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 개혁 (롬1:17)
본문
확실히 16세기는 현대사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신교(新敎)의 불로가(不老泉)'(Jungbrunnen des protestantismus)이라고 부르는 마틴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점화된 것입니다. 그는 1483년 10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시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546년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나 같은 출생지 고향에 묻힌 63년간을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성실한 부인 가트린이 있었고 저들 사이에 네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어린 시절을 만스펠트(Mansfeld)에서 보내면서 1497년까지 농촌 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공동생활 형제단의 문하생으로 막데부르그(Magdeburg)에서 1년을 배우고,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공부를 하다가 1501년에 유명론의 보루로 명성을 떨치던 에루푸르트(Erfurt)대학에서 학문을 습득하였습니다. 1502년에 그 곳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다시 3년 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505년 7월 2일 친구와 함께 비를 피하러 나무 밑에 있다가 옆에 있는 친구가 낙뢰로 인하여 죽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가족을 놀라게 해 버렸습니다. 그후 1506년에 수도의 맹세를 하게 되고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게 되고, 1509년에 신학사로 승진하게 되고,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소위 성(聖) 로마의 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1512년에 신학 박사가 된 그는 빗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에서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그리고 1519년에 다시 시편 주석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11개 수도원을 순회하면서 설교하였습니다. 이 때는 벌써 그의 마음 속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어거스틴 신학에서 은총의 세계에 눈이 열린 후부터 그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됐느냐'의 문제가 더 중대함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그는 하나님은 율법만 행사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뿐아니라 자신이 보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I. 루터의 개혁적 발견(탑의 경험) 루터가 종교 개혁자로서 하나님이 그를 붙잡게 된 것은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 구절은 그가 로마 여행 중, 소위 거룩한 빌라도의 사닥다리의 층계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던 중 그 마음에 번개처럼 떠올라서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하고 기어 오르던 계단을 걸어 내려오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년후인 1515년 11월 빗덴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이 구절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갈망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신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크게 열려진 문을 통하여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 듯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빗덴데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 탑 안에서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탑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1531년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빛을 받기 전 나는 교황청의 법령들과, 교부들의 전통들에 집착해 있었고 또한 그것들을 거룩하며,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매우 진지하게 옹호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해서 금식과 철야 기도, 그리고 기타 다른 방법으로 그것들을 지키려 애썼으며, 내가 내 몸을 시달리게 하되 오늘날 나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되는 영광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나를 그토록 맹렬히 증오하고 박해하는 자들 이상으로 그러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중대한 것은 루터의 개혁적 발견은 바로 로마서 1장 17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 오직믿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곧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고, 사함을 받아 무죄인으로 의롭다 칭해 주는 칭의의 은총이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의 빛이 로마의 루터를 살리고 독일과 구라파와 세계를 빛의 궁전, 은총의 세계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행함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가르친 1000년이 넘는 로마 카톨릭의 이행득구주의 이단 사상에서 모든 영혼을 해방시킨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Ⅱ. 루터 개혁 운동의 발단 당시 독일 빗덴베르그 대학에는 매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경 젊은 두 수도사는 빗덴베르그 시의 성교회 (城敎會) 정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그 건물은 대학 부속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고로 교수나 학생들의 게시판으로 알려 졌습니다. 거기에 도착한 두 수도사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라틴어로 쓰여진 한 문서를 꺼내어 나무로 만든 문짝 문 위에 못질하여 달았습니다. 그 글 서문에 '진리를 밝히고 싶은 열망심에서 문학사요, 신학사이며, 신부인 루터의 사회로 다음의 논제들이 빗덴베르그에서 토의되겠습니다. 이 구술 토의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서신으로라도 의견을 전해 주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공개 토론 내용의 문서가 저 유명한 95개 조항이었습니다. 이 문서가 공개된지 2주만에 전 독일을 불질렀고, 4주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가 저 유명한 면죄부(속죄권) 판매를 위하여 교황의 깃발을 들고 빗덴베르그 시를 흥분시키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ST. Peter' s)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중단시키기 위해 속죄권 판매를 강권하고 있었습니다. 100년동안 끌어오던 공사 비용을 메우기 위해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재개한 것입니다. 이 속죄권 판매는 십자군 군사비 거출을 위해 이미 13세기에 시행되어 왔던 것입니다. 판매 수입고를 올리기 위해서 그 수입의 반액은 지방 감독이 차지하고, 또 판매 책임자는 그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마인즈 감독 알브레흐트(Albreght)의 파송을 받은 판매 책임자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 텟젤(Johann Tetzel 1465-1519)은 당대의 웅변가요, 학자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크게 외치기를 '속죄권(면죄부)을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속죄권을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를 루터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 텟젤의 입성을 막고, 속죄권 반대에 대한 설교를 하고 95개 조항의 공개토록 제목을 제의한 것입니다. 그 중심 내용은 속죄권은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속죄권은 죄의 벌로 면할 수 없다. 속죄권이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없다. 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았다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당시 그 성의 교회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의 그릇으로 꽉차 있었고, 1만 8천이나 되는 이른바 성골이 영민하고 있었습니다. 성자의 날에는 이 성골에 예배 행렬이 줄을 이었고, 교회 건물의 거리에는 성물이 진열되었습니다. 각처로부터 온 순례자들은 많은 제물과 촛불을 들고 물밀듯이 몰려 왔을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성골과, 성의(거룩한 옷) 앞에 입맞추고, 기도하고, 죄 사함 받는 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거기에다 이제 면죄부(속죄권) 판매가 중세 구라파인들과 독일인들의 많은 피를 빨아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로마 사람들은 독일을 위시한 구라파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었습니다. 그 중에도 독일로부터도 금과 은이 로마의 금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루터의 가슴에 구원의 길은 면죄부가 아닌 믿음이라고 하는 소리를 지르게 한 것입니다. 바로 그 소리가 면죄부 판매 때문에 점화된 것입니다. 이 면죄부 판매 운동이 아니었다면 종교개혁이 지연되었을는지 모릅니다.
Ⅲ. 영의 전투 다음해 7월, 당황한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응하자 신학자요, 추기경인 카제타누스(Cajetanus)를 시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519년에는 이 일로 인하여 큰 격돌이 일어났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카톨릭 학자 엑크(John Eck)와 루터 사이에 변론이 붙었습니다. 이 때 엑크는 루터를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이 역사적 토론 후 루터는 1520년 세 개의 중요한 신학 논문을 발표하여 보다 넓고 높고 깊은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첫 논문이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신자들은 다 복음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권이 일반 사람보다 우월할 수 없다. 신자들이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만이 성경 해석 권은 잘못되었다. 교황만이 교회 회의 소집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교황의 월권, 성직자의 독신주의, 교회의 사치 등을 비난하고, 신학 교육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두 번째 논문은 '교회의 바벨 포로'라고 한 글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참된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온갖 인간적인 성례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 글에서 화체설을 반대하고 공재설(共在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로마 카톨릭의 온갖 사슬에서 자유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후 예상대로 1920년 6월 15일에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행되었고, 그후 12월에 교황의 사절단이 빗덴베르그에 도착하여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이 때 루터는 기다린 듯이 12월 10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주저 없이 파문장과 교회 법전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나중에 교황청은 파문장을 보낸 후, 독일 국회에 압력을 보내어 루터를 정죄하여 처형하도록 독촉하였습니다. 마침내 1921년 독일은 보름스(Worms)에서 국회를 소집해서, 4월 17일 루터의 출두를 명했습니다. 그 때 친구들은 가는 것을 만류했으나,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고 하면서 거기에 나타났습니다. 그 때 루터는 국민들로부터 황제 이상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루터는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았고, 그 후에 프레드릭공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발트부르크(Wartburg)에 안내되어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신약 성경을 헬라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므로 모든 신자의 성경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1522년에 빗덴베르그로 돌아온 루터는 본격적인 개혁 운동에 착수하여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쓰고, 수많은 논문들과, 성경주석 설교문, 그리고 담화문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교 개혁가 파렐이 말한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을 비난한 것은 잘못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못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였다" 고하였습니다. 물론 파렐의 이 말은 로마 천주교의 부패한 생활을 지적하지 아니함이 아니라 저들의 부패는 잘못 믿는 교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입니다. 금년으로 종교개혁 479 주년을 맞게 됩니다. 중세기 종교개혁은 결코 우연한 일이나, 순간적인 폭발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상에 위대한 일은 결코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려는 것같이, 전쟁이 터지려는 것 같이 어떤 암살 사건이나 국가 전복(혁명) 사건이 일어나려는 것같이, 어떤 기간동안 쌓이고 쌓인 누적의 폭발인 것입니다. 무려 1000년이 넘도록 쌓이고 쌓여 온 로마 카톨릭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을 심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만인제사제주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런 것들이 종교개혁의 모토였다면, 오늘도 이 운동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 자체 안에서 이 일이 계속되어야 하고, 밖으로 로마 카톨릭을 향한 신령한 도전에서 그러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종교일치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사탄의 책략 앞에서 크게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I. 루터의 개혁적 발견(탑의 경험) 루터가 종교 개혁자로서 하나님이 그를 붙잡게 된 것은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 구절은 그가 로마 여행 중, 소위 거룩한 빌라도의 사닥다리의 층계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던 중 그 마음에 번개처럼 떠올라서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하고 기어 오르던 계단을 걸어 내려오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년후인 1515년 11월 빗덴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이 구절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갈망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신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크게 열려진 문을 통하여 바로 천국으로 들어간 듯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빗덴데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 탑 안에서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탑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1531년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빛을 받기 전 나는 교황청의 법령들과, 교부들의 전통들에 집착해 있었고 또한 그것들을 거룩하며,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매우 진지하게 옹호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해서 금식과 철야 기도, 그리고 기타 다른 방법으로 그것들을 지키려 애썼으며, 내가 내 몸을 시달리게 하되 오늘날 나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되는 영광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나를 그토록 맹렬히 증오하고 박해하는 자들 이상으로 그러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중대한 것은 루터의 개혁적 발견은 바로 로마서 1장 17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 오직믿음,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곧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고, 사함을 받아 무죄인으로 의롭다 칭해 주는 칭의의 은총이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의 빛이 로마의 루터를 살리고 독일과 구라파와 세계를 빛의 궁전, 은총의 세계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행함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가르친 1000년이 넘는 로마 카톨릭의 이행득구주의 이단 사상에서 모든 영혼을 해방시킨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Ⅱ. 루터 개혁 운동의 발단 당시 독일 빗덴베르그 대학에는 매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경 젊은 두 수도사는 빗덴베르그 시의 성교회 (城敎會) 정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그 건물은 대학 부속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고로 교수나 학생들의 게시판으로 알려 졌습니다. 거기에 도착한 두 수도사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라틴어로 쓰여진 한 문서를 꺼내어 나무로 만든 문짝 문 위에 못질하여 달았습니다. 그 글 서문에 '진리를 밝히고 싶은 열망심에서 문학사요, 신학사이며, 신부인 루터의 사회로 다음의 논제들이 빗덴베르그에서 토의되겠습니다. 이 구술 토의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서신으로라도 의견을 전해 주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공개 토론 내용의 문서가 저 유명한 95개 조항이었습니다. 이 문서가 공개된지 2주만에 전 독일을 불질렀고, 4주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가 저 유명한 면죄부(속죄권) 판매를 위하여 교황의 깃발을 들고 빗덴베르그 시를 흥분시키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ST. Peter' s)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중단시키기 위해 속죄권 판매를 강권하고 있었습니다. 100년동안 끌어오던 공사 비용을 메우기 위해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재개한 것입니다. 이 속죄권 판매는 십자군 군사비 거출을 위해 이미 13세기에 시행되어 왔던 것입니다. 판매 수입고를 올리기 위해서 그 수입의 반액은 지방 감독이 차지하고, 또 판매 책임자는 그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마인즈 감독 알브레흐트(Albreght)의 파송을 받은 판매 책임자 도미닉 교단의 수도사 텟젤(Johann Tetzel 1465-1519)은 당대의 웅변가요, 학자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크게 외치기를 '속죄권(면죄부)을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속죄권을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때를 루터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 텟젤의 입성을 막고, 속죄권 반대에 대한 설교를 하고 95개 조항의 공개토록 제목을 제의한 것입니다. 그 중심 내용은 속죄권은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속죄권은 죄의 벌로 면할 수 없다. 속죄권이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없다. 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았다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당시 그 성의 교회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의 그릇으로 꽉차 있었고, 1만 8천이나 되는 이른바 성골이 영민하고 있었습니다. 성자의 날에는 이 성골에 예배 행렬이 줄을 이었고, 교회 건물의 거리에는 성물이 진열되었습니다. 각처로부터 온 순례자들은 많은 제물과 촛불을 들고 물밀듯이 몰려 왔을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성골과, 성의(거룩한 옷) 앞에 입맞추고, 기도하고, 죄 사함 받는 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거기에다 이제 면죄부(속죄권) 판매가 중세 구라파인들과 독일인들의 많은 피를 빨아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로마 사람들은 독일을 위시한 구라파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었습니다. 그 중에도 독일로부터도 금과 은이 로마의 금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루터의 가슴에 구원의 길은 면죄부가 아닌 믿음이라고 하는 소리를 지르게 한 것입니다. 바로 그 소리가 면죄부 판매 때문에 점화된 것입니다. 이 면죄부 판매 운동이 아니었다면 종교개혁이 지연되었을는지 모릅니다.
Ⅲ. 영의 전투 다음해 7월, 당황한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응하자 신학자요, 추기경인 카제타누스(Cajetanus)를 시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1519년에는 이 일로 인하여 큰 격돌이 일어났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카톨릭 학자 엑크(John Eck)와 루터 사이에 변론이 붙었습니다. 이 때 엑크는 루터를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이 역사적 토론 후 루터는 1520년 세 개의 중요한 신학 논문을 발표하여 보다 넓고 높고 깊은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첫 논문이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신자들은 다 복음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권이 일반 사람보다 우월할 수 없다. 신자들이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만이 성경 해석 권은 잘못되었다. 교황만이 교회 회의 소집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교황의 월권, 성직자의 독신주의, 교회의 사치 등을 비난하고, 신학 교육의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두 번째 논문은 '교회의 바벨 포로'라고 한 글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참된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온갖 인간적인 성례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 글에서 화체설을 반대하고 공재설(共在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로마 카톨릭의 온갖 사슬에서 자유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후 예상대로 1920년 6월 15일에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행되었고, 그후 12월에 교황의 사절단이 빗덴베르그에 도착하여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이 때 루터는 기다린 듯이 12월 10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주저 없이 파문장과 교회 법전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나중에 교황청은 파문장을 보낸 후, 독일 국회에 압력을 보내어 루터를 정죄하여 처형하도록 독촉하였습니다. 마침내 1921년 독일은 보름스(Worms)에서 국회를 소집해서, 4월 17일 루터의 출두를 명했습니다. 그 때 친구들은 가는 것을 만류했으나,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고 하면서 거기에 나타났습니다. 그 때 루터는 국민들로부터 황제 이상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루터는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았고, 그 후에 프레드릭공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발트부르크(Wartburg)에 안내되어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신약 성경을 헬라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므로 모든 신자의 성경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1522년에 빗덴베르그로 돌아온 루터는 본격적인 개혁 운동에 착수하여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쓰고, 수많은 논문들과, 성경주석 설교문, 그리고 담화문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교 개혁가 파렐이 말한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을 비난한 것은 잘못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못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였다" 고하였습니다. 물론 파렐의 이 말은 로마 천주교의 부패한 생활을 지적하지 아니함이 아니라 저들의 부패는 잘못 믿는 교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입니다. 금년으로 종교개혁 479 주년을 맞게 됩니다. 중세기 종교개혁은 결코 우연한 일이나, 순간적인 폭발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상에 위대한 일은 결코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려는 것같이, 전쟁이 터지려는 것 같이 어떤 암살 사건이나 국가 전복(혁명) 사건이 일어나려는 것같이, 어떤 기간동안 쌓이고 쌓인 누적의 폭발인 것입니다. 무려 1000년이 넘도록 쌓이고 쌓여 온 로마 카톨릭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을 심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만인제사제주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런 것들이 종교개혁의 모토였다면, 오늘도 이 운동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 자체 안에서 이 일이 계속되어야 하고, 밖으로 로마 카톨릭을 향한 신령한 도전에서 그러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종교일치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사탄의 책략 앞에서 크게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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