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떠난 후에 오는 것 (창13:14-18)

본문

가난이 원인이 되어 형제나 동기간에 불화하고 싸우는 경우보다는 재산의 분배나 돈 때문에 불화하고 싸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돈보다는 의리가 더 중요하고 재물보다는 핏줄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그러나 돈 때문에 형제가 적이되고 친구가 원수가 되고 동지가 등을 돌리는 경우들이 허다한 세태를 바라보노라면 서글픈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인정을 찾게 됩니다.그것은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나홀과 하란을 동생으로 둔 맏형이었습니다.막내 동생이었던 하란은 롯이라는 아들을 낳은 후 맨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롯은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키우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조카인 롯도 데리고 떠났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롯도 장성하여 독립하기에 이르렀고 제법 재산도 모으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롯은 모두가 목축업자였기 때문에 양이나 소 떼를 키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증식되면서 양쪽 집 종들간의 시비와 충돌이 잦아지는 것이었습니다.충돌과 시비의 원인은 그 지방에 귀한 물과 목초에 있었습니다.
자연히 종들의 시비나 충돌은 주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고 피차 속상할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3:8-9을 보면,어느 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부른 다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그 땅이 아브라함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7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지 롯에게 주신 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소유권과 기득권과 우선권이 아브라함에게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먼저 좋은 입지 조건의 땅을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아브라함이 롯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이 죽고난 후 아브라함은 롯을 책임지고 키웠습니다.그리고 가나안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롯은 아브라함에게 신세를 지며 장성한 손아랫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롯이 양보를 하는 것이 일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며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선택권을 고스란히 롯에게 양보해 버렸습니다.
롯은 야심 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요단 들판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그곳은 물이 넉넉한 곳이었고 에덴 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처럼 기름진 땅이었다고 했습니다.
롯은 그날로 짐승 떼를 이끌고 자신이 선택한 요단 평원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남은 땅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 13절 말씀입니다.롯이 선택했던 비옥하고 물이 흐르는 그곳,여호와의 동산과도 같고 애굽의 곡창처럼 윤기 흐르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악하기 이를 떼 없어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롯이 선택했던 그곳엔 이미 문명을 일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들은 기름진 땅에서 거둔 곡식과 과일로 독주를 담가 놓고 마셨고,경제적인 여유를 구실로 극도의 방종과 타락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이 그 쪽을 택한 것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는 처사였습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14장에 나타납니다.살기 좋은 곳은 탐내는 사람이 많은 법입니다.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 주변의 왕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소돔을 침략했고,그리하여 롯과 그의 모든 소유는 포로가 되고 약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장을 보면 사치와 방종의 극을 치닫던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하게 되던 날,재산은 모조리 불타고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롯은 눈앞에 보이는 조건만을 선택의 조건으로 삼았다가 패가 망신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일보의 양보도 없이 자기 곁을 떠나 버린 롯의 무정 때문에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본문 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14-15절을 보면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말씀을 12:7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12:7에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했고,본문에서는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했습니다.즉,본문에는 “너에게 주리라”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재확인이며 다짐인 것입니다.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보아도 소돔과 고모라를 롯에게 그리고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롯 자신의 안목으로 선택한 땅일 뿐,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본문 13:10을 보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때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롯도 눈을 들어 땅을 바라보았고 아브라함도 눈을 들어 땅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대로 제 생각대로 제 소견대로 땅을 바라본 롯은 그 땅에서 쫓겨났고,하나님께서 바라보라신 그대로 바라본 아브라함은 자기가 바라본 땅의 지주가 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내 뜻대로 결행해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관망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라보고 떠나라면 떠나는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신령한 가나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무를 보고 산천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육안이라고 한다면,신령한 세계를 보고 하나님을 보는 눈은 영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의 눈은 육안이었고 아브라함의 눈은 영안이었습니다.
육안으로는 불로 멸망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고 영안으로는 영원한 가나안을 선택했습니다.
롯은 오로지 소돔과 고모라 그곳만을 바라보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은 동서남북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멀리,높이,넓게,깊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으며 성공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동에서 한 번 실패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서,남,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사람은 동쪽이 막혔다고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봅시다.
2.자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했습니다.
자식처럼 키우고 보살폈던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직후 하니님께서는 땅의 티끌처럼 무수한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가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셀 수 없는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 할 때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16-17절)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은 일 대 일의 법칙에 의하지 않고 일 대 천이나 만이나 수억의 법칙에 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3.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롯이 떠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 주셨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롯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언젠가는 떠날 사람들 언젠가는 내 곁에서 멀어져 가게 될 그 어떤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곁을 떠난 뒤에 주님은 내 곁으로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땅을 받고 후손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곁으로 오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바울과 함께 전도 사역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의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가 버렸고,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 버렸고,디도는 달마디아로 가 버렸고,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가지는 않았지만 집요하게 바울 곁에 붙어 있으면서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나 바울이 고독해졌을 그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셨다”(17절)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를 강건케 하셨다는 것은 나를 위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그리고 나에게 힘을 주시고 믿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건강하고 돈 많고 권력있고 그래서 그 주변에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을 만큼 사람들이 득실거린다면 주님이 그 곁에 계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났을 때,그래서 슬프고 괴롭고 외로울 때,주님은 내 곁으로 오셔서 계시와 축복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살던 것들이 내 곁을 떠났다고 해서,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졌다고 해서,가려던 길이 막혔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이유는 바로 그때가 주님이 오시는 시간이며 축복이 임하는 시간이며 임마누엘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라함 곁으로 다가오셨던 주님은 오늘 내 곁으로도 다가오십니다.
그것은 나를 도와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현실과 삶에 용기있게 대처해 나가십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45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