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왕성 (행12:23-25)
본문
1871년 가을, 무디(D. L. Moody)는 부룩클린의 어느 교회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맡은 목회라 온갖 열심과 정열을 다해 설교를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여 강단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열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하나, 둘 그를 떠나게 되고, 결국 몇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가 끝난 후 한 여성도가 무디에게 나아와 겸손히 이르기를 “무디 선생님, 세상 이야기는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무디는 그 여성도의 부탁에 자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가지고 설교를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강단에서 언제나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설교하는 자신에게는 힘이 생겼고, 떠났던 교인들도 다시 돌아오게 되고,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레함 역시 이 같은 체험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마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몇 곳에서 나타난 ‘말씀의 왕성’, ‘말씀의 흥왕’, ‘말씀의 힘’이란 표현을 중심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초기 사도들의 사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행 6:7),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 12:24),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20) 하는 같은 내용의 반복적인 표현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표현의 의미는 ‘자란다’, ‘증가한다’라는 미래 완료형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부흥하고 있었다’, ‘세력이 더하고 있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I. 말씀의 왕성은 그 말씀의 신적 생명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본 위의 세 말씀은 앞에 ‘하나님의 말씀’(행 6:7), ‘하나님의 말씀’(행 12:24), ‘주의 말씀’(행 19:20)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표현은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가 1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2 또한 다른 신(다른 靈)의 말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3 하나님 자신의 말씀 곧 살아 있는 말씀, 운동하는 말씀, 예리한 말씀, 인격을 움직여 주는 말씀(히 4:12)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왕성하다, 말씀이 힘이 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살아 있는 인격적인 신이라는 말입니다.
4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으로 나타내어지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16).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설교, 전도)는 이렇게 신적 생명성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일어나고야 마는 결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입을 통하여 나타난 말씀은 흥왕하고, 점점더 힘이 있어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역사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Ⅱ. 말씀의 왕성은 신자 수(數)의 증가를 뜻합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짐과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 수의 증가’는 정비례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수’란 예수를 따르는 문도(門徒), 즉 신도(信徒)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 했기 때문입니다.(행 6:4). 어떻게 저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무할 수 있었던가 ‘집사’를 세워서 교회 안의 다른 일들, 특별히 구제하는 일을 저들에게 분담시켰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주요 업무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부흥에 큰 비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영적인 일에만 골몰할 때 말씀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 교회에서는 교회 재정(財政)을 분담하는 집사 제도와 교회 행정을 분담하는 장로 제도가 있어서 목사의 목회 사역에 효과를 내도록 한 것입니다.
Ⅲ. 말씀의 왕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6장 7절 하반절이 또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란 유대교의 핵심 세력인 제사장들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에 있었던 제사장들의 수는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Jeremias). 저들은 과거에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 주체 세력들이었습니다(마 26:3). 이제는 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죽였던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따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 도에 복종하니라 라고 함은 ‘믿었다’는 뜻입니다. 옛 도(道), 곧 율법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도(道)인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이행득구(以行得救)주의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이신득구(以信得救)주의, 곧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도에 관계된 것은 당시 사도들의 전도(설교)가 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행하여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행 2:46, 5:25, 42).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던 제사장들이고 보면 저들이 사도의 입에서 나타나는 말씀의 위력을 자주 접했을 것입니다. 부르스(F. F. Bruce)는 말하기를 ‘이때 회개한 제사장들은 특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제사장들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구약 종교’가 그 사명을 정식으로 ‘신약 종교’에 넘겨 준다는 데 큰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구 종교가 바뀌어지는 큰 변화의 한 모습입니다. 결국 말씀의 왕성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행사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Ⅳ. 말씀의 왕성은 주님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24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 앞구절에 보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행 12:23)고 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더라.’는 말씀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헤롯 왕가에는 대대로 반기독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법자의 대명사요, 포악자의 대표요, 불의의 상징이요 반기독, 반교회의 표본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반기독자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절에 보면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인 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였습니다(행 12:4). 그는 잔인한 살인자였습니다. 그의 명을 받아 베드로를 파수하던 수비병들을 모두 죽여 버린 자였습니다(행 12:19). 그는 베드로가 감옥에서 주의 천사의 도움으로 석방된 줄을 몰랐습니다. 그를 지키던 파수병들의 실수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한 자였습니다. 그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신이라고 일컬음 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가 천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던 날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로부터 아첨의 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원래 그는 두로와 시돈 지방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은 헤롯의 관할 구역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양곡을 헤롯왕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 왕의 시종자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 왕에게 화친을 교섭해 왔습니다(행 12:20-21). 이때 헤롯은 그 화친을 허락하고 날을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날은 경기
둘째 날(8월 1일)이었습니다. 그때 헤롯은 반원형 극장 귀빈석에 앉았고, 은으로 장식된 그의 의복이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황제(왕)는 저들 앞에서 연설하였습니다(행 12:21). 바로 그때 두로와 시돈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기를 당신은 신이요, 당신의 음성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두로와 시돈 백성의 찬사는 권력자 앞에 약한 대중들이 곧잘 하는 아첨의 행동이요, 아첨의 소리였습니다. 저들은 살기 위하여 권력자 앞에서 저렇게 아첨의 영광을 떨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하여 소리 지르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지금까지 당신을 사람으로 존경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당신을 인성 위에 초월한 자로 섬기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갑자기 그의 머리 위의 그물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이것이 흉보의 사자임을 깨닫고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아 슬픔에 잠기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심한 복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바라보고 “너희들이 신이라 부르는 나는 곧 이 생명에서 떠나라는 명을 받았다…. 불멸이라는 나는 즉시 죽음으로 달리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이 말을 마치자 그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곧 궁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후 닷새를 복통으로 앓다가 완전히 지친 끝에 죽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Jos. Ant. ⅩⅨ8:2) 우리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고 하였습니다(행 12:23). 마카비서에는 ‘하나님의 힘으로 그의 배에서 벌레가 생기고, 몸에서 악취가 나서 그의 모든 군인들이 코를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를 쳤다(행 12:23)고 하였습니다. 그는 작은 벌레에 씹혀 죽었습니다. 옛날 구약에 적기독의 표본이었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강한 군대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작은 벌레에 씹혀 그 영광이 녹슬도록 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패한, 저주의 죽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다툰 자였습니다. 그는 주와 주의 사자들과 주의 교회를 대적한 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주의 종 베드로를 투옥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회들이 큰 환난 중에 빠져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41장 11절대로 죽었습니다.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고 한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나 또 사람에게 양보하지도 빼앗기지도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 문제에서는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헤롯과 헤롯의 역사는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의 안내를 받아 그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복음의 사자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에 나타난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흔들어 깨워 주었습니다(행 12:7). 그리고 베드로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던 성도들을 만나고(행 12:12-16), 또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흥왕이란 1 악인을 심판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2 주의 종들에게 복음의 문이 계속해서 열려진 것을 말합니다. 3 교회가 올리는 합심 기도의 응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끝났으나 베드로의 사역은 끝나지 아니하였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기독교의 존재 의의 중의 하나는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존재하는 역사의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입니다. 존재하는 세계와 세계사는 인류 구원을 성취해 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교의 장이요, 무대입니다. 그리고 역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교육…등은 하나님의 세계 선교 진행을 위하여 사용되는 간접적 도구들이요, 수단들입니다. 그리고 지음 받은 전 피조 세계의 자원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세계 선교를 위한 선교 비용 자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을 죄악시하지 아니합니다. 배타하거나 업신여기지 아니합니다. 다만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주어진 선교 어간에 사용될 잠정적 수단들일 뿐입니다. 역사 세계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 구원하는 구원 역사는 진정한 역사의 참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그 아들 예수를 보내어 전도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십자가 사역의 완성 후에는 성령님을 통하여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성령님’은 ‘성경’이라고 하는 ‘계시 매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2천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왕성’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왕성은 바로 ‘복음 운동의 왕성’을 뜻합니다. 복음 운동의 왕성이란 예수 믿는 신자의 수가 더해 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승리, 진리의 승리, 교회 운동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 속에 말씀이 왕성해야 합니다. 가정 생활과 교회 운동에 말씀이 왕성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성령님 충만의 삶을 의미합니다. 성령님 충만의 삶이 곧 승리 생활입니다.--
I. 말씀의 왕성은 그 말씀의 신적 생명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본 위의 세 말씀은 앞에 ‘하나님의 말씀’(행 6:7), ‘하나님의 말씀’(행 12:24), ‘주의 말씀’(행 19:20)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표현은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가 1 사람의 말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2 또한 다른 신(다른 靈)의 말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3 하나님 자신의 말씀 곧 살아 있는 말씀, 운동하는 말씀, 예리한 말씀, 인격을 움직여 주는 말씀(히 4:12)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왕성하다, 말씀이 힘이 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살아 있는 인격적인 신이라는 말입니다.
4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으로 나타내어지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16).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설교, 전도)는 이렇게 신적 생명성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일어나고야 마는 결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입을 통하여 나타난 말씀은 흥왕하고, 점점더 힘이 있어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역사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Ⅱ. 말씀의 왕성은 신자 수(數)의 증가를 뜻합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짐과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 수의 증가’는 정비례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수’란 예수를 따르는 문도(門徒), 즉 신도(信徒)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 했기 때문입니다.(행 6:4). 어떻게 저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무할 수 있었던가 ‘집사’를 세워서 교회 안의 다른 일들, 특별히 구제하는 일을 저들에게 분담시켰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주요 업무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부흥에 큰 비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영적인 일에만 골몰할 때 말씀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 교회에서는 교회 재정(財政)을 분담하는 집사 제도와 교회 행정을 분담하는 장로 제도가 있어서 목사의 목회 사역에 효과를 내도록 한 것입니다.
Ⅲ. 말씀의 왕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6장 7절 하반절이 또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란 유대교의 핵심 세력인 제사장들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에 있었던 제사장들의 수는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Jeremias). 저들은 과거에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 주체 세력들이었습니다(마 26:3). 이제는 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죽였던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따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 도에 복종하니라 라고 함은 ‘믿었다’는 뜻입니다. 옛 도(道), 곧 율법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도(道)인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이행득구(以行得救)주의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이신득구(以信得救)주의, 곧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도에 관계된 것은 당시 사도들의 전도(설교)가 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행하여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행 2:46, 5:25, 42).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던 제사장들이고 보면 저들이 사도의 입에서 나타나는 말씀의 위력을 자주 접했을 것입니다. 부르스(F. F. Bruce)는 말하기를 ‘이때 회개한 제사장들은 특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제사장들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구약 종교’가 그 사명을 정식으로 ‘신약 종교’에 넘겨 준다는 데 큰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구 종교가 바뀌어지는 큰 변화의 한 모습입니다. 결국 말씀의 왕성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행사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Ⅳ. 말씀의 왕성은 주님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24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 앞구절에 보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행 12:23)고 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더라.’는 말씀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헤롯 왕가에는 대대로 반기독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법자의 대명사요, 포악자의 대표요, 불의의 상징이요 반기독, 반교회의 표본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반기독자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절에 보면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인 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였습니다(행 12:4). 그는 잔인한 살인자였습니다. 그의 명을 받아 베드로를 파수하던 수비병들을 모두 죽여 버린 자였습니다(행 12:19). 그는 베드로가 감옥에서 주의 천사의 도움으로 석방된 줄을 몰랐습니다. 그를 지키던 파수병들의 실수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한 자였습니다. 그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신이라고 일컬음 받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가 천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던 날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로부터 아첨의 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원래 그는 두로와 시돈 지방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은 헤롯의 관할 구역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양곡을 헤롯왕국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 왕의 시종자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 왕에게 화친을 교섭해 왔습니다(행 12:20-21). 이때 헤롯은 그 화친을 허락하고 날을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날은 경기
둘째 날(8월 1일)이었습니다. 그때 헤롯은 반원형 극장 귀빈석에 앉았고, 은으로 장식된 그의 의복이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황제(왕)는 저들 앞에서 연설하였습니다(행 12:21). 바로 그때 두로와 시돈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기를 당신은 신이요, 당신의 음성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두로와 시돈 백성의 찬사는 권력자 앞에 약한 대중들이 곧잘 하는 아첨의 행동이요, 아첨의 소리였습니다. 저들은 살기 위하여 권력자 앞에서 저렇게 아첨의 영광을 떨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하여 소리 지르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지금까지 당신을 사람으로 존경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당신을 인성 위에 초월한 자로 섬기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갑자기 그의 머리 위의 그물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이것이 흉보의 사자임을 깨닫고 갑자기 큰 충격을 받아 슬픔에 잠기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심한 복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바라보고 “너희들이 신이라 부르는 나는 곧 이 생명에서 떠나라는 명을 받았다…. 불멸이라는 나는 즉시 죽음으로 달리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이 말을 마치자 그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곧 궁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후 닷새를 복통으로 앓다가 완전히 지친 끝에 죽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Jos. Ant. ⅩⅨ8:2) 우리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고 하였습니다(행 12:23). 마카비서에는 ‘하나님의 힘으로 그의 배에서 벌레가 생기고, 몸에서 악취가 나서 그의 모든 군인들이 코를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그를 쳤다(행 12:23)고 하였습니다. 그는 작은 벌레에 씹혀 죽었습니다. 옛날 구약에 적기독의 표본이었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강한 군대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작은 벌레에 씹혀 그 영광이 녹슬도록 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패한, 저주의 죽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다툰 자였습니다. 그는 주와 주의 사자들과 주의 교회를 대적한 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주의 종 베드로를 투옥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회들이 큰 환난 중에 빠져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41장 11절대로 죽었습니다.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고 한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나 또 사람에게 양보하지도 빼앗기지도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 문제에서는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헤롯과 헤롯의 역사는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투옥시킨 자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의 안내를 받아 그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복음의 사자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에 나타난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흔들어 깨워 주었습니다(행 12:7). 그리고 베드로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던 성도들을 만나고(행 12:12-16), 또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흥왕이란 1 악인을 심판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2 주의 종들에게 복음의 문이 계속해서 열려진 것을 말합니다. 3 교회가 올리는 합심 기도의 응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끝났으나 베드로의 사역은 끝나지 아니하였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기독교의 존재 의의 중의 하나는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존재하는 역사의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입니다. 존재하는 세계와 세계사는 인류 구원을 성취해 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교의 장이요, 무대입니다. 그리고 역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교육…등은 하나님의 세계 선교 진행을 위하여 사용되는 간접적 도구들이요, 수단들입니다. 그리고 지음 받은 전 피조 세계의 자원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세계 선교를 위한 선교 비용 자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을 죄악시하지 아니합니다. 배타하거나 업신여기지 아니합니다. 다만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주어진 선교 어간에 사용될 잠정적 수단들일 뿐입니다. 역사 세계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 구원하는 구원 역사는 진정한 역사의 참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그 아들 예수를 보내어 전도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십자가 사역의 완성 후에는 성령님을 통하여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성령님’은 ‘성경’이라고 하는 ‘계시 매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2천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왕성’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왕성은 바로 ‘복음 운동의 왕성’을 뜻합니다. 복음 운동의 왕성이란 예수 믿는 신자의 수가 더해 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승리, 진리의 승리, 교회 운동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 속에 말씀이 왕성해야 합니다. 가정 생활과 교회 운동에 말씀이 왕성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성령님 충만의 삶을 의미합니다. 성령님 충만의 삶이 곧 승리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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