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의 분노 (눅15:11-32)
본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탕자의 비유가 회개하며 집으로 돌아온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사랑으로 맞이하는 내용이라고만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탕자의 비유는 24절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32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후반부에는 아버지와 맏아들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의 교훈도 전반부의 교훈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맏아들은 착실한 것 같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생이 집에 돌아왔고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28절)
첫째로, 맏아들은 외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자기 몫의 재산을 받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출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좀 불편함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어김 없이 순종했습니다(29절).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효자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종과 많은 품군들을 둘 정도로 집안이 부유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에서 드러누워 있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밭에서 막노동을 했는지 품군들을 감독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감독하는 것도 엄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덕분에 호강하며 일은 하지 않고 돈을 물 쓰듯 하는 오렌지족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맏아들은 얼마나 훌륭합니까! 29절에는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원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에게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나쁜 감정을 품었거나 제재를 가한 결과가 아닙니다. 맏아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면 되었을텐데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31절에서 아버지가 그에게 한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사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서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다. 맏아들은 이처럼 순종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숨겨진 면도 있었습니다.
둘째로, 맏아들은 동생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집으로 돌아온 맏아들은 집안에서 나는 노래소리를 들었으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종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종이 한 대답이 27절에 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맏아들은 그 말을 듣고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과연 무엇에 대해서 그가 격분한 것일까요 그는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서 격분했습니다. 그는 집에서 해야 할 의무를 자기에게 모두 떠넘겨버리고 가출해버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가서 유흥비로 탕진해버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지가 된 동생이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행동과 비교하여 동생을 정죄했고 타락한 동생과 더 이상 상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동생과 한집에서 다시 같이 살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맏아들에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는 외형적으로 훌륭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냉정하다 못해 냉혹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맏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만 격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맞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격분했습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와 가문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은 것에 대해서도 격분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유흥비로 탕진한 녀석에게 아직도 무엇이 모자라서 송아지까지 잡으며 환영해야 한단 말입니까 동생이 탕진한 재산을 벌어가지고 돌아오면 또 모르지요. 최소한 절반 정도라고 가지고 돌아와야 그나마 맞아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용서에 가장 큰 걸림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가 아버지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 얼마나 무례한 말입니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여기서 우리는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맏아들의 문제를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에 맞는 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아버지에게 공손히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기분에 맞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김 없이 지켜 행하는 것이 효도인 양 그렇게 한 것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효도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탕자를 용서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아낌 없이 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옷도 입히고 반지도 끼워주고 새 신도 신겨 주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몹시 아깝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격분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태까지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재산을 불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비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교훈을 주시려고 하신 말씀입니다(15:1-2).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맏아들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려고 하기보다 자기들의 유전을 좇고 자기들의 판단에 의거하여 스스로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경멸하고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자기의 고집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맏아들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영접하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와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을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도 부득이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28절). 집 바깥에 있는 탕자가 있고 집 안에 있는 탕자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탕자가 있고 은폐되어 있는 탕자가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평하는 “집 안의 탕자”는 아닙니까
첫째로, 맏아들은 외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자기 몫의 재산을 받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출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좀 불편함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어김 없이 순종했습니다(29절).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효자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종과 많은 품군들을 둘 정도로 집안이 부유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집안에서 드러누워 있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밭에서 막노동을 했는지 품군들을 감독했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감독하는 것도 엄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덕분에 호강하며 일은 하지 않고 돈을 물 쓰듯 하는 오렌지족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맏아들은 얼마나 훌륭합니까! 29절에는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원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에게는 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나쁜 감정을 품었거나 제재를 가한 결과가 아닙니다. 맏아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면 되었을텐데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31절에서 아버지가 그에게 한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사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서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다. 맏아들은 이처럼 순종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숨겨진 면도 있었습니다.
둘째로, 맏아들은 동생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집으로 돌아온 맏아들은 집안에서 나는 노래소리를 들었으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종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종이 한 대답이 27절에 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맏아들은 그 말을 듣고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과연 무엇에 대해서 그가 격분한 것일까요 그는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서 격분했습니다. 그는 집에서 해야 할 의무를 자기에게 모두 떠넘겨버리고 가출해버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가서 유흥비로 탕진해버린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지가 된 동생이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행동과 비교하여 동생을 정죄했고 타락한 동생과 더 이상 상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동생과 한집에서 다시 같이 살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맏아들에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는 외형적으로 훌륭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냉정하다 못해 냉혹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로, 맏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만 격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맞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격분했습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와 가문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은 것에 대해서도 격분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유흥비로 탕진한 녀석에게 아직도 무엇이 모자라서 송아지까지 잡으며 환영해야 한단 말입니까 동생이 탕진한 재산을 벌어가지고 돌아오면 또 모르지요. 최소한 절반 정도라고 가지고 돌아와야 그나마 맞아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용서에 가장 큰 걸림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가 아버지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 얼마나 무례한 말입니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29-30절) 여기서 우리는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맏아들의 문제를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에 맞는 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아버지에게 공손히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기분에 맞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김 없이 지켜 행하는 것이 효도인 양 그렇게 한 것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효도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탕자를 용서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아낌 없이 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옷도 입히고 반지도 끼워주고 새 신도 신겨 주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몹시 아깝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격분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태까지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재산을 불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비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교훈을 주시려고 하신 말씀입니다(15:1-2).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맏아들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려고 하기보다 자기들의 유전을 좇고 자기들의 판단에 의거하여 스스로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경멸하고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자기의 고집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맏아들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영접하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와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을 집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도 부득이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28절). 집 바깥에 있는 탕자가 있고 집 안에 있는 탕자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탕자가 있고 은폐되어 있는 탕자가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평하는 “집 안의 탕자”는 아닙니까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