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골로새1:3-5)
본문
그리스도 안에서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안에 이어서 감사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를 향한 그들의 신앙 때문에 감사하고 성도를 향한 그들의 사랑 때문에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사랑이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근거했기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그 소망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던 순간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살던 골로새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홀연히 밝은 빛이 비쳤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들이 복음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은 골로새 사람들 가운데 뿐 아니라 온 천하에 승리의 진군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감사는 계속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들은 바울이 감격하고 있는 복음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복음이 무엇이길래 바울은 그것을 골로새인이 들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처럼 기뻐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바울은 그것을 들었다는 사실로 그처럼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서 8절은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이 무엇을 하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바울은 지금 골로새 성도들에게 이미 도래한 소망, 그들이 이미 듣고 이미 받아들인 복음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에 대해서 맨먼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복음 그 자체를 마치 승리의 진격을 하는 군대처럼 묘사합니다. 복음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도래했고 그들의 삶 속에 확실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있는 생명체입니다. 보무 당당히 진격하는 군대와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이 한 기도부탁입니다. 바울은 오순절 이후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했지만 데살로니가 사역은 기억할 만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었는지 해를 두고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그때의 사실을 감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말씀의 달음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조용히 스며드는 곳도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천천히 걷듯이 복음이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만 데살로니가 교회에서의 말씀 사역은 달음질이라고 표현하기에 적합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초두에서는 그 말씀 사역의 감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한 줄은 아노라"고 까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님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 ." 예,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위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위로부터 온 계시의 말씀이기에 때로는 보무 당당한 군사의 입성과도 같고 때로는 마라톤 선수의 달음질과도 같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골로새에 도래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골로새를 접수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이 복음을 이미 들었고 그들의 심령을 그 진리가 장악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골로새에 미친 복음의 위력은 동시에 온 세상 전역에 그 힘있는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 ." 복음은 그 소식을 듣고 깨닫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냥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두움 속에 앉은 사람에게 홀연히 밝은 빛을 비추어 줍니다. 절망 가운데 앉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세상이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왜 열심히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 하는지 아십니까 복음을 듣고 깨달으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지고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믿고 다음 주일에 오실 때는 그동안 위해서 기도해온 분들을 인도해 오십시오. 복음 진리의 말씀은 들을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들을 때에 깨닫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삶이 바뀌어 집니다. 권위적인 남편이 사랑의 가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아내가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내로 바뀌어집니다. 반항하는 자녀들이 순종하는 자녀로 바뀌어집니다. 고집 부리는 노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노인으로 바뀌어집니다. 부부 관계가 바로 되어집니다. 가족사이에 화목이 찾아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복음이 터득하게 만듭니다. 어른들 뿐 만 아닙니다. 청소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진리는 듣고 참으로 깨닫는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전혀 새로운 존재로 젊은이들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주일예배든지 밤예배든지, 제직 수련회든지 청소년 캠프든지 놓지 마십시오.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언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만지실지 모릅니다. 진리가 사람의 고막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그래서 소중합니다. 그 과정 속에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 복음을 듣고 깨달은 골로새 사람 중에서와 같이 복음은 또한 온 천하에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지역에 침투한 당대의 이단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속였는줄 아십니까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진리를 소수의 사람들만 깨닫는 것으로 한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온천하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그 영향이 온 세계에 미칩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든지 영향을 줍니다. 빈부귀천 누구든지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급속한 성장은 오늘날 역사가들의 감탄의 대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복음 진보 상황 역시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경이로운 것입니다. 2세기 중반 순교자 유스틴은 어떤 민족 누구에게도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와 기도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곳은 없다고 증언합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을 복음은 장악했다고 증거합니다. 그 50년 후 터툴리안이라고 하는 교부는 다음과 같이 첨가합니다. "우리는 다만 어제 시작했으나 오늘은 여러분의 도시와 섬들, 병영과 궁궐, 의회와 강단을 이미 채우고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신당만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선교의 세계적 진전'이란 책을 쓴 어떤 학자(R.H.Glover)는 사도시대 말기에 급속도로 초대교회가 발전했다고 생각했을 그때에 50만 성도를 측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수효는 50년전 한국 신자수와 거의 맞먹는 정도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벌써 '천만을 넘는 숫자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복음은 골로새와 당시의 세상에 위력을 떨친 것처럼 오늘 조국 방방곡곡에서 그 영향을 증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시작부터 세계적인 메시지입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의 소식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군의 찬양입니다. 하늘과 땅을 모두 상관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인생들에게 미치는 소식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주님의 분부입니다. 복음은 로마제국 신비종교 중 하나가 아닙니다. 지역 종교에 적당한 변형이나 첨가가 아닙니다. "온 천하에서도" 그 위력을 발하는 엄청난 소식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분부하신 소식입니다. 복음은 세상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셋째로 복음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본문 6절은 이 복음을 들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과 평행으로 서술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주제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단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속박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단의 가르침은 율법적인 속박과 인간적인 억압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들로 자유하게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을 허락합니다. 복음은 주권적인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을 찾아오신 소식입니다. 어두움의 결박아래 있는 인생을 그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구출하신 소식입니다. 율법주의 가르침의 표어는 무엇입니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가 아닙니까 그러나 복음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단어로 골로새서에는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사역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너희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냈다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오게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소식이 아닙니다. 엄청난 일을 요구받고 절망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에 관한 소식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향한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말해줄 뿐입니다. 골로새는 특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하신 구원 사역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침투했던 이단들이 신령해지려면 계속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수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복된 은혜에 관한 소식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고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값없는 구원이요.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신 황송한 호의에 관한 소식입니다. 무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소식입니다. 죄인을 아들의 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소식입니다. 원수된 자를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소식입니다. 이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는 복음 진리를 들을 때 만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복음의 도래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삶 속에 찾아 오신 소식입니다. 우리를 만나 주신 소식입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준 소식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일마다 시간마다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감격하여 자유함을 맛보십시오. 복음은 우리를 감사하게 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른 땅에 샘이 솟아나게 합니다.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나게 합니다. 전대미문의 새로운 창조 역사입니다. 그럴듯한 곳에 일어나는 생명 운동이 아닙니다. 옥토에 피어나는 장미가 아닙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누려보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찬양케 될 것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리라"고!
넷째로 참 복음의 결정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데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열매를 맺고 자란다'는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차라리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어간다"고 고쳐 번역하면 덜 어색할 것 같습니다. 일년초들은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다년초들은 열매를 맺고나면 새봄에 또 가지를 뻗는 것입니다. 새로 뻗는 가지에서 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약적 표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체에게 명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오늘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서 충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명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선교적으로 성취된 것을 일컬어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크리소스톰 이후로 선행의 열매로 이해합니다. 반면에 가지를 뻗는다는 것은 회심자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 성도를 향한 바울의 기도에 유사한 표현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그 신적 기원 때문에 풍성한 열매를 보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내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 속에 내재한 복음의 능력은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하게 사는 자를 하나님께 반하게 만듭니다. '예수에 뿅간 우리 마누라'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아니면 '막쪄낸 찐빵'을 읽어보십시오. 복음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악된 욕망을 따라 사는 자를 거룩한 소원을 따라 살게 만듭니다. 나아가서 복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복음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사회를 개혁시킵니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회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바꾸어 갑니다. 어떻게 복음으로 말미암는 개인적인 삶의 변화의 열매는 사회 전체에 확실히 영향을 끼칩니다. 가루 서말속에 들어있는 누룩과 같이 전체를 부풀게하는 내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게 되면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게 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는 거룩한 삶을 살므로 이웃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갑시다. 복음이 여러분의 삶 속에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어가도록" 하십시오. 복음의 내적 활동과 외적 팽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요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매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열매를 맺고 나면 뿌리채 썩어지는 곡식과 같지 않습니다. 복음은 다년생 나무와 같아서 가을에 열매를 맺고 나면 봄에 새가지를 뻗어갑니다. 이 활동은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활동입니다. 다섯째 끝으로 이 복음은 언제나 인간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이 이 놀라운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할 뿐더러 이 복음은 그들에게 전한 에바브라로 인해서 또한 감사드립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에바브라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바브라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에바브라 디도의 약칭이고 당시에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 외에 4장 12-13절과 빌레몬 23절에만 등장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골로새 태생이요 골로새 뿐 아니라 그 지역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합니까 "함께 종된 사랑하는 자"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종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중요한 동역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종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인 데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역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꼭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매이지 않고는 함께 사역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 매인 사람들과 더불어서 동역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그를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묘사합니다(KJV. Mof. UBS. 개역). 많은 다른 사본에 따르면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부릅니다(NAB. NEB. NIV. ASV. RSV). 궁극적인 의미는 크게 문제될 바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바울 사도를 대신해서 골로새 성도를 위해서 사역하는 일꾼으로 종합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에바브라의 골로새 사역은 바울을 대신한 사역입니다. 바울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에바브라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열매인 듯 싶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아시아에 있는 사람 거의 대부분이 복음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바브라는 복음을 듣고 자기 고향 골로새-라오디게아-히에라볼리 등 라이커스 계곡의 도시들에 바울의 파송을 받아 사역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의 파송을 받았다 해도 바울의 권위가 아니라 바울이 섬기는 주님의 권위로 일한 것에 틀림없습니다. 일꾼은 대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가르킵니까 각종 잡다한 일들입니다. 불 끄고 문 잠그고 쓰레기 태우고 자동차 운전하고 그 뿐만 아니라 가끔 수요일 밤에 설교하고 주일날 아이들 가르치고 주간에 여러 가지 포스타까지 붙이는 온갖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바울 대신 그런 일을 수행했습니다. 바울을 대신해서 전한 복음이기에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이기에) 그들이 배운 바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은 이 복음을 전달한 에바브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8절). "성령님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골로새 교회의 보냄을 받아 그들의 사랑을 바울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어떻게 모든 성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지를 전했습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특히 사도 바울에게도 그 사랑은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온 교회가 성령님으로 일깨워진 사랑으로 충만한 분위기를 본문에서 느껴 보십시오. 성령님으로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은 동일한 성령님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에바브라는 출석 상황 대신에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 가운데는 틀림없이 별로 좋지 못한 소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선 그 보고 속에서 밝은 것들을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찬양할 수 있으며 그들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울산 교회는 어떠합니까 아직도 어두운 면들이 우리 주위에 없지 않습니다. 새해가 되었으나 새롭게 되지 못한 부분도 남아 있습니다. 낙심되는 부분조차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마음은 그 가운데서도 밝은 면을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사랑-소망으로 서로를 향해서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이웃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사가 지속됨을 바라볼 줄 아는 전체적인 시각을 잃지 맙시다.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전체적인 줄기를 잡아 낼 줄 아는 자가 비젼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낙동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 앞에서는 어느 쪽으로 흘러 가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큰 물줄기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상황입니다. 순간순간 역류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우리 눈에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밝은 면에 우리의 시선을 향할 때 아직 추운 겨울 아침이지만 우리는 바울과 함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팍에서 역사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의 위력으로 인해서 함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신실한 동역을 통해서 복음 역사는 한 날 위대한 사랑의 보고를 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보좌를 둘러서서 민족과 방언, 나라와 족속들과 우리 가운데서 성취하신 놀라운 복음 진리의 역사를 보고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비전을 잃지 않는 주님의 백성되시기를 바랍니다.아멘.
데살로니가 후서 3장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울이 한 기도부탁입니다. 바울은 오순절 이후 온 천하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했지만 데살로니가 사역은 기억할 만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었는지 해를 두고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그때의 사실을 감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말씀의 달음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조용히 스며드는 곳도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천천히 걷듯이 복음이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만 데살로니가 교회에서의 말씀 사역은 달음질이라고 표현하기에 적합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초두에서는 그 말씀 사역의 감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한 줄은 아노라"고 까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님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 ." 예,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위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위로부터 온 계시의 말씀이기에 때로는 보무 당당한 군사의 입성과도 같고 때로는 마라톤 선수의 달음질과도 같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골로새에 도래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골로새를 접수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이 복음을 이미 들었고 그들의 심령을 그 진리가 장악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골로새에 미친 복음의 위력은 동시에 온 세상 전역에 그 힘있는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 ." 복음은 그 소식을 듣고 깨닫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냥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두움 속에 앉은 사람에게 홀연히 밝은 빛을 비추어 줍니다. 절망 가운데 앉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세상이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왜 열심히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 하는지 아십니까 복음을 듣고 깨달으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지고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믿고 다음 주일에 오실 때는 그동안 위해서 기도해온 분들을 인도해 오십시오. 복음 진리의 말씀은 들을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들을 때에 깨닫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삶이 바뀌어 집니다. 권위적인 남편이 사랑의 가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아내가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내로 바뀌어집니다. 반항하는 자녀들이 순종하는 자녀로 바뀌어집니다. 고집 부리는 노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노인으로 바뀌어집니다. 부부 관계가 바로 되어집니다. 가족사이에 화목이 찾아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복음이 터득하게 만듭니다. 어른들 뿐 만 아닙니다. 청소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진리는 듣고 참으로 깨닫는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전혀 새로운 존재로 젊은이들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주일예배든지 밤예배든지, 제직 수련회든지 청소년 캠프든지 놓지 마십시오.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면 여러분!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언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만지실지 모릅니다. 진리가 사람의 고막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그래서 소중합니다. 그 과정 속에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 복음을 듣고 깨달은 골로새 사람 중에서와 같이 복음은 또한 온 천하에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지역에 침투한 당대의 이단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속였는줄 아십니까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진리를 소수의 사람들만 깨닫는 것으로 한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은 온천하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그 영향이 온 세계에 미칩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든지 영향을 줍니다. 빈부귀천 누구든지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급속한 성장은 오늘날 역사가들의 감탄의 대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복음 진보 상황 역시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경이로운 것입니다. 2세기 중반 순교자 유스틴은 어떤 민족 누구에게도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와 기도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곳은 없다고 증언합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을 복음은 장악했다고 증거합니다. 그 50년 후 터툴리안이라고 하는 교부는 다음과 같이 첨가합니다. "우리는 다만 어제 시작했으나 오늘은 여러분의 도시와 섬들, 병영과 궁궐, 의회와 강단을 이미 채우고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신당만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선교의 세계적 진전'이란 책을 쓴 어떤 학자(R.H.Glover)는 사도시대 말기에 급속도로 초대교회가 발전했다고 생각했을 그때에 50만 성도를 측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수효는 50년전 한국 신자수와 거의 맞먹는 정도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벌써 '천만을 넘는 숫자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복음은 골로새와 당시의 세상에 위력을 떨친 것처럼 오늘 조국 방방곡곡에서 그 영향을 증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시작부터 세계적인 메시지입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의 소식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군의 찬양입니다. 하늘과 땅을 모두 상관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인생들에게 미치는 소식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주님의 분부입니다. 복음은 로마제국 신비종교 중 하나가 아닙니다. 지역 종교에 적당한 변형이나 첨가가 아닙니다. "온 천하에서도" 그 위력을 발하는 엄청난 소식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분부하신 소식입니다. 복음은 세상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셋째로 복음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본문 6절은 이 복음을 들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과 평행으로 서술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주제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단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속박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단의 가르침은 율법적인 속박과 인간적인 억압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들로 자유하게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을 허락합니다. 복음은 주권적인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을 찾아오신 소식입니다. 어두움의 결박아래 있는 인생을 그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구출하신 소식입니다. 율법주의 가르침의 표어는 무엇입니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가 아닙니까 그러나 복음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단어로 골로새서에는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사역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너희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냈다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오게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소식이 아닙니다. 엄청난 일을 요구받고 절망하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에 관한 소식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향한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말해줄 뿐입니다. 골로새는 특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하신 구원 사역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침투했던 이단들이 신령해지려면 계속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수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복된 은혜에 관한 소식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고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값없는 구원이요.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신 황송한 호의에 관한 소식입니다. 무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소식입니다. 죄인을 아들의 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소식입니다. 원수된 자를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소식입니다. 이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는 복음 진리를 들을 때 만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복음의 도래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삶 속에 찾아 오신 소식입니다. 우리를 만나 주신 소식입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준 소식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일마다 시간마다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감격하여 자유함을 맛보십시오. 복음은 우리를 감사하게 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른 땅에 샘이 솟아나게 합니다.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나게 합니다. 전대미문의 새로운 창조 역사입니다. 그럴듯한 곳에 일어나는 생명 운동이 아닙니다. 옥토에 피어나는 장미가 아닙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누려보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찬양케 될 것입니다.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리라"고!
넷째로 참 복음의 결정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데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열매를 맺고 자란다'는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차라리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어간다"고 고쳐 번역하면 덜 어색할 것 같습니다. 일년초들은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다년초들은 열매를 맺고나면 새봄에 또 가지를 뻗는 것입니다. 새로 뻗는 가지에서 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약적 표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체에게 명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오늘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서 충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명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선교적으로 성취된 것을 일컬어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크리소스톰 이후로 선행의 열매로 이해합니다. 반면에 가지를 뻗는다는 것은 회심자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 성도를 향한 바울의 기도에 유사한 표현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그 신적 기원 때문에 풍성한 열매를 보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내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 속에 내재한 복음의 능력은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하게 사는 자를 하나님께 반하게 만듭니다. '예수에 뿅간 우리 마누라'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아니면 '막쪄낸 찐빵'을 읽어보십시오. 복음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악된 욕망을 따라 사는 자를 거룩한 소원을 따라 살게 만듭니다. 나아가서 복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복음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사회를 개혁시킵니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회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바꾸어 갑니다. 어떻게 복음으로 말미암는 개인적인 삶의 변화의 열매는 사회 전체에 확실히 영향을 끼칩니다. 가루 서말속에 들어있는 누룩과 같이 전체를 부풀게하는 내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게 되면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게 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는 거룩한 삶을 살므로 이웃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갑시다. 복음이 여러분의 삶 속에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어가도록" 하십시오. 복음의 내적 활동과 외적 팽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요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매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열매를 맺고 나면 뿌리채 썩어지는 곡식과 같지 않습니다. 복음은 다년생 나무와 같아서 가을에 열매를 맺고 나면 봄에 새가지를 뻗어갑니다. 이 활동은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활동입니다. 다섯째 끝으로 이 복음은 언제나 인간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이 이 놀라운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할 뿐더러 이 복음은 그들에게 전한 에바브라로 인해서 또한 감사드립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에바브라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바브라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에바브라 디도의 약칭이고 당시에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 외에 4장 12-13절과 빌레몬 23절에만 등장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골로새 태생이요 골로새 뿐 아니라 그 지역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합니까 "함께 종된 사랑하는 자"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종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중요한 동역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종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인 데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역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꼭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매이지 않고는 함께 사역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 매인 사람들과 더불어서 동역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그를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묘사합니다(KJV. Mof. UBS. 개역). 많은 다른 사본에 따르면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부릅니다(NAB. NEB. NIV. ASV. RSV). 궁극적인 의미는 크게 문제될 바 없습니다. 에바브라는 바울 사도를 대신해서 골로새 성도를 위해서 사역하는 일꾼으로 종합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에바브라의 골로새 사역은 바울을 대신한 사역입니다. 바울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에바브라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열매인 듯 싶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아시아에 있는 사람 거의 대부분이 복음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바브라는 복음을 듣고 자기 고향 골로새-라오디게아-히에라볼리 등 라이커스 계곡의 도시들에 바울의 파송을 받아 사역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의 파송을 받았다 해도 바울의 권위가 아니라 바울이 섬기는 주님의 권위로 일한 것에 틀림없습니다. 일꾼은 대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가르킵니까 각종 잡다한 일들입니다. 불 끄고 문 잠그고 쓰레기 태우고 자동차 운전하고 그 뿐만 아니라 가끔 수요일 밤에 설교하고 주일날 아이들 가르치고 주간에 여러 가지 포스타까지 붙이는 온갖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바울 대신 그런 일을 수행했습니다. 바울을 대신해서 전한 복음이기에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이기에) 그들이 배운 바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은 이 복음을 전달한 에바브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8절). "성령님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골로새 교회의 보냄을 받아 그들의 사랑을 바울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어떻게 모든 성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지를 전했습니다. 모든 성도 가운데 특히 사도 바울에게도 그 사랑은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온 교회가 성령님으로 일깨워진 사랑으로 충만한 분위기를 본문에서 느껴 보십시오. 성령님으로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은 동일한 성령님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에바브라는 출석 상황 대신에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 가운데는 틀림없이 별로 좋지 못한 소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선 그 보고 속에서 밝은 것들을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찬양할 수 있으며 그들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울산 교회는 어떠합니까 아직도 어두운 면들이 우리 주위에 없지 않습니다. 새해가 되었으나 새롭게 되지 못한 부분도 남아 있습니다. 낙심되는 부분조차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마음은 그 가운데서도 밝은 면을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사랑-소망으로 서로를 향해서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이웃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사가 지속됨을 바라볼 줄 아는 전체적인 시각을 잃지 맙시다.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전체적인 줄기를 잡아 낼 줄 아는 자가 비젼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낙동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 앞에서는 어느 쪽으로 흘러 가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큰 물줄기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상황입니다. 순간순간 역류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우리 눈에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밝은 면에 우리의 시선을 향할 때 아직 추운 겨울 아침이지만 우리는 바울과 함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팍에서 역사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의 위력으로 인해서 함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신실한 동역을 통해서 복음 역사는 한 날 위대한 사랑의 보고를 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보좌를 둘러서서 민족과 방언, 나라와 족속들과 우리 가운데서 성취하신 놀라운 복음 진리의 역사를 보고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비전을 잃지 않는 주님의 백성되시기를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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