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교훈 (벧전4:7-10)
본문
한해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다 지나 버리니 좀 허무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 동안 열심히 뛰어다니기는 했는데 뭘 위해서 그렇게 뛰어다녔나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래서 어쩐지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고 뭔가 아쉽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더 많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 가운ㄴ데 가장 큰 약점은 허무감이라고 합니다. 윤리학자 하코네스라는 교수는 “현대는 상실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물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지위도 있고 가진 것도 있는데 어떤지 허무하고 공허하고 마음이 텅 빈 것같이 허전해 하는 것이 현대인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고독한 존재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들이 살아온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면 모두 허무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이 짧아서 그렇지 좀 깊이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들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몇 가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한해를 무사히 산 것입니다. 건강하고 편안하게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가합니다. 금년에도 사건 사고가 참 많았습니다. 어려운 일,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시험도 많았고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까지 무사히 왔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와 행복은 찾아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된 일만 생각하고 수지맞는 일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없어집니다. 작은 것 속에 감추어진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 보아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길을 세심히 되돌아보면 그런 감사한 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을 발견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플라톤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을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첫째는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을 자기고 있음에 감사하라,
둘째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를 지니고 있음에 감사하라, 세 번째는 사람이 자신하는 것에서 절반 정도만 알아 주는 명예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라, 네 번째는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라, 다섯 번째는 청중의 절반은 박수를 치지 않을 정도의 말솜씨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고 언뜻 생각해 보면 불만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좀 깊이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연말에 와서 일찍이 없었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부도가 날 정도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국민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날이 암담하기도 하고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가가 지금 이렇게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음에도 마음 한편에서 강하게 드는 확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하는 믿음입니다. 자꾸만 마음속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섭리하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 동안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평안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드의 생활을 한번 반성해 볼 때가 되었고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살아온 우리의 현실을 이제는 규모 있게 고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강하게 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쉽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앞날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도 지나고 보면 참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 있게 이번 기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화 될 때 교회가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 중국의 교회는 모두 문을 닫았고 선교 중지령이 내려졌스니다. 그때가 중국 기독교 사상 가장 참혹한 때였고 가장 고난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숨을 지었고 이제는 중국에서 기독교가 말살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은 일단 문제에 봉착하면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중국 교회도 사람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외부의 탄압으로 문이 닫힌 중국의 교회가 숨을 죽이면서 지하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중국이 개방되기 시작하자 조사를 했는데 교회문을 닫을 때 교인 수가 300만 명이었던 것이 82년에 6,00만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32년 동안 중국의 교인들이 모두 말살당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지하에서 더 강렬한 신앙으로 발전시키셔서 어느 날 햇빛을 보게 되니까 스무 배도 넘는 숫자로 증가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를 보면 그와 비슷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참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가 흐른 뒤에 되돌아보니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나가서 전도는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여 앉아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심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흩어 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전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결국 오늘 이 땅에까지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강제로 전도하게 만드십니다. 성지나 고적들을 파괴하신 이유도 마찬기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나 성지에 있는 고적들은 거의 다 후세에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2천 년 전에 있던 유적들이나 고적들은 거의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2쳔 년 동안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두 파괴하시고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이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거기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다가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고향을 찾아간 배경을 보면 고향에 배가 있었고 그물이 그냥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향을 떠날 때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떠났어야 합니다. 마치 로마인들이 로마에 신물이 나서 신세계인 카르타고에 배를 타고 건너간 후 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불태워 버렸듯이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그가 실패했을 때 고향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면 배도 있고 그물도 있으니까 그냥 손쉽게 고향으로내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전도하라고 내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주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육신의 고향을 아예 부숴 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파괴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적이나 유적, 유물들을 파괴하시고 없애 버리신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는 지극히 물질적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보고 만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섬기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잘 아십니다. 만약 2천 년 전의 어떤 유물이라든가 예수님의 옷 한 벌만 현재 그대로 남아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예수보다 더 신성시하면서 그자체를 요란하게 섬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약점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 소중한 유물들을 모두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천년이 흐른 어느 날 느닷없이 베드로의 손톱이 발견되었다고 야단을 떨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손톱을 조금씩 조각내서 수천 달러씩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마리아가 입던 앞치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앞치마의 올을 하나씩 빼서 팔아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라도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그것도 조각내서 팔아먹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 조각을 사다가 보관해 놓고 그것을 예수보다 더 소중하게 섬겼을 것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희곡을 쓸 때 여기서 착안해 썼다고 합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도 그 결과가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경제가 어려워서 곤란을 당하고는 있지만 이것조차도 아주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습관도 엄청나게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종말입니다. 일년 52주 가운데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매시간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은 마지막 월요일입니다. 모레는 금년 마지막 화요일입니다. 오는 수요일은 금년 마지막 수요일입니다. 모든 것이 마지막입니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이 참 의미가 깊습니다. 본문에서도 마지막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빛을 반짝거리게도 만듭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 앞에 진짜 마지막 시간도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그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표정이 당장 진지하지고 눈빛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마지막은 이렇게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연말의 마지막 시간은 그래도 공개적으로 다가오고 또 새해가 다시 시작되니까 마지막의 ㅡ이미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진짜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다”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떨리는 시간입니까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그렇게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찾아올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노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이 노인이 염라대왕 앞에 가서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부르려거든 어떤 암시를 주든지 사전에 경고를 해주어야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부릅니까” 그랬더니 열라대왕이 “무슨 소리냐 몇 번씩 경고를 했는데도 지금 와서 무슨 항의냐”하고 반문했답니다. 노인은 더 큰소리로 ㅜ항의를 했습니다. “경고는 무슨 경고요 나는 경고 같은 것 받은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염라대왕이 “내가 네 번씩이나 네게 경고를 보냈다. 첫번째, 네 눈밑에 잔주름으로 경고했고 두 번째, 네 귀밑에 흰머리로 경고했꼬 세 번째, 네 입가에 잔주름으로 경고했고 네 번째, 네 목에 주름으로 경고를 했는데도 네가 눈치를 채지 못하길래 마지막으로 뱃가죽을 당기면 3미터나 늘어나게 해놓았는데도 모르지 않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종망르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이 들어야 종말도 생각하고 죽음도 생각하게 됩니다. 종말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철든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루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10대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20대에는 연인에 움직이고 30대에는 쾌락에 움직이고 40대에는 야심에 움직이고 50대가 되면 탐욕에 움직이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이렇게 무엇엔가 이끌리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모두 허수아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어느 날 눈이 뜨여서 실존을 느끼고 종말을 생각하게 될 때가 오는데 그때부터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종말은 그래서 웃던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고 유흥에 집착하던 살을 절도 있게 만들고 잔혹하던 사람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엄숙한 정신입니다. 포악한 사형수도 죽을 시간이 가까워 오면 순한 양같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상동이라는 목사님은 일본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깨어나서 고문한 일본 경찰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고문했으니 당신이 이다음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슨 대답을 하여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거요.”
여러분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섬뜩한 말입니까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나서 그 잔혹한 일본 경찰은 그 뒤로부터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답니다. 종말은 이렇게 엄숙한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상갓집에 가서 유쾌하게 막고 마시고 떠드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가끔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객기일 뿐입니다. 허세입니다. 아니면 두려운 마음을 달래 보려는 인간의 심리 때문일 것입니다. 종말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종말의 시간은 꺼림칙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의미 있는 시간입니까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시간에 도달하면 진실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허무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이 말씀을 열심히 살라는 말씁입니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후회가 없고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열심히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모습일 것입니다. 금년에 다하지 못하셨다면 새해에 그렇게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한해를 무사히 산 것입니다. 건강하고 편안하게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가합니다. 금년에도 사건 사고가 참 많았습니다. 어려운 일,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시험도 많았고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까지 무사히 왔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와 행복은 찾아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된 일만 생각하고 수지맞는 일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없어집니다. 작은 것 속에 감추어진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 보아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길을 세심히 되돌아보면 그런 감사한 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을 발견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플라톤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을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첫째는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을 자기고 있음에 감사하라,
둘째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를 지니고 있음에 감사하라, 세 번째는 사람이 자신하는 것에서 절반 정도만 알아 주는 명예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라, 네 번째는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라, 다섯 번째는 청중의 절반은 박수를 치지 않을 정도의 말솜씨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고 언뜻 생각해 보면 불만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좀 깊이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연말에 와서 일찍이 없었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부도가 날 정도의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국민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날이 암담하기도 하고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가가 지금 이렇게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음에도 마음 한편에서 강하게 드는 확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하는 믿음입니다. 자꾸만 마음속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섭리하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 동안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평안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드의 생활을 한번 반성해 볼 때가 되었고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살아온 우리의 현실을 이제는 규모 있게 고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강하게 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쉽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앞날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도 지나고 보면 참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 있게 이번 기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화 될 때 교회가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 중국의 교회는 모두 문을 닫았고 선교 중지령이 내려졌스니다. 그때가 중국 기독교 사상 가장 참혹한 때였고 가장 고난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숨을 지었고 이제는 중국에서 기독교가 말살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은 일단 문제에 봉착하면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중국 교회도 사람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외부의 탄압으로 문이 닫힌 중국의 교회가 숨을 죽이면서 지하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중국이 개방되기 시작하자 조사를 했는데 교회문을 닫을 때 교인 수가 300만 명이었던 것이 82년에 6,00만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32년 동안 중국의 교인들이 모두 말살당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지하에서 더 강렬한 신앙으로 발전시키셔서 어느 날 햇빛을 보게 되니까 스무 배도 넘는 숫자로 증가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를 보면 그와 비슷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참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가 흐른 뒤에 되돌아보니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나가서 전도는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여 앉아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심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흩어 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전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결국 오늘 이 땅에까지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강제로 전도하게 만드십니다. 성지나 고적들을 파괴하신 이유도 마찬기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나 성지에 있는 고적들은 거의 다 후세에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2천 년 전에 있던 유적들이나 고적들은 거의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2쳔 년 동안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두 파괴하시고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이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거기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다가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고향을 찾아간 배경을 보면 고향에 배가 있었고 그물이 그냥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고향을 떠날 때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떠났어야 합니다. 마치 로마인들이 로마에 신물이 나서 신세계인 카르타고에 배를 타고 건너간 후 섬에 도착하자마자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불태워 버렸듯이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그가 실패했을 때 고향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면 배도 있고 그물도 있으니까 그냥 손쉽게 고향으로내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전도하라고 내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주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육신의 고향을 아예 부숴 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파괴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적이나 유적, 유물들을 파괴하시고 없애 버리신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는 지극히 물질적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보고 만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섬기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잘 아십니다. 만약 2천 년 전의 어떤 유물이라든가 예수님의 옷 한 벌만 현재 그대로 남아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예수보다 더 신성시하면서 그자체를 요란하게 섬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약점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 소중한 유물들을 모두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천년이 흐른 어느 날 느닷없이 베드로의 손톱이 발견되었다고 야단을 떨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손톱을 조금씩 조각내서 수천 달러씩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마리아가 입던 앞치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앞치마의 올을 하나씩 빼서 팔아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라도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그것도 조각내서 팔아먹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 조각을 사다가 보관해 놓고 그것을 예수보다 더 소중하게 섬겼을 것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희곡을 쓸 때 여기서 착안해 썼다고 합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도 그 결과가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경제가 어려워서 곤란을 당하고는 있지만 이것조차도 아주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습관도 엄청나게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종말입니다. 일년 52주 가운데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매시간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은 마지막 월요일입니다. 모레는 금년 마지막 화요일입니다. 오는 수요일은 금년 마지막 수요일입니다. 모든 것이 마지막입니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이 참 의미가 깊습니다. 본문에서도 마지막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빛을 반짝거리게도 만듭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 앞에 진짜 마지막 시간도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그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표정이 당장 진지하지고 눈빛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마지막은 이렇게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연말의 마지막 시간은 그래도 공개적으로 다가오고 또 새해가 다시 시작되니까 마지막의 ㅡ이미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진짜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다”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떨리는 시간입니까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그렇게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찾아올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노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이 노인이 염라대왕 앞에 가서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부르려거든 어떤 암시를 주든지 사전에 경고를 해주어야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부릅니까” 그랬더니 열라대왕이 “무슨 소리냐 몇 번씩 경고를 했는데도 지금 와서 무슨 항의냐”하고 반문했답니다. 노인은 더 큰소리로 ㅜ항의를 했습니다. “경고는 무슨 경고요 나는 경고 같은 것 받은 적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염라대왕이 “내가 네 번씩이나 네게 경고를 보냈다. 첫번째, 네 눈밑에 잔주름으로 경고했고 두 번째, 네 귀밑에 흰머리로 경고했꼬 세 번째, 네 입가에 잔주름으로 경고했고 네 번째, 네 목에 주름으로 경고를 했는데도 네가 눈치를 채지 못하길래 마지막으로 뱃가죽을 당기면 3미터나 늘어나게 해놓았는데도 모르지 않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종망르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이 들어야 종말도 생각하고 죽음도 생각하게 됩니다. 종말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철든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루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10대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20대에는 연인에 움직이고 30대에는 쾌락에 움직이고 40대에는 야심에 움직이고 50대가 되면 탐욕에 움직이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이렇게 무엇엔가 이끌리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모두 허수아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어느 날 눈이 뜨여서 실존을 느끼고 종말을 생각하게 될 때가 오는데 그때부터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종말은 그래서 웃던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고 유흥에 집착하던 살을 절도 있게 만들고 잔혹하던 사람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엄숙한 정신입니다. 포악한 사형수도 죽을 시간이 가까워 오면 순한 양같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상동이라는 목사님은 일본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깨어나서 고문한 일본 경찰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고문했으니 당신이 이다음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슨 대답을 하여야 할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거요.”
여러분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섬뜩한 말입니까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나서 그 잔혹한 일본 경찰은 그 뒤로부터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답니다. 종말은 이렇게 엄숙한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상갓집에 가서 유쾌하게 막고 마시고 떠드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가끔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객기일 뿐입니다. 허세입니다. 아니면 두려운 마음을 달래 보려는 인간의 심리 때문일 것입니다. 종말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종말의 시간은 꺼림칙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의미 있는 시간입니까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시간에 도달하면 진실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허무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이 말씀을 열심히 살라는 말씁입니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후회가 없고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열심히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모습일 것입니다. 금년에 다하지 못하셨다면 새해에 그렇게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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