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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들 (계14:13-20)

본문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한다. 솔로몬도 전7:2, 4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고 하였다. 또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바로 그 사람의 사람됨이 나타난다. 즉, 죽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전쟁 없이도 자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 이제 언젠가는 내 차례도 올 것이다. 죽음은 평등하고 공의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론적인 가치관에 우리 생의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의하면 장례식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차별 없이 같은 관, 같은 옷, 같은 예식으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결혼식에는 신분과 처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장례식에서는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과연 누가 누구에게 교만할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멸시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살전 4:16)로서 어두움 가운데서 죽은 자들(계 20:13)과는 달리 복 있는 자들이다. 이 복은 성령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복이다. 이들은 사탄의 핍박에서 견디었고, 세상의 향락을 좇지 않았으며,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도 버렸다(요 12:25). 우리는 성령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늘 말씀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계 14:13에서 “자금 이후로 주 안에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나와 여러분이 출생할 때는 부모에 의해 세상에 출생했으나 죽을 때는 그 책임을 나 자신이 모두 져야 한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는데, 공산주의자 막스는 ‘움직이는 빵’이라고 했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초로와 같은 인생’이라고도 했다. 야곱은 바로 앞에서 “내 나그네의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어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 말함으로 인생의 연약함을 나타냈다. “인간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인간일지라도 주 안에서 죽으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은 본서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 중 두 번째 복에 해당한다. 이것은 내용상 12절과 연결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지켜 인내할 때 순교를 각오하였음을 의미한다. 믿음을 지켜 순교하였다면 그들에게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한편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에서 성도들이 행한 ‘일’(헬, 에르가)은 핍박에 대한 ‘인내’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12절)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들의 일은 수고와 동일한 것으로 그들이 사탄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지치도록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킨 그들은 죽은 후에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를 높이다가 죽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합하여 살다가 죽는 사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신앙 안에 살면서 정절을 지키고 신앙을 더럽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어디든지 따라 순종한 자들을 가리킨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는 자”(12절)라고 했다. 그러기에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 살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잘 죽느냐가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깨끗하고 선명한 일생이었다. 두려움이나 공포, 어두움이 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만약 마라톤 선수에게 골인 지점이 없다면 어떻게 뛰겠는가 삶을 살았으면 결론을 맺어야 한다. 피곤하게 사는 자에게 밤의 휴식이 있듯이 죽음은 고달픈 생을 살고난 후에 오는 평안한 휴식이다. 모든 생의 자기 완성은 죽음이요, 자기 신앙과 생활의 결론이다. 믿는 자라고 죽지 않거나 죽음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두려움 없이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뿐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고 보편적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인정하고 살아가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시간 시간 고백해야 한다. 영생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보면 허무뿐이다. 소유를 중심으로 가치관을 평가하면 죽음은 허무하고 무상하지만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죽음은 완성이요, 성공이다. 순교자는 소유로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장례식마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순교자가 되었다는 존재적인 의미가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즉, 핍박받는다는 것이 소유로서는 무를 의미하지만, ‘핍박받는 자’가 되었다고 하는 그 존재는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주 안에서 죽은 자에게 내리신 축복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 때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해결된다.
첫째, 범죄한 인간들에게 해결책을 주신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오지 않고는 해결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이 인간들이 지은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둘째, 고통의 인간들에게 해결책을 주신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해결받을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의 멍에를 메고 신음하는 인간들이 예수님 안에서 참 평화를 얻게 되고 참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옛 시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마음에 맺힌 시름 첩첩이 쌓여 있어 짓느니 한숨이요 흐르나니 눈물이라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끝이 없다.” 이같은 고백이 바로 불신자들이 느끼는 인생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셋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사망의 문제를 그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한무제는 송로반을 만들어서 이슬을 받아 먹음으로 장생불사하고자 했고, 진나라 진시황은 동남동녀 500인을 삼신 산에 보냈으나 죽고 말았다. 이 세상 그 누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오직 성경에서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사망의 권세를 책망하고 사망의 세력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 어떤 복이 있는가
첫째, 영생의 관문으로써 괴로운 인생을 정리하게 된다. 예수님 안에서 죽을 때 죽음이란 문은 고통스러운 인생을 청산하고 영생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신앙 안에 사는 자에게만 가능한 축복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음으로 맞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둘째, 사망이 주관치 못한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다. 신앙적으로 볼 때 죽음은 세번 온다. 먼저는 영적인 죽음이다. 아담이 지은 죄로 인생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러기에 죽은 자들(육신)은 죽은 자들(사망)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두 번째는 육신적인 죽음이다. 이것은 70-80세가 되어 육신의 수명이 다 됐을 때 오는 육신의 죽음이다. 여기까지는 불신자와 같다. 마지막으로
셋째 사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죽지 못한 사람이 불못에 던지는 죽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다. 이 세상은 잠깐 천막을 치고 낡아 버리면 벗어 버리는 것으로써, 주 안에서 죽은 성도의 죽음은 참 자유를 의미하며, 참 생명을 말하며,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향하는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수고한 일의 열매가 주어진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아니해도 주 안에서 충성을 다한 주의 종들이 이 세상 안에서는 혹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 안에서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행한 대로 그 행위가 따르게 되기 때문에 주를 위해 충성한 종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면류관을 받게 된다. 이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요, 의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 금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등이 그 행한 대로 우리 머리에 주어질 것이다. 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에서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 것이니 복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모든 수고가 지금은 감추어 있어도 사망 이후에는 모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그 날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은 백년을 살 준비를 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을 준비하고 아이를 잉태하면 출산 준비를 한다. 한 평생 살기 위해서 집을 장만하고 노후 대책을 위해 복지 보험을 들어 둔다. 그러나 백년 살 준비만 하고 오늘 죽을 준비를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끝날을 예비하라고 하셨고(마 24:44),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하셨다(암 4:12).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지 겸손하게 뒤돌아 보아야 한다. 맡겨 주신 직분에 부끄럽지 않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본전은 남았다고 안심해서는 안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책망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전도받아 예수 믿은 내가 평생 한명 전도했으면 겨우 한 달란트 남긴 본전이다. 이런 사람은 빨리 한 명이라도 더 전도해야 한다. 행실도 바르게 준비해야 한다. 염소처럼 살지 않았는지 살펴 돌아보자.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들을 일은 하지 않았는지 헤아려 보자.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고 했다(마 16:19). 억울한 자의 호소는 하늘까지 미친다(창 4:10).
그러므로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저축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자. 주님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고 하셨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은행에 저축하는 것은 은행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 경제를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하늘의 은행에 쌓아둔 재물도 마찬가지이다. 땅에서 부자지만 하늘에서 가난한 사람도 있다. 비록 땅에서는 보잘 것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부자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고 고백하였다. 한 경기자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후에 엄청난 감격을 안고 있는 부러운 모습이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고 의술이 뛰어나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손을 들고 만다. 인류 역사 중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 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고 하나 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음을 안다면 사람은 죽음과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 하겠는가 후회스럽게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끗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다.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다가 비참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날을 기다리다가 떳떳하게 죽는 사람도 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순서 없이 찾아온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므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전 8:7-8). 성경은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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