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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를 살아가는 믿음 (딤후3:1-9)

본문

우리는 종종 아주 악한 일을 본다든지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혀를 끌끌 차며 말세가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자연질서에 위배되는 현상이나 인륜에 역행하는 일들은 말세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말세라는 말은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를 상실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말세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실제로 말세가 다가오고 세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별로 대응책은 없는 것 같군요.

말세는 세상이 끝나는 시기라는 뜻인데, 과연 세상이 끝날 것인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 말세는 언제일 것인지 우리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단지 국제정세나 환경문제가 다소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말세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위기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어버리곤 하지요. 서력기원으로 처음 천년을 맞았을 때 중세 유럽에서는 다들 세상의 끝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 생각에 말세가 왔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 일없이 지나갔습니다. 그걸 보고 말세는 아직 멀었구나, 자기들이 말세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오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몇 해 전 두 번째 천년을 맞았을 때도 온 세계가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세상이 끝날 거라는 위기감은 거의 없었지만 막연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 거기다가 컴퓨터의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가 겹쳐서 진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떠들더니, 막상 그 날이 지나가고 나니까 조용해졌지 않습니까? 모두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말세가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문맥상 바울은 지금, 그러니까 이 편지를 쓰던 그 당시가 말세라고 디모데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가 쓰인 지가 벌써 2천년이 지났는데 왜 말세가 오지 않은 걸까요? 바울이 착오를 했거나 용어의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다는 믿음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실 때에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았던 것처럼 다시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계시를 기록한 요한의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속히 오시겠다고 여러 차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아주 강한 말세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말세를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를 산다고 믿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이 흘러도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말세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벌어지게 되겠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세는 세상의 종말이 오는 어느 시점 직전의 얼마간 기간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의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도 분명히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말세는 그 종말 전 30년이나 50년 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신 사건이야말로 말세의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2:17)에 보면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전에는 이런 일을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점으로 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대역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대전환점 이후의 시기를 그 이전의 시기와 구별해서 마지막 때, 또는 말세라고 지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세 이후를 살고 있기 때문에 말세에 대한 이해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말세란 세상이 끝나는 시점의 얼마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인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에 대한 징조나 예언 중에는 세상의 종말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말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말세를 말하는 경우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아주 통탄스러운 일들을 만났을 때를 말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세라고 말하는 것도 이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주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꼭 알고 단단히 대처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고통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는 말에서 그 어감이 아주 비장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이런 비장한 언어를 사용하는 걸까요? 말세라고 할 만큼 통탄할 일은 무엇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타락과 부도덕한 모습들입니다. 바울이 교회 밖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그런 일들이 있기 때문에 말세, 고통하는 때라는 매우 심각하고 비장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까? 그런 얘기 종종 듣지요? ‘나는 내가 싫어.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나아.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이것은 잘못된 자아상, 잘못된 self-esteem을 가지고 있는 경우입니다. 건강한 정신상태가 아니지요. 이런 경우는 카운슬러를 만나서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바울이 통탄해마지 않는 것은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탐욕과 질투와 악한 생각을 제어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자기부인의 흔적이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지요. 나를 희생해서 남을 돕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남을 희생시켜 자기 잇속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거예요. 안수집사 투표해서 떨어지면 교회 분위기가 흉악해져요. 그러다가 결국은 교회를 떠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과 이웃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 아니에요? 제직회에서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분노하고 토라집니다. 미성숙한 자기중심적인 인격의 결과입니다. 그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고 공동체를 파괴하지요.

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돈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꼭 사랑해서라기보다 당장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그만큼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돈에 대한 애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그만큼 잃는 것이 있어요. 뭘 잃습니까?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습니다. 사람을 잃어요.
왜냐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늘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선택하면 사람을 잃게 되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행동하면 돈이 안 들어오지요. 손해를 보는 수가 많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돈을 사랑함으로써 잃는 것은 사람뿐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 벌기 위해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잘못이란 얘기가 아니에요. 돈을 모으기 위해 못먹고 못쓰면서 어렵게 사는 것이 죄라는 게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서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한 나머지 정말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납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말세라고 개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열거되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의 흉내만 내면서 살지만, 사실은 전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거나 초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나 중요한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경건의 모양만 몸에 배서 사는 수가 많아요. 경건의 능력, 경건한 삶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놀라운 능력을 부인한단 말이지요.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말세라고 통탄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처럼 비슷한 류가 되지 않겠어요? 여기서 어리석은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에베소 교회에 실제로 그런 현상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들이 귀가 얇아서 솔깃하게 얘기하면 넘어가는 수가 많잖아요?

얀네와 얌브레는 구약 성경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성경 외의 기록에 의하면 애굽의 마술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대적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요.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거짓 교사들, 경건의 모양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데, 결국 그들은 모세를 대적했던 사람들이 재앙을 당했던 것처럼 그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정말 개탄스러운 일들을 종종 봅니다. 며칠 전에는 서울의 유수한 교회 목사님이 교회 돈을 자기 마음대로 갖다 쓴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판사로부터 따끔한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노릇 아닙니까? 이것은 드러나서 매스컴을 탄 경우지만, 그렇지 않고 은밀한 곳에서 행해지는 일들은 얼마나 더 많고 통탄할 일들이 있을까요? 정말 바울의 탄식처럼 말세의 고통하는 때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도 그런 모습들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늘 자신을 돌아보며 죄악된 본능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제어하며 싸우는 자기부인의 삶으로 경건의 능력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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