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물으시는 하나님 (욥39:1-4)
본문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이것은 욥기의 주제입니다. 동방 우스 땅의 왕(부자)이었던 욥의 경건됨은 하늘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였습니다(욥1:1). 하나님은 이러한 욥의 경건을 높이 평가하고, 그렇게도 경건한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욥1:8). 그는 아들 일곱, 딸 셋의 자녀를 받았습니다. 그의 소유물은 양이 7,000이요, 약대가 3,000이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이며, 종들도 심히 많아 동방 사람중에 가장 큰 자였다고 하였습니다(욥1:3). 그러던 욥에게 뜻밖에 환난이 닥쳐와서 아들 딸 열 남매는 무너지는 집더미 속에 떼죽음을 당해버렸습니다. 그 많은 가축과 종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빼앗기고, 죽임 당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로 태움을 받아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욥의 온 몸에는 원인 모를 악창이 나서, 썩어내리는 피부의 물 때문에 그가 잿구더기 가운데 앉아야만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원망함에 이르렀고, 종들이 그를 떠나고, 친구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며, 잿구더기 가운데 앉아 있는 욥은 동리의 아이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전을 지키던 욥에게도 이제자신도 모를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르르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와서 여러 피조 세계의 짐승들의 생태와 양육을 통하여 욥을 교훈하기를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봉독한 산 염소와 암사슴을 가지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산 염소가 새끼치는 때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 산 염소란 바위의 염소란 뜻으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의 석굴에 사는 짐승을 가리킵니다. 그 털색이 바위의 색과 같아서 사람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짐승입니다. 또 묻기를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아느냐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고 하였습니다. 그것들이 몸을 구부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짐승들이 새끼를 치는 때와 낳는 때를 묻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저 짐승들이 새끼 양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이 질문의 촛점은 사람(욥)이 아닌, 하나님 자신께서 짐승새끼의 때(기한)도, 양육도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 교훈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욥에게 주권적 섭리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짐승들의 수태의 기한과 그 낳는 때를 주장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계시의 표현에서 모든 피조세계의 때(시간)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I. 모든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하십니다(39:1-2). 오늘에 발견된 인간의 과학은 산 염소의 새끼치는 때와 암사슴의 새끼 낳는 기한, 그리고 그것이 만삭 되는 때와 그 낳을 때를 얼마든지 밝혀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한이 어떻게 해서 정해졌는지를 아무도,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밝혀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결정이었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죽일 때와 치료시킬 때, 헐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돌을 던질 때와 거둘 때, 안을 때와 멀리할 때, 찾을 때와 잃을 때, 지킬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잠잠할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전도서3:1-3). 이러한 모든 때(시간)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창조 의지와 통치와 섭리의 결과라고 하였습니다(전도서3:11). 그 누가 자신의 출생일을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신의 생존날짜를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신의 죽는 죽음의 날을 알거나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의 시작과 마침은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전도서3:11). 아침의 때, 밤의 때를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은 생존의 시간도 하나님 자신만이 정하시고, 또 그대로 집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 피조세계의 시작도 진행도, 종말도 전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의 산물입니다. 결코 인간 욥이 산 염소나 암사슴의 새끼치는 때나, 새끼 낳는 때나, 만삭의 때를 결정할 수 없는 무지한 인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II. 인간은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는 청지기일 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 염소와, 암사슴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안에 수태하고, 해산하고, 양육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의 어느 지점에 그 수명이 끝이 나고 맙니다. 저 짐승들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 속에 저마다 타고난 피조적 기능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적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보다 모자라게 살거나 아니면 더 연장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더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빨리 죽은 듯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건대 유아들의 죽음이나, 불의의 사고나, 재앙으로 인생이 끝나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대로 살다가 간 것 뿐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명을 더 연장받아 산 사람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은 15년을 더 연장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히스기야가 원래 받은 자기 생존기간 외에 더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받은 생존 기간을 더 유효적절하게 사용함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일 뿐입니다. 중대한 교훈은 모든 인생은 이 세상에서 얼마의 시간을 받았는가를 앎에 있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에 모든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젊은자들은 아직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시간들을 낭비하거나 오용해서는 안됩니다. 늙은자들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해서는 안됩니다. 더욱기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는 현실 쾌락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인생이 창조 세계에서 받은 모든 시간은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받은 시간들 속에서 태중의 시간, 출생하는 시간, 양육 받는 시간, 교육받는 시간, 그리고 직업인으로 일하는 시간(장년기), 그리고 활동의 중심 무대에서 물러서는 시간(노년기)등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중에 잠자는 시간, 쉬는 시간도 있습니다. 혹자는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까지도 사실상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부여받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 봉사하는 시간, 감사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 전도하고, 선교하는 시간. 이 모든 시간이 하나님 경외를 위한 시간입니다. 가족끼리 즐기는 시간, 여행을 하는 시간, 친구들과 사귀는 시간, 어떤 연구에 골몰하는 시간 등이 모두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있는 시간입니다. 그 사람이 정치를 하든지, 교육을 하든지, 과학이나, 문학이나, 사업이나, 농업이나, 어업이나, 광업이나, 기타 여러분야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분야에서 움직이는 생존 자체가 하나님 경외를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낸 교훈의 두 번째 교훈은 산 염소와 암사슴은 하나님이 정한 그 시간 안에 수태하고 출생하고 살고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저 짐승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의 법칙 아래 순종하여 지음 받은 자기의 피조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물며 사람일진대,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그 시간 안에서 하나님 섬기는 청지기의 일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실한 이유는 모든 인생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벌서 1995년 12월 중순을 맞고 있습니다. 또한 번 시간(세월)에 대한 벽보를 읽게 되는 순간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시간에 의하여 제약을 받고 시간의 지배를 받고, 결국 시간에 의해서 존재를 상실하게 됩니다. 보통 ‘시간’이라고 할 때 특정한 찬스(때)와 또 때의 길이의 의미로 기간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이 자기 생일이나, 자기 죽는 날을 두 번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시간의 일회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사건이 반복되고 같은 종류의 일이 거듭되어도 지나가버린 시간은 동일한 시간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시간의 단일성, 순간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신비적 선물입니다. 사람치고 이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네카(Seneca)는 말하기를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시간마저도 영원히 우리 것이 아니고 다시 돌려주어야 할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결코 잠시의 시간을 창조하거나, 더욱이 그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칼라일(Carlyle)은 ‘시간은 기적이다’고 했습니다. 아놀드 베넷트(A. Bennett)는 ‘시간은 매일 즉 날마다의 기적이다’고 하였습니다. 결코 저와 여러분이 시간을 붙잡거나, 보거나, 측량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색깔도, 부피도, 모양도 없습니다. 시간을 쌓아 둘 수도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장래의 시간을 앞당겨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아무런 변화를 모릅니다. 오직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그칠 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거리에는 스톱(Stop)싸인이 없습니다. 시간에는 오직 전진만 있을 뿐입니다. 쌀독의 쌀은 퍼내야 없어지지 마는 시간은 퍼내지 않아도 저절로 가 버리고, 없어집니다. 잃었던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어도 한 번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중대하고 중대한 시간의 진리는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있습니다. 나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졌느냐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내가 얼마나 값있게 내용있게 사용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우리들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하소서(시90:12)라고 기도하였습니다. 1995년도 우리 경향인들에게 ‘기념비적 영광의 해’입니다. 금년은 우리 경향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욥에게 산 염소나, 암사슴의 새끼치는 때나, 새끼 낳는 때를 가지고 교훈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직접 개입하신 축복의 해였습니다. 신학자 폰 틸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시간을 가리켜서 카이로스(κιρο )라고 하였습니다. 금년은 우리 경향인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영광의 해입니다. 그것이 1995년 7월 17일이었습니다. 경향교회당신축기공의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날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들이 산 염소가 새끼치는 때와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아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묻기를 내가 나의 집 경향교회당을 짓고자 하는 이 때를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이 축복의 시간을 선용해야 합니다. 내 한 평생 꼭 한 번만 받은 충성의 챤스로 선용해야 합니다. 물질을 드리는 시간으로, 기도하는 시간으로, 감사하는 시간으로, 축복을 받는 시간으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봉독한 산 염소와 암사슴을 가지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산 염소가 새끼치는 때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 산 염소란 바위의 염소란 뜻으로 인적이 없는 깊은 산의 석굴에 사는 짐승을 가리킵니다. 그 털색이 바위의 색과 같아서 사람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짐승입니다. 또 묻기를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아느냐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고 하였습니다. 그것들이 몸을 구부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짐승들이 새끼를 치는 때와 낳는 때를 묻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저 짐승들이 새끼 양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이 질문의 촛점은 사람(욥)이 아닌, 하나님 자신께서 짐승새끼의 때(기한)도, 양육도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 교훈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욥에게 주권적 섭리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짐승들의 수태의 기한과 그 낳는 때를 주장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계시의 표현에서 모든 피조세계의 때(시간)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I. 모든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하십니다(39:1-2). 오늘에 발견된 인간의 과학은 산 염소의 새끼치는 때와 암사슴의 새끼 낳는 기한, 그리고 그것이 만삭 되는 때와 그 낳을 때를 얼마든지 밝혀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한이 어떻게 해서 정해졌는지를 아무도,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밝혀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결정이었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죽일 때와 치료시킬 때, 헐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돌을 던질 때와 거둘 때, 안을 때와 멀리할 때, 찾을 때와 잃을 때, 지킬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잠잠할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전도서3:1-3). 이러한 모든 때(시간)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창조 의지와 통치와 섭리의 결과라고 하였습니다(전도서3:11). 그 누가 자신의 출생일을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신의 생존날짜를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신의 죽는 죽음의 날을 알거나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의 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의 시작과 마침은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전도서3:11). 아침의 때, 밤의 때를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은 생존의 시간도 하나님 자신만이 정하시고, 또 그대로 집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 피조세계의 시작도 진행도, 종말도 전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의 산물입니다. 결코 인간 욥이 산 염소나 암사슴의 새끼치는 때나, 새끼 낳는 때나, 만삭의 때를 결정할 수 없는 무지한 인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II. 인간은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는 청지기일 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 염소와, 암사슴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안에 수태하고, 해산하고, 양육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의 어느 지점에 그 수명이 끝이 나고 맙니다. 저 짐승들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 속에 저마다 타고난 피조적 기능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적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보다 모자라게 살거나 아니면 더 연장하여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더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빨리 죽은 듯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건대 유아들의 죽음이나, 불의의 사고나, 재앙으로 인생이 끝나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대로 살다가 간 것 뿐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생명을 더 연장받아 산 사람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은 15년을 더 연장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히스기야가 원래 받은 자기 생존기간 외에 더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받은 생존 기간을 더 유효적절하게 사용함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일 뿐입니다. 중대한 교훈은 모든 인생은 이 세상에서 얼마의 시간을 받았는가를 앎에 있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에 모든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젊은자들은 아직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시간들을 낭비하거나 오용해서는 안됩니다. 늙은자들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해서는 안됩니다. 더욱기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는 현실 쾌락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인생이 창조 세계에서 받은 모든 시간은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받은 시간들 속에서 태중의 시간, 출생하는 시간, 양육 받는 시간, 교육받는 시간, 그리고 직업인으로 일하는 시간(장년기), 그리고 활동의 중심 무대에서 물러서는 시간(노년기)등이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중에 잠자는 시간, 쉬는 시간도 있습니다. 혹자는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까지도 사실상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부여받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 봉사하는 시간, 감사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 전도하고, 선교하는 시간. 이 모든 시간이 하나님 경외를 위한 시간입니다. 가족끼리 즐기는 시간, 여행을 하는 시간, 친구들과 사귀는 시간, 어떤 연구에 골몰하는 시간 등이 모두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있는 시간입니다. 그 사람이 정치를 하든지, 교육을 하든지, 과학이나, 문학이나, 사업이나, 농업이나, 어업이나, 광업이나, 기타 여러분야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분야에서 움직이는 생존 자체가 하나님 경외를 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낸 교훈의 두 번째 교훈은 산 염소와 암사슴은 하나님이 정한 그 시간 안에 수태하고 출생하고 살고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저 짐승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의 법칙 아래 순종하여 지음 받은 자기의 피조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물며 사람일진대,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그 시간 안에서 하나님 섬기는 청지기의 일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실한 이유는 모든 인생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벌서 1995년 12월 중순을 맞고 있습니다. 또한 번 시간(세월)에 대한 벽보를 읽게 되는 순간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시간에 의하여 제약을 받고 시간의 지배를 받고, 결국 시간에 의해서 존재를 상실하게 됩니다. 보통 ‘시간’이라고 할 때 특정한 찬스(때)와 또 때의 길이의 의미로 기간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이 자기 생일이나, 자기 죽는 날을 두 번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시간의 일회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사건이 반복되고 같은 종류의 일이 거듭되어도 지나가버린 시간은 동일한 시간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시간의 단일성, 순간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신비적 선물입니다. 사람치고 이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네카(Seneca)는 말하기를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시간마저도 영원히 우리 것이 아니고 다시 돌려주어야 할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결코 잠시의 시간을 창조하거나, 더욱이 그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칼라일(Carlyle)은 ‘시간은 기적이다’고 했습니다. 아놀드 베넷트(A. Bennett)는 ‘시간은 매일 즉 날마다의 기적이다’고 하였습니다. 결코 저와 여러분이 시간을 붙잡거나, 보거나, 측량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색깔도, 부피도, 모양도 없습니다. 시간을 쌓아 둘 수도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장래의 시간을 앞당겨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아무런 변화를 모릅니다. 오직 지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그칠 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거리에는 스톱(Stop)싸인이 없습니다. 시간에는 오직 전진만 있을 뿐입니다. 쌀독의 쌀은 퍼내야 없어지지 마는 시간은 퍼내지 않아도 저절로 가 버리고, 없어집니다. 잃었던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어도 한 번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중대하고 중대한 시간의 진리는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있습니다. 나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졌느냐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내가 얼마나 값있게 내용있게 사용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우리들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하소서(시90:12)라고 기도하였습니다. 1995년도 우리 경향인들에게 ‘기념비적 영광의 해’입니다. 금년은 우리 경향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욥에게 산 염소나, 암사슴의 새끼치는 때나, 새끼 낳는 때를 가지고 교훈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직접 개입하신 축복의 해였습니다. 신학자 폰 틸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시간을 가리켜서 카이로스(κιρο )라고 하였습니다. 금년은 우리 경향인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영광의 해입니다. 그것이 1995년 7월 17일이었습니다. 경향교회당신축기공의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날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들이 산 염소가 새끼치는 때와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아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묻기를 내가 나의 집 경향교회당을 짓고자 하는 이 때를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이 축복의 시간을 선용해야 합니다. 내 한 평생 꼭 한 번만 받은 충성의 챤스로 선용해야 합니다. 물질을 드리는 시간으로, 기도하는 시간으로, 감사하는 시간으로, 축복을 받는 시간으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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