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기를 (롬8:18-25)
본문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신이 “어떠한 삶의 연결고리를 다양하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잊고 있거나 생각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범위를 축소하여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이해득실과 밀접한 경우에 한정해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나와는 무관해”라는 판정을 쉽사리 내려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러한 태도가 “자신을 죽이며 모두를 함께 고통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지나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만 파고드는 고질적인 삶의 습관”이 언제나 이러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좁은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생각하면 그렇게 초라하고 나약하기 이를데 없는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면 “무궁 무진한 잠재력” 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말해서, 만약 “자기 자신 속에 자신으로만 가득차 있다면”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될 뿐 아니라 아주 이기적이고 좁은 자신의 울타리에 매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모든 쓸모의 바탕”으로 비워두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세계의 모든 삶의 연관성 속에서 더욱 풍부한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책임있는 삶이 시작됩니다. 즉, 발딛고 서 있는 곳에서 책임있게 말하며, 자신을 포함하여 살아가는 일 속에 발견되는 모든 매인 것들을 풀어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러한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루가13:33)”라고 말씀하시며 당당하게 걸어가신 길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처형당하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류와 매여있는 역사의 자락을 풀어내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모든 묶인 것들을 풀어주고, 눈먼 것을 보게하며, 억눌린 것에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루가 4:18)” 예수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 선포를 함축하는 표상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이 일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매인 것을 풀어내는 일에 기꺼이 헌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얼마의 땀과 그만큼의 피흘리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것이 부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다름아닌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자신의 울타리에 매이게 하여 갇혀버리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와 세셰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일을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환경주일 이고, 어제는 스물 한번째 맞이하는 세계 환경의 날 이 었습니다. 환경오염과 하나님의 창조세계 파괴의 심각성을 재삼 강조하여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근본으로 부터 뒤틀려 가고 있는 땅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적인 의도”가 결국 자연과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고 점령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한 이래,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이러한 일을 끊임없이 자행해 왔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이러한 거만하기 이를데 없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더는 이것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이 처참하게 파괴된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나와는 무관하다”는 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갖 묶인 것과 구겨진 것을 풀고 펴는 일의 주인공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의미심장한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묶여 있는 “멸망의 사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맡겨인 책임을 거스름으로써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것은 “피조세계에 대한 봉사와 섬김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맡기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인간의 탐욕스런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지배욕구와 착취의 행동을 낳았습니다. 동반자인 피조세계를 인간의 노예인 듯이 대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롬8:22)” 있었던 것입니다. 이 “멸망의 사슬에서 풀어나는 자유”를 지금껏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바울은 확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스런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일은 시작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온갖 탐욕스런 착취의 사슬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나와 너 모두를 파괴시키는 이기적 욕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원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세계에 대한 봉사와 섬김의 책무”를 깨닫게 되었을 때 시작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우리가 희망하는 일을 버릴 수 없는 근거입니다. 도무지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이라 불리우는 자리”에서 조차도 바로 “그 희망의 일을 우리가 시작함으로써” 희망의 상황이 열리는 까닭입니다. 바울은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지금 보이지 않고 오직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절망이요 처참한 파괴의 현실일찌라도, “인내하며 기다리며 희망하는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서 진정한 해방현실을 앞당기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환경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결심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희망하는 일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바로 보며 우리의 책무를 지나쳐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를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멸망의 사슬에 자신을 매어두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매인 것을 풀어내는 일에 기꺼이 헌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얼마의 땀과 그만큼의 피흘리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것이 부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다름아닌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자신의 울타리에 매이게 하여 갇혀버리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와 세셰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일을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환경주일 이고, 어제는 스물 한번째 맞이하는 세계 환경의 날 이 었습니다. 환경오염과 하나님의 창조세계 파괴의 심각성을 재삼 강조하여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근본으로 부터 뒤틀려 가고 있는 땅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적인 의도”가 결국 자연과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고 점령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한 이래,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이러한 일을 끊임없이 자행해 왔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이러한 거만하기 이를데 없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더는 이것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이 처참하게 파괴된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나와는 무관하다”는 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갖 묶인 것과 구겨진 것을 풀고 펴는 일의 주인공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의미심장한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묶여 있는 “멸망의 사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맡겨인 책임을 거스름으로써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것은 “피조세계에 대한 봉사와 섬김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맡기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인간의 탐욕스런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지배욕구와 착취의 행동을 낳았습니다. 동반자인 피조세계를 인간의 노예인 듯이 대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롬8:22)” 있었던 것입니다. 이 “멸망의 사슬에서 풀어나는 자유”를 지금껏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바울은 확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스런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일은 시작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온갖 탐욕스런 착취의 사슬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나와 너 모두를 파괴시키는 이기적 욕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원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피조세계에 대한 봉사와 섬김의 책무”를 깨닫게 되었을 때 시작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우리가 희망하는 일을 버릴 수 없는 근거입니다. 도무지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이라 불리우는 자리”에서 조차도 바로 “그 희망의 일을 우리가 시작함으로써” 희망의 상황이 열리는 까닭입니다. 바울은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지금 보이지 않고 오직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절망이요 처참한 파괴의 현실일찌라도, “인내하며 기다리며 희망하는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서 진정한 해방현실을 앞당기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환경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결심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희망하는 일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바로 보며 우리의 책무를 지나쳐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를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림으로써 멸망의 사슬에 자신을 매어두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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