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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호봇의 하나님 (창26:12-22)

본문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어른들의 말씀 가운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격언’이라고 합니다. 격언들은 길지 않습니다. 대체로 짧고 단순합니다. 그러면서도 격언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터득하게 되는 삶의 깊은 이치를 담고 있어서, 한권의 책으로도 못다할 많은 말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간단해보이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격언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생한 삶 속에서 만들어지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 의해서 “정말 그렇구나”하고 인정을 받아온 말입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이 말은 실제로 사람들이 우물을 파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서서히 응축되어서 만들어진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 속에는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말은 우물을 파는 데만 쓰여지지 않습니다. 모든 격언이 그런 것처럼, 여기에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터득해야 할 놀라운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격언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우물파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인가에 목말라하면서 삶의 우물을 파는 사람들. 그래서 이 시간 우리는 ‘우물파는 한 사람’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우리도 우물을 파는 자들임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십이장에서 오십장까지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네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그리고 요셉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십육장은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지금부터 거의 사천년전의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사천년전이면 아득히 먼 옛날입니다. 백년전이라고 해도 아주 오래 전인 것처럼 생각되는데, 사천년은 얼마나 먼 옛날입니까 오늘은 이처럼 아득해 보이는 사천년전의 세계로 가보겠습니다. 사천년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 시대에는 물론 자동차도 없었고, 티비도,컴퓨터도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외형적인 모습들은 많이 변했지만, 살아가는 근본이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통해서 삶의 깊은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이삭, 사천년전이라는 그 먼 옛날에 살았던 이삭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삭은 ‘우물파는 자’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우물과 인연이 깊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보면, 이삭만 우물을 판 것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우물을 많이 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오절을 보면,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십팔절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우물을 팠고, 그 이전,그 이후의 사람들도 우물을 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우물물을 길어서 먹었습니다. 그러니 사천년전에는 오죽 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우물을 파지 않으면,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물파는 것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우물파는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십육장의 이삭의 이야기는 온통 우물파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십이절 다음에도 이삭은 계속해서 우물을 팝니다. 이삭이 마지막 판 우물의 이름이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기자는 이삭을 “우물파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물파는 사람. 이 이삭이 살았던 모습을 통해서 사천년의 시공간을 넘어서 이 시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이삭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어려움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인데, 내용을 조금 자세하게 나누어보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을 셋으로 나누어서 거기에 이삭의 모습들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더듬어보려고 합니다.
I.우물을 잃은 이삭(12-16절) 첫번째,“우물을 잃은 이삭”입니다. 성경구절은 십이절에서 십육절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십이절,십삼절,그리고 십사절 앞부분까지 이삭이 받은 복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서 여기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이삭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은 우선 이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삭이 쉽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결코 조건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삭은 실제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십이절을 보십시오:“이삭이 그땅에서 농사하여.” 이삭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입니다. 이삭이 지금 머물고 있는 그랄땅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의 땅입니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이삭이 머무는 곳을 “그땅”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곳이 이삭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곳이 비록 자기의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큰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삭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무슨 일이든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열심으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랄이 자기땅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최소한의 것을 이용해서 최대의 것을 만들어가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성공을 했습니다. 이삭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이삭이 복받은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이야기는 이삭이 복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십사절 뒷부분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기는 커녕 그를 시기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땅에 빌붙어 사는 이삭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기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을 결코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해치려고 합니다. 먼저 우물을 막아버립니다. 그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온 우물을 막아버립니다. 그리고 십팔절 중간쯤보면,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은 이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죽고난 다음에도 그들은 우물들을 메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고,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막는 자들입니다. 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이삭은 우물을 잃게 됩니다. 당시 이삭에게 우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물이 매우 귀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곳에 머물던지 먼저 우물을 팠습니다. 우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막아버린 것입니다. 이삭을 죽을 지경으로 몰아넣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삭을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물을 얻지 못하도록 해서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저절로 죽게 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참으로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이삭은 이렇듯 잔혹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목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우물을 빼앗기고 그랄 땅에서 추방까지 당하게 됩니다. 이삭이 아주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우물을 잃은 이삭. 그래서 생명의 위협에 처한 채 쫓겨나는 이삭. 이것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첫번째 장면입니다.
II.옛 우물을 다시 파는 이삭(17-18절) 두번째 장면은,“옛 우물을 다시 파는 이삭”입니다. 성경구절은 십칠절과 십팔절입니다. 우물을 잃고난 다음,이삭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이삭의 상황으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대항할 수도 없습니다. 블레셋은 강력한 국가였고, 이삭은 국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대항할 수도 없었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일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곳은 이삭의 땅도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것이라고 우겨대면, 이삭은 할 말이 없습니다. 떠나라고 하면 거기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저항할 힘이 없는 이삭을 쫓아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에게 떠밀려 다니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삭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거기에 매달려 있지 않습니다. 즉각 그곳을 떠나서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쫓겨난 이삭은 새로운 삶의 자리를 찾아서 그랄 골짜기로 들어가고, 그곳에 있던 옛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이삭은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그는 결코 주저앉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놓은 곳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실망되고 좌절되는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른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이 길이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선조인 이삭도 그런 일을 당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 갔더니 일이 또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들이 다 메워져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들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본 이삭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장 마실 물이 없습니다. 물이 없는데,아무리 귀한 것들이 많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마실 물을 얻지 못하면,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도 사람이지만,무수한 가축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삭은 극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도 이삭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종들을 불러서 막힌 우물들을 다시 파게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삭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십시오. 넓은 평지에서 쫓겨나서, 기껏 우물을 찾아서 그랄 골짜기로 들어왔더니 우물들이 다 메워져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어떻게 막아놓았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없도록 단단히 막아놓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막아 놓은 우물을 다시 파고, 거기서 물을 길러서 사람과 가축이 마시려면 보통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이삭은 앞길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한 이삭이 어떻게 하는지 잘 보십시오. 종들을 불러서 메워진 우물을 다시 파게 합니다. 그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놓은 그 우물들을 결국은 다시 파놓고야 맙니다. 언제나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이삭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어떻게 합니까 그 우물들의 이름을 아버지가 부르던 대로 불렀습니다.
이삭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는 우리 앞서 살았던 신앙의 위인들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블레셋 땅에서 우물을 파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당했던 어려움을 아브라함도 당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막아버린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파면서, 거기서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했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어려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한 어려움을 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창교회는 삼십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곳을 거쳐갔던 수많은 사람들. 이 교회는 그들이 역경 가운데서 파놓은 신앙의 우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교회에 들어올 때마다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도 우리처럼 인생의 우물을 파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들을 다 이겨내고 그들의 승리의 우물로 가득찬 이 교회를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옛우물을 기억하라.”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파는 이삭을 통해서 이 시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III.새 우물을 파는 이삭(19-22절) 세번째 장면은 “새 우물을 파는 이삭”입니다. 성경구절은 십구절에서 이십이절까지입니다. 그랄 골짜기로 쫓겨들어온 이삭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서 거기서 물을 길어 먹었습니다. 이것으로 일단 식수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들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때보다 사람도 많아지고 가축도 더 많아졌기 때문에, 더 많은 우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새로운 우물을 팝니다. 이제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이 아닌, 자기의 우물,“이삭의 우물”을 팝니다. 자기 우물을 파는 이삭. 이삭은 여기서도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네 자신의 우물을 파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을 파야 합니다. 옛 사람들이 경험한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신앙도 본받아야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우물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여러분 자신의 우물을 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새 우물을 파면서 이삭은 이렇듯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삭은 또 어려움을 격게 됩니다. 기껏 우물을 파놓았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자기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참 끈질기고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우물파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아무데나 팔 수도 없고, 물줄기를 잘 잡아서 파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면 단번에 물을 얻을 수도 있지만,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다가 물을 얻게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십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샘근원을 얻었더니.” 이삭의 종들이 샘근원을 얻기까지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파놓은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것이라고 우겨대는 것입니다. 속터질 노릇이지요.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고 했습니다.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냥 넘겨준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장소를 옮겨서 다시 우물을 팝니다. 이때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밀려서 골짜기 안쪽으로 더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샘근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삭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것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의 이름을 “싯나”라고 했습니다. “싯나”의 뜻은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대적’은 ‘다툼’보다 더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전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또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서 골짜기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때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합니다. 이제야 이삭은 블레셋 사람의 냉혹한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당하는 고초를 굳굳하게 견디어 왔습니다. 이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코 나약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물을 빼앗기면 다른 우물을 팝니다. 그 우물을 또 빼앗기면 다시 다른 우물을 팝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의 지혜를 보게 됩니다. 이삭은,자기가 애써 파놓은 우물을 빼았긴 것은 억울한 일이지만, 그것을 붙들고 블레셋 사람들과 다투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다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차라리 다투는 데 힘을 쏟느니, 그 힘으로 우물을 하나 더 파는 게 났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쓸데 없는 데 힘을 쏟는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삭의 지혜로운 모습을 생각하십시오. 그 힘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십시오. 우리가 해놓은 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시비를 걸 때, 그들과 다투지 말고,다툴 힘으로 다른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우리는 우물을 파는 이삭의 모습을 통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굳굳하게 극복해가는 위대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시기해서 우물들을 흙으로 메워버렸을 때, 그곳에서 쫓겨나와 그랄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파놓았던 우물들이 흙으로 메워진 것을 보았을 때, 그 우물들을 다시 파고, 블레셋 사람들이 억지를 부리면 다시 다른 우물을 파면서 끝까지 버텨나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르호봇”에 이르게 됩니다. 이십이절을 보십시오:“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곳을 왜 르호봇이라고 했습니까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삭은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삭이 만난 하나님은 르호봇의 하나님입니다. 에섹과 싯나를 거쳐서,다툼과 대적함을 지나서, 놀라운 복을 주시는 르호봇의 하나님을 이삭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삭이 르호봇의 하나님을 경험하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십이절에 보면,이삭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넓은 평지에서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쫓겨나서 그랄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활동할 수 있는 폭이 그만큼 좁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다시 밀려나서 골짜기 깊은 곳으로 쫓겨 들어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골짜기 안쪽안쪽으로 몰아넣어서 이삭이 더 이상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이삭에게서 물러갑니다. 이삭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그 팔벌린 틈도 없는 좁디좁은 그랄 골짜기 속에서 이삭은 르호봇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장소를 넓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하나님께서 르호봇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삭은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 이삭은 얼마나 굳굳한 사람입니까 겉으로는 유약한 것같아도, 속으로는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숱한 우물들을 잃으면서도 그것들에 연연해 하지 않고 새로운 우물들을 계속 팠던 사람. 그래서 결국 르호봇의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 우리의 위대한 이삭. 그는 묵묵히 우물을 파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도 삶의 우물을 파고 있는 우리들에게 결코 좌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끝내 르호봇의 하나님을 만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어려움을 끝까지 견뎌내어서 르호봇의 하나님을 경험하라.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한계를 깨뜨리시고, 우리의 활동영역을 넓혀주시는 하나님.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위축될 때마다, 우리의 세계를 넓혀주시는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더 많은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르호봇의 하나님. 우리의 사업을 부흥케하시고, 우리의 가정을 번영케 해주시고, 우리의 교회터를 넓혀주시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실 하나님. 바로 이분이 그랄 골짜기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이삭이 만난 르호봇의 하나님입니다. 마치는 말 이 시간도 삶의 우물을 파는 이 시대의 이삭들이여.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랄 골짜기와도 같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마다, 르호봇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바로 그곳이 르호봇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이 르호봇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이 르호봇이 되게 하십시오. 이 교회가 르호봇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던지 그곳이 르호봇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분명히 기억하십시오:사천년전 그랄 골짜기에서 이삭이 만났던 그 르호봇의 하나님을 이 시간 우리도 만날 수 있습니다. 르호봇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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