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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로 돌아가라 (고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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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데 아무리 애를 쓰고 궁리를 해도 쉽게 해결이 되지 않을 때, 그 문제의 본질적인 면에 접근해서 다루게 되면 의외로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위기가 닥쳐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종종 부부싸움도 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당히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가령 남편이 직업을 잃었다거나 또는 아내가 남편 몰래 계를 들었다가 곗돈을 날렸다고 합시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간에 신뢰나 애정이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이고, 날이 갈수록 갈등과 긴장이 심화될 것입니다.

이제 남편은 아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존경과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져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가지고도 다투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인 이목이 그런 긴장 속에 있는 관계를 그나마 유지하게 하는 강제적 규범으로 작용을 했는데, 그 기능이 약화되면서 쉽게 그 관계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요즘에는 이혼들을 참 많이 하잖아요? 옛날에는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어서 이혼을 안 했겠어요?

자, 이렇게 위기에 처한 부부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남편이 새로운 직장을 알아본다거나 아내가 절약을 한다거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깨진 신뢰가 회복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부부 사이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옛날 연애 시절에 얼마나 죽고 못 살 정도로 그리워하며 사랑했었는지 그때 사진을 보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별 볼일 없는 집안이라면서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졌는지 잘 설득해서 기어이 결혼 승낙을 얻어냈을 때의 감격도 되살려봐야겠지요.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 커가는 아이들의 재롱으로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던 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란 두 사람이 만나서 그냥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수많은 사연들과 감정들이 이루어낸 매우 소중하고 값진 결정체란 말이지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것(잠 19:14)이라는 말씀이나,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마 19:6)이라는 말씀은 부부의 근본적인 개념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처럼 부부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남편이 직업을 잃은 것이나 아내가 곗돈을 날린 것은 그렇게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본질적인 가치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문제가 더 커지고 문제만 중요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보게 되면 문제는 아주 작아집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서로 나뉘어 싸웠는데, 그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누가 훌륭한 지도자이고, 누가 더 인기 있는 사역자인가 하는 평가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품평회 하듯이 목사를 평가하고 비교하는 수가 많아요. 어느 목사는 능력이 많다, 어느 목사는 설교를 잘한다, 어느 목사는 공부를 많이 해서 유식하다, 이런 식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목사를 선호하고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 아닙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 너희들이 그렇게 따지고 구분하는 교회의 사역자란 게 무엇인지 그 본질을 한번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 등을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노예라는 뜻인데, 가장 아래층에 있는 자들, 즉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가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 갤리선의 노젓는 노예가 되잖아요? 그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노를 젓는 임무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자신이나 아볼로,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노예, 노예 중에서도 가장 아래층에 있는 노예라는 단어를 써서 묘사하는 것은 사역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 완전히 그리스도께 예속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유능하고 똑똑해도 그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개척했다고 바울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볼로가 가르쳤다고 아볼로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맡은 자라는 단어는 청지기라는 단어입니다. 청지기는 집사예요.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신임을 얻고 그 집의 집사가 됩니다. 즉 그 집안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 된 거지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서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분업화가 이루어지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지만, 바울이나 아볼로 같은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비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습니다.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사역자들의 궁극적인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으로 초청하시는데 그 일에 쓰임받도록 부르심을 입고 수종드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일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렇게 책임을 맡은 사역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성이라는 말은 믿을 만하다,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있던가요?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지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또 내일 다르면 그 사람을 어떻게 예측해요? 그런 사람에게 무슨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어요? 우스운 얘기지만 교회 안에 그런 분들이 참 많아요. 기분이 좋은 때인지 은혜를 받은 때인지 모르지만,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을 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목사가 믿고 일을 맡겨놓으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딴사람처럼 바뀌어가지고 맡은 일에 책임감도 없고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팽개쳐버려요. 목사 입장에서 보면 죽을 노릇 아니겠어요?

일을 맡기는 사람과 일을 맡아서 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어디서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직장이든 무슨 조직에서든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능력보다도 충성입니다. 능력이야 어차피 우리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얘기를 했겠어요?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거든요. 바울이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그에게 일을 맡기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고용이 되었다면, 즉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일을 맡겼다면 고린도 교회의 평가에 신경을 많이 써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나는 이 교회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맡기셨으므로 교회나 교인들의 평가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면 매우 현실성이 없거나 아주 꽉 막힌 사람이 되어가지고 교회에서 쫓겨나기 딱 좋겠지요.

물론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쫓겨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따라야죠. 우리가 굳이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르다고 구별할 필요가 없겠지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니까요. 어쨌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역자는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고 하나님께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목사가 평판이 좋아야 하겠지만, 너무 평판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세속적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겠어요?

바울은 매우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4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털지 않아도 먼지투성이로 사는 게 우리 모습이잖아요? 정직하게 살면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사는 사람만이 이런 얘기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무슨 특수한 유전자를 타고났거나 그의 몸에 천사표 피가 흘렀던 것이 아니에요. 그도 역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절규했고, 또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딤전 1:15)라고 하기까지 했어요. 그만큼 그는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케세라 세라 하는 식으로 살아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말 못하지요.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목적도 아닙니다. 바울의 그 다음 말을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자신의 정직하고 자책할 것 없는 삶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진짜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을 판단할 권한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 평가는 할 수 있겠지요. 바울도 죽음을 앞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의 일생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최종적인 평가와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미래를 위한 평가, 발전을 위한 평가를 해야죠. 올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내년에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평가를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런 평가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 또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지요. ‘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주께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래야 진짜 평가가 되지 않습니까? 최종적인 판단과 평가를 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이 일을 맡기셨으니까 평가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 마땅하지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얘기는 뭔가 하면, 너희들이 멋대로 바울은 어떻고 아볼로는 어떻네 하는 식으로 평가를 해서 그것을 분쟁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지도 못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인가요? 우리는 목사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달란트를 받은 것은 목사만 아니지 않아요? 오늘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임무들이 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직장에 맨날 지각하고 게으름이나 피우는 사람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비판 하나에 울고 칭찬 하나에 웃기보다 주님의 평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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