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본문
북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린란드 북부 지역을 항해하면서 신기한 장면을 보았답니다. 바다에 많은 크고 작은 얼음 조각들이 떠있었는데, 바닷물의 흐름을 따라서 북쪽으로 떠가고 있었답니다. 남쪽에서 북극을 향해 부는 바람 때문이었답니다. 거대한 빙산도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빙산은 반대로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답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의 해류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바다물의 흐름은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이죠. 표면에서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흐름이 있고, 깊은 내면에 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는 흐름입니다. 자잘한 얼음 조각들은 표면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립니다. 그러나 거대한 빙산은 표면의 흐름에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바다 저 깊은 곳에서 흐르는 해류의 흐름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두 가지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는 역사의 표면을 흐르는 흐름입니다. 이런 저런 세파에 따라 요란하게 소용돌이칩니다. 또 하나는 역사의 내면을 흐르는 흐름입니다. 표면의 세파와 무관하게 도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흘러갑니다. 자잘한 얼음 조각과 같은 사람들은 역사의 표면을 흐르는 흐름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빙산과 같은 사람들은 역사의 내면을 흐르는 흐름을 따릅니다. 세파에 흔들림 없이 도도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요즈음 우리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납니다. 격랑이 일어서 그 위에 떠 있는 배들을 뒤흔듭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곧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겉 표면을 흐르는 역사의 흐름만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면의 소용돌이만 보기 때문입니다. 저 깊은 곳을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통찰력을 가지고 역사 내면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깊은 곳을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진정한 위로와 참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역사 저 깊은 곳을 흐르는 구속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답답하고 걱정스런 이 세상의 풍파를 잠시 잊고,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묵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본문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케제만은 요한이 이 말씀을 쓰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우선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기 전의 존재형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고스' 즉 '말씀'이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일했고,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말씀은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육신'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인간 존재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인간성을 말합니다. 요한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크스' 즉 '육신'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타락해서 죄를 짓고 멸망당할 처지에 놓여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만 할 연약하고 가련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저 멀리 강가에 있는 구명조끼나 튜브나 구명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손에 닿을 만한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구원할 능력이 있으시다 해도 도저히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곳에 계시면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은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손을 벌리면 닿을 만한 거리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거리에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도와 주시기 위해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 오셨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왕이 자기 지위를 버리고 노예가 되고, 종이 되어서 백성들 앞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군림하고 통치하던 사람이 섬기고 시중드는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섬기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일 지라도 우리를 위해 기꺼이 감당하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변화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혼부부가 사랑한다면서 부부 싸움을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서로가 변화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팥죽을 좋아합니다. 결혼해서 집사람이 팥죽을 쒀주는데 전에 제가 먹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저는 밥알이 든 팥죽만 먹어봤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쒀준 팥죽은 밥알 대신 새알이 들어 있었습니다. 먹어도 팥죽 같지 않고 이상해서 안 먹는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집사람은 밥알 든 팥죽은 못 먹겠다고 버텼습니다. 서로 밥알 팥죽을 먹으라고, 새알 팥죽을 먹으라고 다퉜습니다. 서로 양보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변화되기 바란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좋을 대로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대로 자신을 바꾸셨습니다. 기꺼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구속사의 절정입니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incarnation 즉 성육신이라 불렀습니다. 이 성육신이 역사 내면을 흐르는 흐름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본문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 이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잠깐 다녀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속 머물러 계십니다. 33년 생애 동안 계셨습니다. 이제는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늘 거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고달픈 이 역사의 파고를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못 가겠다고 버텼습니다. 출3:11에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령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함께 하시는 징표로 능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셨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영도하게 된 여호수아도 두려워 떨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이들이 두려워 떨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말렉 군대가 덤벼들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덤벼들었습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대적이 버티고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뿐입니까 이 거센 역사의 파고를 거슬러 오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혼자서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을 물리친 것도 모세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것도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셔서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본문 말씀은 성육신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그 안에서 아들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감히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별한 경우를 몇 차례 소개해 줍니다.
우선 출 16:10을 보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기 전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고 말씀했다. 출 24:16에 보면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라고 말씀했다. 왕상 8:11에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만나를 주신다든지, 십계명을 주실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 나타납니다. 또한 성전을 봉헌할 때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 영광을 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우리 눈에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변화산 위에 올랐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주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 고단한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 말씀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육신하신 말씀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은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혜란 말의 뜻은 "과분한 대우"란 뜻을 가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떼를 써서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세상 향락에 탕진을 하고 굶어 죽지 못해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크게 잔치를 벌이라고. 맏아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아들 대우를 극진히 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를 양자삼으셔서 감히 아들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죄값을 치러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과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특별 대우하십니다. 기도하면 들으시고, 어려움을 호소하면 해결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진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리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말합니다. 이 진리는 세상 학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넘치도록 가득 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만 있으면 넘치는 은혜와 부족함 없는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힘겹고 고달픈 세상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우리를 고단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눈물짓게 만듭니다. 그러나 역사 저 깊은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소리가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참 평안이 있고, 여기에 진정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빙산은 반대로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답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의 해류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바다물의 흐름은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이죠. 표면에서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는 흐름이 있고, 깊은 내면에 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는 흐름입니다. 자잘한 얼음 조각들은 표면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립니다. 그러나 거대한 빙산은 표면의 흐름에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바다 저 깊은 곳에서 흐르는 해류의 흐름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두 가지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는 역사의 표면을 흐르는 흐름입니다. 이런 저런 세파에 따라 요란하게 소용돌이칩니다. 또 하나는 역사의 내면을 흐르는 흐름입니다. 표면의 세파와 무관하게 도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흘러갑니다. 자잘한 얼음 조각과 같은 사람들은 역사의 표면을 흐르는 흐름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빙산과 같은 사람들은 역사의 내면을 흐르는 흐름을 따릅니다. 세파에 흔들림 없이 도도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요즈음 우리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습니다. 요란한 소리를 납니다. 격랑이 일어서 그 위에 떠 있는 배들을 뒤흔듭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곧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겉 표면을 흐르는 역사의 흐름만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표면의 소용돌이만 보기 때문입니다. 저 깊은 곳을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통찰력을 가지고 역사 내면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깊은 곳을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진정한 위로와 참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역사 저 깊은 곳을 흐르는 구속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답답하고 걱정스런 이 세상의 풍파를 잠시 잊고,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묵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본문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케제만은 요한이 이 말씀을 쓰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우선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기 전의 존재형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고스' 즉 '말씀'이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일했고,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말씀은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육신'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인간 존재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인간성을 말합니다. 요한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사르크스' 즉 '육신'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타락해서 죄를 짓고 멸망당할 처지에 놓여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만 할 연약하고 가련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저 멀리 강가에 있는 구명조끼나 튜브나 구명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손에 닿을 만한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구원할 능력이 있으시다 해도 도저히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곳에 계시면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은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손을 벌리면 닿을 만한 거리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거리에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도와 주시기 위해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 오셨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왕이 자기 지위를 버리고 노예가 되고, 종이 되어서 백성들 앞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군림하고 통치하던 사람이 섬기고 시중드는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섬기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일 지라도 우리를 위해 기꺼이 감당하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변화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혼부부가 사랑한다면서 부부 싸움을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서로가 변화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팥죽을 좋아합니다. 결혼해서 집사람이 팥죽을 쒀주는데 전에 제가 먹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저는 밥알이 든 팥죽만 먹어봤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쒀준 팥죽은 밥알 대신 새알이 들어 있었습니다. 먹어도 팥죽 같지 않고 이상해서 안 먹는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집사람은 밥알 든 팥죽은 못 먹겠다고 버텼습니다. 서로 밥알 팥죽을 먹으라고, 새알 팥죽을 먹으라고 다퉜습니다. 서로 양보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변화되기 바란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좋을 대로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대로 자신을 바꾸셨습니다. 기꺼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구속사의 절정입니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incarnation 즉 성육신이라 불렀습니다. 이 성육신이 역사 내면을 흐르는 흐름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본문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 이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잠깐 다녀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속 머물러 계십니다. 33년 생애 동안 계셨습니다. 이제는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늘 거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고달픈 이 역사의 파고를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못 가겠다고 버텼습니다. 출3:11에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령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함께 하시는 징표로 능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셨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영도하게 된 여호수아도 두려워 떨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이들이 두려워 떨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말렉 군대가 덤벼들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덤벼들었습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대적이 버티고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뿐입니까 이 거센 역사의 파고를 거슬러 오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혼자서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을 물리친 것도 모세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것도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셔서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본문 말씀은 성육신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그 안에서 아들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감히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별한 경우를 몇 차례 소개해 줍니다.
우선 출 16:10을 보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기 전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고 말씀했다. 출 24:16에 보면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라고 말씀했다. 왕상 8:11에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제사장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만나를 주신다든지, 십계명을 주실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 나타납니다. 또한 성전을 봉헌할 때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 영광을 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우리 눈에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변화산 위에 올랐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주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 고단한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 말씀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육신하신 말씀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합니다. 먼저 은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혜란 말의 뜻은 "과분한 대우"란 뜻을 가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떼를 써서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세상 향락에 탕진을 하고 굶어 죽지 못해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크게 잔치를 벌이라고. 맏아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아들 대우를 극진히 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를 양자삼으셔서 감히 아들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죄값을 치러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과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특별 대우하십니다. 기도하면 들으시고, 어려움을 호소하면 해결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진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리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말합니다. 이 진리는 세상 학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넘치도록 가득 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만 있으면 넘치는 은혜와 부족함 없는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힘겹고 고달픈 세상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 우리를 고단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눈물짓게 만듭니다. 그러나 역사 저 깊은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소리가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참 평안이 있고, 여기에 진정한 은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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