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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헤어짐 (행15: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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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결정된 이방인을 위한 신앙의 원칙은 두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율법의 멍에를 메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고 완전한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해야 하고 율법의 요구를 지켜야만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은 다시는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말자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상숭배하던 습관을 버려라. 두 번째로 음행의 습관을 버리라. 세 번째는 구약에서 말하는 더러운 음식들을 먹지 말라고 세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안디옥으로 바나바와 바울과 유다와 실라 이사람들이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겨렁된 메시지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고, 같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행15:30-33)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이제 평안과 평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내용을 보면 사도바울의 역정을 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완전치 못하는 인간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와 복음의 역사를 계속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성인들이 아닙니다. 어느 한부분에 장점이 있다면 어느 한 부분은 단점이 있습니다. 하나님ds 우리가 완전하고 능력 있어서 우리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연약하고 지혜가 부족하지만 성격이 급하고 비인격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완전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좌절하면 안됩니다. 비록 여러분이 성결하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나 바나바는 굉장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복음을 전했던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흠모할만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설교를 참잘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자였습니다. 상담을 잘했습니다. 또 자기의 것을 모두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두사람은 아주 협력이 잘되었던 사람들입니다.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참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일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가 되어서 일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이 뜨거운 복음의 열정 때문에 지금까지 전도를 많이 했는데 그들이 잘있는지 돌아보고 심방을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것이 2차 전도여행의 시작입니다. (행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2차 전도여행은 2차 양육여행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전도하러 갔지만 2차전도여향은 양육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육하러 가는 그들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유럽전도로 방향을 바꾸어 버리십니다. 아시아 전도여행의 목표를 유럽으로 바꾸어 버리십니다. 바울은 형제들이 어떤가를 궁금해했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 씨를 뿌렸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잘자라고 있을까 혹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에게 찾아가서 다시 떠납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기는 가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전도여행을 가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한사람, 요한마가라는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차전도여행 때 요한 마가가 수종자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요한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이 요한 마가는 전도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참신났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너무 힘들어요. 불편해요. 겁이나요. 그래서 밤빌리아에서 마가는 도중하차하고 맙니다. ‘나안가겠다’ 사도바울이 화가 났습니다. 이런 마음을 마음 속에 꿍하고 있었던 것같아요. 사실 마가와 같은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런데 가보니까 화장실이 없어요. 가보니까 먹을 것이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려고 하는 거에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도중하차하는 겁니다. 이 사람을 바나바는 또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화가 났습니다. 절대 그 사람은 못데리고 간다. 바나바는 꼭 데리고 간다. 이 일로 두사람은 싸우게 됩니다. 싸움이 좀 지나쳤습니다.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여기에 만남과 헤어짐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39에 보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인간적인 실수와 약점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인간적인 실수와 약점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실제적인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나와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관점과 해석과 문화적 차이 때문에 다르게 볼 숟가 있다는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너는 내 식으로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것을 가지고 주장하다 보면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 데 아주 중요한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의견이 다른 이 문제가 사탄의 공격에 의한 문제냐, 아니면 문화적 차이, 관점의 차이, 해석의 차이, 지식의 차이, 경험의 차이로 생기는 문제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문제라면 심각합니다. 그러나 문화적인 차이라고 한다면 수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면 누구 때문에 싸웠습니까 사람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싸운 문제가 하나님의 관한 문제, 예수님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문화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도 싸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보십시오. 이사람들이 싸운 문제는 목표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문제 때문에 싸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빨강색을 좋아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초록색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으쌰의쌰하면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야 뭔가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취향의 문제입니다. 이 때 조심할 것은 서로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정죄해서도 안됩니다. 서로 취향이 다를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도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는 거에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거에요. 여기에 우리의 심각한 문제가 있고, 마귀가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것은 헤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것은 하나님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각각의 취향에 맞게끔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헤어지는 것도 괜찮아요. 서로 축복하고, 사랑으로 헤어지면 됩니다. 서로 부딫치지 말고, 서로 받은 은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헤어짐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누구 때문입니까 마가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그를 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힘들어도 끼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입장입니다. 이런 인격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겁장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는 팀을 헤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가다가 도중에 또 힘들다고 도망가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여기에못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바울도 주님을 생각했고, 바나바도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선교를 중요시 했고, 바나바는 사람을 중요시 했습니다. 생각하는 차이 뿐입니다. 둘다 맞습니다. 이런 일 있을 때는 누가 나쁘고 누가 잘한 것이 없습니다. 다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쪽으로 갑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또한 마가가 실수한 자리로 데리고 갑니다. 반면에 바울은 정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실라라는 사람을 택해가지고 수리아 안디옥 쪽으로 반대로 떠나게 됩니다. (행15: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잘 만나야 하지만 잘 헤어져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영원히 같이 살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우리의 인생에는 많이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헤어져야 할 때 어떻게 헤어져야 합니까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헤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로 헤어질 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고, 고소를 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도을 하고, 소문을 만들고 자기를 정당화 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서신서를 통해서 볼 때 서로 화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나중에 마가가 기독교에서 참으로 소중한 사람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만나고 바울과 마가가 서로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통하여 손해를 보지 아니하시고 더욱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성경적인 원리를 무엇입니까 만나도 하나님께 영광을, 헤어져도 하나님께 영광. 그러면 됩니다. 헤어짐을 통해서 서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욕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서로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 뿐입니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에 조심할 점은 그때마다 헤어질 지라도 교제를 끊지마십시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신앙의 손해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때에는 마음이 아프지만 나중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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