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16-1-13)
본문
I. 머리말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미 버렸으므로 그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 즉 다윗을 찾아서 사무엘이 왕으로 기름을 붓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을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새 왕을 찾으라"(1-3)
2. 두려워 떠는 베들레헴의 장로들(4-5)
3. 선택받지 못한 다윗의 형들(6-10)
4. 다윗에게 기름부음(11-13)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다윗의 기름부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이야기가 사울의 기름부음에 관한 이야기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이다.
첫째, 두 경우 모두 다 제사를 드린 다음에 기름을 부었으며(삼상 9,12-13 ; 22-24 ; 16,3-5),
둘째,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기름을 부었으며(9,25-10,1;16,2),
세째, 둘 다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다(9,21 ; 16,11)는 점이다. 그러나 시작은 이와 같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이 두 왕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차이점의 일부가 본문에 나타나 있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Ⅱ.
1. 새 왕을 찾으라 (1-3절) 하나님은 사울을 이미 버렸다고 말한다. 사울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표명은 이미 삼상 13,14와 15,23에서 선언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반복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이유는 사울이 길갈에서 제사지낸 사건(삼상 13,8-13)과 아말렉과 싸울 때에 완전한 진멸(히브리어로 [헤렘])을 실시하지 않은 사건(삼상 15장)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택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님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바울 사도도 이러한 위험성을 감지하고 자기 자신이 이렇게 선택받았다가 버림받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도 경종이 되는 말씀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으므로 왕이 될 새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미 한 사람을 골라 놓으셨으므로 그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이다. 그 새 왕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을 알려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사무엘은 순종하기 보다는 주저하고 거부하는 자세를 보였다.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베들레헴으로의 사무엘의 여행은 왕권 교체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행위는 사울에 대한 모반이요 혁명을 유도하고 주도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만약 사울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사무엘은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 사명 수행을 두려워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그가 살고 있는 라마에서 베들레헴으로 갈 경우 사울이 거처하고 있는 기브아 성을 지나가야 하고, 그러면 자연히 사울의 눈에 띌 것이고, 그러면 그의 여행 목적이 탄로가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부 의사를 비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종종 죽음의 위협에 직면할 때가 있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의 위협과 협박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군사정권 하에서 이러한 현상을 많이 목도하였다. 우리는 성서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모세, 예레미야, 아모스, 예수, 바울 등 수 많은 성서의 인물들이 이러한 죽음의 위협에 처했던 상황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중대한 결단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떠한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종이 되기도 한다. 사무엘은 어떠한 결단을 했는가 사무엘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 직면하였지만 비겁자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용감한 하나님의 참 종의 길을 선택하였다. 사건이 탄로나서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제사드리러 가는 행위가 결코 속임수(Notluge)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로서 제사드리는 일은 사무엘의 고유 임무이기 때문에 제사드리러 간다는 것이 절대 속임수일 수 없다는 논리다. 다른 하나는 사무엘의 행위를 일종의 속임수(Vorwand)로 보는 견해다. 필자는 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전자의 주장처럼 사무엘이 제사드리는 것은 그의 고유임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제사드리러 가는 행위는 기름붓는 일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때로는 이러한 방법으로 성서의 인물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서에서 발견한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주고 거짓말로 그들을 보호해 준 경우(수 2장), 다윗이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미친 체 한 경우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삼상 21장에서).
2. 두려워 떠는 베들레헴의 장로들 (4-5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베들레헴으로 향하였다. 사무엘을 본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반가워하기보다는 두려워 떨며 그를 맞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장로들이 사무엘과 사울 왕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실을 사울이 알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했다고 보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무엘이 이를 색출하여 징계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워 떨었다는 견해다. 이 두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평강(shalom)을 위하여 오십니까" (표준새번역:"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묻는 장로들의 질문은 전자의 상황을 반영하기 보다는 후자의 상황을 반영하는 질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로들의 겁에 질린 질문에 사무엘은 "평강(shalom)을 위함이니라"(표준새번역:"그렇소.좋은 일이오")라고 대답하면서 장로들을 안심시킨다. 사무엘의 이 말은 처벌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베들레헴에 온 것은 베들레헴 사람들과 함께 제사드리기 위함이라고 그가 온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그래서 그들을 제사에 초대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더 이상 제사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기사를 기름부음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제사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제사는 드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는 베들레헴 여행의 외형적인 목적이었으므로 제사를 생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사무엘의 베들레헴 여행의 외형적인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아직 비밀로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베들레헴 장로들이 기름부음 행사에 참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관심거리의 하나로 남아 있는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장로들에게는 기름부음행사를 비밀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첫째, 이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에 장로들이 기름부음에 참여했다는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으며,
둘째,기름부음행사를 비밀로 숨기기 위하여 제사를 구실로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 정황으로 보아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면 그 사실은 곧 사울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에는 장로들과 이새 가족들이 다 참여하였지만 기름부음 행사에는 다윗가족만 참여한 것 같다. 13절에서는 분명하게 '형제들이 둘러 선 가운데서 기름을 부었다'고 보고한다.
3. 선택받지 못한 다윗의 형들 (6-10절) 6-13절의 장소는 4-5절과는 다른 것 같다. 4-5절은 베들레헴 도성 가운데 제단이 설치된 공공장소였다면, 6-13절의 장소는 이새의 집이었을 것이다. 이새의 장자 엘리압이 첫번째로 기름부음의 대상이 되었다. 6절 상반절의 표현, 즉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라는 표현으로 보아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와 선 것은 그의 아버지 이새가 추천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엘리압 스스로 자청해서 나온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사무엘이 그의 용모와 훤칠한 키를 보고 엘리압이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왕 재목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을 한 사무엘을 나무랜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여기에 사람과 하나님의 인간 평가 기준이 다름이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우선 그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준수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등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특히 옛날에는 키가 크고 준수한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울도 왕이 되었던 것이다(9,2). 외모란 인간의 육체적인 모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란 학벌, 가문, 재산, 사회적 지위 등이다. 사람들은 그 사람 자신의 됨됨이를 보기보다는 이러한 외적인 조건들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사무엘도 그랬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마저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무엘을 책망한다. 사무엘은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다음 그에게 실망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또 다시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평가는 사람들의 평가 방법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중심'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lebab이다. lehab의 일차적인 의미는 심장(heart)이다.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이차적인 의미가 나왔다. 하나님이 '중심을 본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 됨됨이를 본다는 말이다. 외모야 조금 못생겼더라도 마음이 올바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러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포로기에 하나님이 선택한 고난의 종은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사 53,2)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고난의 종은 하나님의 선택된 종으로서 다른 사람의 죄짐을 대신 져 주는 위대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 볼품없는 고난의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한다(막 9,12). 또 바울 사도도 그 외모가 준수하지 못해서 멸시를 당했던 것 같다(고후 10,10;12,7).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이 좋은 사람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문벌도 좋지 않고 지혜도 부족하며 천한 사람들을 선택하신다(고전
1,26-31). 하나님만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날수록 그 사람의 외모보다는 마음을 보게 된다. 처음에 외모가 그럴싸해서 그 사람을 좋아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가짐이 곱지 못하고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게 되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처음에 외모로 볼 때는 볼품이 없어서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한 경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가짐이 곱고 생각이 바르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이와같이 외모를 보고 장자 엘리압을 선택했다가 실패한 사무엘 앞에 계속해서 이새는 차례대로 나머지 여섯 아들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곱 아들 모두 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름붓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무엘뿐만 아니라 이새도 아들들의 중심을 보기보다는 그 외모를 보고 이렇게 하였던 것이다.
4. 다윗에게 기름부음 (11-13절) 일곱 아들을 모두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으나 그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은 혹시 또 다른 아들이 있는가 하고 이새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직 막내가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 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왜 이새는 이 막내 다윗을 제사에 초청하지 않고 양 떼를 지키라고 들판에 남겨두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첫째, 아직 제사드릴 나이가 안되었기 때문에둘째, 나이도 나이지만 이새가 다윗을 왕 재목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판에 내버려 두었다고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무엘이 왕 재목을 찾아 기름 붓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방문했다고 이새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새는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도착할 때부터 이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기름붓기 위하여 사무엘이 아들들을 불러 세우기 시작할 때는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 때라도 조금 늦기는 하였지만 이새가 다윗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아들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면 사람을 급히 보내서라도 다윗을 불러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새는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새는 다윗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었음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다윗은 양을 지키기 위하여 들판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를 데려 오라. 그가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 하겠노라". 이 구절 후반부에 대한 번역이 약간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개역에서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공동번역에서는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라고 번역한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에서는 "(우리가)제물을 바치지 아니 하겠소"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식탁에 앉다'.혹은 '제물을 바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sabab란 동사다. sabab동사의 기본의미는 `돌다', `돌이키다', `순회하다', `빙둘러(제의적인) 행진을 하다', `식탁에 둘러앉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식탁에 앉다'나 '제물을 바치다' 모두 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미 장로들과 제사를 지낸 다음 비밀리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다윗 가족들만 모인 자리라고 볼 때 제사를 지내는 상황이라기 보다는 사울을 기름부을 때와 마찬가지로 식탁에 둘러앉은 장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9,22-10,
1)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달려 온 다윗은 '(얼굴)이 붉고 눈이 아름답고 외모가 준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성서는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묘사에서 어떤 유형의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에는 '얼굴'이라는 말은 없다. 다만 '붉다'는 말만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붉다는 것은 얼굴이외의 다른 신체부위일 수는 없다. 다윗의 얼굴이 붉은 것은 들판에서 열심히 양을 돌보고 양을 짐승들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햇볕에 검붉게 그을린 건강한 젊은이의 얼굴임이 분명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윗의 선택은 방외자의 선택이요 가장 낮은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 선택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전 1,26-31) 다음으로 본문은 다윗의 `눈이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어떤 눈일까 남자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눈이란 여자의 아름다운 눈과는 달리 눈에 총기가 넘치고 투철한 의지가 담긴 눈일 것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눈이 빼어나고'로 번역했고, 표준 공동번역에서는 `눈이 반짝이는'이라고 번역했다. 마지막으로 '외모가 준수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준수한 의미의 히브리어 tob는 사울이 준수하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다윗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의 강한 정신과 생활력이 담긴, 마음의 의지가 반영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엘리압의 외모의 아름다움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다윗을 맞은 사무엘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는 확인을 받은 다음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 형제 중에서'(개역)라는 말은 `그 형제들 가운데서 다윗을 선택해서'라는 의미보다는 표준새번역이 번역한 것처럼 '그 형들이 둘러 선 가운데서'(공동번역:'형들이 보는 앞에서')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들레헴 장로들을 포함한 온 회중이 참여한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형제들만이 참여한 자리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과 단 둘이만 있을 때에 기름부은 것처럼(9,27) 다윗의 경우에도 단 둘이 있을 때에 기름을 부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 앞에 불리워 섰을 때에, 그들은 왜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다윗은 야훼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보고 다윗을 선택하였지만, 그러나 그 마음이 올바른 것만 가지고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많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만 가지고는 왕이 되어 통치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없이는 지도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
Ⅲ.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을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본문은 다윗의 마음을 보고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윗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떠했기에 하나님은 그를 선택했을까 본문에는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논하는 사람이었다(삼하
2,1;5,19). 역대기사가는 사울과 다윗의 근본적인 차이를 바로 여기에서 찾는다(대상
2,1;5,19). 다윗은 사울과 맞대결을 하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은자 였기 때문이었다(삼상 24,10). 여기에서도 그의 하나님 경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2. 다윗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형들이 다 제사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들판에 남아서 양떼를 지키는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사자나 곰과 싸우면서까지 양떼를 지키는 철저한 사명감과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삼상17,34-37).
3. 다윗은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자나 곰도 두려워하지 않고 양을 지키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용감성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와 과감히 맞서는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삼상17,41-54).
4. 다윗은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였다. 다윗은 게으름을 피우고 놀고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름다움은 일하는 노동자의 아름다움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노동하는 다윗을 선택하였다.
5. 마지막으로 다윗은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회개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다(삼하12,15-23). 물론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다음에 나타난 현상들이지만, 이러한 마음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보시고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것이다. 본문은 다윗과 사울, 그리고 다윗과 그의 형들을 이중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 이중의 비교를 통해서 본문은 사울과 형들은 준수하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반면에, 다윗은 이들과는 달리 외모는 비록 사울이나 형들만 못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용감한 사람이었음을 부각시키면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다윗을 사울 대신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성서가 말해 주듯이 다윗은 이러한 장점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밧세바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잘못을 범하기도 한 단점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단점보다는 위에서 말한 장점이 더 많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말해 준다. 본문은 이러한 비교를 통한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을 준다. 이 본문에 비추어 오늘 우리 한국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 오늘 우리들은 이 두 부류의 사람가운데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인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울이나 다윗의 형들처럼 외모만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마음가짐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우리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한국인 전체의 모습은 어떤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의 한국인들은 마음보다는 외모, 즉 학벌, 돈, 지위 등을 더 중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외모 중시의 마음가짐으로는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것이다. 외모를 중시하는 오늘 우리의 풍조에 대한 좋은 경종이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마음, 중심을 가져야 할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미 버렸으므로 그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 즉 다윗을 찾아서 사무엘이 왕으로 기름을 붓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을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새 왕을 찾으라"(1-3)
2. 두려워 떠는 베들레헴의 장로들(4-5)
3. 선택받지 못한 다윗의 형들(6-10)
4. 다윗에게 기름부음(11-13)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다윗의 기름부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이야기가 사울의 기름부음에 관한 이야기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이다.
첫째, 두 경우 모두 다 제사를 드린 다음에 기름을 부었으며(삼상 9,12-13 ; 22-24 ; 16,3-5),
둘째,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기름을 부었으며(9,25-10,1;16,2),
세째, 둘 다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다(9,21 ; 16,11)는 점이다. 그러나 시작은 이와 같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나 이 두 왕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차이점의 일부가 본문에 나타나 있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Ⅱ.
1. 새 왕을 찾으라 (1-3절) 하나님은 사울을 이미 버렸다고 말한다. 사울이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표명은 이미 삼상 13,14와 15,23에서 선언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반복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이유는 사울이 길갈에서 제사지낸 사건(삼상 13,8-13)과 아말렉과 싸울 때에 완전한 진멸(히브리어로 [헤렘])을 실시하지 않은 사건(삼상 15장)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택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님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바울 사도도 이러한 위험성을 감지하고 자기 자신이 이렇게 선택받았다가 버림받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도 경종이 되는 말씀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사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으므로 왕이 될 새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미 한 사람을 골라 놓으셨으므로 그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이다. 그 새 왕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을 알려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사무엘은 순종하기 보다는 주저하고 거부하는 자세를 보였다.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베들레헴으로의 사무엘의 여행은 왕권 교체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행위는 사울에 대한 모반이요 혁명을 유도하고 주도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만약 사울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사무엘은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 사명 수행을 두려워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그가 살고 있는 라마에서 베들레헴으로 갈 경우 사울이 거처하고 있는 기브아 성을 지나가야 하고, 그러면 자연히 사울의 눈에 띌 것이고, 그러면 그의 여행 목적이 탄로가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부 의사를 비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종종 죽음의 위협에 직면할 때가 있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의 위협과 협박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군사정권 하에서 이러한 현상을 많이 목도하였다. 우리는 성서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모세, 예레미야, 아모스, 예수, 바울 등 수 많은 성서의 인물들이 이러한 죽음의 위협에 처했던 상황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중대한 결단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떠한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종이 되기도 한다. 사무엘은 어떠한 결단을 했는가 사무엘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 직면하였지만 비겁자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용감한 하나님의 참 종의 길을 선택하였다. 사건이 탄로나서 죽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제사드리러 가는 행위가 결코 속임수(Notluge)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로서 제사드리는 일은 사무엘의 고유 임무이기 때문에 제사드리러 간다는 것이 절대 속임수일 수 없다는 논리다. 다른 하나는 사무엘의 행위를 일종의 속임수(Vorwand)로 보는 견해다. 필자는 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전자의 주장처럼 사무엘이 제사드리는 것은 그의 고유임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 제사드리러 가는 행위는 기름붓는 일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때로는 이러한 방법으로 성서의 인물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서에서 발견한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주고 거짓말로 그들을 보호해 준 경우(수 2장), 다윗이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미친 체 한 경우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삼상 21장에서).
2. 두려워 떠는 베들레헴의 장로들 (4-5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베들레헴으로 향하였다. 사무엘을 본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반가워하기보다는 두려워 떨며 그를 맞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장로들이 사무엘과 사울 왕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한 사실을 사울이 알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했다고 보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무엘이 이를 색출하여 징계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워 떨었다는 견해다. 이 두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평강(shalom)을 위하여 오십니까" (표준새번역:"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묻는 장로들의 질문은 전자의 상황을 반영하기 보다는 후자의 상황을 반영하는 질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로들의 겁에 질린 질문에 사무엘은 "평강(shalom)을 위함이니라"(표준새번역:"그렇소.좋은 일이오")라고 대답하면서 장로들을 안심시킨다. 사무엘의 이 말은 처벌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베들레헴에 온 것은 베들레헴 사람들과 함께 제사드리기 위함이라고 그가 온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그래서 그들을 제사에 초대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더 이상 제사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기사를 기름부음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제사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제사는 드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는 베들레헴 여행의 외형적인 목적이었으므로 제사를 생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사무엘의 베들레헴 여행의 외형적인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아직 비밀로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베들레헴 장로들이 기름부음 행사에 참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관심거리의 하나로 남아 있는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장로들에게는 기름부음행사를 비밀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첫째, 이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에 장로들이 기름부음에 참여했다는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으며,
둘째,기름부음행사를 비밀로 숨기기 위하여 제사를 구실로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 정황으로 보아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면 그 사실은 곧 사울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에는 장로들과 이새 가족들이 다 참여하였지만 기름부음 행사에는 다윗가족만 참여한 것 같다. 13절에서는 분명하게 '형제들이 둘러 선 가운데서 기름을 부었다'고 보고한다.
3. 선택받지 못한 다윗의 형들 (6-10절) 6-13절의 장소는 4-5절과는 다른 것 같다. 4-5절은 베들레헴 도성 가운데 제단이 설치된 공공장소였다면, 6-13절의 장소는 이새의 집이었을 것이다. 이새의 장자 엘리압이 첫번째로 기름부음의 대상이 되었다. 6절 상반절의 표현, 즉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라는 표현으로 보아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와 선 것은 그의 아버지 이새가 추천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엘리압 스스로 자청해서 나온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사무엘이 그의 용모와 훤칠한 키를 보고 엘리압이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왕 재목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을 한 사무엘을 나무랜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여기에 사람과 하나님의 인간 평가 기준이 다름이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우선 그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준수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등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특히 옛날에는 키가 크고 준수한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울도 왕이 되었던 것이다(9,2). 외모란 인간의 육체적인 모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란 학벌, 가문, 재산, 사회적 지위 등이다. 사람들은 그 사람 자신의 됨됨이를 보기보다는 이러한 외적인 조건들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사무엘도 그랬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마저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사무엘을 책망한다. 사무엘은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다음 그에게 실망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또 다시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평가는 사람들의 평가 방법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중심'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lebab이다. lehab의 일차적인 의미는 심장(heart)이다.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이차적인 의미가 나왔다. 하나님이 '중심을 본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 됨됨이를 본다는 말이다. 외모야 조금 못생겼더라도 마음이 올바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러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포로기에 하나님이 선택한 고난의 종은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사 53,2)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고난의 종은 하나님의 선택된 종으로서 다른 사람의 죄짐을 대신 져 주는 위대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신약성서는 이 볼품없는 고난의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한다(막 9,12). 또 바울 사도도 그 외모가 준수하지 못해서 멸시를 당했던 것 같다(고후 10,10;12,7).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이 좋은 사람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문벌도 좋지 않고 지혜도 부족하며 천한 사람들을 선택하신다(고전
1,26-31). 하나님만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날수록 그 사람의 외모보다는 마음을 보게 된다. 처음에 외모가 그럴싸해서 그 사람을 좋아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가짐이 곱지 못하고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게 되면 그를 멀리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처음에 외모로 볼 때는 볼품이 없어서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한 경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가짐이 곱고 생각이 바르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이와같이 외모를 보고 장자 엘리압을 선택했다가 실패한 사무엘 앞에 계속해서 이새는 차례대로 나머지 여섯 아들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곱 아들 모두 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름붓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무엘뿐만 아니라 이새도 아들들의 중심을 보기보다는 그 외모를 보고 이렇게 하였던 것이다.
4. 다윗에게 기름부음 (11-13절) 일곱 아들을 모두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으나 그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은 혹시 또 다른 아들이 있는가 하고 이새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직 막내가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 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왜 이새는 이 막내 다윗을 제사에 초청하지 않고 양 떼를 지키라고 들판에 남겨두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첫째, 아직 제사드릴 나이가 안되었기 때문에둘째, 나이도 나이지만 이새가 다윗을 왕 재목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판에 내버려 두었다고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무엘이 왕 재목을 찾아 기름 붓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방문했다고 이새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새는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도착할 때부터 이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기름붓기 위하여 사무엘이 아들들을 불러 세우기 시작할 때는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 때라도 조금 늦기는 하였지만 이새가 다윗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아들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면 사람을 급히 보내서라도 다윗을 불러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새는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새는 다윗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었음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다윗은 양을 지키기 위하여 들판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를 데려 오라. 그가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 하겠노라". 이 구절 후반부에 대한 번역이 약간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개역에서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공동번역에서는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라고 번역한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에서는 "(우리가)제물을 바치지 아니 하겠소"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식탁에 앉다'.혹은 '제물을 바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sabab란 동사다. sabab동사의 기본의미는 `돌다', `돌이키다', `순회하다', `빙둘러(제의적인) 행진을 하다', `식탁에 둘러앉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식탁에 앉다'나 '제물을 바치다' 모두 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미 장로들과 제사를 지낸 다음 비밀리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다윗 가족들만 모인 자리라고 볼 때 제사를 지내는 상황이라기 보다는 사울을 기름부을 때와 마찬가지로 식탁에 둘러앉은 장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9,22-10,
1)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달려 온 다윗은 '(얼굴)이 붉고 눈이 아름답고 외모가 준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성서는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묘사에서 어떤 유형의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에는 '얼굴'이라는 말은 없다. 다만 '붉다'는 말만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붉다는 것은 얼굴이외의 다른 신체부위일 수는 없다. 다윗의 얼굴이 붉은 것은 들판에서 열심히 양을 돌보고 양을 짐승들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햇볕에 검붉게 그을린 건강한 젊은이의 얼굴임이 분명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윗의 선택은 방외자의 선택이요 가장 낮은 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 선택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전 1,26-31) 다음으로 본문은 다윗의 `눈이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어떤 눈일까 남자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눈이란 여자의 아름다운 눈과는 달리 눈에 총기가 넘치고 투철한 의지가 담긴 눈일 것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눈이 빼어나고'로 번역했고, 표준 공동번역에서는 `눈이 반짝이는'이라고 번역했다. 마지막으로 '외모가 준수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준수한 의미의 히브리어 tob는 사울이 준수하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다윗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의 강한 정신과 생활력이 담긴, 마음의 의지가 반영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엘리압의 외모의 아름다움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다윗을 맞은 사무엘은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는 확인을 받은 다음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 형제 중에서'(개역)라는 말은 `그 형제들 가운데서 다윗을 선택해서'라는 의미보다는 표준새번역이 번역한 것처럼 '그 형들이 둘러 선 가운데서'(공동번역:'형들이 보는 앞에서')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들레헴 장로들을 포함한 온 회중이 참여한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형제들만이 참여한 자리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과 단 둘이만 있을 때에 기름부은 것처럼(9,27) 다윗의 경우에도 단 둘이 있을 때에 기름을 부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 앞에 불리워 섰을 때에, 그들은 왜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다윗은 야훼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보고 다윗을 선택하였지만, 그러나 그 마음이 올바른 것만 가지고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많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만 가지고는 왕이 되어 통치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없이는 지도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
Ⅲ.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을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본문은 다윗의 마음을 보고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윗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떠했기에 하나님은 그를 선택했을까 본문에는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논하는 사람이었다(삼하
2,1;5,19). 역대기사가는 사울과 다윗의 근본적인 차이를 바로 여기에서 찾는다(대상
2,1;5,19). 다윗은 사울과 맞대결을 하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은자 였기 때문이었다(삼상 24,10). 여기에서도 그의 하나님 경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2. 다윗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형들이 다 제사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들판에 남아서 양떼를 지키는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사자나 곰과 싸우면서까지 양떼를 지키는 철저한 사명감과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삼상17,34-37).
3. 다윗은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자나 곰도 두려워하지 않고 양을 지키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용감성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와 과감히 맞서는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삼상17,41-54).
4. 다윗은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였다. 다윗은 게으름을 피우고 놀고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름다움은 일하는 노동자의 아름다움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노동하는 다윗을 선택하였다.
5. 마지막으로 다윗은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회개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다(삼하12,15-23). 물론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다음에 나타난 현상들이지만, 이러한 마음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보시고 그를 왕으로 기름부었던 것이다. 본문은 다윗과 사울, 그리고 다윗과 그의 형들을 이중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 이중의 비교를 통해서 본문은 사울과 형들은 준수하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반면에, 다윗은 이들과는 달리 외모는 비록 사울이나 형들만 못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용감한 사람이었음을 부각시키면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다윗을 사울 대신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성서가 말해 주듯이 다윗은 이러한 장점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밧세바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잘못을 범하기도 한 단점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단점보다는 위에서 말한 장점이 더 많았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말해 준다. 본문은 이러한 비교를 통한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을 준다. 이 본문에 비추어 오늘 우리 한국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 오늘 우리들은 이 두 부류의 사람가운데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인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울이나 다윗의 형들처럼 외모만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마음가짐을 중시하는 사람인가 우리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한국인 전체의 모습은 어떤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의 한국인들은 마음보다는 외모, 즉 학벌, 돈, 지위 등을 더 중시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외모 중시의 마음가짐으로는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것이다. 외모를 중시하는 오늘 우리의 풍조에 대한 좋은 경종이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마음, 중심을 가져야 할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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