옛날 선배들.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그 신앙을 견디고 그 신앙을 지켰던 우리의 선배들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역경이나 환란이라는 것은 그 신앙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스트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 속에서 견딥니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역경 속에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가짜는 역경이 오면 떠나갑니다. 떠나가요. 더 이상 이것이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다. 편리하지 못하다. 이기심 때문에 이 신앙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돌짝밭같은 마음이예요. 중국에 모텍동을 통한 문화혁명이 시작될 때 선교사들이 추방 명령을 받습니다. 다 떠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가던 선교사 한 분이 자기가 전도했던 사람. 자기가 제자 훈련을 시켰던 사람. 이제는 중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어요. 그 목사님을 앞에 앉혀놓고 차를 나누면서 이런 질문을 했대요. 이 선교사님이 걱정이 되가지고. "당신 견딜 수 있겠소 환란의 비바람이 많은 핍박이 올텐데 견딜 수 있겠소 신앙 지키겠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중국 목사님이 가만히 있더니 "선교사님차가 뜨겁죠 그러더니 티백을 빼더니 "이 티백이 이 물이 뜨겁다고 해서 들어갔을 때 차가 맛을 잃어버리나요 아마 이 뜨거운 물에서 차는 진짜 맛을 낼 겁니다. 저는 이 신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란 속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을 이깁니다. 믿으십니까 역경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짝 밭같은 마음. 혹시 내 신앙 생활의 행태가 바로 이 피상적 기독교인 돌짝 밭의 상태와 방불한 것은 아닌지요. 세 번째로 세 번째는 뭐예요 가시떨기 밭. 이 길가가 맹목상의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면 돌짝밭은 피상적인 기독교인이예요.
그렇다면 가시떨기 밭은 세속적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 가시떨기 마음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저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 이 세상의 유혹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을 결국 이기지 못한 사람.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자. 가시 기운이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자. 주님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실까요 18절. 19절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 위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말씀을 막아서 결실치 못했다. 그 기운이 어떤 기운이예요 가시 기운이예요. 그 기운을 무엇에 비교했습니까 세상의 염려, 재리, 유혹, 기타 욕심. 세상의 가치 체계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그 욕심. 그 욕망이 말씀에 대한 사모함보다 더 컸어요. 이사람 말씀에 대한 열정이 없는 거 아니예요. 관심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에 대한 욕심이 더 컸어요. 결국 그래서 말씀에 대한 그의 사모함이 그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비극. 성경에 그런 비극을 경험했던 한 청년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관원이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죠. 그리고 그는 진지한 구도자의 질문을 갖고 있었어요.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좋은 질문. 이 구도자의 목마름을 가지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했어요 예수님이 사람 만날 때마다 전도하는 방법이 다 달라요. 이 사람이 만약 재물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 재물이 주인이 아니고 재물을 종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재물 얘기 꺼낼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재물의 욕망을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커다란 관심이었어요.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쫓을 수가 있겠느냐" 성경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심히 근심하며 떠나갔다. 결국 재물에 대한 욕심을 그 사람은 이길 수가 없었어요. 재물이 그의 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재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 아니예요. 재물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재물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을 만몬이라고도 말합니다. 매모니즘이라고 하죠. 본래 만몬이라는 단어는 "나는 믿는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어요. "
I believe" 나는 믿는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재물을 믿기 시작하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재물이 신앙이예요. 재물이 나의 신앙이예요. 재물이 나의 안정을 보장하고 재물이 나의 구원을 보장하고 재물이 내 일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재물은 그 사람의 신이 되어 있는 거예요. 두 신을 섬길 수가 없잖아요.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 우리 가운데 이 가시 떨기 밭은 없을까요 주님은 그래서 마지막으로 어떤 밭을 얘기하십니까 좋은 땅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었던 좋은 땅 이 좋은 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자, 본문의 20절 한번 읽어보십시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자, 말씀을 들었어요. 그 다음에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받아" 말씀을 받았다. 듣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받았다.
그런데 이 받았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이게 중요해요.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 비교해 보세요. 누가복음 8장 15절입니다. 같은 씨 뿌리는 비유를 누가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자, 여기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받았다는 단어 대신에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왜 듣습니까 설교를 왜 들어요 그냥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내 생활에 옮기겠는가 내가 들은 바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는가 지키겠는가 이 순종이 중요해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열매는 없습니다. '지키어' 이것이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예배를 많이 드린다. 그것이 자랑인 사람이 있어요. "나는 이번 주간에도 예배를 다섯번이나 드렸다.오늘 하루 나는 성경을 다섯 시간 읽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니예요. 다섯 시간 읽은 것은 좋은 것이예요.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니까 다섯 시간이나 읽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야! 나는 오늘 다섯 시간이나 먹었다. 음식을 다섯 시간이나 먹었다. 자랑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이렇게 물어 볼 거예요. 왜 다섯 시간이나 먹었냐 먹기 위해서 먹어요 왜 식사하셨습니까 먹기 위해서 먹습니까 얻어진 에너지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는거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살자고, 삶을 살자고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들으세요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 붙들고 살려고, 어디에서 삽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이 말씀 붙들고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자고. 그래서 말씀을 받는거예요. 듣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나 성경공부나 기도나 교회생활이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도피행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살기가 하도 힘드니까 교회와서 성경공부하면 참 좋아요. 찬양하면 예배드리면 좋거든요 그래서 나는 계속 교회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이것은 잘못이예요. 도피가 되면 안돼요. 그것은 무서운 도피일 수가 있어요. 세상이 힘드니까 교회속으로 도피하는 것이예요. 11세기에 유럽의 헨리 3세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왕노릇하기가 너무나 피곤했어요. 왕이 싫어졌어요. 아마 양녕대군 비슷했던 모양이예요.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누가 제일 부러웠냐 하면 수도승이 제일 부러워요. 수도사들. 저 수도원에서 하루 종일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들이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수도사나 되면 좋겠다. 여러분 그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떤 교인이 제게 와서 "목사님은 좋겠어요.왜요목사님은 하루 종일 성경읽고 기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꼭 그런것도 아니예요. 목사되도 힘든 것은 힘들어요.
그런데 이 왕이 같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그 당시 유명한 수도원, 그 원장이 리챠드라는 원장이었는데 그 원장을 찾아 왔습니다. "나를 수도사로 받아 주십시요." 그러자 가만히 수도원장이 보더니 "글쎄요, 수도사가 되려면 중요한 규칙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실 수가 있을런지요뭔데요.수도원의 생명은 순종입니다. 철저하게 순종하시겠습니까" 왕의 자리에 있던 이 헨리3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손을 들고 맹세합니다. "제가 철저히 순종하겠습니다.그래요 그럼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첫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지키셔야 합니다. 그 첫번째 명령은 지금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요. 그리고 하늘이 당신에게 맡긴 백성들을 제대로 섬기십시요." 저는 주님이 같은 얘기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참 좋지요, 이것 필요한 것이예요.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예요. 돌아가셔야 해요.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말씀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삶을 사는 장소는 어디에요 가정입니다. 고통이 있어도 그 가정의 한 복판에 서셔야 합니다. 직장입니다. 흔들리고 있는 직장, 서셔야 합니다. 흔들리고 있는 사업의 장, 서셔야 합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셔야 합니다. 넘어졌다고요 다시 말씀붙들고 일어서셔야 합니다. 재기하셔야 합니다.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를 보내시는 삶의 장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기위하여 이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내가 좋은 땅과 같은 이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내 삶의 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그 삶의 장의 한복판에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오늘 나는 이 말씀을 붙들고 그렇게 주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제 나를 보내시는 그 곳으로 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좋은 땅이예요. 어떤 목사님이 어떤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첫날 설교를 너무 잘 했어요. 교인들이 기대가 있었어요. 두 번째 설교도 비슷한 설교를 하셨어요. 세번째 주에도. 교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새로 오신 목사님이 아마도 살매증에 걸린 모양이다. '살매'는 살짝 치매증세를 말합니다. 똑같은 설교를 세번이나 했단 말이예요. 네번째도 똑같은 설교를 했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흥분을 했습니다. 정신있습니까 목사님 똑같은 설교를 네번이나 했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히려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제가 여러분과 나누었던 말씀을 순종하시겠습니까 똑같은 설교를 했지만 이 말씀을 순종한 흔적이 우리 가운데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우리가 또 지켜야 할 새로운 말씀을 그 때 시작하겠습니다. 결실이 최종 목적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들으라 하십니다. 뿌리를 내리라 하십니다. 지키어 행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백배의 결실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땅처럼 말씀앞에 반응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이분들은 천국 가서도 실업사태가 없습니다. 천국에서 찬양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저는 천국에 가면 실업자가되요. 설교가 없쟎아요. 천국에 가면 예수님 계신데 그 앞에서 설교할 수도 없고. 그러나 저에게도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음치가 치유될 줄 믿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사회에서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던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흥의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부흥의 시대가 되면 그때는 설교가 특별한 것이 됩니다. 부흥의 시대의 설교는 최고의 특권이었고, 사람들은 설교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처럼 설교가 영향력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설교의 위기 시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정적인 인상으로 남아있느냐하는 것은 이런 경우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두 사람이 한창 싸움이 붙어서 그 시비가 높아지다 보면 흔히 이런 소리가 나오죠 '야, 나한테 설교 하지마.'설교하지마, 이런 말의 뉘앙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설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설교의 위기. 이것은 설교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설교를 듣는 청중 때문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두가지 차원에서 다 접근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먼저 설교자의 책임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으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그 인격이 실추될 때 그 메시지도 그 설득력을 상실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그 자체가 그 내용이 빈곤하다, 천박한 설교들, 이 시대에 유행하는 천박한 설교들은 설교의 위기를 가져온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 때문만은 아니고, 저는 청중들도 상당히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늘의 청중들이 설교에 대해서 진지한 자세를 갖고 있겠습니까 청취의 자세, 이것이 설교의 질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설교가 영향력을 상실한 한 중요한 원인이 청중들에게 있다는 쪽에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하고 시비를 걸 수가 없잖아요 설교자로서의 예수님, 흔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나는 예수는 싫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보고는 뭐라고 그럴 수는 없고, 어떤 사람이 예수의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았다. 그건 전적으로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건 청중의 책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리켜 우리는소위 '씨 뿌리는 비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크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라는 그런 일련의 메시지의 한 토막을 형성합니다. 예수께서 해안 가에 띄운 배를 강단으로 삼아 말씀을 증거하시고 청중들은 해안 육지가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는 그들,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바람직한 변화의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보다 진지한 청취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주께서 역설하고 계십니다. 자,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 마가복음 4장 9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들으라 이것이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씨, 하나는 밭, 하나는 열매입니다. 씨와 밭과 열매. 자, 이 씨는 똑같은 씨였습니다. 똑 같은 씨가 다양한 밭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밭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씨가 떨어졌는데 어떤 밭에서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밭이 잘못 가꾸어 졌다. 자, 네가지 밭을 주께서 말씀하시죠 네 가지 종류의 밭,
첫째는 무엇입니까 길 가.
둘째는 돌짝밭, 세번째는 가시 떨기밭, 네 번째는 좋은 땅입니다. 자, 이 네가지 우리 마음 밭을 대표하고 있는 말씀을 반응하는 마음 밭을 대표하고 있는 네가지의 유형의 밭 가운데 오늘 설교를 청취하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 밭은 어느 밭에 속할까요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 자수해서 광명찾아요. 나는 어느 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길가를 생각해 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 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이들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예요.
왜냐하면 적어도 이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 문제예요. 일단 말씀을 들었다는 면에서 이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우리가 간주할 수가 있습니다. 교인이라면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은 어떤 교인 이었을까 명목상의 기독교인. 이름뿐인 기독교인, 그러나 실제로 말씀에 대한 열정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말씀이 그의 삶 속에 전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가라는 것은 주로 팔레스타인에서는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마의 영향으로 그 당시 이미 하이웨이가 닦아지고 있었습니다마는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길가라는 것은 밭과 밭 사이로 난 그런 길였습니다. 거기에 농부들도 다니고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다닙니다. 또 지나가는 여행객들도 다닙니다. 한참 다니다보면 그 길은 아주 빤들빤들해지고 아주 굳은 땅이 됩니다. 여기에 씨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씨가 떨어지자 마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씨가 떨어지자 마자 새가 그것을 쪼아 먹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 9절이 끝난 후에 9절이 끝나면 몇 절이죠 10절 이하에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친히 주님 자신이 해석을 하십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시는가 보세요. 자, 이 길가에 대한 주님 자신의 해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입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이것이 주님의 해석이예요. 말씀이 길가에 뿌리워 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듣는 순간 즉시로 뭐가 찾아왔습니까 사단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간 사람들. 이것이 바로 길가와 같다. 이게 무슨 얘기냐 도대체, 새를 무엇에 비교한 것이예요 새가 사탄이다. 새가 그 씨를 쪼아 먹듯 내 마음에 말씀이 떨어져서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 말씀을 낚아채 갔다는 말이죠. 마귀가 그렇게 했다. 그러면 마귀에 의해 말씀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 그래서 말씀을 정말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오늘 같은 교회 상황에서 어떤 사람일까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습관적으로 교회에 오면 조는 사람. 이것이 바로 길가를 대표하는 사람. 네, 존다는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예요. 졸 수도 있죠. 교회에 와서 너무 피곤해서 졸 수도 있죠. '아 그렇구나, 내가 저분들을 이해해 줘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다 마귀가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설교가 중간 쯤 진행 되었을때 조는 분들은 이 설교자인 제가 상당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오죽하게 설교를 했으면 중간에 졸음에 빠지겠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앞에 앉아서, 뒤에 앉아서 졸면 괜찮은데, 앞에 빤히 보이는데서 조니까 어떤 설교자가 열을 받은 모양이예요. 목사님이 그 옆에 있는 사람보고 '집사님, 좀 깨워요, 깨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깨우면서 중얼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자기가 재워 놓고 누구보고 깨우래' 그러니까 설교자도 굉장히 책임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가 하면 초장부터 존다. 그리고 어쩌다 피곤해서 한번 조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존다. 뭐 잘못된 것 아니예요 그래서 전혀 말씀이 들어 오지 못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재미있는 것이 뭐냐하면 설교가 딱 끝나면 용하게 깨어나요. 저는 이런 사람들, 그래서 말씀을 도무지 자기의 것으로 삼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사탄의 역사도 있지 않으냐 진짜 마귀의 역사도 있지 않느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사탄의 역사도 있을 수가 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쳤던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 변증 서적들을 쓰기도 하고, 어린이 문학을 많이 쓰기도 했죠.
그런데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분이 쓴 책 가운데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쓰는 편지예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거기에 사탄의 전략이 아주 투명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노신사, 아주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노신사 한 분이 도서실에 갔어요.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기독교 책이 하나 손에 잡혔어요. 그래서 기독교 책을 읽다가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나도 이젠 제대로 믿어야 돼. 제대로 신앙 생활 해야돼. 내 일생이 얼마 남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해야지. 뭐 이런 도전을 막 받으면서 숙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결단을 하고 새로와 져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입니다. 이 생각 때문에 이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운명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생각이지요.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나냐하면 점심 시간이 다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나요.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식당에 들어 가서 밥을 먹는 거예요. 밥을 먹다보니까 식권증도 오고, 밥을 먹고 나니까 인생이 다 그런거지뭐. 나라고 뭐 특별하게 이 나이에 와서 내가 다시 인생의 길을 바꾸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점심 먹고 나서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 옵니다. 돌아 올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것처럼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때 악마는 이 버스 타고 집에 돌아가는 이 노신사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습니다. 그런 얘기예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오늘날 교회당을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 교회와서 주일날 아침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날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은 그래도 좀 마음에 말씀이 와 닿습니다. '맞았어, 나도 새로워져야지. 나도 좀 제대로 믿어보고, 나도 신앙의 길을 추구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딱 드는 순간에 '오늘 설교가 길다. 왜 안 끝나나 오늘 점심 메뉴가 뭘까 점심이 괜찮더라 식당에 아주. 이천원 경제위기메뉴, 값도 싸고 그래서 식구들이 함께 내려가서 예배 끝나고 식사하고 이분이 교회 출석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설교에 대한 관심 보다 점심 시간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분도 있데요. 어떤 자매님이 '목사님 저희 남편은 점심 먹는 취미로 나와요.' 그것도 안 나오는 것 보다 나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다 바뀔 수가 있으니까. 헌데 점심 먹고 이제 집으로 가면서 마치, 잘 들으세요. 아무 일이 일어 나지 않았던 것처럼 집으로 갑니다. 그때 이 사람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신이, 이 세상 신.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 마귀는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인것처럼 행세합니다. 바로 그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가지 못하도록 사단이 방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오지 못하고 이 말씀이, 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사단의 역사가 개제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무지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씀을 빼앗긴채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고 견고하고 굳어진 마음 그 상태로 오늘도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 길가가 아니겠어요 길가와 같은 마음 밭. 두 번째는 무슨 밭입니까 돌짝 밭입니다. 돌짝밭. 저는 길가가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면 돌짝 밭은 피상적 기독교인입니다. 피상적 기독교인. 깊이가 없는 피상적 기독교인. 진정으로 이 사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기독교인을 대표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이 피상적 기독교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설명을 하셨느냐 16절 17절 한번 보세요. 16절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난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옛날 청교도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3가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3가지 적.
첫째는 사탄 마귀.
둘째는 크리스챤의 적은 육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이기심.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 이것이 신앙생활의 적이 예요. 또 하나 적이 있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이 잘못된 가치체계를 갖고 있는 이 세상. 이 3가지가 바로 크리스챤의 3대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 길가와 같은 마음밭을 공격하고 있는 사탄 마귀라면 돌짝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육신입니다. 육신.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 부패한 이기심. 쉬운 것.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 그래서 이것이 더 이상 나에게 편리하지 않다면 쉽게 신앙을 포기할 수가 있는 사람들. 이것이 돌짝밭 같은 마음밭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돌짝밭이 아주 많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석회석이 많아요. 그러니까 실제 돌짝밭이 많고 돌짝 밭은 깊이가 없어요. 깊이가 없으니까 이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자. 처음엔 어떤 신앙생활에 대한 반응을 보였어요. 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 다시 한번 보시면 여기 돌짝 밭. 16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받았다고 그랬어요 기쁨으로 받았다. 정적 반응이 있었어요. 아. 맞아말씀에서 동의도 되고 또 같이 웃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서 울기도 하고 그리고 나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간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이 돌짝밭은 교인의 이런 스타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것 같아요. 간증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습니다. 그는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바람을 몰고 등장해요. 근데 어느날 보면 없어졌어요. 바람과 함께 나타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게 돌짝 밭과 같은 교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근데 왜 사라졌느냐 나중에 알고 보면 아주 치사하고 사소한 이유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와서 누구하고 싸웠다. 아. 나 그인간 보기 싫어 안 믿어. 정 보기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요. 그렇다고 신앙을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근데 아예 신앙을 저 버린 사람들이 있어요. 실제로 이런 사람도 있더라구요. 어떤 분이 안 나와서 왜 교회 안나오냐고 물으니까 그 부인이 아주 계면쩍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나중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구.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아서 안나온데요. 참아. 근데 그런 것들이 실제로 신앙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일 수 있어요. 어떤 분은 또 4층이라 못 오겠데요. 엘리베이터가 충청도산이라 너무 느려 못 오겠다는 사람도 있고. 우리 옛날 선배들은 어떻게 믿었을까 옛날 선배들.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그 신앙을 견디고 그 신앙을 지켰던 우리의 선배들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역경이나 환란이라는 것은 그 신앙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스트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 속에서 견딥니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역경 속에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가짜는 역경이 오면 떠나갑니다. 떠나가요. 더 이상 이것이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다. 편리하지 못하다. 이기심 때문에 이 신앙을 포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돌짝밭같은 마음이예요. 중국에 모텍동을 통한 문화혁명이 시작될 때 선교사들이 추방 명령을 받습니다. 다 떠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가던 선교사 한 분이 자기가 전도했던 사람. 자기가 제자 훈련을 시켰던 사람. 이제는 중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어요. 그 목사님을 앞에 앉혀놓고 차를 나누면서 이런 질문을 했대요. 이 선교사님이 걱정이 되가지고. "당신 견딜 수 있겠소 환란의 비바람이 많은 핍박이 올텐데 견딜 수 있겠소 신앙 지키겠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중국 목사님이 가만히 있더니 "선교사님차가 뜨겁죠 그러더니 티백을 빼더니 "이 티백이 이 물이 뜨겁다고 해서 들어갔을 때 차가 맛을 잃어버리나요 아마 이 뜨거운 물에서 차는 진짜 맛을 낼 겁니다. 저는 이 신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란 속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을 이깁니다. 믿으십니까 역경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짝 밭같은 마음. 혹시 내 신앙 생활의 행태가 바로 이 피상적 기독교인 돌짝 밭의 상태와 방불한 것은 아닌지요. 세 번째로 세 번째는 뭐예요 가시떨기 밭. 이 길가가 맹목상의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면 돌짝밭은 피상적인 기독교인이예요.
그렇다면 가시떨기 밭은 세속적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 가시떨기 마음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저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 이 세상의 유혹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을 결국 이기지 못한 사람.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자. 가시 기운이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자. 주님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실까요 18절. 19절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 위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말씀을 막아서 결실치 못했다. 그 기운이 어떤 기운이예요 가시 기운이예요. 그 기운을 무엇에 비교했습니까 세상의 염려, 재리, 유혹, 기타 욕심. 세상의 가치 체계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그 욕심. 그 욕망이 말씀에 대한 사모함보다 더 컸어요. 이사람 말씀에 대한 열정이 없는 거 아니예요. 관심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에 대한 욕심이 더 컸어요. 결국 그래서 말씀에 대한 그의 사모함이 그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비극. 성경에 그런 비극을 경험했던 한 청년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관원이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죠. 그리고 그는 진지한 구도자의 질문을 갖고 있었어요.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좋은 질문. 이 구도자의 목마름을 가지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했어요 예수님이 사람 만날 때마다 전도하는 방법이 다 달라요. 이 사람이 만약 재물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 재물이 주인이 아니고 재물을 종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재물 얘기 꺼낼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재물의 욕망을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커다란 관심이었어요.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쫓을 수가 있겠느냐" 성경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심히 근심하며 떠나갔다. 결국 재물에 대한 욕심을 그 사람은 이길 수가 없었어요. 재물이 그의 신이었습니다. 여러분 재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 아니예요. 재물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재물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을 만몬이라고도 말합니다. 매모니즘이라고 하죠. 본래 만몬이라는 단어는 "나는 믿는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어요. "
I believe" 나는 믿는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재물을 믿기 시작하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재물이 신앙이예요. 재물이 나의 신앙이예요. 재물이 나의 안정을 보장하고 재물이 나의 구원을 보장하고 재물이 내 일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재물은 그 사람의 신이 되어 있는 거예요. 두 신을 섬길 수가 없잖아요. 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 우리 가운데 이 가시 떨기 밭은 없을까요 주님은 그래서 마지막으로 어떤 밭을 얘기하십니까 좋은 땅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었던 좋은 땅 이 좋은 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자, 본문의 20절 한번 읽어보십시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자, 말씀을 들었어요. 그 다음에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받아" 말씀을 받았다. 듣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받았다.
그런데 이 받았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이게 중요해요.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 비교해 보세요. 누가복음 8장 15절입니다. 같은 씨 뿌리는 비유를 누가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자, 여기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받았다는 단어 대신에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왜 듣습니까 설교를 왜 들어요 그냥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내 생활에 옮기겠는가 내가 들은 바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는가 지키겠는가 이 순종이 중요해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열매는 없습니다. '지키어' 이것이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예배를 많이 드린다. 그것이 자랑인 사람이 있어요. "나는 이번 주간에도 예배를 다섯번이나 드렸다.오늘 하루 나는 성경을 다섯 시간 읽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니예요. 다섯 시간 읽은 것은 좋은 것이예요.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니까 다섯 시간이나 읽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야! 나는 오늘 다섯 시간이나 먹었다. 음식을 다섯 시간이나 먹었다. 자랑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이렇게 물어 볼 거예요. 왜 다섯 시간이나 먹었냐 먹기 위해서 먹어요 왜 식사하셨습니까 먹기 위해서 먹습니까 얻어진 에너지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는거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살자고, 삶을 살자고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들으세요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 붙들고 살려고, 어디에서 삽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이 말씀 붙들고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자고. 그래서 말씀을 받는거예요. 듣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나 성경공부나 기도나 교회생활이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도피행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살기가 하도 힘드니까 교회와서 성경공부하면 참 좋아요. 찬양하면 예배드리면 좋거든요 그래서 나는 계속 교회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이것은 잘못이예요. 도피가 되면 안돼요. 그것은 무서운 도피일 수가 있어요. 세상이 힘드니까 교회속으로 도피하는 것이예요. 11세기에 유럽의 헨리 3세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왕노릇하기가 너무나 피곤했어요. 왕이 싫어졌어요. 아마 양녕대군 비슷했던 모양이예요.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누가 제일 부러웠냐 하면 수도승이 제일 부러워요. 수도사들. 저 수도원에서 하루 종일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들이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수도사나 되면 좋겠다. 여러분 그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떤 교인이 제게 와서 "목사님은 좋겠어요.왜요목사님은 하루 종일 성경읽고 기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꼭 그런것도 아니예요. 목사되도 힘든 것은 힘들어요.
그런데 이 왕이 같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그 당시 유명한 수도원, 그 원장이 리챠드라는 원장이었는데 그 원장을 찾아 왔습니다. "나를 수도사로 받아 주십시요." 그러자 가만히 수도원장이 보더니 "글쎄요, 수도사가 되려면 중요한 규칙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실 수가 있을런지요뭔데요.수도원의 생명은 순종입니다. 철저하게 순종하시겠습니까" 왕의 자리에 있던 이 헨리3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손을 들고 맹세합니다. "제가 철저히 순종하겠습니다.그래요 그럼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첫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지키셔야 합니다. 그 첫번째 명령은 지금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요. 그리고 하늘이 당신에게 맡긴 백성들을 제대로 섬기십시요." 저는 주님이 같은 얘기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참 좋지요, 이것 필요한 것이예요.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예요. 돌아가셔야 해요.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말씀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삶을 사는 장소는 어디에요 가정입니다. 고통이 있어도 그 가정의 한 복판에 서셔야 합니다. 직장입니다. 흔들리고 있는 직장, 서셔야 합니다. 흔들리고 있는 사업의 장, 서셔야 합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셔야 합니다. 넘어졌다고요 다시 말씀붙들고 일어서셔야 합니다. 재기하셔야 합니다.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를 보내시는 삶의 장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기위하여 이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내가 좋은 땅과 같은 이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내 삶의 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그 삶의 장의 한복판에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오늘 나는 이 말씀을 붙들고 그렇게 주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제 나를 보내시는 그 곳으로 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좋은 땅이예요. 어떤 목사님이 어떤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첫날 설교를 너무 잘 했어요. 교인들이 기대가 있었어요. 두 번째 설교도 비슷한 설교를 하셨어요. 세번째 주에도. 교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새로 오신 목사님이 아마도 살매증에 걸린 모양이다. '살매'는 살짝 치매증세를 말합니다. 똑같은 설교를 세번이나 했단 말이예요. 네번째도 똑같은 설교를 했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흥분을 했습니다. 정신있습니까 목사님 똑같은 설교를 네번이나 했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히려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제가 여러분과 나누었던 말씀을 순종하시겠습니까 똑같은 설교를 했지만 이 말씀을 순종한 흔적이 우리 가운데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우리가 또 지켜야 할 새로운 말씀을 그 때 시작하겠습니다. 결실이 최종 목적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들으라 하십니다. 뿌리를 내리라 하십니다. 지키어 행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백배의 결실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땅처럼 말씀앞에 반응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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