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타 (계22:10-21)
본문
때때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아니하고 불시에 그저 지나가다가 교우들의 가정을 심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성도들은 매우 반가워하고 또 찿아와 기도해 주는 데 대하여 너무나 고마워 하면서 어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대접하려고 하고 다음에는 꼭 미리 연락을 하고 오시면 좀 준비해서 더 많이 대접하겠노라고들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가정에 가면 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환영해주는가 하고 이런 대접은 주님께서 받아야 하는데.하는 겸연한 생각을 하면서도 인간적인 입장에서 너무나 기분이 좋고 마음도 편안하고 해서 말씀을 증거하고 기도하는 가정 예배가 영적으로 충만해 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정들에는 언제고 어느 때고 집에 있기만 하면 가고 싶고, 함께 앉아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싶은 것이 목회자들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때때로는 찿아 심방을 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가정도 없지 아니합니다. 그 가정은 결국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교회적인 관심의 도가 약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여집사님 가정에 심방을 갔다가 그 여 집사님의 불신 남편에게 무안을 당하고 쫓겨난 가슴아픈 추억도 있고, 어느 경우에는 심방갔다가 자기 할 일에만 몰두하고 마치 귀찮은 장사군 대하듯이 하는 박대를 당하고 말할 수 없는 불친절을 경험하고 석연치 않은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 집을 뛰쳐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 처럼 고달픈 경우는 또 없습니다. 누구도 반겨주지 아니하고 달가워 하지 아니하는 곳에 가야만 하는 경우 처럼 괴로운 일도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을 친히 당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 이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아니하였고 예수께서 오심을 고대하고 사모하는 사람들 역시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로마 제국의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우상 숭배와 사치와 타락과 방종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백성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그 로마의 식민 노예가 되어 버렸고 소망도 내일도 기대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2,000년전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할 때의 그날들 처럼 한숨과 비탄에 빠진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가르쳐주었던 메시야는 이미 현실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 누구도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셨던 마리아의 아들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 성자 메시야 이신 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첫번 크리스마스의 밤에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빈들에서 양을 치던 몇몇의 목자들과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찿아왔던 세 사람의 박사들과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외양간의 동물들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오심을 사모하지 아니하였고 그 교훈과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행하셨을 때에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철저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일생이셨고 평생을 통하여 머리둘 곳이 없으셨던 고독하고 외로운 분이셨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에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깔아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했지만 그 사람들은 불과 5일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배신당하신, 철저하게 환영받지 못하신 메시야이셨습니다.
2,000년전 그 때도 그렇게 예수께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셨고 외면당하신 고독한 메시야 이셨는 데. 2,000년 동안도 그러하신 것 같고.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그렇게 사모하고 기다리고 고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는 ‘마란 아타’ 입니다. 이 ‘마란 아타’의 신앙은 초대 교회가 그 엄청난 로마 제국의 박해와 끈질기게 쫓아오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이기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이제 곧 내일이면 예수님 께서 다시 오실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혹독한 박해와 고문과 환란을 참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마란 아타’입니다. 그리이스어의 시제로 의지 미래형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꼭 다시 오실 것인 데, ‘바로 내일. 아니 오늘. 아니 조금후에 오실 것이다’ 라는 의지를 담고 있는 미래형입니다. 경기장에서 굶주린 짐승들에게 내던짐을 당하여 그 몸이 갈기 갈기 찢기우고 산채로 화형을 당하여 그 타는 불꽃이 로마시내를 밝히는 햇불이 되고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고문을 당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쇠사슬에 묶여 보면서도 믿음의 길에서 변절치 아니하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께서 곧 다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마란아타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박해 중에서도 주님의 재림은 곧 이루어 지지 아니하며 점점 순교자는 늘어나게 되면서 요한 계시록은 그 종말을 맺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란 아타’ 즉,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라는 믿음은 이제 탄식의 기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라나타’ 라고 하는 기원형의 시제입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 성경은 이 뜻을 정확하게 번역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 오실 것을 믿습니다’의 ‘마란 아타’가 ‘주여 오시옵소서’의 ‘마라나타’로 바뀌는 과정은 처절한 눈물과 육신이 깨어 부수어지는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믿다가 믿다가 죽어도 아니오시니 죽는 순간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울면서 울면서 부르짖으면서 외쳤던 기도가 바로 이 ‘마라나타’인 것입니다. 마란아타가 마라나타로 되기까지의 이 눈물의 시간 시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박해와 고난과 역경과 눈물의 기도와 부르짖음과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을 지나면서 이루어진 기도가 바로 이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라나타의 신앙은 고난을 참아 견디는 신앙이요 마지막 환란 날의 신앙이요 죽음도 불사하는 의지의 신앙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의 이 마라나타 신앙의 아버지가 있으니 곧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의 주님 고대가를 아십니까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주님 오시는가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부르면 주님계신 그곳에 가고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대강절의 현대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는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이 마라나타의 신앙은 바로 대강절을 맞는 우리 성도들의 소망의 신앙이며 암울한 현실과 부패한 죄악 세상에 대한 소망의 신학입니다. 동시에 아무도 기다리지 아니하였고 소망도 없고 바램도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오늘 우리 교회가 이루어야 하는 교회적인 사업과 역사의 대 명제입니다.
그 첫번 째 노엘의 밤에 아무도 반겨 맞지 아니하셨고, 일생을 사시면서 배척과 음모와 배신의 나날들을 보내시고, 소외와 고독 속에서 지내셨던 주님을. 이제는 기다리고 대망하고 소망중에 바라보는 신앙이 바로 대강절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때 맥가이버 신드롬이 있었습니다. 이 맥가이버는 만능의 천재적인 재능군으로서 어느 상황의 어느 환경에서든지, 특별히 드라마에서는 절대적으로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과학적인 지식과 재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곤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무엇이 잘 안되면 이럴 때는 맥가이버가 있거나 자신이 맥가이버이고 싶은 신드롬에 빠진 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신드롬으로 슈퍼맨 신드롬이 있었습니다. 슈퍼맨과 그 친구들.슈퍼우먼, 아쿠아맨, 베트맨, 독수리오형제등등은 우리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들을 척척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인데 모든 현실에 있어서 무능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이 슈퍼맨을 기다리거나 그것이 잘 안될 때 자신이 슈퍼맨이 되는 환상에 빠지는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슈퍼맨인 줄로 생각하다가 그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실망하고 반항하고 탈선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자신이 무슨 슈퍼맨이 된 줄로 생각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큰일을 치루고는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슈퍼맨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슈퍼맨 신드롬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슈퍼맨은 슈퍼맨이 아니라 바로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슈퍼맨을 기다리는 환상에 빠져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환상과 기도와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슈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 주님께서 계시다면.우리 주님께서 오시기만 한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근심과 괴로움과 고난과 기도의 제목들과 이루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대 결론을 보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비방하고 우리의 믿음을 박해하던 수 많은 적 그리스도들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며 모든 산자와 죽은 자들이 엄위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엄연한 미래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겠습니까 이 대강절의 신앙 자세를 두 가지 말씀드립니다.
1.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사모하는 가운데 부끄럼 없는 구원에 참여하는 결단을 새롭게 하십시다. 구원도 부끄러운 구원이 있고 일면 자랑스러운 구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상급이 없고 칭찬이 없는 의의 면류관도 생명의 면류관도 없는 불쌍한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면 구원은 얻겠으나 전도의 열매가 없고 봉사의 흔적이 없고 충성의 증거가 없는 신자는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부끄러운 구원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복음 성가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무어라고 말할까 그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이 노랫말은 오늘 우리 대강절 신앙의 첫째 결단을 마치 날선 검과도 같이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다 주님 오시는 그 날에-오늘일지, 내일일지-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움을 받고 모두 다 구원의 반열에 들이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어떤 이는 겨우 자기 자신만 구원된.불쌍한 구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저기 다른 데 그런 교인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생동안 믿음 생활 한다고 하면서 단 한명 전도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먹고 입고 호의호식하며 살면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서는 인색한 스쿠르우지 같이 살고 세상의 일과 자신의 육신의 일을 위해서는 그렇게 분주하고 바쁘게 살아왔지만 주님의 일에는 이리 저리 핑게대고 갑자기 바쁘다고 외면했던 신자들이 우리 교회에는 없습니다. 오늘 대강절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하여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럼 없는 신앙을 소유하는 결단이요 이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거듭나고 또 다시 주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모든 성도들이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부끄럼 없는 구원에 참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진실한 믿음을 굳건히 합시다. 진실합시다. 이제 주님 오시는 데 거짓과 가식과 허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다미선교회가 그 소동을 벌릴 때에 정작 당사자인 이장림씨는 체포되고난 뒤에 인터뷰에서 자신은 10월 28일 재림일이 아닌 줄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몰아져 갔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재림 앞에서 거짓을 위주한 아이러니를 벌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재림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정말 기다린다면 어찌 거짓을 위주할 수 있겠습니까 극과 극이 서로 상통하는 경우가 없지 아니합니다. 일전에 보니까 법과 질서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일 수 있는 검찰총장과 법과 질서의 차원에서 가장 어두움에 감추어져 있는 소위 깡패 건달 세계의 두목이 술자리를 같이 하고 서로 협상했던 일이 밝혀졌지요 그 사건이 아마도 슬롯타머신인가 하는 사회 문제였고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해야할 교회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더러운 거짓과 모략이 있다면 이 또한 역시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역사상 교회와 성직자 세계에서 가증된 거짓과 더러운 모략과 간사한 술책이 있었던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타락했던 교회가 그러했고 신사참배를 가결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3회 평양노회가 그러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느 목사님께서 채플에 오셔서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다 목사가 되면 천으로 만든 까운을 입지 말고 진실로 만든 까운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스스럼 없이 꺼리낌없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합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진실한 신자만이 주님 오실 날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이 아닌 사람들은 주님 오실 날이 곧 심판과 멸망의 날인 것을 자신이 먼저 알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믿지도 기다리지도 사모하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의 사람들은 마치 어린 아이가 시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순전한 삶으로, 진실한 신앙으로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 다시 오십니다. 무엇으로 준비하고 단장하겠습니까 진실의 옷을 입으시고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진실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진실한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강절의 촛불이 빛나고 있습니다. 진실의 불꽃입니다. 참으로의 빛입니다. 그 마음 속에 빛이 있다면 진실의 빛일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는 그 속에 주님의 빛이 있어서 그 얼굴이 빛나고 그 삶이 밝습니다. 주님 나신 날을 하루 하루 기다려 가는 대강절에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결단하십시다. 주님 다시오실 그날에 부끄럼 없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전도, 봉사, 충성의 결단을 새롭게 하십다. 그리고 신앙과 삶에 있어서 진실함을 회복합시다. 그 때에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 처럼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외쳐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강절 신앙의 간절하고 뜨거운 결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크리스마스 성탄절의 평강과 은총을 충만히 누리시는 복된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괴로움을 친히 당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 이셨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지 아니하였고 예수께서 오심을 고대하고 사모하는 사람들 역시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로마 제국의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우상 숭배와 사치와 타락과 방종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백성이었던 히브리인들은 그 로마의 식민 노예가 되어 버렸고 소망도 내일도 기대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2,000년전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할 때의 그날들 처럼 한숨과 비탄에 빠진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가르쳐주었던 메시야는 이미 현실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 누구도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셨던 마리아의 아들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 성자 메시야 이신 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첫번 크리스마스의 밤에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빈들에서 양을 치던 몇몇의 목자들과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찿아왔던 세 사람의 박사들과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외양간의 동물들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 오심을 사모하지 아니하였고 그 교훈과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행하셨을 때에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철저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던 일생이셨고 평생을 통하여 머리둘 곳이 없으셨던 고독하고 외로운 분이셨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에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깔아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했지만 그 사람들은 불과 5일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배신당하신, 철저하게 환영받지 못하신 메시야이셨습니다.
2,000년전 그 때도 그렇게 예수께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셨고 외면당하신 고독한 메시야 이셨는 데. 2,000년 동안도 그러하신 것 같고.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그렇게 사모하고 기다리고 고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는 ‘마란 아타’ 입니다. 이 ‘마란 아타’의 신앙은 초대 교회가 그 엄청난 로마 제국의 박해와 끈질기게 쫓아오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이기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이제 곧 내일이면 예수님 께서 다시 오실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혹독한 박해와 고문과 환란을 참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마란 아타’입니다. 그리이스어의 시제로 의지 미래형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꼭 다시 오실 것인 데, ‘바로 내일. 아니 오늘. 아니 조금후에 오실 것이다’ 라는 의지를 담고 있는 미래형입니다. 경기장에서 굶주린 짐승들에게 내던짐을 당하여 그 몸이 갈기 갈기 찢기우고 산채로 화형을 당하여 그 타는 불꽃이 로마시내를 밝히는 햇불이 되고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고문을 당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쇠사슬에 묶여 보면서도 믿음의 길에서 변절치 아니하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께서 곧 다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마란아타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박해 중에서도 주님의 재림은 곧 이루어 지지 아니하며 점점 순교자는 늘어나게 되면서 요한 계시록은 그 종말을 맺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란 아타’ 즉,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라는 믿음은 이제 탄식의 기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라나타’ 라고 하는 기원형의 시제입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 성경은 이 뜻을 정확하게 번역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 오실 것을 믿습니다’의 ‘마란 아타’가 ‘주여 오시옵소서’의 ‘마라나타’로 바뀌는 과정은 처절한 눈물과 육신이 깨어 부수어지는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믿다가 믿다가 죽어도 아니오시니 죽는 순간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울면서 울면서 부르짖으면서 외쳤던 기도가 바로 이 ‘마라나타’인 것입니다. 마란아타가 마라나타로 되기까지의 이 눈물의 시간 시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박해와 고난과 역경과 눈물의 기도와 부르짖음과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을 지나면서 이루어진 기도가 바로 이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라나타의 신앙은 고난을 참아 견디는 신앙이요 마지막 환란 날의 신앙이요 죽음도 불사하는 의지의 신앙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의 이 마라나타 신앙의 아버지가 있으니 곧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의 주님 고대가를 아십니까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주님 오시는가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부르면 주님계신 그곳에 가고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대강절의 현대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는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이 마라나타의 신앙은 바로 대강절을 맞는 우리 성도들의 소망의 신앙이며 암울한 현실과 부패한 죄악 세상에 대한 소망의 신학입니다. 동시에 아무도 기다리지 아니하였고 소망도 없고 바램도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오늘 우리 교회가 이루어야 하는 교회적인 사업과 역사의 대 명제입니다.
그 첫번 째 노엘의 밤에 아무도 반겨 맞지 아니하셨고, 일생을 사시면서 배척과 음모와 배신의 나날들을 보내시고, 소외와 고독 속에서 지내셨던 주님을. 이제는 기다리고 대망하고 소망중에 바라보는 신앙이 바로 대강절의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때 맥가이버 신드롬이 있었습니다. 이 맥가이버는 만능의 천재적인 재능군으로서 어느 상황의 어느 환경에서든지, 특별히 드라마에서는 절대적으로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과학적인 지식과 재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곤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무엇이 잘 안되면 이럴 때는 맥가이버가 있거나 자신이 맥가이버이고 싶은 신드롬에 빠진 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신드롬으로 슈퍼맨 신드롬이 있었습니다. 슈퍼맨과 그 친구들.슈퍼우먼, 아쿠아맨, 베트맨, 독수리오형제등등은 우리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들을 척척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인데 모든 현실에 있어서 무능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이 슈퍼맨을 기다리거나 그것이 잘 안될 때 자신이 슈퍼맨이 되는 환상에 빠지는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슈퍼맨인 줄로 생각하다가 그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실망하고 반항하고 탈선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자신이 무슨 슈퍼맨이 된 줄로 생각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큰일을 치루고는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슈퍼맨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슈퍼맨 신드롬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슈퍼맨은 슈퍼맨이 아니라 바로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슈퍼맨을 기다리는 환상에 빠져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환상과 기도와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슈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 주님께서 계시다면.우리 주님께서 오시기만 한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근심과 괴로움과 고난과 기도의 제목들과 이루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대 결론을 보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비방하고 우리의 믿음을 박해하던 수 많은 적 그리스도들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며 모든 산자와 죽은 자들이 엄위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엄연한 미래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겠습니까 이 대강절의 신앙 자세를 두 가지 말씀드립니다.
1.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사모하는 가운데 부끄럼 없는 구원에 참여하는 결단을 새롭게 하십시다. 구원도 부끄러운 구원이 있고 일면 자랑스러운 구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상급이 없고 칭찬이 없는 의의 면류관도 생명의 면류관도 없는 불쌍한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면 구원은 얻겠으나 전도의 열매가 없고 봉사의 흔적이 없고 충성의 증거가 없는 신자는 아마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부끄러운 구원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복음 성가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무어라고 말할까 그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이 노랫말은 오늘 우리 대강절 신앙의 첫째 결단을 마치 날선 검과도 같이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다 주님 오시는 그 날에-오늘일지, 내일일지-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움을 받고 모두 다 구원의 반열에 들이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요 어떤 이는 겨우 자기 자신만 구원된.불쌍한 구원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저기 다른 데 그런 교인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생동안 믿음 생활 한다고 하면서 단 한명 전도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먹고 입고 호의호식하며 살면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서는 인색한 스쿠르우지 같이 살고 세상의 일과 자신의 육신의 일을 위해서는 그렇게 분주하고 바쁘게 살아왔지만 주님의 일에는 이리 저리 핑게대고 갑자기 바쁘다고 외면했던 신자들이 우리 교회에는 없습니다. 오늘 대강절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하여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럼 없는 신앙을 소유하는 결단이요 이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거듭나고 또 다시 주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모든 성도들이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부끄럼 없는 구원에 참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진실한 믿음을 굳건히 합시다. 진실합시다. 이제 주님 오시는 데 거짓과 가식과 허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다미선교회가 그 소동을 벌릴 때에 정작 당사자인 이장림씨는 체포되고난 뒤에 인터뷰에서 자신은 10월 28일 재림일이 아닌 줄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몰아져 갔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재림 앞에서 거짓을 위주한 아이러니를 벌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재림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정말 기다린다면 어찌 거짓을 위주할 수 있겠습니까 극과 극이 서로 상통하는 경우가 없지 아니합니다. 일전에 보니까 법과 질서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일 수 있는 검찰총장과 법과 질서의 차원에서 가장 어두움에 감추어져 있는 소위 깡패 건달 세계의 두목이 술자리를 같이 하고 서로 협상했던 일이 밝혀졌지요 그 사건이 아마도 슬롯타머신인가 하는 사회 문제였고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해야할 교회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더러운 거짓과 모략이 있다면 이 또한 역시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역사상 교회와 성직자 세계에서 가증된 거짓과 더러운 모략과 간사한 술책이 있었던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타락했던 교회가 그러했고 신사참배를 가결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3회 평양노회가 그러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느 목사님께서 채플에 오셔서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다 목사가 되면 천으로 만든 까운을 입지 말고 진실로 만든 까운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스스럼 없이 꺼리낌없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합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진실한 신자만이 주님 오실 날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이 아닌 사람들은 주님 오실 날이 곧 심판과 멸망의 날인 것을 자신이 먼저 알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믿지도 기다리지도 사모하지도 아니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의 사람들은 마치 어린 아이가 시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순전한 삶으로, 진실한 신앙으로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주님 다시 오십니다. 무엇으로 준비하고 단장하겠습니까 진실의 옷을 입으시고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진실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진실한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강절의 촛불이 빛나고 있습니다. 진실의 불꽃입니다. 참으로의 빛입니다. 그 마음 속에 빛이 있다면 진실의 빛일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는 그 속에 주님의 빛이 있어서 그 얼굴이 빛나고 그 삶이 밝습니다. 주님 나신 날을 하루 하루 기다려 가는 대강절에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결단하십시다. 주님 다시오실 그날에 부끄럼 없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전도, 봉사, 충성의 결단을 새롭게 하십다. 그리고 신앙과 삶에 있어서 진실함을 회복합시다. 그 때에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 처럼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외쳐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강절 신앙의 간절하고 뜨거운 결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크리스마스 성탄절의 평강과 은총을 충만히 누리시는 복된 성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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