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찬 경륜을 간직한 중앙의 십자가 (요19:18,엡2:13-18)
본문
주님이 두 강도와 함께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운데 있더라” 하는 말이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요한복음 19장 18절에서입니다. 끝없는 암시를 주는, 또 우리가 얼핏 깨닫지 못하는 숨어 있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세는 그의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에 장차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신18:15-18, 요1:19-21, 행3:20-23, 7:37). 요한복음 1장 19-28절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찾아와서 당신이 그리스도냐 당신이 엘리야냐 당신이 그 선지자냐 하고 묻고 있는데 그 선지자냐 한 것은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예언을 가리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고, 또 모세 자신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한 그림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2-33절에는, 중앙에 선 십자가의 상황에 대하여 보다 더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좌우의 두 십자가와 가운데 있는 십자가와의 대화 내용을 말하고 있고, 그들의 말로를 우리 앞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의 군인들과 유대인들이 갖은 모략을 다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보다 가혹하게 형벌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때(마26:14-16, 막14:10-11, 눅22:3, 요13:30), 제사장들은 그에게 은 30을 달아 주었습니다. 은 30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을 노예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절기를 맞이하면 죄인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마지막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라고 묻자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마27:15-23, 눅23:18-23)라고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살인자요 흉악한 행악자 바라바보다도 예수님을 더 못하게 취급했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쥐어 주고 그 앞에 꿇게 하여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27:27-29, 37, 눅23:36-38)라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한 왕으로 위장하고 능욕한 흔적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그 머리 위에 죄인의 명패를 붙였는데, 예수님의 명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했으며, 그것도 당시의 통용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요19:1-24). 이것도 능욕적인 전시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것이 무슨 죄목이 됩니까! 아마 이런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은 예수님밖에는 다시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 십자가형 자체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가장 가혹한, 저주받은 사형법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하는 기록이 있습니다(갈3:13). 고대 우리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죄인을 나무에 매어 달았는데, 그것은 저주를 받은 상징입니다. 당시 로마인의 세계에서 십자가에 못받아 죽인다는 것은 가장 흉악한 죄인, 예컨대 반역자나 노예 같은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은 어떤 죄를 짓는다해도 십자가에 죽인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두 강도를 끌어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이것도 경멸을 더하는 처사로 예수님의 괴로움을 더해 주려는 유대인의 모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좌를 보아도 강도, 우를 보아도 강도입니다. 강도들 중간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강도로 취급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살펴볼 때, “가운데 십자가”는 악의에 찬 유대인의 모략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우발적인 사건인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영원하신 그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 선 세 십자가는 인간 역사의 축도로서, 모든 인간의 실상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보는, 최후의 순간에 회개한 그 강도는 사람이 볼 때엔 흉악한 강도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0)하신 말씀대로 벌써 죄인이 아닙니다. 이는 사람의 눈에는 죄인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인이 아닌 모든 성도의 그림자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에서 보는 한 강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능욕하고 모욕한 그 강도는 사람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죄인입니다. 그는 회개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특이한 십자가 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그에게서 도저히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무죄를 선언하였고(눅23:20-22),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을 가지고 잡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허물이 전혀 없는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죄는 아니었지만 그 어깨에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인간 역사에 다시 없는 중죄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53:1-12). 그러기에 죄와 더불어 짝하실 수 없는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던 순간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하여튼, 인간 역사에 단 한 번만 있었던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한 분만의 독특한 인격, 독특한 죽음이 바로 중앙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세 십자가의 가운데 있는 중앙의 십자가는 분리의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이나 바른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악한 일은 혼자서 못한다고 합니다. 불안하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서로 돕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두 강도는 어제까지 악한 일을 저지른 악의 동업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만은 예수님이 한 가운데 달리시므로 좌우로 나뉘어졌습니다. 이 분리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물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그런 혼돈의 상태가 창조 이전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게 하시므로 궁창이 생기고, 높은 곳이 솟아나고 낮은 곳에는 물이 고여 바다와 육지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창조는 분리의 작업입니다.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를 분리한 것이 바로 창조의 과업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창조라 할 수 있는, 거듭나는 도리 즉 신앙의 길도 바로 분리인 줄로 믿습니다. 혼돈 상태에서는 거듭나는 길도,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입니까 분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나누고,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고, 신앙과 불신앙을 나누고, 의로운 길과 악한길을 나누는 이것이 신앙의 작업입니다. 자세히 보면, 두 강도의 분리의 내용도 중앙의 십자가로써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첫째, 그리스도관에서 분리되었습니다. 한 강도는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이니, 이 강도의 그리스도관은 기껏해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일입니다(마27:39-43). 그러나 한 강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1-42)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쓰라린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이 확실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그리스도관은 훨씬 더 높고 먼 구원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전부입니까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이 나옵니다. 이를 가리켜 최대의 이적이라고들 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세 번 있는데, 야이로의 딸은 죽은 후에 금방 살리셨고(막5:21-24, 35-43, 눅8:41-42, 49-5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상여를 메고 가는 도중에 살리셨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장례를 당일에 지내므로 당일에 살리신 것이고(눅7:11-17),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만에 살리셨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이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이렇게 최대의 이적으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주님! 제가 또 죽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래, 너는 또 죽는다”고 하셨고, 그 후에 나사로는 두 번째 죽을 때까지 다시 웃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순히 현세에서 생명을 연장했다는 거기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관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한 그 강도의 소망,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높은 그리스도관의 표현입니까!
둘째, 자기관에서 분리되었습니다. 한 강도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인들 자기가 강도한 것이 잘못인 줄 몰랐겠습니까만 그냥 안다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양심에 부딪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우리가 받는 이 형벌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이니, 마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죄악감은 그 마음에 와닿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자기관은 다른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남을 욕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고 참 자기를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아는 데는 너무도 인색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발할 줄을 모릅니다. 여기 한 강도는 참 예수를 아는 순간에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1)고 했습니다. 우편강도가 의로운 자라는 것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아는 그날에, 즉 메시야를 만나는 그 순간에 참 자기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이적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하였습니다. 예수를 알아보는 순간, “나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라고 말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우편강도는 자기를 본 것입니다. 참된 예수를 알고 참된 자기를 알 때 그 강도의 태도는 경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모르는 강도는 오만불손하여 마지막까지 예수를 능욕하고 모욕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가 십자가 상에서 지은 죄가 그의 일생동안 지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알며 참된 회개를 했는가 하는 것은, 그 뒤에 따라오는 그의 경건한 생활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째는 구원관의 분리입니다. 한 강도의 구원관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현세적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현세를 체념하고 이미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예수님을 ‘의로운 자’라고 이미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인정하고 있고, 또 이미 말씀드린 것같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당신의 나라”라고 내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바로 낙원입니다. 예수님이 낙원의 주인입니다.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했습니다. 그 낙원에 가는 길이 예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믿고 있는 완벽한 기도입니다. 이리하여 두 강도는 미래의 소망에서도 분리되고 있습니다. 중앙에 선 십자가는 분리의 십자가입니다. 이제까지 같은 강도였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듯 큰 차이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관에 있어, 자기관에 있어, 그리고 구원관에 있어서 이토록 판이한 개념을 갖게 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네째로 두 사람의 차이에 응답하시는 그리스도의 응답 역시 분리입니다. 예수님이 그 무거운 입을 여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셨습니다. 한 강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으십니다.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침묵 역시 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침묵, 그것은 강도에 대한 포기입니다. 방치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구원시켜 하늘 나라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잡아서 지옥에 던져 넣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를 구원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일부는 그냥 방치해 두십니다. 그 방치가 바로 멸망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미 멸망의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이것이 바로 가장 무서운 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신다”하고, “하나님은 침묵의 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의 모방>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또 허드슨 테일러는 “삼라만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이신데 어떤 사람은 그 음성을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를 않습니다. “작은 기계 하나가 돌아가는 소리는 나는데, 엄청나게 큰 지구가 하루 24시간 동안에 한 바퀴 자전을 하고 또 365일 일 년 동안에 태양을 한바퀴 공전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많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귀에 그 소리가 일체 들려 오지 않는 것은 그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라는 것은 내 귀에 맞는 것만 들려올 뿐 맞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에 맞는 것만 보이고, 맞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못 보았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도 얼마든지 많은 물체가 있은 것입니다. 하여튼 똑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한 사람은 가혹하게 내버렸고 한 사람에겐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얼마나 즉각적인 회답입니까 얼마나 든든한 회답입니까 얼마나 확고한 구원의 회답입니까 이 강도는 외경에 의하면 디스마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죽은 사람들 중에 확고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에 참여한 최초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강도는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일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더불어 죽고, 이제부터 사는 것은 자기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옛날에 십자가에 죽으신 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같이 계십니다. 그 주님이 강도와 같은 내 일생의 모든 죄를 속량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앙에 선 십자가와 회개한 강도와의 관계이며,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주신 거룩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십자가의 뜻을 명백히 파악하고, 십자가의 제자로서 올바른 신앙과 생활이 우리에게 있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복음 23장 32-33절에는, 중앙에 선 십자가의 상황에 대하여 보다 더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좌우의 두 십자가와 가운데 있는 십자가와의 대화 내용을 말하고 있고, 그들의 말로를 우리 앞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의 군인들과 유대인들이 갖은 모략을 다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보다 가혹하게 형벌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때(마26:14-16, 막14:10-11, 눅22:3, 요13:30), 제사장들은 그에게 은 30을 달아 주었습니다. 은 30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을 노예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절기를 맞이하면 죄인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마지막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라고 묻자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마27:15-23, 눅23:18-23)라고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살인자요 흉악한 행악자 바라바보다도 예수님을 더 못하게 취급했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쥐어 주고 그 앞에 꿇게 하여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27:27-29, 37, 눅23:36-38)라고 희롱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한 왕으로 위장하고 능욕한 흔적입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그 머리 위에 죄인의 명패를 붙였는데, 예수님의 명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했으며, 그것도 당시의 통용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요19:1-24). 이것도 능욕적인 전시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것이 무슨 죄목이 됩니까! 아마 이런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은 예수님밖에는 다시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 십자가형 자체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가장 가혹한, 저주받은 사형법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하는 기록이 있습니다(갈3:13). 고대 우리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죄인을 나무에 매어 달았는데, 그것은 저주를 받은 상징입니다. 당시 로마인의 세계에서 십자가에 못받아 죽인다는 것은 가장 흉악한 죄인, 예컨대 반역자나 노예 같은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은 어떤 죄를 짓는다해도 십자가에 죽인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두 강도를 끌어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이것도 경멸을 더하는 처사로 예수님의 괴로움을 더해 주려는 유대인의 모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좌를 보아도 강도, 우를 보아도 강도입니다. 강도들 중간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강도로 취급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살펴볼 때, “가운데 십자가”는 악의에 찬 유대인의 모략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우발적인 사건인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영원하신 그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고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 선 세 십자가는 인간 역사의 축도로서, 모든 인간의 실상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보는, 최후의 순간에 회개한 그 강도는 사람이 볼 때엔 흉악한 강도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0)하신 말씀대로 벌써 죄인이 아닙니다. 이는 사람의 눈에는 죄인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인이 아닌 모든 성도의 그림자라고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에서 보는 한 강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능욕하고 모욕한 그 강도는 사람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죄인입니다. 그는 회개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특이한 십자가 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그에게서 도저히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무죄를 선언하였고(눅23:20-22),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을 가지고 잡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허물이 전혀 없는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죄는 아니었지만 그 어깨에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인간 역사에 다시 없는 중죄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53:1-12). 그러기에 죄와 더불어 짝하실 수 없는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던 순간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하여튼, 인간 역사에 단 한 번만 있었던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한 분만의 독특한 인격, 독특한 죽음이 바로 중앙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세 십자가의 가운데 있는 중앙의 십자가는 분리의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이나 바른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악한 일은 혼자서 못한다고 합니다. 불안하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서로 돕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두 강도는 어제까지 악한 일을 저지른 악의 동업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만은 예수님이 한 가운데 달리시므로 좌우로 나뉘어졌습니다. 이 분리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창세기 1장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물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그런 혼돈의 상태가 창조 이전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게 하시므로 궁창이 생기고, 높은 곳이 솟아나고 낮은 곳에는 물이 고여 바다와 육지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창조는 분리의 작업입니다.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를 분리한 것이 바로 창조의 과업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창조라 할 수 있는, 거듭나는 도리 즉 신앙의 길도 바로 분리인 줄로 믿습니다. 혼돈 상태에서는 거듭나는 길도,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입니까 분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나누고, 진리와 비진리를 나누고, 신앙과 불신앙을 나누고, 의로운 길과 악한길을 나누는 이것이 신앙의 작업입니다. 자세히 보면, 두 강도의 분리의 내용도 중앙의 십자가로써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첫째, 그리스도관에서 분리되었습니다. 한 강도는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이니, 이 강도의 그리스도관은 기껏해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일입니다(마27:39-43). 그러나 한 강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1-42)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쓰라린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이 확실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그리스도관은 훨씬 더 높고 먼 구원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전부입니까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이 나옵니다. 이를 가리켜 최대의 이적이라고들 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세 번 있는데, 야이로의 딸은 죽은 후에 금방 살리셨고(막5:21-24, 35-43, 눅8:41-42, 49-5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상여를 메고 가는 도중에 살리셨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장례를 당일에 지내므로 당일에 살리신 것이고(눅7:11-17),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만에 살리셨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이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이렇게 최대의 이적으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주님! 제가 또 죽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래, 너는 또 죽는다”고 하셨고, 그 후에 나사로는 두 번째 죽을 때까지 다시 웃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순히 현세에서 생명을 연장했다는 거기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관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한 그 강도의 소망,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높은 그리스도관의 표현입니까!
둘째, 자기관에서 분리되었습니다. 한 강도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인들 자기가 강도한 것이 잘못인 줄 몰랐겠습니까만 그냥 안다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양심에 부딪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우리가 받는 이 형벌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이니, 마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죄악감은 그 마음에 와닿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자기관은 다른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남을 욕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고 참 자기를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아는 데는 너무도 인색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발할 줄을 모릅니다. 여기 한 강도는 참 예수를 아는 순간에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1)고 했습니다. 우편강도가 의로운 자라는 것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아는 그날에, 즉 메시야를 만나는 그 순간에 참 자기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이적으로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하였습니다. 예수를 알아보는 순간, “나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서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6:5)라고 말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우편강도는 자기를 본 것입니다. 참된 예수를 알고 참된 자기를 알 때 그 강도의 태도는 경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모르는 강도는 오만불손하여 마지막까지 예수를 능욕하고 모욕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가 십자가 상에서 지은 죄가 그의 일생동안 지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를 알며 참된 회개를 했는가 하는 것은, 그 뒤에 따라오는 그의 경건한 생활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째는 구원관의 분리입니다. 한 강도의 구원관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현세적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현세를 체념하고 이미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예수님을 ‘의로운 자’라고 이미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인정하고 있고, 또 이미 말씀드린 것같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당신의 나라”라고 내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바로 낙원입니다. 예수님이 낙원의 주인입니다.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했습니다. 그 낙원에 가는 길이 예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믿고 있는 완벽한 기도입니다. 이리하여 두 강도는 미래의 소망에서도 분리되고 있습니다. 중앙에 선 십자가는 분리의 십자가입니다. 이제까지 같은 강도였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듯 큰 차이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관에 있어, 자기관에 있어, 그리고 구원관에 있어서 이토록 판이한 개념을 갖게 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네째로 두 사람의 차이에 응답하시는 그리스도의 응답 역시 분리입니다. 예수님이 그 무거운 입을 여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셨습니다. 한 강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으십니다.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침묵 역시 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침묵, 그것은 강도에 대한 포기입니다. 방치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구원시켜 하늘 나라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잡아서 지옥에 던져 넣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를 구원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일부는 그냥 방치해 두십니다. 그 방치가 바로 멸망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미 멸망의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이것이 바로 가장 무서운 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신다”하고, “하나님은 침묵의 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의 모방>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또 허드슨 테일러는 “삼라만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이신데 어떤 사람은 그 음성을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를 않습니다. “작은 기계 하나가 돌아가는 소리는 나는데, 엄청나게 큰 지구가 하루 24시간 동안에 한 바퀴 자전을 하고 또 365일 일 년 동안에 태양을 한바퀴 공전하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많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귀에 그 소리가 일체 들려 오지 않는 것은 그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라는 것은 내 귀에 맞는 것만 들려올 뿐 맞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습니다.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에 맞는 것만 보이고, 맞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못 보았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도 얼마든지 많은 물체가 있은 것입니다. 하여튼 똑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한 사람은 가혹하게 내버렸고 한 사람에겐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얼마나 즉각적인 회답입니까 얼마나 든든한 회답입니까 얼마나 확고한 구원의 회답입니까 이 강도는 외경에 의하면 디스마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죽은 사람들 중에 확고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에 참여한 최초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강도는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일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더불어 죽고, 이제부터 사는 것은 자기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옛날에 십자가에 죽으신 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같이 계십니다. 그 주님이 강도와 같은 내 일생의 모든 죄를 속량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앙에 선 십자가와 회개한 강도와의 관계이며,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주신 거룩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십자가의 뜻을 명백히 파악하고, 십자가의 제자로서 올바른 신앙과 생활이 우리에게 있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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