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몸.... (창3:1-10)
본문
공해와 환경오염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후, 더우기 요즘 신록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자연에 대해 생각하면서 창세기를 눈여겨보게 된다.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의 세상에 대해 창세기 기자는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창조의 신비와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우리가 다 잘 알 다시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을 통해 창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장과 결실이 구체화되는 계절이기에 하나님이 위탁 해주신 가정 사회 교회의 바른 터전을 마련하고 보존하기 위해 성실하게 땀을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건설적인 것들이 마련되고 보존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 이 병들은 지금의 사회는 멍들고, 일체의 가치기준이 뒤바뀌어졌고, 사람은 난폭해졌다. 미움이 싹트고 저주와 폭력이 난무한다. 가정과 이웃이 함께 번뇌하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는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손 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옥을 건설하고 있는 셈이다. 지자제 참패 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이웃들은 실망의 실망을 하고 있다. 이런 절망적인 시기에 많은 단체들도 국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희망을 줄 수 있을까 하여 그 대안을 만드는데 온갖 힘을 쏟고 있는 모습을 본다. 우리도 이 계절처 럼 희망과 의욕과 밝은 가정 사회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도 자신이 땀흘려 만들어 놓은 세상을 즐기셨다. 그런 가운데 눈에 유난히 들어오는 귀절이 있었다. 배경이 원시시대이니 우리의 말초신경을 건드릴만한 것은 아니지만 벗음으로 인해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다. 부끄럽다는 말 속에는 명백하게 성적인 문제성이 표명되어 있다. 수치심은 기독교 신앙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된 인간의 도덕적인 기본 감정이기도 하다. 성서는 결코 타락 이전의 인간의 성에 대 해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손의 번식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실 속에 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인간의 성적인 것을 문제시하게 된 까 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실된 사랑에서 진실하지 못한 사랑으로 전락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남 을 위한 사랑에서 나를 위한 이기적 사랑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본래의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조건 주는 것이고, 위하는 것이고, 덮어주는 것이고, 한마디로 희생적인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사랑이란 이기적인 요소를 너나 할 것 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어느정 도의 이익이 관련되어 있는 모습을 부정할 수 없다. 청춘 남녀간의 사랑을 한 예로 든다면 우리의 본래의 사랑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적에 그 사랑이 발동되는 것은 분명 어떤 동기가 있다. 그 동기는 때로는 아름다움이고 때로는 다른 어떤 매력이 라는 가치가 드러날 때가 된다. 따라서 상대방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이라는 가치가 사라지면 자연히 사랑 자체도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하나의 통례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 인간의 표정은 한마디로 부끄러운 몸이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이타적인 사랑을 피하여 이기적인 사랑의 거처에 숨어 드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적인 사랑을 깨고 참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걸친 옷가지를 제비뽑아 나눠갖는 자들에게 다 빼앗기고,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렸지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대조적인 사실을 볼 수 있다. 좀 더 확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유기적으로 관계된 공동체라는 얘기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희 생적 사랑을 피하여 부끄러운 몸이 되었는데 더 문제는 이러한 사실조차도 이제는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뎌져 버리고 말았다. 부끄러워 피한 인간을 향해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를 우리는 지금 물어야 할 때이다. 얼마나 거짓에 물들어있으며 얼 마나 참된 것이 남아있는가를 철저하게 짚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의 몸을 철저히 위장하기 전에는 사실 한 인간의 몸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얼마나 위장을 잘하느냐에 따라 이기적인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잘 위장하지 못한 우리의 몸조차 세련되지 못한 그 무엇이라 도 찾아 위장하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1차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훈련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부끄러운 몸의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얘기할 것 없이 성서에 제시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벗은 그대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바로 그것이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사회를 위해 자신을 내 어주어야 함에도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사회를 이용해 먹을까 하는데만 혈안 이 되다 보니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하신 예수의 말씀처럼 교회는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하는데만 급급해 왔던 사실에 대해 통감하며 회개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 세상은 따로 떨어뜨려 분리할 수 없는 부부의 관계와 다를바 없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세상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부끄러운 몸을 감추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갈라선 상태가 되어버렸다. 실질적으로는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이면서도 가깝 게 하기를 두려워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타락한 이기적 인간의 모습보다 더하다. 그러니 오늘의 교회를 타락했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세상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손가락질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고 쉽게 말할 것이다. 사실 믿음이 없다. 교회에 뭐 믿을만한 게 있어야 믿지. 교회가 세상을 등졌는데 세상으로 부터 교회가 사랑을 어떻게 받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교회답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는 못달릴망정 흉내라도 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는 목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을 지칭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지체가 연합하여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운 여름을 맞이하면서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진다. 우리의 그토록 부끄러운 몸을 드러낸다. 여름이라고 육체만 드러내지 말고 교회의 더러운 모습, 빈약한 모습도 그대로 내어놓자. 알몸으로 덤비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마귀들 에게는 무서운 것이 된다. 아무것도 없는 빈 껍질을 위장하려 애쓰지 말고 까뒤집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자.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랑을 결코 회복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사랑이란 이기적인 요소를 너나 할 것 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어느정 도의 이익이 관련되어 있는 모습을 부정할 수 없다. 청춘 남녀간의 사랑을 한 예로 든다면 우리의 본래의 사랑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적에 그 사랑이 발동되는 것은 분명 어떤 동기가 있다. 그 동기는 때로는 아름다움이고 때로는 다른 어떤 매력이 라는 가치가 드러날 때가 된다. 따라서 상대방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이라는 가치가 사라지면 자연히 사랑 자체도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하나의 통례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 인간의 표정은 한마디로 부끄러운 몸이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이타적인 사랑을 피하여 이기적인 사랑의 거처에 숨어 드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적인 사랑을 깨고 참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걸친 옷가지를 제비뽑아 나눠갖는 자들에게 다 빼앗기고,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렸지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는 대조적인 사실을 볼 수 있다. 좀 더 확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유기적으로 관계된 공동체라는 얘기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희 생적 사랑을 피하여 부끄러운 몸이 되었는데 더 문제는 이러한 사실조차도 이제는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뎌져 버리고 말았다. 부끄러워 피한 인간을 향해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를 우리는 지금 물어야 할 때이다. 얼마나 거짓에 물들어있으며 얼 마나 참된 것이 남아있는가를 철저하게 짚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의 몸을 철저히 위장하기 전에는 사실 한 인간의 몸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얼마나 위장을 잘하느냐에 따라 이기적인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잘 위장하지 못한 우리의 몸조차 세련되지 못한 그 무엇이라 도 찾아 위장하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1차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훈련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부끄러운 몸의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얘기할 것 없이 성서에 제시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벗은 그대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바로 그것이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사회를 위해 자신을 내 어주어야 함에도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사회를 이용해 먹을까 하는데만 혈안 이 되다 보니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하신 예수의 말씀처럼 교회는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하는데만 급급해 왔던 사실에 대해 통감하며 회개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 세상은 따로 떨어뜨려 분리할 수 없는 부부의 관계와 다를바 없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세상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부끄러운 몸을 감추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갈라선 상태가 되어버렸다. 실질적으로는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이면서도 가깝 게 하기를 두려워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타락한 이기적 인간의 모습보다 더하다. 그러니 오늘의 교회를 타락했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세상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손가락질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고 쉽게 말할 것이다. 사실 믿음이 없다. 교회에 뭐 믿을만한 게 있어야 믿지. 교회가 세상을 등졌는데 세상으로 부터 교회가 사랑을 어떻게 받겠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교회답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는 못달릴망정 흉내라도 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는 목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을 지칭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지체가 연합하여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운 여름을 맞이하면서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진다. 우리의 그토록 부끄러운 몸을 드러낸다. 여름이라고 육체만 드러내지 말고 교회의 더러운 모습, 빈약한 모습도 그대로 내어놓자. 알몸으로 덤비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마귀들 에게는 무서운 것이 된다. 아무것도 없는 빈 껍질을 위장하려 애쓰지 말고 까뒤집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자.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의 사랑을 결코 회복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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