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의 습관 (마17:1-8)
본문
어떠한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한 집착의 태도는 많은 경우에 핵심적인 내용을 놓쳐버리거나, 엉뚱한 곳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도 그것을 교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머무르려는 태도” 즉,자기 취향에 맞는 상황에만 안주하려는 태도, 혹은 무조건 익숙헤져 있고 길들여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머무르며 변화를 원치 않거나 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영롱한 햇빛이 벽에 반사되어 벽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그 벽이 빛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여 벽에만 온갖 관심을 다 쏟고, 심지어 벽을 빛이라고 생각하며 도무지 그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태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빛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한, 빛을 향해 자신의 몸을 돌리지 않는한 그 사람은 “벽”속에 갇혀있는 셈인 것입니다. 또한 친숙하고, 단지 길들여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지구가 평평한 사각형이란 생각이 진리로 받아들여 졌을 때 “지구는 둥글다”라는 말은 충격적이었고, 지구가 사각형이라는 생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와같은 획기적인 전혼을 두려워 하기까지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길들여진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았습니다. 좁은 감방에 있다가 조금 넚은 감방에 있게 된 것을 자랑스럽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에서도 머무르려는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갇힌자에게 있어야할 것은 “자유”이며 “자유에 대한 소망”입니다.
감방이 벏어졌다고 그것에 만족하는 태도는 자유를 갈망하는 태도에서 멉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핵심을 잃어버린 머무름의 태도”에 대한 예수의 지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아주 놀라운 모습을 목격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장엄한 광경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는 제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절정을 드러내시며 미래적인 비젼을 현재적 경험으로 가져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강화시키며 흔들림이 없는 움직임의 근거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기득권을 담보한 세력은 예수의 비정통성과 반율법성, 그리고 반야훼성을 들어 도전하고 있는 형편 이었습니다. 제자들 마저도 예수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예수 자신의 움직임이 구약의 예언자(엘리야) 전통에 흔들림없이 서있고 야훼의 법(모세)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대한 제자의 반응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데다가 머무름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신다면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 표현을 바꾼다면 “이곳에 계속하여 머물고 싶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은 접어두고 이 장엄함 속에 남고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제안은 예수의 의도와는 너무나 다른 것 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절정”과 그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완성하는 그 때까지 그것을 갈망하며 보다 힘차고 용기롭게 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확신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들에게 밀어닥칠 환경이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참여했고 경험한 하나님 나라는 한두번 쓰다가 버릴 소모품이 아나다. 그 어떤것과도 견줄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이것을 언제나 새롭게 경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일구어나가는 도전적인 태도를 잃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망함으로써 단지 주어진 현상의 “놀라움”속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즉흥적인 발상은 핵심을 벗어나 있습니다. 핵심을 잃어버린 분주함이나 열정은 결심없는 수로로움입니다. 광맥을 잘못 파들어가 오랜 수고가 허탈하게 끝나버리는 상태와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야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향한 행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자기 취향”에 매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압도당하지만, 핵심을 잃어버린채로 “하나님 나라의 힘찬 역사”를 한 시점에 고정시켜 버리려눈 무모한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독단적인 계획과 자신의 사고와 능력 속에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두어 버리는 헛된 노력이 많습니다. 빛을 항아리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선의 항아리를 깨고 빛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어떠한 곤란한 경우에도 하나님 나라의 힘찬 역사는 머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감방이 넓어졌다고 즐거워하는 어리석음이나 갈망하는 법을 잃어버린 머무름의 습관을 걷어치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감방이 벏어졌다고 그것에 만족하는 태도는 자유를 갈망하는 태도에서 멉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핵심을 잃어버린 머무름의 태도”에 대한 예수의 지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아주 놀라운 모습을 목격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장엄한 광경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는 제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절정을 드러내시며 미래적인 비젼을 현재적 경험으로 가져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강화시키며 흔들림이 없는 움직임의 근거를 주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기득권을 담보한 세력은 예수의 비정통성과 반율법성, 그리고 반야훼성을 들어 도전하고 있는 형편 이었습니다. 제자들 마저도 예수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예수 자신의 움직임이 구약의 예언자(엘리야) 전통에 흔들림없이 서있고 야훼의 법(모세)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대한 제자의 반응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데다가 머무름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신다면 여기에 초막을 짓겠습니다.” 표현을 바꾼다면 “이곳에 계속하여 머물고 싶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은 접어두고 이 장엄함 속에 남고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제안은 예수의 의도와는 너무나 다른 것 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절정”과 그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완성하는 그 때까지 그것을 갈망하며 보다 힘차고 용기롭게 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확신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들에게 밀어닥칠 환경이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참여했고 경험한 하나님 나라는 한두번 쓰다가 버릴 소모품이 아나다. 그 어떤것과도 견줄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이것을 언제나 새롭게 경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일구어나가는 도전적인 태도를 잃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망함으로써 단지 주어진 현상의 “놀라움”속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즉흥적인 발상은 핵심을 벗어나 있습니다. 핵심을 잃어버린 분주함이나 열정은 결심없는 수로로움입니다. 광맥을 잘못 파들어가 오랜 수고가 허탈하게 끝나버리는 상태와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야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향한 행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기적인 자기 취향”에 매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압도당하지만, 핵심을 잃어버린채로 “하나님 나라의 힘찬 역사”를 한 시점에 고정시켜 버리려눈 무모한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독단적인 계획과 자신의 사고와 능력 속에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두어 버리는 헛된 노력이 많습니다. 빛을 항아리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선의 항아리를 깨고 빛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어떠한 곤란한 경우에도 하나님 나라의 힘찬 역사는 머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감방이 넓어졌다고 즐거워하는 어리석음이나 갈망하는 법을 잃어버린 머무름의 습관을 걷어치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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