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쓴물 (출15:22-27)
본문
옛 속담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세한 연후에 송백 지조”(歲寒然後 松栢 志操) 이는 곧 겨울이 온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푸르른 것을 알 수 있다는 말로, 시련이 닥쳐 봐야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람만큼 참으로 간사한 존재는 없습니다. 믿음이 좋다 하는 이도 평상시에는 좋아 보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포기하는 이가 있고, 반면에 어려울 때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지만 환경이 좋아지면 나태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약점을 잘 아시기에 삶과 환경을 통하여 성숙한 신앙인으로 그의 자녀들을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다루시며 만들어 가시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함께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통과합니다. 그들은 홍해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강한 확신과 감격에 젖여 잇었습니다. 홍해의 체험, 이것은 대단한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환호와 기쁨에 젖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전 10:1-2에서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지적하며, 홍해의 체험을 세례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홍해는 애굽과 완전히 결별하는 마지막 순간이요, 세례도 세상과 결별을 고하는 성도의 고백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기쁨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멸망과 죄로부터의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기쁨의 연속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을 잘 살펴 봅시다. 홍해 체험의 감동에 젖어 수르 광야를 하루 종일 통과합니다. 이튿날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목욕하거나 세면할 물이 없습니다. 아니, 세면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얻지를 못합니다. 또 하루가 지납니다. 이제는 갈증에 지치고 맙니다. 본문 22절을 봅시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제 그들은 현실의 고통 때문에 홍해를 건넌 감격을 까맣게 잊습니다. 그러다가 사흘만에 겨우 발견한 물은 써서 마실 수 없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라’라고 부르게 됩니다(23절).
그러므로 그들은 절망과 좌절에 빠져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24절).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 즉 모두에게 있는 일입니다. 모세도 인생의 절정기인 40세에 광야에 보내어 40년간을 절망의 기간으로 걷게 하셨고,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3년간을 준비시키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 분이 쓰시고자 할 때는 시련의 길을 걷게 하여 준비시키시고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산산히 부수고는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과 마음 속을 감찰하십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에게, 물질욕이 있다면 그것이 깨지도록 다루실 것입니다. 명예에 관심이 있는 내 모습이라면 그 명예가 좌절되게 낮추실 것입니다.
세상에 관심이 있는 만큼 철저히 부수실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너지기까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챨스 코우만의 “애벌레 관찰 이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고치(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오랫 동안 애벌레가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 주고픈 충동을 느끼고는 가위를 가져다가 그 구멍을 크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 나방의 애벌레는 퉁퉁 불은 몸집을 기우뚱거리며 고치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 그 나비가 날기를 기다리며 하루 이틀 사흘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비가 날기를 기다리는데 날지를 못합니다. 그 때서야 나비를 도와 준 것이 아니라 나비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기 위해 긴 시간을 몸부림칠 때, 비록 고통의 순간들이지만 퉁퉁 불은 몸에서 수분이 빠져 날기에 알맞은 몸이 되어서야 그 구멍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고통은 나비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중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고통을 못 이겨 금방 가위를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위험에서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좁은 구멍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을 배반까지 하며 넘어지는 고통을 겪었던 베드로도 벧전 1:7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에는 더 큰 섭리와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번개의 유익을 아십니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알아왔던 번개가 지상의 생물을 살게 하는데 아주 유익 하답니다. 이것을 현대 과학은 발견했습니다. 번개가 번쩍일 때 그 빛과 열에 의해서 공중에 떠있는 질소가 빗 속에 녹아들어 땅 위로 비와 함께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만일 번개가 없다면 그 중요한 비료인 질소가 식물에 공급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번개도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하시기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도 이처럼 더 큰 섭리로 그들 앞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배웠습니다.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옳습니다. 성도의 자세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는 노래처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짖고 기도할 때 응답으로 ‘한 나무’를 지시해 주셨습니다(25절).
벧전 2:24에서는 나무는 곧 십자가의 상징이라고 언급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고통과 역경이 있을 때 몸부림치고 기도하면 그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여기에서 그 물이 달아지는 이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체험이 있는 신앙, 그것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생명력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라의 쓴물의 고통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이처럼 더 큰 유익을 위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 시련이 닥쳐올 때 이 시험에 잘 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고통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하여 25-26절에 나타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치료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의 약속입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 갈기 갈기 찢겨졌을 때에 호세아 선지자가 이 말씀을 다시 선언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늘 이 자리에 찢기고 상한 마음으로 오신 분이 있다면 치료의 하나님 앞에 모두 내어 놓으십시오. 마라의 쓴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원망하고 좌절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치료의 하나님이라….” 그리고 이 시련 뒤에 항상 우리의 삶 속에 위로의 손길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의 고통을 지난 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엘림은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주가 있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련을 잘 이기고 나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약속과 엘림의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이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잊어 버리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 같은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환호와 기쁨에 젖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전 10:1-2에서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지적하며, 홍해의 체험을 세례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홍해는 애굽과 완전히 결별하는 마지막 순간이요, 세례도 세상과 결별을 고하는 성도의 고백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의 기쁨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멸망과 죄로부터의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기쁨의 연속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을 잘 살펴 봅시다. 홍해 체험의 감동에 젖어 수르 광야를 하루 종일 통과합니다. 이튿날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목욕하거나 세면할 물이 없습니다. 아니, 세면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얻지를 못합니다. 또 하루가 지납니다. 이제는 갈증에 지치고 맙니다. 본문 22절을 봅시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제 그들은 현실의 고통 때문에 홍해를 건넌 감격을 까맣게 잊습니다. 그러다가 사흘만에 겨우 발견한 물은 써서 마실 수 없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라’라고 부르게 됩니다(23절).
그러므로 그들은 절망과 좌절에 빠져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24절).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 즉 모두에게 있는 일입니다. 모세도 인생의 절정기인 40세에 광야에 보내어 40년간을 절망의 기간으로 걷게 하셨고,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3년간을 준비시키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 분이 쓰시고자 할 때는 시련의 길을 걷게 하여 준비시키시고 다듬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산산히 부수고는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과 마음 속을 감찰하십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에게, 물질욕이 있다면 그것이 깨지도록 다루실 것입니다. 명예에 관심이 있는 내 모습이라면 그 명예가 좌절되게 낮추실 것입니다.
세상에 관심이 있는 만큼 철저히 부수실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너지기까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챨스 코우만의 “애벌레 관찰 이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고치(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오랫 동안 애벌레가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 주고픈 충동을 느끼고는 가위를 가져다가 그 구멍을 크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 나방의 애벌레는 퉁퉁 불은 몸집을 기우뚱거리며 고치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제 그 나비가 날기를 기다리며 하루 이틀 사흘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비가 날기를 기다리는데 날지를 못합니다. 그 때서야 나비를 도와 준 것이 아니라 나비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비는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기 위해 긴 시간을 몸부림칠 때, 비록 고통의 순간들이지만 퉁퉁 불은 몸에서 수분이 빠져 날기에 알맞은 몸이 되어서야 그 구멍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고통은 나비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중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고통을 못 이겨 금방 가위를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위험에서 막아 주시고 믿음의 날개로 세상을 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좁은 구멍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주님을 배반까지 하며 넘어지는 고통을 겪었던 베드로도 벧전 1:7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에는 더 큰 섭리와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번개의 유익을 아십니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알아왔던 번개가 지상의 생물을 살게 하는데 아주 유익 하답니다. 이것을 현대 과학은 발견했습니다. 번개가 번쩍일 때 그 빛과 열에 의해서 공중에 떠있는 질소가 빗 속에 녹아들어 땅 위로 비와 함께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만일 번개가 없다면 그 중요한 비료인 질소가 식물에 공급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번개도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하시기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도 이처럼 더 큰 섭리로 그들 앞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배웠습니다.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옳습니다. 성도의 자세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는 노래처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짖고 기도할 때 응답으로 ‘한 나무’를 지시해 주셨습니다(25절).
벧전 2:24에서는 나무는 곧 십자가의 상징이라고 언급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고통과 역경이 있을 때 몸부림치고 기도하면 그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여기에서 그 물이 달아지는 이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체험이 있는 신앙, 그것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생명력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라의 쓴물의 고통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이처럼 더 큰 유익을 위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 시련이 닥쳐올 때 이 시험에 잘 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고통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하여 25-26절에 나타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치료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의 약속입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민족이 갈기 갈기 찢겨졌을 때에 호세아 선지자가 이 말씀을 다시 선언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늘 이 자리에 찢기고 상한 마음으로 오신 분이 있다면 치료의 하나님 앞에 모두 내어 놓으십시오. 마라의 쓴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원망하고 좌절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치료의 하나님이라….” 그리고 이 시련 뒤에 항상 우리의 삶 속에 위로의 손길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의 고통을 지난 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엘림은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주가 있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련을 잘 이기고 나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약속과 엘림의 오아시스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이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잊어 버리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 같은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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