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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의 노래 (창4:16-24)

본문

경제위기 시대를 맞이하여 직장 잃은 남편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가정 경제가 흔들리고 이제는 주부들이 경제 일선에 나서는 모습도 흔히 보게 됩니다. 이럴 때면 어깨가 처지고 고개를 숙인 남자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남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아내 앞에서만큼은 당당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자기 남편이 늘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게 여자들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요즘 정덕희 교수의 지쳐 있는 남편 기살리기 라는 강의가 한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정교수의 강의를 듣다 보면 저도 ‘그래 맞다!’ 하면서 맞장구를 치게 됩니다. 많은 여자들도 공감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강의의 내용은 오늘날 세상이 남자 기죽이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당신 남편만큼은 기를 살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사람들은 당당한 남편, 잘나가는 남자가 되기를 서로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기를 세우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아야 합니까 왜 남자는 당당해지고 싶어합니까 왜 여자는 자기 남자가 당당해지기를 소원합니까 그렇게 되면 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도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잘나가는 모습이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얼마나 기죽이는지 아십니까 남자로서 여자 앞에 당당하고, 남편이 아내 앞에서 당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한 그렇게 하면 그 가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또 그것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당당해지기 위해 모두가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옳은 모습입니까 이런 모습과 생각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인의 후예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날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지향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별개의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속에는 라멕이라는 육중한 체구에 최고의 매력을 지닌 남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세 가지 하나님 앞에 중대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것도 실수가 아닌 다분히 의도적인 죄입니다.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 라멕의 모습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내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두 아내를 취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시작된 인류의 죄악이 가인으로 인하여 표면화되고 라멕에 이르러 극대화되었습니다. 그가 지은 첫 번째 죄는 두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성경이 결혼의 신성함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4-6) 최초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아담이 불렀습니다. 그는 아내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행복한 가정의 비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라멕은 인류 최초의 일부다처주의자입니다. 그는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둘이 한몸이 될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성경은 가정 안에서 인간의 행복의 비결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잠5:18-20)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 거스르기 위하여 두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다분히 도전적입니다. 하나님이 네 품안에 아내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니까 거스르기 위하여 일부러 첩을 취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라면 다 거부하고 싶어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당당함으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요즘 이정재, 이미숙 주연의 정사 라는 영화가 한창 인기입니다. 그 영화가 인기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 싶은 인간 내면의 잠재의식 때문입니다. 몸은 아니어도 마음이라도 내 남편 내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그런 영화를 좋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사랑을 꿈꿔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빗나간 사랑을 죄악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외도도 남이 하면 스캔들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가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세상을 향해 당당해지고 싶어하는 라멕적 사고가 하나님을 앞에 중대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2. 소년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는 가인입니다. 그 뒤를 이은 자가 바로 라멕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라멕의 범죄가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1 자신의 창상과 상함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고 입을 수도 있습니다.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기에 상대방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관대한 용서를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라멕은 어린 소년의 실수로 인하여 작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라멕은 즉각적으로 보복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기가 피해를 입은 만큼 상대방에게 보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예 그의 생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지난주에 민방위 훈련에 참석했습니다. 동해안으로 계속적으로 간첩이 침투하고 잠수정이 내려와 한참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북한에서 행한 대남방송을 시청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훈련 중에 조난당한 자신들의 잠수정을 가지고 남한이 간첩을 침투시켰다고 생떼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빨리 공작원들과 잠수정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호식량을 보내 주고 소를 보내 줘도 호전적인 저들의 태도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라멕적 사고를 하고 있는 개선 불가능한 집단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인간,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인간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인간은 용납치 않는 강퍅함이 오늘날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2 나이 어린 소년을 죽였습니다. 라멕의 살인에 있어서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라멕이 죽인 사람이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소년과 어른은 싸울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소년이 자신에게 작은 피해를 입히자 라멕은 가차없이 죽인 것입니다. 왜 나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혀도 상관없고 나는 피해를 입어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자기가 곧 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이 된 사람은 나의 최고 됨에 방해가 되고 나의 신 됨을 인정치 않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인 나에게 도움은 못줄 망정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신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모두 이런 라멕적 사고 속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9:3-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성경에서 피는 곧 생명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 고귀한 생명을 피에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뒤에 먹을 것이 없는 인간들에게 동물을 음식으로 먹을 수 있게 하셨으나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음으로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간으로 하여금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곧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생명에 대한 경시사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보다 병원에서 낙태되는 아이의 수가 몇 배로 높은 것을 보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생명을 파리 목숨 없애듯 빼앗습니다. 자신마저 사랑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생명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라멕은 소년을 죽이고 자랑처럼 그것을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도 자기 눈에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용서치 않겠다는 공격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범죄 후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자 동산 나무 뒤편으로 얼른 숨어 버렸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 그는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대답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죄를 숨기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고 말았을 때 극도의 공포감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라멕은 끔찍한 죄를 저질러 놓고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같은 살인자로서 가인과 라멕을 서로 비교해 보십시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1-14) 하나님이 네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을 때 가인은 내 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했습니다.
가인이 벌에 대하여 두려워 떨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입니다. 1 다시는 그가 주의 낯을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땅을 떠나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고 분리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일생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날마다 피하며 쫓기는 생애가 되었습니다. 또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며 날마다 떠도는 나그네의 인생의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의지하며 기대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유리함으로 방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3 자기를 만나는 자가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웠습니다. 죄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아담이 그러했고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라멕의 모습은 범죄 후에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무고한 생명을 죽여놓고도 오히려 그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24)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이라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죽이면 가인을 죽인 자도 또 가인처럼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인의 연속성을 끊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무도 그의 생명에 대하여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살아서 그가 다른 인생들에게 보여줘야 할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범죄 후에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죄인가를 알았습니다. 정말로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하여 살기를 간청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라멕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살인자 가인을 죽이는 자가 가인이 받은 벌의 칠 배를 받아야 한다면 자신을 죽이는 자는 자신이 받을 벌의 칠십 칠 배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뭔데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보호를 받아야 합니까 라멕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두 아내를 취한 자입니다. 작은 실수로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해서 나이 어린 소년을 가차없이 죽인 끔찍한 살인자입니다. 도대체 이렇듯 악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듯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입니까 라멕 자신이 곧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자연만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목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신이 될 때는 이 상황이 어떻게 역전됩니까 내가 신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도 곧 나를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이렇듯 삭막해지고 살벌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멕과 같은 사상 때문입니다. 라멕 정신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길에 방해가 되는 모든 세력에 대한 척결입니다. 그가 누구든 상관이 없습니다. 걸리면 죽이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길에는 전진, 또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절대 남을 용서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자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유난히도 이름이 강조되며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라멕은 누구와 자신을 비교합니까 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과시합니다. 결국 라멕의 후손의 특징은 자기 이름을 존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의 후손이 되어 바벨탑을 세웠습니다. 바벨탑을 세운 영웅은 니므롯입니다.(창10:8,9) 그가 바벨탑을 세운 목적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 안에는 누구든지 라멜과 같은 사악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온갖 형태로 우리는 죄를 지으며 미워하면서 상대방을 죽이고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이런 사람들을 부추켜 가지만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늘 자신을 낮추며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면 주님이 죽고 내가 부정될 때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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