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응하기까지 (창41:37-45)
본문
한국 교회에서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다. 요셉처럼 우리가 꿈과 비젼을 갖자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도 어느 누구를 본받으라는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자. 모세를 본받자.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을 본받자 할 때 봅시다. 요셉은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꾸고 싶어서 꾼 사람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꾸어졌습니다. 그를 본받으려면 우리도 그와 똑같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천국가는 꿈을 꾸고 싶다고 그 꿈이 꾸어집니까 안됩니다. 주님 주신 비젼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인간은 늘 꿈을 꾸고 꿈을 먹고 삽니다. 꿈꾸지 말라고 해도 꿈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인간 누구나 가지는 그런 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상상도 못한 감히 접근도 못할 꿈을 제시합니다. 요셉도 그 꿈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일은 저쪽에서 열어 보여 주기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고전2:8). 그래서 요셉은 자기가 잘나서 꿈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가 귀싸대기 얻어터지는 게 그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네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했는데 또 그 말씀이 요셉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봅시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 여기서 너는 요셉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준 축복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창세기 27장 29절이 야곱에게 준 것이 아니고, 야곱 언약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야곱 언약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요셉은 형제들의 주가 됩니다. 나중에 끝에 가서 보면 형제들이 다 그에게 절을 합니다. 창세기 45장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요셉이 고생을 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의 모습으로 고생했습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는 그 모습으로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야곱 언약을 성취하는 도구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모든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착하고 싶어서 착한 것도 아니고 팔려가고 싶어서 팔려간 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형제들이 잔뜩 겁을 먹습니다. 그때 요셉이 어떤 고백을 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요셉의 일생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1. 야곱은 언약을 깨닫기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야곱은 바로 앞에 서서 지금까지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야곱이 했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1 야곱은 태어날 때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2 형으로부터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챈 죄로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3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피눈물나는 종살이를 했습니다.
4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어 집안에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5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씨름을 벌였습니다. 6 딸 디나는 세겜 족속의 땅에 들어가 강간을 당하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7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8 장자 르우벤은 빌하와 통간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9 아들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고 짐승이 물어 죽였다고 속였습니다. 야곱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사건 하나 하나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의미를 알 때까지 하나님이 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난 뒤에 깨달음을 얻은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어떻게 합니까 손은 어긋나게 해서 거꾸로 축복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 두들겨 부수는 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의지가 다 꺾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로 행하셨습니다. 반대로 이끌어 가심 속에 야곱은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자신의 뜻과 의지를 꺾으시고 하나님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기 전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손을 어긋나게 해서 축복합니다. 요셉은 므낫세가 장자라면서 바로 할 것을 부탁했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고 하면서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 부숴 버리신 하나님의 고생, 그 사랑을 그 순간에 그는 고백한 것입니다.
2. 요셉도 말씀이 응하기까지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또 오랜 세월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 지냈습니다. 그의 발에는 착고가 채워지고 온몸은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왜 요셉이 착고에 그 발이 상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착한 요셉이 무고하게 고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죄없이 당하는 어려움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 죄없이 당한 어려움이지만 이것을 고난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진짜 고난이 무엇인지 이 말씀 차원에서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요셉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하나님 차원에서 볼 때는 응당 겪어야 할 과정을 거쳤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은 스스로 굉장히 착했습니다. 그 착함과 나타나는 현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요셉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복을 받지만 자신은 계속 미끄러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 요셉에게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복은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결과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있을 때, 죄수로 감옥에 갇혔을 때 똑같이 반복되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고, 그가 맡은 일 역시 형통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만큼은 계속 미끄러지는 삶이었습니다. 미끄러지기만 하는 요셉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열심히 일했으나 억울한 누명만 뒤집어썼습니다. 감옥 안에서 술빚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었지만 그는 요셉을 잊었습니다. 이렇듯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어진 시간이 13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은 하나님은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이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 자신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려움 속에 깊은 한숨을 쉬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스스로 왜 이래야만 하는지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착했는지 모릅니다. 사실상 착했는데 자기는 계속 미끄러집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 것은 알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도 알겠습니다. 자신을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계속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미끄러지기만 합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렸습니다. 종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나중에는 감옥까지 갑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킨 결과가 감옥행이니 얼마나 한탄스럽겠습니까 우리가 한번 그 입장이 되어 보세요. 원망이 안 나오겠습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불평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믿음 좋다는 것이 바로 이런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라면 누가 과연 예수를 믿겠습니까
3. ‘말씀이 응한다’는 말의 의미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가는 곳이 어디든 그곳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요셉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의 요셉은 아직도 계속 더 맞아야 합니다. 요셉의 고난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만 합니까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요셉이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25:23)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면 모를수록 요셉은 더 두들겨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요셉의 고난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요셉 자신이 부모와 형제를 위한 희생을 짊어지지만 그 자신은 더 철저하게 부서져야 합니다. 부서지는 것이 감옥에 가서 착고에 채이는 것입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를 살린다’는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그는 고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가 야곱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자가 야곱을 살립니다. 요셉이 지금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술빚는 관원장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그가 버림받은 자가 되어 버린 자들을 살립니다. 이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 섬기는 자의 주체가 장차 씨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까지 요셉이 죽을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버림을 받습니다. 버림받은 그분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버림받은 자가 우리를 살린다는 이 사랑이 내 안에 응할 때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착고에 채이고 쇠사슬에 묶여서 고생을 해야 합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꿈해석을 해줍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나갔습니다. 나간 사람이 자기가 잘 되면 요셉에 대하여 잘 말해 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잊어버리고 안해 줍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이 사실을 요셉에게 깨닫게 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착고와 쇠사슬에 매여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105:19) 성경은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했습니다. 말씀이 그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목사되는 것은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갔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너 왜 목사됐니 물으면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 해야지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서, 민족과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됐다고 하면 안됩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마귀입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 사람들이 붕붕뜹니다. 사람들이 자꾸 그러면 주님이 부끄러워집니다. 요셉은 자기가 꿈을 가지고 있다고 우쭐대고 있으니 하나님이 두들겨 부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서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옛날 야곱이나 저쪽의 사람들이나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단지 말씀이 이게 아니다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자기가 제자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주님이 불렀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했는데 부르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했을 때도 주님이 끌고 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응해야 합니다. 요셉이 깨달은 바는 내가 꿈을 가진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국무총리 되는 것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말씀이 응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사랑을 알았으면 우리가 지금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가장 완전한 이 사랑을 받았으면 국무총리도 아니고, 여자의 유혹을 물리친 내 잘남도 아니고, 나를 핍박한 형제들을 먹여 살린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를 받았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정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알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감옥에서 내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왕이 꿈을 꿉니다. 그래서 말씀이 딱딱 맞아들어 갑니다. 이 사건 이 사건이 플러스 마이너스가 되어 맞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까지 언약을 모릅니다. 이들을 참 이스라엘을 만들고 그 땅에 죄악도 관영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가 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니까 아브라함이 자기의 비젼과 꿈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꿈이 없었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우리가 뭘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마지막 날에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뭘 우리가 뛰어나가야 합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 같으면 그 사람을 우연하게 만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노래까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했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말씀이 응해서 나는 이런 예수를 믿는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도 그렇다고 말하면 말씀이 응한 것 아닙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도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안 믿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지 왜 모르느냐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게 기적입니다. 모르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모르는 사람을 향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니까 그놈은 나쁜 놈이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다름 아닌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를 살린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이 복음의 진리를 더 깊게 깨닫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깨닫기까지 단련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의 단련은 이 사실을 깨닫게 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 여기서 너는 요셉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준 축복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창세기 27장 29절이 야곱에게 준 것이 아니고, 야곱 언약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야곱 언약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요셉은 형제들의 주가 됩니다. 나중에 끝에 가서 보면 형제들이 다 그에게 절을 합니다. 창세기 45장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요셉이 고생을 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의 모습으로 고생했습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는 그 모습으로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야곱 언약을 성취하는 도구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모든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착하고 싶어서 착한 것도 아니고 팔려가고 싶어서 팔려간 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형제들이 잔뜩 겁을 먹습니다. 그때 요셉이 어떤 고백을 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요셉의 일생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1. 야곱은 언약을 깨닫기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야곱은 바로 앞에 서서 지금까지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야곱이 했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1 야곱은 태어날 때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2 형으로부터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챈 죄로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3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피눈물나는 종살이를 했습니다.
4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어 집안에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5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씨름을 벌였습니다. 6 딸 디나는 세겜 족속의 땅에 들어가 강간을 당하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7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8 장자 르우벤은 빌하와 통간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9 아들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고 짐승이 물어 죽였다고 속였습니다. 야곱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사건 하나 하나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의미를 알 때까지 하나님이 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난 뒤에 깨달음을 얻은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어떻게 합니까 손은 어긋나게 해서 거꾸로 축복합니다. 이제는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 두들겨 부수는 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의지가 다 꺾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로 행하셨습니다. 반대로 이끌어 가심 속에 야곱은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자신의 뜻과 의지를 꺾으시고 하나님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기 전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손을 어긋나게 해서 축복합니다. 요셉은 므낫세가 장자라면서 바로 할 것을 부탁했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고 하면서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인간의 모든 생각을 다 부숴 버리신 하나님의 고생, 그 사랑을 그 순간에 그는 고백한 것입니다.
2. 요셉도 말씀이 응하기까지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또 오랜 세월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 지냈습니다. 그의 발에는 착고가 채워지고 온몸은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왜 요셉이 착고에 그 발이 상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착한 요셉이 무고하게 고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죄없이 당하는 어려움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 죄없이 당한 어려움이지만 이것을 고난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진짜 고난이 무엇인지 이 말씀 차원에서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요셉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하나님 차원에서 볼 때는 응당 겪어야 할 과정을 거쳤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은 스스로 굉장히 착했습니다. 그 착함과 나타나는 현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요셉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복을 받지만 자신은 계속 미끄러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 요셉에게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복은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결과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있을 때, 죄수로 감옥에 갇혔을 때 똑같이 반복되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고, 그가 맡은 일 역시 형통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만큼은 계속 미끄러지는 삶이었습니다. 미끄러지기만 하는 요셉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열심히 일했으나 억울한 누명만 뒤집어썼습니다. 감옥 안에서 술빚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었지만 그는 요셉을 잊었습니다. 이렇듯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어진 시간이 13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은 하나님은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이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 자신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려움 속에 깊은 한숨을 쉬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스스로 왜 이래야만 하는지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착했는지 모릅니다. 사실상 착했는데 자기는 계속 미끄러집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 것은 알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도 알겠습니다. 자신을 인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계속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미끄러지기만 합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렸습니다. 종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나중에는 감옥까지 갑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킨 결과가 감옥행이니 얼마나 한탄스럽겠습니까 우리가 한번 그 입장이 되어 보세요. 원망이 안 나오겠습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불평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믿음 좋다는 것이 바로 이런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라면 누가 과연 예수를 믿겠습니까
3. ‘말씀이 응한다’는 말의 의미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가는 곳이 어디든 그곳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요셉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의 요셉은 아직도 계속 더 맞아야 합니다. 요셉의 고난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만 합니까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요셉이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25:23)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면 모를수록 요셉은 더 두들겨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요셉의 고난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요셉 자신이 부모와 형제를 위한 희생을 짊어지지만 그 자신은 더 철저하게 부서져야 합니다. 부서지는 것이 감옥에 가서 착고에 채이는 것입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를 살린다’는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그는 고생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가 야곱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자가 야곱을 살립니다. 요셉이 지금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술빚는 관원장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그가 버림받은 자가 되어 버린 자들을 살립니다. 이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 섬기는 자의 주체가 장차 씨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까지 요셉이 죽을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버림을 받습니다. 버림받은 그분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버림받은 자가 우리를 살린다는 이 사랑이 내 안에 응할 때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착고에 채이고 쇠사슬에 묶여서 고생을 해야 합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꿈해석을 해줍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나갔습니다. 나간 사람이 자기가 잘 되면 요셉에 대하여 잘 말해 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잊어버리고 안해 줍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이 사실을 요셉에게 깨닫게 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착고와 쇠사슬에 매여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105:19) 성경은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했습니다. 말씀이 그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목사되는 것은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갔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너 왜 목사됐니 물으면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 해야지 교회를 크게 하기 위해서, 민족과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됐다고 하면 안됩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마귀입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 사람들이 붕붕뜹니다. 사람들이 자꾸 그러면 주님이 부끄러워집니다. 요셉은 자기가 꿈을 가지고 있다고 우쭐대고 있으니 하나님이 두들겨 부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서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옛날 야곱이나 저쪽의 사람들이나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단지 말씀이 이게 아니다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자기가 제자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주님이 불렀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했는데 부르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했을 때도 주님이 끌고 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응해야 합니다. 요셉이 깨달은 바는 내가 꿈을 가진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국무총리 되는 것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말씀이 응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사랑을 알았으면 우리가 지금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가장 완전한 이 사랑을 받았으면 국무총리도 아니고, 여자의 유혹을 물리친 내 잘남도 아니고, 나를 핍박한 형제들을 먹여 살린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를 받았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정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알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감옥에서 내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왕이 꿈을 꿉니다. 그래서 말씀이 딱딱 맞아들어 갑니다. 이 사건 이 사건이 플러스 마이너스가 되어 맞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까지 언약을 모릅니다. 이들을 참 이스라엘을 만들고 그 땅에 죄악도 관영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가 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니까 아브라함이 자기의 비젼과 꿈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꿈이 없었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우리가 뭘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마지막 날에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뭘 우리가 뛰어나가야 합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 같으면 그 사람을 우연하게 만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노래까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했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말씀이 응해서 나는 이런 예수를 믿는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도 그렇다고 말하면 말씀이 응한 것 아닙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도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안 믿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지 왜 모르느냐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게 기적입니다. 모르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모르는 사람을 향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니까 그놈은 나쁜 놈이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다름 아닌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를 살린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이 복음의 진리를 더 깊게 깨닫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깨닫기까지 단련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의 단련은 이 사실을 깨닫게 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