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욘1:1-16)
본문
요나서는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장 가까운 가드헤벨에서 출생한 아밋대의 아들 요나(왕상14:25)를 불러 선지자로 세우시고 동시 최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성의 멸망을 예고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나서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또한가지의 주제는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죄악의 도성 니느웨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요나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멀리멀리 도망하는 요나의 도피행각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고 드디어 그를 버리시지 않고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를 다시 불러 들임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는 과정이 전개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요나처럼 참된 증인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1.요나가 받은 사명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을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1:2상) 느니웨성 가로를 질러 3일 길을 걸어야 하는(3:3)큰 도성으로 어린아이만 12만이 되는(4:11) 당시의 최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성벽의 높이가 100피트 이상이요 폭은 큰 수레 3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악독한 성, 피의 도성이었습니다(1:2,홈3:1-5). 여러 나라를 지배했으니 피지배국에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쳐라’ 이것은 회개 촉구의 복음이었고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요나에게는 반갑지 않은 분부였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세가지 명령은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의 예수님의 명령과 흡사합니다. 먼저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는 사명을 위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창13:17,수1:2,행8:26,9:10,10:20). 다음에는 가야 합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직장에 흩어지면 그곳에서 복음을 확장하고 성도들이 서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이 드러나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서는 입을 열고 전해야 합니다. 증거는 사명이요 사명은 곧 그리스동인의 생명입니다. 사명수행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부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분부가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이 짧아 우리 수준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의 이해 속에서 판단이 되기 때문에 자기 수준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다가도 알고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어그리고 점점 불순종과 무감각과 불평과 이기심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인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성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고 마음 구석구석을 청소합니다.
2.요나의 거부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1:3상)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라서 말씀에 대한 거부감정이 생겼습니다. ‘악독한 도성은 회개할 필요도 없이 망해 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앗수르가 망할 것을 기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또한가지 이유는 종교적, 신앙적인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선민 만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원수 나라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한가지 이유는 가서 말씀을 외치면 선지자가 왔다고 환영과 대접을 할 것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와 학대 밖에 당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불안과, 초조, 공포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니느웨성의 악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요나는 ‘그러나’ 로 반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때 항상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합니까” 이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무조건 순종 뿐인 성도의 삶에서 ‘그러나’는 조건부 불순종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그러나’라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나’ 라고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너는 자꾸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너는 순종만 해 보아라 복이 임한다”라고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까. 익서을 행하면 살고 행하지 못하면 죽을 것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의유혹을 피하십시요. ‘그러나’의 함정에 빠져서 원치 않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지 맙시다. 양심생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의 반응으로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지 맙시다. 성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앞에 ‘그러나’ 세상이 다 악하니 나 혼자서 성결해야 무슨 유익이 있으리이까‘ 로 나락에 떨어지지 맙시다. 정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 세상이 다 제길로 가는데 나혼자 정도를 걸어 별 수 있습니까, 로 거스리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러나’로 말씀하시게 합니다. 그러나 의 조건부 신앙은 하나님의 길에서 어긋나게 합니다. 죄악의 도성, 원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본 요나는 순간 못마땅하여 ‘그러나’의 이유를 달아 불쾌와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 하였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 딴길로 가서 입을 다물었습니다.‘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되 무엇을 위해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길로 가지 않고 제길로 갔습니다. 가릇 유다 처럼 제길로 간 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을 가야할 요나도 그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제길로 간 것입니다. ‘요나’는 히브리어로 ‘비둘기’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결과 순종의 뜻과 달리 질투와 편협심, 고집과 불평으로 순종의 길을 가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이름과 삶이 같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유익’이란 뜻의 오네시모는 도덕질한 무익한사람이었고 “무죄자” 란 뜻의 삭개오는 실재로는 선량한 백성을 토색한 죄인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삶의 차이가 백지 한 장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왔느냐 제길로 갔느냐의 차입니다. 두길 만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과 하나님을 배역하고 제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확환 길을 않고 자기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돌이킵시다, 세계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나의 열심으로 삼읍시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특심하게 합시다. 침묵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입을 열고 외침시다. 내가 서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합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증거합시다.
3.요나의 도피행각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1:3하) 불순종의 섬리가 작용할 때 저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을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컴컴한 새벽 아직 땅거미가 거두어지는 새벽이 오기 전 저 동쪽 바다에서 해가 솟아오르기 전, 새벽 햇살의 날개를 타고 도망을 갔으나 그 속도가 얼마나 빠릅니까(시139:7). 요나는 항구로 바꾸어 욥바로 내려 갔습니다. ‘내려 갔다’는 말씀은 지리적인 표현 만은 아닙니다. 영적인 귀한 진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독인들은 독수리처럼 올라가야 하는데 땅거미처럼 내려갑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 갔고 배 밑층으로 내려 갔습니다. 그가 어디까지 내려 갔습니까 산의 뿌리까지 내려 갔으니 엄청난 낙하입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짜꾸 내려가는데 한꺼번에 뚝 떨어지는 것ㅇ 아니고 한겹 한겹 내려 갑니다. 요나는 뱃삯을 지불했으나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배삯만 아깝게 손해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메사에 손해를 봅시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 모든 것이 형통할 것같은데 불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불통일 것같으나 형통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목적을 이루되 삯까지 받아가며 이룹니다. 요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되 삯까지 잃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눈을 피하려고 하면 삶이 자꾸 내려갑니다. 사업이 안되고 직장에서 떨려나고 몸에 병들고 마음에 병들었습니까 교통 사고, 화재, 재난이 자꾸 일어나 되는 일이 없습니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이와같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연단으로 받으시고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십시오, 그 길만이 회복하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죄악으로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돌이켜 회개하여 구원 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4.여호와의 추적
1).자연 동원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1:4상) ‘도망’ 이라는 뜻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부터 도피 혹은 포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도망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시지는 않습니다. 여호와는 새벽날개보다 더 빨리 요나를 추적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빨리 도망을 가봐도 하나님의 눈초리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초에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갈 생각을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세상 도처에 편만해 계시는 하나님을 어디 가서 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센 바람과 폭풍을 요나를 향하여 ‘세게 던졋습니다’ (원어의 의미). 순종치 않는 종을 죄 가운데 오래 머물게 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요 선민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의 간섭이 매우 혹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표현일 뿐입니다. 풍랑 가운데 휘몰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빈축을 사고 있습니까 깨어나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다른 사람의 열심에 비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열심이 아니라 내가 나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포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날마다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회유책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1:4하) 사람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을 갔던 요나는 내리막 길로 가게 되었고 선가는 지불되었어나 목적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의 불순종한 범죄가 타인까지 위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회유정책을 쓰셨습니다. 큰 광풍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노늘날 세계의 지도자(선원으로 등장됨)들은 경제문제, 평화문제, 질병문제, 대립문제, 세계적인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그것에서 구출받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짐을 바다에 빠뜨리는 지혜와 사람까지 던져야 하는 최악의 노력을 동원하나 결국은 인간의 한계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풍랑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회유책인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범죄로 인하여 일어난 세상 풍랑은 한계를 넘어서 이방 사람들까지 이릅니다. 범죄를 한 요나는 죄는 자기가 범해 놓고 배 밑층에 내려가서 숨었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도 그 거스림 때문에 일어난 환난을 외면한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지금 문제에 당면해 있으면서도 그 문제성조차도 인식을 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그 때가 위기입니다. 모든 것이 좋다 좋다 할 그 때가 위험한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문제성에 직면하여 외면하지 말고 직감하고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할 때에 열심히 설교는 했는데 어떤 때는 성도들이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말씀은 증거를 했지만 문제성을 지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자기들의 문제와 연결을 시키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서 빙빙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깨닫고도 외면한다면 해결은 커녕 오리무중이요 공중누각을 쌓은 어리석음을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풍랑의 노도에 무감각해서는 안됩니다. 외면해서도 안됩니다. 그 의미를 타진하고 문제를 인식하고 위험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오리무중에 빠져들어 정신이 마비되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 명철을 구합시다. 사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인간을 회유키 위해 자연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이방인 사용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1:6하) 요나는 배 밑충에서 잠들면서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할 것입니다. 배가 가고 있는 한 안전할 것이라’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안도감에 깊이 잠에 빠졌습니다. 죄가 그를 무감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풍과 공포, 놀람, 열광적인 일들이 그의 잠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잠에 깊이 빠지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인 사건을 보는 눈이 감겨 집니다. 요나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싶을 때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계획이 다 이루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순간 그 계획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교도를 통해 요나의 잠을 흔들어 깨웁니다. 불순종한 자에게 안전한 잠은 없습니다(시127:2). 잠을 깬 요나 앞에서 무서운 태풍이 생명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잠이야말로 일창춘몽이었습니다. 제비는 시행되었고 요나는 뽑혔습니다(잠16:33). 요나는 결국 질문 공세를 받습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생업. 고국. 민족이 무엇이냐” 불순종한 자의 결그은 고난과 환란과 고통과 조소뿐입니다. 질문 공세를 받은 요나는 비로소 선지자의 역활로 돌아옵니다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이 지경이 되었노라” 출애굽 당시 하나님 재앙을 내리신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애굽 군대를 수장시킨 하나님, 40 년간 광야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 하셨던 그 권능의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기브온 골짜기에 태양을 머물게 하시고 아모리 백성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을 알고 태풍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요나의 배신 행위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주위에 일어난 풍랑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 현장을 존재케한 원인, 나의 죄를 더 무서워 해야 합니다. 회교도들이 하루에 다섯차례 기도하고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도생활의 부끄러움을 깨워주고 있습니다. 양심이 알도록 현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도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고 일장춘몽에 빠져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머지 않아 하나님이 태풍으로 쫓아오실 것입니다. 태풍이 오기 전에 돌이킵시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세계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곳에 재앙의 풍파가 일어납니다. 양심의 고통, 내외적인 폭풍을 면해야 합니다. 눈을 열어 징계의 태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천재지변, 기근, 질병, 사상의 혼탁, 무력상잔들의 원인을 이 민족에서 제거하기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5.요나의 반항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12상) 태풍이 불자 사공들은 각각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종교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신을 부르는 종교행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또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환경정비 입니다. 환경이 불량하여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니까 환경이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는 문제해결은 안됩니다.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나 더욱 흉용한 풍랑에 무리가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너에게 어떻게 하랴” 요나가 대답할 정답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배를 니느웨로 돌려라”여야 했습니다. 큰 풍랑을 만난 것이 자기의 연고라는 문제점은 알았지만 요나는 바른 해결책을 쓰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해결책은 죄를 고백하고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대답은 반항입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어떻게 보면 요나가 책임을 지는 것같지만 하님 앞에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니느웨로는 가지 않겠다는 거역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해결될 일은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악독과 강퍅이 여지없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기자처럼 요나는 “하나님이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아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오늘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이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용서해 주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사오니 배를 돌려 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게 해 주옵소서” 하여야 할 요나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방인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고 제물과 서원을 드렸습니다. 성도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났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항거해 보지 않은 자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나의 반항입니다. 이방인들은 요나를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보다도 못한 선지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받을까봐 오히려 걱정이나 하고 근심하면서 그곳을 가기를 거절했던 요나입니다. 뱃사람들은 요나 죽이기를 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13절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뱃사람들은 세번 씩이나 놀랍니다. 폭풍우가 일어났을 때 놀랬고 요나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 놀랬고 여호와를 알고 두려워 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원을 하였습니다(16절). 이 서원은 구원을 받은 후에 한 서원이므로 어떤 면에서 진실합니다. 참회 속의 서원은 변할 수가 없는 법이고 마지막 궁지에 떨어졌을 때 하는 서원은 진실한 것입니다. 이방 선언들의 회심은 요나에게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일을 통해서 벳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끊고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고 하는 이 짧은 구절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기어코 이루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은 장소에 굳건히 서 계십니까 이탈되어 있습니까 문제의 해결은 이탈된 장소에서 사명을 받은 장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도피의 방편으로 사용했던 장소가 벌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려고 하면 일시적인 해결이 될지 모르나 영구적인 해결은 되지 못합니다. 모든 만물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듯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 하루동안도 깨달아야 합니다. 왜 나에게 24시간을 주셨는가. 오늘 어찌하여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나로 하여금 움직일 수 있도록 이 순간 순간을 주셨는지, 오늘도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그 뜻을 내가 먼저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하루가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요나처럼 참된 증인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1.요나가 받은 사명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을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1:2상) 느니웨성 가로를 질러 3일 길을 걸어야 하는(3:3)큰 도성으로 어린아이만 12만이 되는(4:11) 당시의 최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성벽의 높이가 100피트 이상이요 폭은 큰 수레 3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악독한 성, 피의 도성이었습니다(1:2,홈3:1-5). 여러 나라를 지배했으니 피지배국에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쳐라’ 이것은 회개 촉구의 복음이었고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요나에게는 반갑지 않은 분부였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세가지 명령은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의 예수님의 명령과 흡사합니다. 먼저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는 사명을 위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창13:17,수1:2,행8:26,9:10,10:20). 다음에는 가야 합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직장에 흩어지면 그곳에서 복음을 확장하고 성도들이 서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이 드러나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서는 입을 열고 전해야 합니다. 증거는 사명이요 사명은 곧 그리스동인의 생명입니다. 사명수행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부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분부가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이 짧아 우리 수준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의 이해 속에서 판단이 되기 때문에 자기 수준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다가도 알고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어그리고 점점 불순종과 무감각과 불평과 이기심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인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성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고 마음 구석구석을 청소합니다.
2.요나의 거부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1:3상)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라서 말씀에 대한 거부감정이 생겼습니다. ‘악독한 도성은 회개할 필요도 없이 망해 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앗수르가 망할 것을 기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또한가지 이유는 종교적, 신앙적인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선민 만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원수 나라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한가지 이유는 가서 말씀을 외치면 선지자가 왔다고 환영과 대접을 할 것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와 학대 밖에 당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불안과, 초조, 공포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니느웨성의 악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요나는 ‘그러나’ 로 반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때 항상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합니까” 이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무조건 순종 뿐인 성도의 삶에서 ‘그러나’는 조건부 불순종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그러나’라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나’ 라고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너는 자꾸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너는 순종만 해 보아라 복이 임한다”라고 말씀하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까. 익서을 행하면 살고 행하지 못하면 죽을 것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의유혹을 피하십시요. ‘그러나’의 함정에 빠져서 원치 않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지 맙시다. 양심생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의 반응으로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지 맙시다. 성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앞에 ‘그러나’ 세상이 다 악하니 나 혼자서 성결해야 무슨 유익이 있으리이까‘ 로 나락에 떨어지지 맙시다. 정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 세상이 다 제길로 가는데 나혼자 정도를 걸어 별 수 있습니까, 로 거스리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러나’로 말씀하시게 합니다. 그러나 의 조건부 신앙은 하나님의 길에서 어긋나게 합니다. 죄악의 도성, 원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본 요나는 순간 못마땅하여 ‘그러나’의 이유를 달아 불쾌와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 하였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 딴길로 가서 입을 다물었습니다.‘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되 무엇을 위해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길로 가지 않고 제길로 갔습니다. 가릇 유다 처럼 제길로 간 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을 가야할 요나도 그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아 제길로 간 것입니다. ‘요나’는 히브리어로 ‘비둘기’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결과 순종의 뜻과 달리 질투와 편협심, 고집과 불평으로 순종의 길을 가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이름과 삶이 같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유익’이란 뜻의 오네시모는 도덕질한 무익한사람이었고 “무죄자” 란 뜻의 삭개오는 실재로는 선량한 백성을 토색한 죄인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삶의 차이가 백지 한 장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왔느냐 제길로 갔느냐의 차입니다. 두길 만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과 하나님을 배역하고 제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정확환 길을 않고 자기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돌이킵시다, 세계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나의 열심으로 삼읍시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특심하게 합시다. 침묵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입을 열고 외침시다. 내가 서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합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증거합시다.
3.요나의 도피행각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1:3하) 불순종의 섬리가 작용할 때 저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을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컴컴한 새벽 아직 땅거미가 거두어지는 새벽이 오기 전 저 동쪽 바다에서 해가 솟아오르기 전, 새벽 햇살의 날개를 타고 도망을 갔으나 그 속도가 얼마나 빠릅니까(시139:7). 요나는 항구로 바꾸어 욥바로 내려 갔습니다. ‘내려 갔다’는 말씀은 지리적인 표현 만은 아닙니다. 영적인 귀한 진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독인들은 독수리처럼 올라가야 하는데 땅거미처럼 내려갑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 갔고 배 밑층으로 내려 갔습니다. 그가 어디까지 내려 갔습니까 산의 뿌리까지 내려 갔으니 엄청난 낙하입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짜꾸 내려가는데 한꺼번에 뚝 떨어지는 것ㅇ 아니고 한겹 한겹 내려 갑니다. 요나는 뱃삯을 지불했으나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배삯만 아깝게 손해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메사에 손해를 봅시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 모든 것이 형통할 것같은데 불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불통일 것같으나 형통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목적을 이루되 삯까지 받아가며 이룹니다. 요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되 삯까지 잃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눈을 피하려고 하면 삶이 자꾸 내려갑니다. 사업이 안되고 직장에서 떨려나고 몸에 병들고 마음에 병들었습니까 교통 사고, 화재, 재난이 자꾸 일어나 되는 일이 없습니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이와같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연단으로 받으시고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십시오, 그 길만이 회복하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죄악으로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돌이켜 회개하여 구원 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4.여호와의 추적
1).자연 동원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1:4상) ‘도망’ 이라는 뜻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부터 도피 혹은 포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도망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시지는 않습니다. 여호와는 새벽날개보다 더 빨리 요나를 추적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빨리 도망을 가봐도 하나님의 눈초리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초에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갈 생각을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세상 도처에 편만해 계시는 하나님을 어디 가서 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센 바람과 폭풍을 요나를 향하여 ‘세게 던졋습니다’ (원어의 의미). 순종치 않는 종을 죄 가운데 오래 머물게 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요 선민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의 간섭이 매우 혹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표현일 뿐입니다. 풍랑 가운데 휘몰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빈축을 사고 있습니까 깨어나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다른 사람의 열심에 비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열심이 아니라 내가 나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포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날마다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회유책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1:4하) 사람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을 갔던 요나는 내리막 길로 가게 되었고 선가는 지불되었어나 목적지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의 불순종한 범죄가 타인까지 위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회유정책을 쓰셨습니다. 큰 광풍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노늘날 세계의 지도자(선원으로 등장됨)들은 경제문제, 평화문제, 질병문제, 대립문제, 세계적인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그것에서 구출받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짐을 바다에 빠뜨리는 지혜와 사람까지 던져야 하는 최악의 노력을 동원하나 결국은 인간의 한계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풍랑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회유책인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범죄로 인하여 일어난 세상 풍랑은 한계를 넘어서 이방 사람들까지 이릅니다. 범죄를 한 요나는 죄는 자기가 범해 놓고 배 밑층에 내려가서 숨었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도 그 거스림 때문에 일어난 환난을 외면한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지금 문제에 당면해 있으면서도 그 문제성조차도 인식을 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그 때가 위기입니다. 모든 것이 좋다 좋다 할 그 때가 위험한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문제성에 직면하여 외면하지 말고 직감하고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할 때에 열심히 설교는 했는데 어떤 때는 성도들이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말씀은 증거를 했지만 문제성을 지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자기들의 문제와 연결을 시키지 못하고 그냥 공중에서 빙빙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깨닫고도 외면한다면 해결은 커녕 오리무중이요 공중누각을 쌓은 어리석음을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풍랑의 노도에 무감각해서는 안됩니다. 외면해서도 안됩니다. 그 의미를 타진하고 문제를 인식하고 위험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오리무중에 빠져들어 정신이 마비되면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 명철을 구합시다. 사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인간을 회유키 위해 자연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이방인 사용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1:6하) 요나는 배 밑충에서 잠들면서 ‘적어도 당분간은 안전할 것입니다. 배가 가고 있는 한 안전할 것이라’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안도감에 깊이 잠에 빠졌습니다. 죄가 그를 무감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풍과 공포, 놀람, 열광적인 일들이 그의 잠을 깨우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잠에 깊이 빠지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인 사건을 보는 눈이 감겨 집니다. 요나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싶을 때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계획이 다 이루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순간 그 계획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교도를 통해 요나의 잠을 흔들어 깨웁니다. 불순종한 자에게 안전한 잠은 없습니다(시127:2). 잠을 깬 요나 앞에서 무서운 태풍이 생명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잠이야말로 일창춘몽이었습니다. 제비는 시행되었고 요나는 뽑혔습니다(잠16:33). 요나는 결국 질문 공세를 받습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생업. 고국. 민족이 무엇이냐” 불순종한 자의 결그은 고난과 환란과 고통과 조소뿐입니다. 질문 공세를 받은 요나는 비로소 선지자의 역활로 돌아옵니다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이 지경이 되었노라” 출애굽 당시 하나님 재앙을 내리신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애굽 군대를 수장시킨 하나님, 40 년간 광야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 하셨던 그 권능의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기브온 골짜기에 태양을 머물게 하시고 아모리 백성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을 알고 태풍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요나의 배신 행위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주위에 일어난 풍랑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 현장을 존재케한 원인, 나의 죄를 더 무서워 해야 합니다. 회교도들이 하루에 다섯차례 기도하고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도생활의 부끄러움을 깨워주고 있습니다. 양심이 알도록 현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도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고 일장춘몽에 빠져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머지 않아 하나님이 태풍으로 쫓아오실 것입니다. 태풍이 오기 전에 돌이킵시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세계나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곳에 재앙의 풍파가 일어납니다. 양심의 고통, 내외적인 폭풍을 면해야 합니다. 눈을 열어 징계의 태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천재지변, 기근, 질병, 사상의 혼탁, 무력상잔들의 원인을 이 민족에서 제거하기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5.요나의 반항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12상) 태풍이 불자 사공들은 각각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종교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신을 부르는 종교행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또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환경정비 입니다. 환경이 불량하여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니까 환경이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는 문제해결은 안됩니다.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나 더욱 흉용한 풍랑에 무리가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너에게 어떻게 하랴” 요나가 대답할 정답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배를 니느웨로 돌려라”여야 했습니다. 큰 풍랑을 만난 것이 자기의 연고라는 문제점은 알았지만 요나는 바른 해결책을 쓰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해결책은 죄를 고백하고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대답은 반항입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어떻게 보면 요나가 책임을 지는 것같지만 하님 앞에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니느웨로는 가지 않겠다는 거역이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해결될 일은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악독과 강퍅이 여지없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기자처럼 요나는 “하나님이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아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오늘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이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용서해 주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사오니 배를 돌려 나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게 해 주옵소서” 하여야 할 요나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방인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고 제물과 서원을 드렸습니다. 성도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났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항거해 보지 않은 자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나의 반항입니다. 이방인들은 요나를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보다도 못한 선지자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받을까봐 오히려 걱정이나 하고 근심하면서 그곳을 가기를 거절했던 요나입니다. 뱃사람들은 요나 죽이기를 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13절에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뱃사람들은 세번 씩이나 놀랍니다. 폭풍우가 일어났을 때 놀랬고 요나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 놀랬고 여호와를 알고 두려워 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원을 하였습니다(16절). 이 서원은 구원을 받은 후에 한 서원이므로 어떤 면에서 진실합니다. 참회 속의 서원은 변할 수가 없는 법이고 마지막 궁지에 떨어졌을 때 하는 서원은 진실한 것입니다. 이방 선언들의 회심은 요나에게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일을 통해서 벳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끊고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고 하는 이 짧은 구절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기어코 이루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은 장소에 굳건히 서 계십니까 이탈되어 있습니까 문제의 해결은 이탈된 장소에서 사명을 받은 장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도피의 방편으로 사용했던 장소가 벌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려고 하면 일시적인 해결이 될지 모르나 영구적인 해결은 되지 못합니다. 모든 만물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듯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 하루동안도 깨달아야 합니다. 왜 나에게 24시간을 주셨는가. 오늘 어찌하여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나로 하여금 움직일 수 있도록 이 순간 순간을 주셨는지, 오늘도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그 뜻을 내가 먼저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하루가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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