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보물돈재물 (마6:19-21)
본문
성경의 많은 곳이 그러하듯 위의 말씀도 많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철 저히 왜 곡되어 왔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그 문맥의 흐름을 따라서 위 본문을 살펴본 다면 이 말씀이 결코 어렵거나 난해한말씀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보물의 개념이 너무나 뿌리깊게 자기식 시각에 사로 잡혀 있어서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득하 게 보인다. 무엇이 보물이며 또한 보물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가장 기본적이고 초 보적인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 만큼 설교자들이나 성도들이 오늘 본문 말씀 을 대할 때는 철저히 소경이 되곤 한다. 소경이 된다는 말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이미 날 때부터 소경이기에), 본문에서 기독교인들의 현주소를 아 주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목적과 의도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의 성격을 아주 잘 고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무슨 말인가. 보물이란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일컬어 보물이라 한다. 생명 을 주 고도 아깝지 않은 것이 보물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저렇게 열심히 강조 하고 하늘에 쌓아두기 위해서 열심히 저축하는 것이 무 엇인가. 그들의 열 심과 그리고 물질(헌금)과 충성, 봉사들이다. 어떤 이들은 물질은 자기 자신이 라고 한다. 자신의 땀이요 피라고 한다. 그래서 헌금은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 하는 유일한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아닌 경우는 모두 말 뿐이요 관념 적인 신앙이라고 공박한다. 아무리 말로만 사랑한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 되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 믿음이요, 신을 기만하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 라고 한다. 어떻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참 믿음이냐고 하며 헌금의 당 위성을 강조한다. 물론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 자. 이런 망발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 주 근사한 신앙 생활의 모범으로 들릴런지 모르지만 이것처럼 인간에 대한 모 욕적인 언사도 없다. 이 말처럼 인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말도 드물다. 어떻 게 물질이 나요 돈이 나일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는 너무 나도 동떨어진 말이다. 차라리 맘모니스트(mammonist)라는 말이 어울린다. 아 무런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 말이야 말로 그리스도는 명분이요 돈이 주 인이며 물질이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라는 자증을 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물은 물질이지 그리스도가 보물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보물인 물질 을 하늘에 부지런히 저축을 해 놓아야 투자 금액에 비례해서 하늘창고 주택은행으로부터 빌라맨션아파트를 더 넓은 평수 로 분양 받을 수 있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물은 바로 천국에서의 빌라 맨션이요 그 것은 오늘의 보물인 물질의 더 극대화 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단 지 물 질 보물이 종교적 형태로 환원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여기서 헌금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은 적당하 지 않다. 그와 같은 논리를 여기서 전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주제를 끌어다가 문제 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것이며 단순한 호도책일 뿐이다. 그러한 오류가 본문 에서 왜 발생할 수 밖에 없는가. 따지고 보면 오늘의 본문에서도구원의 메시지가 아주 강하게 선포되고 있으 며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종교양태들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말씀이다. 문제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하면 번역의 과정에서와 성경에 대한 올바 른 해 석과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현상이다. 또한 성경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의 부재와 갈등이 없는 맹목적인 신앙이 합작하여 만들어 놓은 결과들이다. 물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신의 눈과 상태가 그러 한 번역, 그리고 그러한 해 석을 낳는다. Mh; qhsaurivzete uJmi'n qhsaurou;"ejpi; th'" gh'", 메 테사우리 제테 휴민 테사우루스 에피 테스 게스 여기서 원문을 번역할 때 몇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 땅 위에)를, 동사를 설명해 주고 있는 부사구로 볼 것이냐 아니면 테사우루스(qhsau-rou;",보물)을 한정 해 주고 있는 형용사 구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둘 사이에는 매우 현격한 해석의 차이를 갖게 한다. 물론 두가지 견해 중 어느 것 을 택할지는 번역자의 견해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대하 고 있는 개역성경의 경우나 여타 영문 번역 성경들은 한결같이 부사구 로 해석해 주고 있다. 여기서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 땅 위에)를 부사구로 해석한다 면 동 사의 행위가 미치는 장소를 나타내 주는 장소 부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 론 그렇게 해석하면 보물을 쌓아두는 곳이 ` 땅 위에` 가 된다. 반면에 보물 을 수식해 주는 형용사구로 해석을 한다면 ` 땅 위 에 있는 보물` 이 된다. 그 것을 부사구로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간접목적어인 휴민(uJmi'n)을 어떻 게 해석해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2인칭 대명사 여격형태이다 . 여격을 ` 너희를 위하여 ` 라고 해석하는 것은 다분히 억지이다. 이런 억지 를 부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를 부사구로 해 석하고 나면 여격을 처리할 수 있는 적당한 어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 너희 를 위하여` 라고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여격은 ` -에게로` 해석해 주 어야 한다. 이 경우 문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대부분 문법학자들은 여격 이 재 귀대명사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헬라어에는 분명히 재귀 대명사의 변화형태가 있다. 번역성경대로 해야 한다면 휴 민(uJmi'n)대신 헤아 우토이스(eJautoi'")가 와야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재귀대명 사가 아닌 여격이다.
그런데 에피 테스 게 스를 부사구로 해석하고 나니 여격 으로 해석하기가 난감해진다. 그래서 학자들의 기지가 동원되고, 헬라어는 여 격도 때로 재귀대명사의 성 격을 띄기 때문에 재귀대명사로 해석해 주어야 할 때가 있다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내게 된다. 본문의 경우가 그러한 예인데 , ` 너희에게` 를 ` 너희를 위하여` 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사례라고 말한다 . 그러나 그것이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고 있 으니 이 를 어쩌겠는가. 결국 문법서라는 것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주 고 있다. 여기서의 여격으로 표현된 ` 너희에게`는 보물을 쌓아두는 장소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목적어인 보물을 쌓아두는 장소 가 어디인가를 결정해주는 것이,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이것을 형용사구로 해석을 하면 보물이 현재 있는 장소를 말한다. 그리고 휴 민(uJmi'n)은, 여격을 그대로 살려서 해석을 해주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겠다. " 너희는 땅 위에 있는 보물을 너희에게 쌓지 말라" 가 된다. 이렇게 해석을 할 때 사실은 헬라어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휴민(uJmi'n)에 대한 억지 해 석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거기 혹은 저기는 호푸(pou)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종속절을 이끌어주는 관계부사 호푸(opou)이다. 곧 형용사구 에피 테스 게스를 선행사로 하는 관계부사절이다. 이를 번역하 면,, `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는 땅 위의 보물을 너희에게 쌓지 말라` 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가 형용사구로 쓰인 예가 있다. 물론 번역도 형용사구로 해석해 주고 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자.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다" 위의 문장은 오늘 본문과 동일한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에도테 모 이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jEdovqh moi pa'sa ejxousiva ejn oujranw/' kai; ejpi; th'" gh'") 이 경우에 엔 우라노 와 에피 테스 게스가 엑수시아(권세)를 꾸며주는 형용사 구이지 에도테 (주셨다,동사)를 꾸며주는 부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권세 가 있는 장소를 말해 준다. 이것을 마태복음 6장 19절을 번역한 번역성경들과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번역해 보자. " 그가 나를 위하여(moi, 여격을 재귀대명사로) 권세를 하늘과 땅위에 주셨다 " 얼마나 어색한 번역이 되겠는가. 다행히도 여기서는 형용사구로 번역해 놓았 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가 없지만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에서는 그러한 형 태의 번역을 해 놓고도 그것이 정당하고 맞는다고 우기고 있 으니 우리는 하이 코메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문법학자들 의 학문적 정당성까지 억 지로 동원하면서 말이다. 성경은 이렇게 덥혀 있어야 하는가. 위 문장의 예는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에서 에피 테스 게스와 엔 우라노를 형용사구로 본다해도 전혀 무리가 없음을 실 증해주는 경우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그러하듯 어떤 경우에는 부사구 로 보아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 이것은 물론 나의 개인 적인 견해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영어성경들도 대부분 부 사구로 번역하고 있지만, 최초의 영어 번역성경이라 할 수 있는 John Wycliffe(1320-1384)의 Lollard Bible에는 형용사구로 번역했다는 사 실이다. 이 후에 번역된 성경들은 이를 무시했는데 그 까닭을 모를 일 이다 . 물론 위클리프의 번역성경은 생소한 문체 때문에 인기 있는 성경이 되지 못 했을 뿐더러 대본이 라틴어였던 관계로 라틴어의 문체에 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성경이었지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본문에 대해서 영어로는 최초의 번역성경이었던 위 클리프의 성경이 형용사구로 번역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 이후 번역성경들의 견해는 이를 완 전히 무시하고 번역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가 형용사구로 사용된 예는 다 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가복음 4장 31절이다. o" otan sparh'/ ejpi; th'" gh'", 땅위의 모든 씨 보다. 여기서 우리는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를 부사구로 해석하면 오히려 성경의 전체 흐름과도 맞지 않으며 산상수훈의 흐름과도 배치된 다는 점을 지 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할 때 생길 수 밖에 없는 부작용은 오늘날 기독교의 현상을 보더라도 결코 적지않은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성경의 왜곡이며 참된 기독교의 굴절을 야기하며 신앙의 전체를 좌우하는 심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문제의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땅 위에 있는 보물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하늘에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이것을 아주 명확히 주석해 주는 말씀이 골로 새서 3장 1절 이하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 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 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 정과 사악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1-6). 그렇다. 이것이 하늘에 있는 보물과 땅에 있는 보물의 명확한 구별이다. 땅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음란과 부정과 사악과 악한 정욕과 탐 심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이다. 신앙생활이 모 두 탐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신관에서 비롯된다. 잘못된신 관이라 함은 우상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의의라 고 하는 것이 산상수훈에서 계속하 여 지적되어 온 것들이다. 구제에 있어서 그러하며 기도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금식에 있어서도 자기 의로 하는 것들이 계속하여 지적되어 왔던 것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두가 탐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이를 일컬어 우상숭배라고도 하며 땅 위에 있는 보물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보물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내는 것이요 이를 위해 생명 을 바치는 행위야말로 불행한 행진이다. 그것이 어디에 쌓이는가.쌓이는 곳 이 바로 ` 너희에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쌓여있는 그대로 심판에 이미 거하고 있는 것이다. 땅 위에 있는 보물 과 하나로 살고있는 것이 인생의 불행이 아닌가. 육신적인 욕 심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들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보물로 삼고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물질 을 보물로 삼고 있다면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아무리 열심히 바친다해도 그의 보물은 물질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지 않 은가.
왜냐하면 " 나의 보물은 물질인 데 이 보물을 받아 주십시오. 그 리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는데 내 마음을 이 물질에 담 아 당신에게 드립니다" 고 한다면 내 마음이 물질과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루어 은행에 저축하고 있는 것 밖에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배 역은 무엇인가. 그렇다. 다만 천국은행을 지키는 금고지기 아니면 은행 장쯤 될 뿐이며 다만 인간의 보물을 잘 관리했다가 이 다음에 적 당히 이윤을 남겨서 돌려주면 되는 관리인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나님을 망 령 되이 여겨도 되는 것인가. 역시 이 모든 것들은 자기를 버리지 못하 고 자신의 의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들은 사상 누각이요 착각 속 에 사는 허무한 생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좀이나 동록에 의해서 상할 수 있는 것들이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땅 의 보물은 파도의 거품과 같은 것이기 에 도적이 도적질하고 구멍이 뚫리게 되 어 있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그러한 인생들을 일컬어 말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 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 말 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1-
3). 반면에 하늘에 있는 보물은 무엇인가. 물론 마태복음 6장 20절의 말씀 도 번역 에 있어서는 개역성경이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도 ` 하늘에` 라는 것은 장소를 나타내는 형용사구로 보아야 타당하다. 이와 병행구를 이루고 있는 누가복음 12장 33절도 형용사구인데, 원문 을 번역해보면 " 너희의 소유 를 팔아 구제하라. 너희를 위하여(여기서는 재귀대명사여격 eJautoi'") 낡아 지지 아니하는 주머니 곧 도적이 가까이 하지 않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는 다함 이 없는 하늘에 있는 모물 을 만들라" 이다. 즉 보물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 지 보물을 쌓아 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지적해 두고 하늘의 보물 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앞에서 인용한 골로새서 3장은 이를 잘 언급해 주고 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렇다. 이것이 하늘의 보물이다. 산상수훈의 문맥에서 언급된다면 하나님의 의다. 곧 그 나라의 의가 된다. 때문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 를 구하라고 한다.이러한 말씀에 대한 바울의 또 다른 표현을 빌면 우리 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 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는 말씀이다. 바울은 한번도 헌금을 말하면서 그것이 보화요 혹은 그것을 하늘에 쌓 아 두라 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하늘의 보화 곧 `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그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배로, 보물로 이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질그릇에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보물삼아 쌓아두어서는 안 되며 하 늘의 신령한 것, 곧 그리스도 보배를 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 기서 질그릇은 바로 ` 너희에게(uJmin)` 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21절 말씀은 어디에 있는 보물을 쌓아 둘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포인트이지 어디에 쌓아 둘 것인가 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누구나가 보물은 자신에게 쌓아둔다. 자신은 어떤 보물이든 갖고 산다. 이 질그릇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 가 오늘의 문제이다. 그 보물에 의해서 인간은 내면의 가치관이 형성 되고 움직이며 행동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보물이냐 하는 것이 인 생의 가치를 결정해 준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 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 위에 있는 보물이 당신에게 있는가. 당신은 아직 땅에 속한 자일 뿐이다.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고 있는 가. 당신은 하늘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보물이 있다 면 그것은 참으로 우상이요 없어져야 할 죄악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테사우리제 테)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 느니라(마 12:34-35). 이것은 내면에 쌓여 있는 그것이 곧 삶의 모습을 결정해 주는 것임을 밝혀주 고 있다. 여기서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을 그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번역해보 면 다음 과 같이 할 수 있겠다.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는(호푸) 땅위의(에피 테스 게스) 보물을 너희에게 쌓지 말고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않고 도 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는(호푸) 하늘에 있는(엔 우 라노) 보물을 너희 에게 쌓으라.
왜냐하면(가르) 너의 보물이 있는(현 재,직설법) 곳(호푸)에 너 의 마음이 있을 것이기(미래,직설법) 때문이다.(마6:19-21절에 대한 사역)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저렇게 열심히 강조 하고 하늘에 쌓아두기 위해서 열심히 저축하는 것이 무 엇인가. 그들의 열 심과 그리고 물질(헌금)과 충성, 봉사들이다. 어떤 이들은 물질은 자기 자신이 라고 한다. 자신의 땀이요 피라고 한다. 그래서 헌금은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 하는 유일한 표현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아닌 경우는 모두 말 뿐이요 관념 적인 신앙이라고 공박한다. 아무리 말로만 사랑한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 되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 믿음이요, 신을 기만하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 라고 한다. 어떻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참 믿음이냐고 하며 헌금의 당 위성을 강조한다. 물론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 자. 이런 망발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 주 근사한 신앙 생활의 모범으로 들릴런지 모르지만 이것처럼 인간에 대한 모 욕적인 언사도 없다. 이 말처럼 인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말도 드물다. 어떻 게 물질이 나요 돈이 나일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는 너무 나도 동떨어진 말이다. 차라리 맘모니스트(mammonist)라는 말이 어울린다. 아 무런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 말이야 말로 그리스도는 명분이요 돈이 주 인이며 물질이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라는 자증을 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물은 물질이지 그리스도가 보물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보물인 물질 을 하늘에 부지런히 저축을 해 놓아야 투자 금액에 비례해서 하늘창고 주택은행으로부터 빌라맨션아파트를 더 넓은 평수 로 분양 받을 수 있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물은 바로 천국에서의 빌라 맨션이요 그 것은 오늘의 보물인 물질의 더 극대화 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단 지 물 질 보물이 종교적 형태로 환원되었을 뿐이다. 더욱이 여기서 헌금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은 적당하 지 않다. 그와 같은 논리를 여기서 전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주제를 끌어다가 문제 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것이며 단순한 호도책일 뿐이다. 그러한 오류가 본문 에서 왜 발생할 수 밖에 없는가. 따지고 보면 오늘의 본문에서도구원의 메시지가 아주 강하게 선포되고 있으 며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한 일반적인 종교양태들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말씀이다. 문제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하면 번역의 과정에서와 성경에 대한 올바 른 해 석과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현상이다. 또한 성경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의 부재와 갈등이 없는 맹목적인 신앙이 합작하여 만들어 놓은 결과들이다. 물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신의 눈과 상태가 그러 한 번역, 그리고 그러한 해 석을 낳는다. Mh; qhsaurivzete uJmi'n qhsaurou;"ejpi; th'" gh'", 메 테사우리 제테 휴민 테사우루스 에피 테스 게스 여기서 원문을 번역할 때 몇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 땅 위에)를, 동사를 설명해 주고 있는 부사구로 볼 것이냐 아니면 테사우루스(qhsau-rou;",보물)을 한정 해 주고 있는 형용사 구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둘 사이에는 매우 현격한 해석의 차이를 갖게 한다. 물론 두가지 견해 중 어느 것 을 택할지는 번역자의 견해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대하 고 있는 개역성경의 경우나 여타 영문 번역 성경들은 한결같이 부사구 로 해석해 주고 있다. 여기서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 땅 위에)를 부사구로 해석한다 면 동 사의 행위가 미치는 장소를 나타내 주는 장소 부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 론 그렇게 해석하면 보물을 쌓아두는 곳이 ` 땅 위에` 가 된다. 반면에 보물 을 수식해 주는 형용사구로 해석을 한다면 ` 땅 위 에 있는 보물` 이 된다. 그 것을 부사구로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간접목적어인 휴민(uJmi'n)을 어떻 게 해석해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2인칭 대명사 여격형태이다 . 여격을 ` 너희를 위하여 ` 라고 해석하는 것은 다분히 억지이다. 이런 억지 를 부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를 부사구로 해 석하고 나면 여격을 처리할 수 있는 적당한 어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 너희 를 위하여` 라고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여격은 ` -에게로` 해석해 주 어야 한다. 이 경우 문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대부분 문법학자들은 여격 이 재 귀대명사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헬라어에는 분명히 재귀 대명사의 변화형태가 있다. 번역성경대로 해야 한다면 휴 민(uJmi'n)대신 헤아 우토이스(eJautoi'")가 와야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재귀대명 사가 아닌 여격이다.
그런데 에피 테스 게 스를 부사구로 해석하고 나니 여격 으로 해석하기가 난감해진다. 그래서 학자들의 기지가 동원되고, 헬라어는 여 격도 때로 재귀대명사의 성 격을 띄기 때문에 재귀대명사로 해석해 주어야 할 때가 있다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내게 된다. 본문의 경우가 그러한 예인데 , ` 너희에게` 를 ` 너희를 위하여` 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사례라고 말한다 . 그러나 그것이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고 있 으니 이 를 어쩌겠는가. 결국 문법서라는 것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주 고 있다. 여기서의 여격으로 표현된 ` 너희에게`는 보물을 쌓아두는 장소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목적어인 보물을 쌓아두는 장소 가 어디인가를 결정해주는 것이,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이것을 형용사구로 해석을 하면 보물이 현재 있는 장소를 말한다. 그리고 휴 민(uJmi'n)은, 여격을 그대로 살려서 해석을 해주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겠다. " 너희는 땅 위에 있는 보물을 너희에게 쌓지 말라" 가 된다. 이렇게 해석을 할 때 사실은 헬라어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휴민(uJmi'n)에 대한 억지 해 석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거기 혹은 저기는 호푸(pou)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종속절을 이끌어주는 관계부사 호푸(opou)이다. 곧 형용사구 에피 테스 게스를 선행사로 하는 관계부사절이다. 이를 번역하 면,, `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는 땅 위의 보물을 너희에게 쌓지 말라` 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가 형용사구로 쓰인 예가 있다. 물론 번역도 형용사구로 해석해 주고 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자.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다" 위의 문장은 오늘 본문과 동일한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에도테 모 이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jEdovqh moi pa'sa ejxousiva ejn oujranw/' kai; ejpi; th'" gh'") 이 경우에 엔 우라노 와 에피 테스 게스가 엑수시아(권세)를 꾸며주는 형용사 구이지 에도테 (주셨다,동사)를 꾸며주는 부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권세 가 있는 장소를 말해 준다. 이것을 마태복음 6장 19절을 번역한 번역성경들과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번역해 보자. " 그가 나를 위하여(moi, 여격을 재귀대명사로) 권세를 하늘과 땅위에 주셨다 " 얼마나 어색한 번역이 되겠는가. 다행히도 여기서는 형용사구로 번역해 놓았 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가 없지만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에서는 그러한 형 태의 번역을 해 놓고도 그것이 정당하고 맞는다고 우기고 있 으니 우리는 하이 코메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문법학자들 의 학문적 정당성까지 억 지로 동원하면서 말이다. 성경은 이렇게 덥혀 있어야 하는가. 위 문장의 예는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에서 에피 테스 게스와 엔 우라노를 형용사구로 본다해도 전혀 무리가 없음을 실 증해주는 경우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그러하듯 어떤 경우에는 부사구 로 보아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 이것은 물론 나의 개인 적인 견해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영어성경들도 대부분 부 사구로 번역하고 있지만, 최초의 영어 번역성경이라 할 수 있는 John Wycliffe(1320-1384)의 Lollard Bible에는 형용사구로 번역했다는 사 실이다. 이 후에 번역된 성경들은 이를 무시했는데 그 까닭을 모를 일 이다 . 물론 위클리프의 번역성경은 생소한 문체 때문에 인기 있는 성경이 되지 못 했을 뿐더러 대본이 라틴어였던 관계로 라틴어의 문체에 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성경이었지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본문에 대해서 영어로는 최초의 번역성경이었던 위 클리프의 성경이 형용사구로 번역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 이후 번역성경들의 견해는 이를 완 전히 무시하고 번역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가 형용사구로 사용된 예는 다 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가복음 4장 31절이다. o" otan sparh'/ ejpi; th'" gh'", 땅위의 모든 씨 보다. 여기서 우리는 에피 테스 게스(ejpi; th'" gh'")를 부사구로 해석하면 오히려 성경의 전체 흐름과도 맞지 않으며 산상수훈의 흐름과도 배치된 다는 점을 지 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할 때 생길 수 밖에 없는 부작용은 오늘날 기독교의 현상을 보더라도 결코 적지않은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성경의 왜곡이며 참된 기독교의 굴절을 야기하며 신앙의 전체를 좌우하는 심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문제의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땅 위에 있는 보물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하늘에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이것을 아주 명확히 주석해 주는 말씀이 골로 새서 3장 1절 이하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 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 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 정과 사악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1-6). 그렇다. 이것이 하늘에 있는 보물과 땅에 있는 보물의 명확한 구별이다. 땅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음란과 부정과 사악과 악한 정욕과 탐 심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이다. 신앙생활이 모 두 탐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신관에서 비롯된다. 잘못된신 관이라 함은 우상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의의라 고 하는 것이 산상수훈에서 계속하 여 지적되어 온 것들이다. 구제에 있어서 그러하며 기도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금식에 있어서도 자기 의로 하는 것들이 계속하여 지적되어 왔던 것 아닌가. 그러한 것은 모두가 탐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이를 일컬어 우상숭배라고도 하며 땅 위에 있는 보물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보물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내는 것이요 이를 위해 생명 을 바치는 행위야말로 불행한 행진이다. 그것이 어디에 쌓이는가.쌓이는 곳 이 바로 ` 너희에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쌓여있는 그대로 심판에 이미 거하고 있는 것이다. 땅 위에 있는 보물 과 하나로 살고있는 것이 인생의 불행이 아닌가. 육신적인 욕 심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들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보물로 삼고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물질 을 보물로 삼고 있다면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아무리 열심히 바친다해도 그의 보물은 물질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지 않 은가.
왜냐하면 " 나의 보물은 물질인 데 이 보물을 받아 주십시오. 그 리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는데 내 마음을 이 물질에 담 아 당신에게 드립니다" 고 한다면 내 마음이 물질과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루어 은행에 저축하고 있는 것 밖에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배 역은 무엇인가. 그렇다. 다만 천국은행을 지키는 금고지기 아니면 은행 장쯤 될 뿐이며 다만 인간의 보물을 잘 관리했다가 이 다음에 적 당히 이윤을 남겨서 돌려주면 되는 관리인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나님을 망 령 되이 여겨도 되는 것인가. 역시 이 모든 것들은 자기를 버리지 못하 고 자신의 의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들은 사상 누각이요 착각 속 에 사는 허무한 생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좀이나 동록에 의해서 상할 수 있는 것들이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땅 의 보물은 파도의 거품과 같은 것이기 에 도적이 도적질하고 구멍이 뚫리게 되 어 있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그러한 인생들을 일컬어 말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 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 말 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1-
3). 반면에 하늘에 있는 보물은 무엇인가. 물론 마태복음 6장 20절의 말씀 도 번역 에 있어서는 개역성경이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도 ` 하늘에` 라는 것은 장소를 나타내는 형용사구로 보아야 타당하다. 이와 병행구를 이루고 있는 누가복음 12장 33절도 형용사구인데, 원문 을 번역해보면 " 너희의 소유 를 팔아 구제하라. 너희를 위하여(여기서는 재귀대명사여격 eJautoi'") 낡아 지지 아니하는 주머니 곧 도적이 가까이 하지 않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는 다함 이 없는 하늘에 있는 모물 을 만들라" 이다. 즉 보물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 지 보물을 쌓아 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지적해 두고 하늘의 보물 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앞에서 인용한 골로새서 3장은 이를 잘 언급해 주고 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렇다. 이것이 하늘의 보물이다. 산상수훈의 문맥에서 언급된다면 하나님의 의다. 곧 그 나라의 의가 된다. 때문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 를 구하라고 한다.이러한 말씀에 대한 바울의 또 다른 표현을 빌면 우리 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 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는 말씀이다. 바울은 한번도 헌금을 말하면서 그것이 보화요 혹은 그것을 하늘에 쌓 아 두라 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하늘의 보화 곧 `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그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배로, 보물로 이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질그릇에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보물삼아 쌓아두어서는 안 되며 하 늘의 신령한 것, 곧 그리스도 보배를 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 기서 질그릇은 바로 ` 너희에게(uJmin)` 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21절 말씀은 어디에 있는 보물을 쌓아 둘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포인트이지 어디에 쌓아 둘 것인가 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누구나가 보물은 자신에게 쌓아둔다. 자신은 어떤 보물이든 갖고 산다. 이 질그릇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 가 오늘의 문제이다. 그 보물에 의해서 인간은 내면의 가치관이 형성 되고 움직이며 행동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보물이냐 하는 것이 인 생의 가치를 결정해 준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 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땅 위에 있는 보물이 당신에게 있는가. 당신은 아직 땅에 속한 자일 뿐이다.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고 있는 가. 당신은 하늘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보물이 있다 면 그것은 참으로 우상이요 없어져야 할 죄악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테사우리제 테)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 느니라(마 12:34-35). 이것은 내면에 쌓여 있는 그것이 곧 삶의 모습을 결정해 주는 것임을 밝혀주 고 있다. 여기서 마태복음 6장 19절과 20절을 그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번역해보 면 다음 과 같이 할 수 있겠다.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는(호푸) 땅위의(에피 테스 게스) 보물을 너희에게 쌓지 말고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않고 도 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는(호푸) 하늘에 있는(엔 우 라노) 보물을 너희 에게 쌓으라.
왜냐하면(가르) 너의 보물이 있는(현 재,직설법) 곳(호푸)에 너 의 마음이 있을 것이기(미래,직설법) 때문이다.(마6:19-21절에 대한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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