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 기록된 기적-큰 믿음을 위하여 (마15:21-28)
본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안 다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로 꼽는 내용 중에첫째가 기독교는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 천국, 영생, 구원 따위는 실감 나지 않는 이 야기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독백에 불과할 뿐 현실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지적은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위 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신앙을 이야기할 때 본인은 버림받 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의 소외감, 거절감이 마음 가운데 팽배 해 있다는 말입니다. 위의 사례들은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벽입니다. 본문에는 이러한 벽을 뛰어넘은 여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장애 요소
첫째/침묵 가나안 여자는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이 가 나안 여자는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22절). 그런데 2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가나안 여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박한 문제를 호소할 때 예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도와주십시오. 내 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 비 현실의 종교로 인식되기도 합니다.둘째/방해 가나안 여자가 애타게 주님을 부를 때 제자들이 사이에 끼어 듭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 르오니 보내소서(23절). 이를 다시 말하면 선생님 귀찮습니다.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데 쫓아 보내지요입니다. 놀랍게도 도움이 필요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여자를 방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이 신앙 생활을 하려 할 때 그들을 실족 시키는 요인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격려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목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가 신앙의 방해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조심하십시오.셋째/거절 제자들의 요청이 있은 후에 마침내 예수께서 입을 여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 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4,26절). 예수께서 이 여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도움 주 기를 거부하십니다. 이때 이 여자는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그 꿈이 산산조 각 났습니다. 자신이 이방인임을 한탄하며 발걸음을 돌릴 판입니다 .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문제는 침묵과 방해와 거절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려는 사람이 부딪치는 장벽들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은 도움은커녕 방해나 하고, 예수께는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싸 이게 됩니다.
장애 요소를 극복함
본문에서 놀라운 사실은 이 가나안 여자가 침묵과 방해와 거절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응답을 얻어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2 8절). 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복음서에서 백부장과 이 여자밖에 없습니다(눅 7:9 참조).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처음의 냉정한 태도가 어떤 뜻을 두고 일부러 그러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장애 요인은 더욱 큰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어떻게 가나안 여자가 침묵과 방해와 거절의 시험을 극복했는지 세 가지 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확신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메시야에게만 사용되는 독특한 호칭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에서 구세주가 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이스 라엘 백성들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구 세주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침묵에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침묵 앞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마침내 말씀하실 것임을 확신 하였습니다. 자신의 간구를 들으실 줄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진실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신뢰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험을 이겨 낼 수 있 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 볼 때, 침묵을 견디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로,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중 간에서 방해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제자들이 뭐라 해도 상관하지 않고 잠잠히 있습니다. 이 여자의 안중에는 제자들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큰 도움을 얻습니다. 그러나 때로 가나안 여자를 방해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신앙의 방해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혹시 당신이 제자들처 럼 누군가의 신앙 성장을 막은 일은 없습니까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예수께서 그렇게 형편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두셨는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제자들이 완벽한 사람들이었다면 이 여자는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다른 사람 에게 실망을 주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의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의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제자들의 부족 함이 예수님의 위대함을 깎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진리가 되심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방해꾼의 소리가 높아지고 주님과 멀어지는 듯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만나야 할 사람이 누 구인지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제자들을 만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 습니다. 구세주가 도움을 청해야 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목사나 장로를 만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때 우리 신앙이 흔들 리지 않으며 실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해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 결국 그러한 구도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셋째로, 자존심을 버리고 문제 해결에 더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신앙 생활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보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쳤습니다. 위대한 사 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 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내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 기 자신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세운 계획, 내가 쌓은 학문, 내 가치관을 고집하고 그것들을 따라 행동합니다. 이것은 마치 병원을 찾아간 환자가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는 일과 같습니다 . 의사 앞에 앉아 스스로 진찰하고 병명을 말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오만 한 태도입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말로 원죄의 뿌리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자존심이 깨어진 사람 들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가나안 여자를 냉혹하게 대하시는 이유는 자존심의 벽을 헐어야 겸손하게 주 앞에 나올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는 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유대인 들은 죄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방 사람들을 괄시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개들을 삼 가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유 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는데 바울은 반대로 유대인을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비윤리적이며 방황하는 실존을 묘사할 때, 성경은 개라는 상징을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개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크게 손상되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뜻밖에도 여자는 주여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소서(27절 참 조)라고 말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주께 매달린 이 여자의 믿음은 그의 관심이 문제 해결에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가나안 여자가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을 외면했다면 그의 딸은 귀신 들린 채 고통스런 생활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을 세우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놓칠 수 있습니다. 저도 자존심이 강한 편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절대로 길을 잃은 표를 내지 않습니다. 잘 모르는 길을 가면서 아는 척하고 운전을 합니다. 두 시간을 헤매도 그냥 헤맵니다. 그러다 보니 손해는 항상 제 편에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존심보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딸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가 겸손하게 주 앞에 엎드렸을 때 들려 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어머니의 믿음으로 귀신들렸던 딸이 당장 나음을 입는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이 여자는 침묵과 방해와 거절의 시험을 극복하고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당신에 게도 이와 같은 믿음과 자존심을 내어 버릴 만한 용기가 있습니까 그런 결단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많은 은총들을 잃 을 것입니다.
세 가지 장애 요소
첫째/침묵 가나안 여자는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이 가 나안 여자는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22절). 그런데 2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가나안 여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절박한 문제를 호소할 때 예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아무리 외쳐도 대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도와주십시오. 내 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 비 현실의 종교로 인식되기도 합니다.둘째/방해 가나안 여자가 애타게 주님을 부를 때 제자들이 사이에 끼어 듭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 르오니 보내소서(23절). 이를 다시 말하면 선생님 귀찮습니다.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데 쫓아 보내지요입니다. 놀랍게도 도움이 필요해서 예수님 앞에 나온 여자를 방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이 신앙 생활을 하려 할 때 그들을 실족 시키는 요인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을 격려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목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가 신앙의 방해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조심하십시오.셋째/거절 제자들의 요청이 있은 후에 마침내 예수께서 입을 여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 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4,26절). 예수께서 이 여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도움 주 기를 거부하십니다. 이때 이 여자는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그 꿈이 산산조 각 났습니다. 자신이 이방인임을 한탄하며 발걸음을 돌릴 판입니다 .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문제는 침묵과 방해와 거절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려는 사람이 부딪치는 장벽들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은 도움은커녕 방해나 하고, 예수께는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싸 이게 됩니다.
장애 요소를 극복함
본문에서 놀라운 사실은 이 가나안 여자가 침묵과 방해와 거절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응답을 얻어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2 8절). 이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복음서에서 백부장과 이 여자밖에 없습니다(눅 7:9 참조).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처음의 냉정한 태도가 어떤 뜻을 두고 일부러 그러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장애 요인은 더욱 큰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여자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어떻게 가나안 여자가 침묵과 방해와 거절의 시험을 극복했는지 세 가지 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확신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메시야에게만 사용되는 독특한 호칭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에서 구세주가 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이스 라엘 백성들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구 세주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침묵에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침묵 앞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마침내 말씀하실 것임을 확신 하였습니다. 자신의 간구를 들으실 줄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진실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신뢰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험을 이겨 낼 수 있 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 볼 때, 침묵을 견디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로,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중 간에서 방해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제자들이 뭐라 해도 상관하지 않고 잠잠히 있습니다. 이 여자의 안중에는 제자들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큰 도움을 얻습니다. 그러나 때로 가나안 여자를 방해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신앙의 방해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혹시 당신이 제자들처 럼 누군가의 신앙 성장을 막은 일은 없습니까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예수께서 그렇게 형편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두셨는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제자들이 완벽한 사람들이었다면 이 여자는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다른 사람 에게 실망을 주기 쉬운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의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의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제자들의 부족 함이 예수님의 위대함을 깎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진리가 되심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방해꾼의 소리가 높아지고 주님과 멀어지는 듯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만나야 할 사람이 누 구인지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제자들을 만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 습니다. 구세주가 도움을 청해야 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목사나 장로를 만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출 때 우리 신앙이 흔들 리지 않으며 실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해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 결국 그러한 구도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셋째로, 자존심을 버리고 문제 해결에 더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신앙 생활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 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보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쳤습니다. 위대한 사 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 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내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 기 자신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세운 계획, 내가 쌓은 학문, 내 가치관을 고집하고 그것들을 따라 행동합니다. 이것은 마치 병원을 찾아간 환자가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는 일과 같습니다 . 의사 앞에 앉아 스스로 진찰하고 병명을 말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오만 한 태도입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이야말로 원죄의 뿌리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자존심이 깨어진 사람 들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가나안 여자를 냉혹하게 대하시는 이유는 자존심의 벽을 헐어야 겸손하게 주 앞에 나올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는 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유대인 들은 죄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방 사람들을 괄시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개들을 삼 가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유 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는데 바울은 반대로 유대인을 개라고 표현했습니다. 비윤리적이며 방황하는 실존을 묘사할 때, 성경은 개라는 상징을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개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크게 손상되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뜻밖에도 여자는 주여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소서(27절 참 조)라고 말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주께 매달린 이 여자의 믿음은 그의 관심이 문제 해결에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가나안 여자가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을 외면했다면 그의 딸은 귀신 들린 채 고통스런 생활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을 세우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놓칠 수 있습니다. 저도 자존심이 강한 편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절대로 길을 잃은 표를 내지 않습니다. 잘 모르는 길을 가면서 아는 척하고 운전을 합니다. 두 시간을 헤매도 그냥 헤맵니다. 그러다 보니 손해는 항상 제 편에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존심보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딸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가 겸손하게 주 앞에 엎드렸을 때 들려 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어머니의 믿음으로 귀신들렸던 딸이 당장 나음을 입는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이 여자는 침묵과 방해와 거절의 시험을 극복하고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당신에 게도 이와 같은 믿음과 자존심을 내어 버릴 만한 용기가 있습니까 그런 결단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많은 은총들을 잃 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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