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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파의 목적 (행1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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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에는 우리 나라와 동양권에서 지키고 있는 고유한 민속명절인 설날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설날이 되면 각 가정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이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 때마다 불신자들을 둔 신자 가정은 제사문제로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와 이방문화, 즉 하나님 중심적인 문화와 인간 중심적인 문화가 충돌하여 갈등을 빚을 때 겪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은 사실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조상제사나 무당이나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천주교나 자유주의 신학적인 기초를 가진 교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신자라면 조상제사문제는 큰 문제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상제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과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명절을 통하여 믿지 않는 우리의 이웃이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복음전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인데, 이 본문이 이 주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한 사건입니다. 이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여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면서부터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을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14:8-9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지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이 본문이 상황은 이렇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루스드라에 한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이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설교 도중에 그를 주목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소리로 말하면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은 뛰면서 걷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바울이 하는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가 나면서 걷지 못하여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을 고치신 사건과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비슷한 부분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쳤다고 하는 것과, 둘 다 믿음으로 나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바울이 "구원받을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고쳐주셨다고 하였고, 사도행전 3:16에서도 베드로가 신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이 기록을 볼 때 믿음이 두 사람 다 고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기적을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할까요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일반화시켜서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건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도 믿음이 있으면 이러한 방법으로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 기적들은 오늘날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이나 사도들이 행한 기적 또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행한 기적들은 모두 한가지의 공통되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게하려는 것입니다. 역시 이 표적도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가지고 해석하여 적용하기를 그 강조점을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가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일어난 독특한 한 사건은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큰 기적도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어떤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칙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일반화시켜 보편적으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역사적으로 있었던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여기에다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영적으로 앉은뱅이가 된 우리들이라고 연결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밝히지도 않고 역사적인간격을 무시하여 그 뒤에 감추어진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면 성경을 읽는 사람의 주관적인 관점에 따라 수많은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역사적으로 있었던 한 사람으로 이해해야지 영적으로 앉은뱅이 된 사람이라든지, 어떤 방법으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적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합니다(행14:3). 여기서 바울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신을 고치게 된 사건도 하나님께서 바울이 증거하는 말에 대하여 증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그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을 일반화시킬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적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날 때부터 한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바나바가 날 때부터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고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요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사도행전 14:11-12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이 말씀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행한 일을 본 사람들은 루가오니아 말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 지역의 전설과 관련이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라틴의 시인 오비드(Ovid)가 이 지방에 있었던 전설을 시로 지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우스(Zeus, La. Jupiter) 신과 그의 아들 헤르메스(Hermes, La. Mercury)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브루기아 산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여러 번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갈대로 엮은 작고 초라한 오두막집에 살던 빌레몬(Philemon)과 바우시스(Baucis)라고 하는 늙은 농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후히 대접하였습니다. 후에 그들은 이 농부 부부에게는 후하게 보상하였지만 그들을 맞이하지 않았던 다른 집들은 홍수로 쓸어 버렸습니다. 최근에 칼더(W. M. Calder)라고 하는 사람이 발견한 비문에 이 전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루가니오 사람이 헤르메스 신상을 제우스에게 바쳤다."는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루가니오 방언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를 제우스(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그의 아들 헤르메스(허메)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있는 바와 같이 제우스는 그리이스 신전의 주신이었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마이아(Maia)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신들이 전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바나바는 바울보다 나이도 많고 점잖았기 때문에 제우스로, 바울은 바나바보다는 젊고 말하는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 진 것 같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은 그 신당에서 황소와 화관(최고의 권위자나 승리자에게 주는 관)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기 위하여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자신들도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도행전 14:14-15의 말씀을 보십시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의 이러한 태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계 신문에 머릿기사로 나타나는 내용이 수만 명의 교인 출석하는 서울 만민중앙성결교회 이재록 목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많은 사람을 기도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 많은 회심자가 있었고 치료되는 역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이나 바나바처럼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시켰습니다. 그의 설교나 발언을 보면 이 점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98년 7월 3일 금요철야예배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피를 몽땅 쏟아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성이 없는 새 피를 받았다. 따라서 나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98년 6월 21일 예배에서는 "물위에 걷는 것 외에는 성경 66권을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신격화시키자 교인들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이재록 목사가 해외에서 음주와 도박 사건으로 문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이 교회의 직원회의에서 한 성가대원이 "당회장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다. 당회장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당회장님이 술을 드셨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다. 술 먹을 권세를 주신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98년 8월 20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현상을 볼 때 구약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 말이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어떻게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0-31)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고칠 때 그들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들에게 아주 놀라운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전도자의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을 설명하였습니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14:16)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도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한 설교의 핵심을 사도행전의 누가는 사도행전 14:15-17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이 설교는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한 방법과 방법론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구약에 계시된 메시야가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먼저 하나님의 자연계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연계시라 함은 자연계시는 자연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연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먼저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지은 분이시다. 그분은 살아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이 설명은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농경문화권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런 말을 했지만 오늘 산업정보화 사회에는 모든 일을 풀어주시고 사업이나 연구의 결과를 주시는 분이시며, 일용할 양식과 삶의 즐거움과 여유를 주시는 분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한 것을 묵인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모를 때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한 때에 대하여 벌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16-17절을 헬라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번역하면 이 의미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과거 세대에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증거없이 자신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비를 주시고 때마다 결실을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시고, 음식을 충분히 주시고 너희의 마음에 기쁨으로 채우시고 만족케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인하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오래 참으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쓴 편지 가운데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19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셨기 때문에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헛된 신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은 이 말씀에서 제우스 신과 헤르메스 신의 허구성도 아울러 공격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들을 통치하시고 우리에게 일상적인 필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은 종교를 "하나님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논리적 순서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맏아들일 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루스드라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은 헛된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을 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거짓 신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는 헛된 철학이나 우상, 조상제사를 맹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설을 위시한 명절이 될 때마다 조상제사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조상제사 문제로 인하여 갈등을 겪는 이유는 조상제사는 곧 효도라고 하는 등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상제사는 실제에 있어서 효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죽은 조상이 후손들이 정성을 드려 차례를 지내면 그들에게 복을 준다고 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무속신앙과 결합되어 기복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죽은 자가 산 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어떤 형태로든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가능하며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날이 될 때마다 불신자 가족들이 있는 가정마다 고민하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우리의 신앙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해 준 것처럼 하나님을 설명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비와 이슬을 내리게 하시고 결실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현대의 산업 정보화시대에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지혜를 주시며 결과를 주시는 분이심을 설명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답은 너무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사람이 속한 공동체, 사회, 문화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의 의식구조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파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과 친구들, 나아가서 국가와 여러 제도권과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구조는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과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충돌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기울일 때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한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을 걷게 하신 것과 같은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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