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도끼 (왕하6:1-7)
본문
여리고 선지학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할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자가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겠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허락을 하자 “선생님도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고 하자 엘리사도 그곳에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선지학교 생도들이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생도중 한명이 나무를 찍을 때에 그만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요단강에 빠졌습니다. 이에 낙심 중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 온 것입니다.” 그때 엘리사가 그 소리를 듣고는 “어디에 빠졌느냐”고 하자 생도는 빠진 곳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너는 이것을 가져가라”하니 생도가 손을 내밀어 가졌습니다. 위와같은 내용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주는가”를 살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합시다. 성경에 보면 도끼에 대한 교훈이 몇군데 나와 있습니다.
1 “도끼를 가지고 벌목을 하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추어 그로 죽게 하면 이런 사람은 도피 성읍으로 도망가면 생명이 보존된다는 내용”(신19:5)
2 “어느 성읍을 전쟁에서 빼었을 때 도끼로 그곳의 과목을 작벌하지 말라 그러나 과목이 아닌 것은 작벌해서 전쟁도구를 만들어도 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신20:19)
3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사10:15)
4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10)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도 도끼에 관한 교훈들이 꽤 많이 나와 있습니다.
1 도끼가 제자루 못 찍는다.(제가 제일을 처리를 못한다는 뜻)
2 도끼 가진 놈이 바늘 가진 놈 못 당한다.(작지만 적절하게 쓸 수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뜻) 3 도끼로 제 발등 찍는다.(남을 헤치려다 오히려 자신이 해를 입니다.)
4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시간 가는 줄 모른다) 5 도끼는 날을 갈아 써도 사람은 죽으면 고만이다.(물건은 고쳐 쓸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
1. 선지 생도가 나무를 찍을 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진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도끼가 자루에 든든히 꽃혀 있는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준비성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급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면 실수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이 세속에 휩쓸렸다가 있는 신앙마저 빼았기고 마는 것입니다. 1 3000명 기드온 용사가 철저하게 준비하여 미디안과 싸웠습니다.
2 지혜로운 5처녀가 기름을 준비 했습니다. 3 선지 생도 부인인 과부가 기름을 담을 그릇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4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사로 나가기 위하여 1년간의 준비 기간을 가졌습니다. 5 마르다는 준비성이 많아 성경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간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믿음의 상실입니다. 신앙이 없는 자는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간 것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도끼가 자루에 붙어 있을 때만이 도끼는 제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1 도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루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떠나면 우리는 자루에서 빠진 도끼처럼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믿음에 말씀하신 곳을 몇군데 찾아 봅시다. 1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2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마9:29) 3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4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2.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낙담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기도 했습니다. 본문 6장5절에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 온 것입니다.” “아아! 내 주여!”한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로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 1 “아아!”라고 외친 것은 그의 감정적 표현입니다. 설교는 이론적인 표현을 많이 쓸지라도 기도는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감정적 표현을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감사와 기쁨은 이론이 아니라 마음의 감정을 통해 하나님께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을 기도로서 회복해야 합니다. 욕심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한 것 그 이상의 축복을 덤으로 주십니다.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 중에 도끼에 대한 설화가 있지만 성경 본문 내용은 설화가 아니라 역사입니다. 나뭇꾼이 나무를 하다가 쇠도끼를 물에 빠뜨린 후 울고 있을 때 신선 할아버지가 나타나 “왜 우느냐” “도끼를 빠뜨렸습니다.” 금도끼를 가지고 나와서는 “이것이 네것이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은도끼를 가지고 나와 “이것이 네것이냐” 역시 그 나무꾼은 정직하게 “아닙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드디어 쇠도끼를 가지고 나왔을 때 정직하게 자기 것으로 고백을 함으로서 덤으로 금도끼와 은도끼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께서 선지 생도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도끼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사자 엘리사가 함께 있었을 때 어려운 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프레이즈 갇!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선지 생도는 하나님의 종이고(대하6:3)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 생도가 나무를 하러 가기 전에 엘리사보고 함께 가자고 부탁을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사자는 교역자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단체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어느 장소에 갈 때는 교역자를 동반하는 것이 본문 내용으로 보아서 성경적입니다. 포로를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가 “유라굴로”라고 불리우는 광풍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사자 바울이 그 배에 함께 승선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폭풍의 이름은 영어로만 붙이는데 우리나라 여성이름좀 붙이면 좋겠습니다. 영자호 제일 만만한 이름이 영자밖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예수님이 그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엘리사가 “어디에 빠졌느냐”고 물었고 선지 생도는 빠진 그곳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1) 엘리사는 “왜 빠뜨렸느냐!” 어째서 조심하지 않았느냐!하는 책망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유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빠졌느냐”고 물은 것은 빠진 장소를 알아서 그 도끼를 건져 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왜 죄를 졌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왜 죄를 졌느냐!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책하시지 않았습니다. 창3:9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독교 구원의 문제는 “왜 믿느냐”보다도 “어디에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으로 “왜 믿느냐” 하는 이유보다도 “어디에 있느냐”하는 실존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실존의 주소는 현제 어디 입니까 세속 가운데 자아발견입니까 아니면 교회 가운데 자신의 실존을 느끼십니까
(2) 선지 생도는 빠진 그곳을 정확하게 보여 드렸습니다. 우리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정확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서 여차여차히 세속의 물속에 도끼가 요단강에 빠지듯이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아아! 하나님 건져 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들의 실상을 정확히 아뢰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믿음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약화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 도끼가 빠졌는가를 선지 생도가 몰랐다면 영영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느 곳이 우리들의 신앙의 취약점이며, 취약지 인가를 알아서 범사에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5.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습니다. 여기에서 나뭇가지는 영적으로 볼 때 십자가를 의미 합니다. 십자가 믿음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십자가는 철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 또는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합니다. 나무가 요단강에 던져 진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속 속에 몸을 던져 도끼가 떠오르는 기적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을 기적적으로 건져 구원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단강에 비하면 나뭇가지는 작은 것이지만 그러나 나뭇가지는 요단강을 이겼습니다. 요단강에 심겨진 수많은 나무보다 하나님의 사자의 손에 의해 짤려져서 요단강가에 던져진 보잘 것 없는 나뭇가지가 더 나은 것입니다. 선지학교 생도들이 학교 기숙사를 짓는다고 굵직굵직한 나무를 벤 그 나무보다 하나님의 사자의 손을 통해 희생된 작은 나뭇가지가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도끼를 떠오르게 한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의 희생이 도끼를 떠오르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사랑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나뭇가지라고 해서 반드시 도끼를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엘리사의 손에 붙들려 능력있는 나뭇가지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신만으로는 절대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없고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만이 능히 능력이 있는 종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도끼가 요단강에서 기적적으로 떠올랐습니다.
(1) 잃어버린 것을 찾는 순간은 기쁨입니다. 도끼가 떠오르는 순간을 본 선지 생도의 기쁨은 얼마나 껐었겠습니까 놀라움과 기쁨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찾을 것입니다. 1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목자의 심정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려 그것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야단 법석을 떨다가 드디어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쁜지 그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웃을 함께 불러 기쁨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한 드라크마 값보다 이웃을 불러 대접한 그 돈이 모르긴 몰라도 더 들어갔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잃어버렸을 때는 기분이 안좋고 해서 찾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찾을 때가 있는데 찾고나면 별것도 아닌데 “아! 찾아구나!” 하는 기쁨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선지 생도는 남의 도끼인데도 아마 무척 기뻣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전도를 해서 한 영혼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이끌어 들였을 때 얼마나 기쁨니까 본인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혼인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도끼가 떠오른 것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 것입니다. 나뭇가지는 약한 것이지만 도끼는 강한 것입니다. 동양 철학의 하나인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쇠는 목을 이깁니다. 음양오행은 목화토금수인데 오행은 오행상생, 오행상비, 오행상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무와 쇠는 상극으로 자연법칙에 의하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라! 본문에 분명히 나무는 쇠를 이긴 것이니 연약한 나무가 강한 쇠를 이겼습니다. 요즈음 물로 쇠를 자르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주역의 음양 오행 원칙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음양 오행 원칙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전1:27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 끄럽게 하려 하시느니라” 도끼가 떠오르므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음양오행설 같은 세상의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결혼하는 것은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궁합과 같은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줄 믿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지금도 젊지만, 신앙이 별로 강하지 못할 때 저는 제자신이 성명학 책을 보고 이리 뜯어 맞추고 저리 뜯어 맞추어서 완벽한 이름을 지어 본 적이 있습니다. 나 궁풍(弓豊), 나 교인(敎人), 나 기인(基人), 나 호인(浩人)등등 여러가지를 지어 보았는데 나 궁풍이 좋을 것 같아서 궁풍으로 하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는 “나의 또 하나의 이름은 나 궁풍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장소에 따라서 가명으로 사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는 동안 “활궁자”에 “풍성할 풍”자를 잊어버리고 “활궁”에 “바람풍”자로 스스로 잘못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님보고 제 이름은 궁풍인데 활궁자에 바람풍입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시면서 “바람에 활이 날라가는데” 그것이 뭐가 좋으냐가 호통을 치셨습니다. 아차! 이것 “풍서할 풍”자인데 마귀가 “바람풍”자로 바꾸어 놓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이 풍성하다는 것은 큰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시127:4-5 “젊은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연약한 가지일지라도 능히 무거운 쇠라도 이길 수 있다는 신앙의 자신감을 가지시고 선지 생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잃어버린 도끼를 기적으로 되찾은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것, 또는 잊어버린 것을 찾는 은혜가 함께 하시사 기쁨을 맞이하시고 특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성품을 찾는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도끼를 가지고 벌목을 하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추어 그로 죽게 하면 이런 사람은 도피 성읍으로 도망가면 생명이 보존된다는 내용”(신19:5)
2 “어느 성읍을 전쟁에서 빼었을 때 도끼로 그곳의 과목을 작벌하지 말라 그러나 과목이 아닌 것은 작벌해서 전쟁도구를 만들어도 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신20:19)
3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사10:15)
4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10)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도 도끼에 관한 교훈들이 꽤 많이 나와 있습니다.
1 도끼가 제자루 못 찍는다.(제가 제일을 처리를 못한다는 뜻)
2 도끼 가진 놈이 바늘 가진 놈 못 당한다.(작지만 적절하게 쓸 수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뜻) 3 도끼로 제 발등 찍는다.(남을 헤치려다 오히려 자신이 해를 입니다.)
4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시간 가는 줄 모른다) 5 도끼는 날을 갈아 써도 사람은 죽으면 고만이다.(물건은 고쳐 쓸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
1. 선지 생도가 나무를 찍을 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진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도끼가 자루에 든든히 꽃혀 있는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준비성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급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면 실수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이 세속에 휩쓸렸다가 있는 신앙마저 빼았기고 마는 것입니다. 1 3000명 기드온 용사가 철저하게 준비하여 미디안과 싸웠습니다.
2 지혜로운 5처녀가 기름을 준비 했습니다. 3 선지 생도 부인인 과부가 기름을 담을 그릇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4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사로 나가기 위하여 1년간의 준비 기간을 가졌습니다. 5 마르다는 준비성이 많아 성경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간 것은 영적으로 볼 때 믿음의 상실입니다. 신앙이 없는 자는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간 것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도끼가 자루에 붙어 있을 때만이 도끼는 제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1 도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루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떠나면 우리는 자루에서 빠진 도끼처럼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믿음에 말씀하신 곳을 몇군데 찾아 봅시다. 1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2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마9:29) 3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4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2.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낙담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기도 했습니다. 본문 6장5절에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 온 것입니다.” “아아! 내 주여!”한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로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 것입니다. 1 “아아!”라고 외친 것은 그의 감정적 표현입니다. 설교는 이론적인 표현을 많이 쓸지라도 기도는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감정적 표현을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감사와 기쁨은 이론이 아니라 마음의 감정을 통해 하나님께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을 기도로서 회복해야 합니다. 욕심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한 것 그 이상의 축복을 덤으로 주십니다.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 중에 도끼에 대한 설화가 있지만 성경 본문 내용은 설화가 아니라 역사입니다. 나뭇꾼이 나무를 하다가 쇠도끼를 물에 빠뜨린 후 울고 있을 때 신선 할아버지가 나타나 “왜 우느냐” “도끼를 빠뜨렸습니다.” 금도끼를 가지고 나와서는 “이것이 네것이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은도끼를 가지고 나와 “이것이 네것이냐” 역시 그 나무꾼은 정직하게 “아닙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드디어 쇠도끼를 가지고 나왔을 때 정직하게 자기 것으로 고백을 함으로서 덤으로 금도끼와 은도끼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께서 선지 생도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도끼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사자 엘리사가 함께 있었을 때 어려운 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프레이즈 갇!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선지 생도는 하나님의 종이고(대하6:3)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 생도가 나무를 하러 가기 전에 엘리사보고 함께 가자고 부탁을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사자는 교역자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단체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어느 장소에 갈 때는 교역자를 동반하는 것이 본문 내용으로 보아서 성경적입니다. 포로를 태우고 로마로 가던 배가 “유라굴로”라고 불리우는 광풍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사자 바울이 그 배에 함께 승선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폭풍의 이름은 영어로만 붙이는데 우리나라 여성이름좀 붙이면 좋겠습니다. 영자호 제일 만만한 이름이 영자밖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예수님이 그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엘리사가 “어디에 빠졌느냐”고 물었고 선지 생도는 빠진 그곳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1) 엘리사는 “왜 빠뜨렸느냐!” 어째서 조심하지 않았느냐!하는 책망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유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빠졌느냐”고 물은 것은 빠진 장소를 알아서 그 도끼를 건져 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왜 죄를 졌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왜 죄를 졌느냐!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책하시지 않았습니다. 창3:9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기독교 구원의 문제는 “왜 믿느냐”보다도 “어디에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으로 “왜 믿느냐” 하는 이유보다도 “어디에 있느냐”하는 실존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실존의 주소는 현제 어디 입니까 세속 가운데 자아발견입니까 아니면 교회 가운데 자신의 실존을 느끼십니까
(2) 선지 생도는 빠진 그곳을 정확하게 보여 드렸습니다. 우리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정확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곳에서 여차여차히 세속의 물속에 도끼가 요단강에 빠지듯이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아아! 하나님 건져 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들의 실상을 정확히 아뢰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믿음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약화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 도끼가 빠졌는가를 선지 생도가 몰랐다면 영영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느 곳이 우리들의 신앙의 취약점이며, 취약지 인가를 알아서 범사에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5.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습니다. 여기에서 나뭇가지는 영적으로 볼 때 십자가를 의미 합니다. 십자가 믿음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십자가는 철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 또는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합니다. 나무가 요단강에 던져 진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속 속에 몸을 던져 도끼가 떠오르는 기적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을 기적적으로 건져 구원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단강에 비하면 나뭇가지는 작은 것이지만 그러나 나뭇가지는 요단강을 이겼습니다. 요단강에 심겨진 수많은 나무보다 하나님의 사자의 손에 의해 짤려져서 요단강가에 던져진 보잘 것 없는 나뭇가지가 더 나은 것입니다. 선지학교 생도들이 학교 기숙사를 짓는다고 굵직굵직한 나무를 벤 그 나무보다 하나님의 사자의 손을 통해 희생된 작은 나뭇가지가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도끼를 떠오르게 한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의 희생이 도끼를 떠오르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사랑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나뭇가지라고 해서 반드시 도끼를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엘리사의 손에 붙들려 능력있는 나뭇가지가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신만으로는 절대 능력있는 종이 될 수 없고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만이 능히 능력이 있는 종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도끼가 요단강에서 기적적으로 떠올랐습니다.
(1) 잃어버린 것을 찾는 순간은 기쁨입니다. 도끼가 떠오르는 순간을 본 선지 생도의 기쁨은 얼마나 껐었겠습니까 놀라움과 기쁨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찾을 것입니다. 1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목자의 심정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려 그것을 찾기 위하여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야단 법석을 떨다가 드디어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쁜지 그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웃을 함께 불러 기쁨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한 드라크마 값보다 이웃을 불러 대접한 그 돈이 모르긴 몰라도 더 들어갔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잃어버렸을 때는 기분이 안좋고 해서 찾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찾을 때가 있는데 찾고나면 별것도 아닌데 “아! 찾아구나!” 하는 기쁨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선지 생도는 남의 도끼인데도 아마 무척 기뻣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전도를 해서 한 영혼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이끌어 들였을 때 얼마나 기쁨니까 본인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혼인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도끼가 떠오른 것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 것입니다. 나뭇가지는 약한 것이지만 도끼는 강한 것입니다. 동양 철학의 하나인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쇠는 목을 이깁니다. 음양오행은 목화토금수인데 오행은 오행상생, 오행상비, 오행상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무와 쇠는 상극으로 자연법칙에 의하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라! 본문에 분명히 나무는 쇠를 이긴 것이니 연약한 나무가 강한 쇠를 이겼습니다. 요즈음 물로 쇠를 자르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주역의 음양 오행 원칙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음양 오행 원칙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전1:27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 끄럽게 하려 하시느니라” 도끼가 떠오르므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음양오행설 같은 세상의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결혼하는 것은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궁합과 같은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줄 믿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지금도 젊지만, 신앙이 별로 강하지 못할 때 저는 제자신이 성명학 책을 보고 이리 뜯어 맞추고 저리 뜯어 맞추어서 완벽한 이름을 지어 본 적이 있습니다. 나 궁풍(弓豊), 나 교인(敎人), 나 기인(基人), 나 호인(浩人)등등 여러가지를 지어 보았는데 나 궁풍이 좋을 것 같아서 궁풍으로 하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는 “나의 또 하나의 이름은 나 궁풍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장소에 따라서 가명으로 사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는 동안 “활궁자”에 “풍성할 풍”자를 잊어버리고 “활궁”에 “바람풍”자로 스스로 잘못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님보고 제 이름은 궁풍인데 활궁자에 바람풍입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시면서 “바람에 활이 날라가는데” 그것이 뭐가 좋으냐가 호통을 치셨습니다. 아차! 이것 “풍서할 풍”자인데 마귀가 “바람풍”자로 바꾸어 놓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이 풍성하다는 것은 큰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시127:4-5 “젊은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연약한 가지일지라도 능히 무거운 쇠라도 이길 수 있다는 신앙의 자신감을 가지시고 선지 생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잃어버린 도끼를 기적으로 되찾은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것, 또는 잊어버린 것을 찾는 은혜가 함께 하시사 기쁨을 맞이하시고 특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성품을 찾는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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