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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보자 (히5:11-14)

본문

그리스도인은 성장해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보다는 더욱 더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본인 스스로도 답답하지만 주위에서 보는 사람도 답답함을 느낍니다. 더욱 안타깝게 여길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답답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성도를 꾸중하는 내용이 담긴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탁월함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원형은 보지 못하고 모형만 보는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렀습니다. 아직도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령한 것을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그들의 믿음의 성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깊이 있는 내용을 피하고 이제 내용을 바꾸어서 먼저 믿음이 성장해야 할 것을 촉구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것이 왔으므로 부분적인 것은 이제 모두 사라지게 되었음을 알고 더욱 더 성장하는 믿음을 가지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들으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난번에 일본에 갔다가 안타까운 일을 목격했습니다. “光の 丘”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나오다가 한 아이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그저 인형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사람이었습니다. 그 크기는 50센티미터 정도였고 머리는 납작하고 역삼각형 모양이었습니다. 나이는 6살이라고 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성장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자의 안타까움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욱 성장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초보자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성장하였는가를 진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듣는 것이 둔합니다(11). 말씀의 초보자의 특징은 듣는 것이 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둔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νωθροσ인데 이 말은 병든 동물의 팔과 다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둔하다는 말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둔하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말입니다. 영적 개발에 게으릅니다. 타성에 빠져 있습니다. 태만하고 느리고 우둔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둔하고, 이해력이 둔하며, 듣는 힘이 약하며, 재치가 없고 감수성이 둔해서 잘 잊어버리며, 생각과 의지가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영적인 것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마음이 천성적으로 우둔합니다. 어떤 진술을 말한다 할찌라도 합당한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둔감합니다. 무감각합니다. 정신적으로 냉담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하고 우리의 감정을 좀더 타락하도록 만드는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둔한 사람은 진리의 깊은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혹시 귀로는 들을 수 있을런지 몰라도 마음에 새기어지도록 듣지 못합니다. 본문은 말씀하기를 믿음의 초보자는 멜기세댁의 어려운 진리를 들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그 가치의 귀중함을 설명해도 그들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멜기세댁의 어려운 뜻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깊은 뜻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믿음이 우선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믿음이 적으면 깊이 있는 말씀을 듣지 못하므로 자신만이 손해를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귀는 있어 듣기는 하나 믿음이 없어 그 뜻을 모르므로 듣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은 믿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성으로 해석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의 이해가 빈약해서 다 알아 듣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神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듣기 위해서는 믿음이 우선되어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듣는 것이 둔하여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네 가지 밭 중에서 길가와 같은 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는 씨를 받지 않았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판단이 우선이 되어서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태만과 게으름 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 돌과 가시를 솎아 버려야 하는데 게을러서 하지 못합니다. 태만은 자기의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낳게 하고 게으름은 복음을 듣지 못합니다. 부지런하여 열심이 있는 사람이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의 능력을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만큼 부지런하다는 말입니다. 게으름은 악마가 베는 베개입니다.
A. 핫파이트의 말과 같이 게으름은 송장과 같이 아무 소용도 되지 않는 물건입니다. 그러면서도 송장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들의 나태함과 게으름을 꼬집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사탄의 대장이 잔치를 베풀면서 부하 사탄들에게 “지옥의 자리가 많이 비었다. 이 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한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탄이 “세상에 가서 성경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겠습니다.”고 했고, 다른 사탄은 “저는 세상에 신은 없다고 할 겁니다. 그리고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막내 사탄이 “저는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에게 믿는 것도 좋지만 차차 믿어도 된다고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두 사탄은 몇 명만 데리고 왔지만 막내 사탄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차차 봉사하겠다” “차차 믿겠다” “차차.”라고 말하다가 때를 놓친 사람들이었습니다. 태만과 게으름은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결국에는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차차라고 말하지 맙시다. 세계 40대 사망률 1위가 우리나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이라는 날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연약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일시적 결정은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심령 깊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흔들립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귀로는 들을 수 있을런지 몰라도 심령으로 듣지를 못합니다. 다 같이 들었는데 심령으로 듣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듣는 분들마다 귀로 듣는 연약한 자가 되지 말고 심령으로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는 편견입니다. 편견은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경험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경험으로 만들어진 편견은 다른 사람의 견해를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어린 아이를 전도하는 것보다 나이든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더 힘든 이유는 어른은 벌써 편견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려진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리는 것은 새 종이에 처음으로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편견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증거하는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들의 편견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섯째는 육욕입니다. 신령한 것을 알면서도 육신적 욕심이 있기에 듣지를 못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듣는 것이 둔해지면 결국에는 성장하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초보의 특징입니다.
2.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12,13절). 신앙의 초보자의 두 번째 특징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성도로 하여금 의에 이르게 하는데 믿음의 초보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은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체험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들음으로도 안되고 지식으로도 안됩니다. 신앙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살아 있는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깊이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성령님의 능력과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놀라운 일을 많이 했던 캐더린 쿨만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심령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20대에 들어와서 미국 곳곳을 다니면서 천막집회를 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1933년에 콜로라도 덴버시에서 천막집회를 인도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자기 혼자 설교하기가 힘드니까 강사 한 분을 초빙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이 왔습니다. 그는 가정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약 2개월 동안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그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남자는 이혼을 하고 쿨만과 재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6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쿨만은 영적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더 이상 결혼생활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갈라 섰습니다. 쿨만은 눈물을 흘리며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에 시원하게 용서받았다는 감격이 없었습니다. 계속 비탄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던 어느 날 쿨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케더린,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았던가” “예” “
그런데 너는 왜 그러니 나는 네 잘못을 다 잊었어. 내 책에서도 이미 다 지워버렸어.”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모든 불안과 공포와 죄책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쿨만은 그 때 얻은 자유함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자기의 지난 과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은 쿨만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물 붓듯이 부어 주셔서 그를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쿨만이 들은 음성이라는 것은 기도하는 중에 들을 수 있는 영음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성경 가운데 어느 말씀에 강하게 사로잡히면서 영적으로 들리는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괜찮습니다.분명한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사건이었습니다. 체험이 중요합니다. 체험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이 없으면 그 신앙은 냉냉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말씀의 지식을 익히려 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의 진보성을 가지려 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지도 못합니다. 체험이 있는 자가 열정이 있고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도 지식으로 남지 말고 체험으로 남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때가 오래되어 선생이 될 때가 되었는데도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있었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순절 때 구원받은 3000명 중에 속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들은지 30년이 지났습니다. 선생이 될 수 있는 모든 구비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체험이 없었습니다. 체험이 없으므로 성장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고작 어린아이와 같아서 단단한 것을 먹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수용력이 없고 이기적 신앙 생활을 합니다. 약하고 무지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당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는 것이 둔하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칭찬하는 소리만 좋아하고 세상적인 것들이 신앙을 앞서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서 신유의 은사와 물질적 축복만 좋아합니다. 육신적 오감에 따르는 생활을 합니다. 철저히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육적인 감정을 향한 그들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혼은 영적인 것에 나약하고 병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 부목사님 한 분이 심방을 갔는데 그 목사님이 심방을 다녀간 후에 심방을 받은 집사의 가정에 시험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사르밭 과부의 설교를 하면서 이 집에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왔는데 그 설교 내용이 집사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당시 어렵게 살고 있는 집사님으로서는 축복을 기다렸는데 고작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가니 마음이 편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교역자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인으로 40년 이상 교회에 다녔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심방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생각되기로는 수십년을 믿었지만 아직 초보의 단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면 수십년이 흘러도 초보의 단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고질적인 신앙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는 믿음을 꾸지람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회심은 있었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중심만 주장하는 신앙은 어디가 잘못되어도 분명 잘못된 믿음입니다. 이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할 뿐만 아니라 목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목사로서의 안타까움은 그 영혼을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가르쳤는데 성장하지 않을 때 나타납니다.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의 마음에 있지만 또 다른 한 이유는 가르치는 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도자를 지도자로 여기지 않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배우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도자가 없어서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지도자가 있기는 하지만 지도자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 확신은 있으나 뜨거운 열정이 있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내 영이 살기 위해서는 열정 있는 뜨거운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일류대학을 좋아합니까 훌륭한 선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모두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면 모두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로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성장해 있습니까 열정은 얼마나 있습니까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보면 가르쳐 지켜 행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체험이 있는 자가 가르칩니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누가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수가성의 여인은 입을 다물지 못해서 동네로 내려가서 전했습니다. 가르쳐 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초보자는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14절).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운전을 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능숙하지는 못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초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보는 시간이 지나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연습해야 초보를 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은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그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훈련을 위해서 연단을 시킵니다. 때에 따라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시험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기도 하십니다. 연단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키이트의 말처럼 인생의 희망과 넓은 문이 우리 앞에 열려서 우리의 전망이 밝고 건강할 때에는 고통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이 세계의 거인적 고뇌가 엄습할 때에는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원성의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연단은 오히려 도가니 속에 들어간 금이 더욱 더 빛나는 정금으로 변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의 도가니를 통해서 인간 정신은 승화되어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게 됩니다. 단테의 신곡이 나오게 된 것도, 밀턴의 실락원이 나오게 된 것도, 베토벤의 위대한 심포니가 나오게 된 것도 모두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였습니다. 학설에 의하면 세계적인 문호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이나 오셀로나 햄릿 등의 비극은 그가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서 깊은 절망에서 헤멜 무렵에 쓰여진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연단이라는 체로써 여과하지 않으면 인생의 찬란한 황금을 가려낼 수 없을 것입니다. 윌리암 팬의 말과 같이 고통이 없으면 승리도 없고, 가시관이 없으면 보좌도 없으며, 쓴 맛이 없으면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을 뿐입니다. 연단을 받을 때는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획득된 능력을 정확히 사용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정확히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훈련받은 군인이 자기의 맡은 일을 위해서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것과 같이, 훈련받은 체육 선수가 자기의 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각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말씀에서 제시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모든 문제의 근원부터 해결해 주며 인내하도록 도와줍니다. 잘못된 부분들은 연단을 받는 동안 말씀을 통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되어진 말씀을 실천하고 실천하다가 오차가 생긴 부분들은 다시 묵상하고 또 다시 실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은 물론이요 승천과 천국까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은 철저히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른바 성령님을 통해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성령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진리를 생각나게 하여 주시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고 깨달은 후에 성장하도록 해주십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 보는 말씀은 자신에게는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때때로 가르치기에 급급해서 말씀을 준비했던 제자신을 회개하였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나오는 성도들에게 깊이 있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며 기도하며 준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 자신이 은혜받으려 하지 않고 성경을 교과서 삼아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위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초보적일 뿐입니다. 자신이 사모하는 심정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연단이 온전해지며 초보적 신앙을 면할 수 있습니다. 연단은 선악을 분별할 때까지 받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연단 후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연단을 받지 않은 초보적 신앙은 선악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연단은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선을 찾을 때까지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덕을 고양시키지 못하고 파멸시키는 악을 제거할 때까지 연단받아야 합니다. 연단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초보적 단계를 벗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몇 년 동안 예수를 믿었습니까 수 십년입니까 아니면 수 년에 불과합니까 이제 며칠 안되었습니까 그 기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초보인가 아닌가입니다. 아직도 듣는 것이 둔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귀에 좋은 소리나 좋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충만한데 이르지 못하며 의의 말씀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초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구원의 반열에 서 있기는 하나 아직 깊이 있는 말씀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 속에 뜨거움이 없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입니다. 초보는 연습으로 숙련될 수 있습니다. 연습은 반복적입니다. 특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약한 부분에 대한 적극적 반복이 있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더 강하게 칠합니다. 우리의 초보적 신앙은 계속되는 훈련과 특히 내가 약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강하게 칠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 말씀으로, 기도로, 봉사로, 거듭 훈련과 색칠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성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 속에서 내 자신의 초보적 모습은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훈련으로 성숙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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