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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 설교 (딤후4:1-5)

본문

오늘 제 강의의 제목이 복음적 선포 혹은 복음적 설교 입니다. 여러분이 강의안을 받으셨 을 텐데 강의안을 보면서 진행하겠습니다.
1.복음은 사람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능력(권세)이다(롬 1:16). 복음의 선포로 만이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이 복음의 선포로 이루어진다. 복음 선포 외에 어떠한 것도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아무리 고상한 도덕적 강론으로도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며, 또 그 도덕의 실행에 이르 게 하지 못한다. 도덕성 강론을 해도 윤리는 강론해도 그 실행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 윤리이다.
그런데 도덕 강론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만이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도덕의 실천에 이르게 한다. 사람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 할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질 할 법도들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복음의 선포에 성령님이 역사 하므로 사람들이 변화되어 바른 사람이 된다. 복음 선포에 성령님이 역사 하므로 사람들 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므로(고후 5:7) 예수 믿고 구원에 이르며 자기에게서 해방된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지반은 복음의 선포이다. 성령님이 아무리 역사하시기 원하셔도 복음의 선포 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못하는데 복음 선포에 성령님이 역사한다. 복음에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므로 하나님의 의를 획득한다. 본래 의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 데 사람이 아무도 법을 지켜 하나님의 계명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음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그 모든 법을 지키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여 구원에 이른다. 복음 선포에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므로 죄에서 해방되고 죄과가 제거된다. 복음 선포로 믿음이 생겨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 죄가 제거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바로 의가 된다. 믿음으로 의를 이룸으로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화평에 이른다. 의롭게 되는 것은 단지 죄의 제 거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서 구원받음 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화평 에 이른다. 이와 같은 일은 복음의 선포가 이룬다. 사람의 노력, 의를 이루려는 종교적 열 성, 참된 자기를 만들려는 인간의 자기 노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복음 선포가 이룬다. 오래 자기 노력과 투쟁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선포가 이루어낸다.
왜냐하면 그 선포는 복음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선포되면 성령님이 역사 하므로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사람 이 되고 바른 경지에 이른다. 복음이 그 내용대로만 제시되면 복음이 제시한 목표대로 사람 들은 변화된다. 이처럼 복음 선포에 기적이 발생한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큰 기적은 바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아무도 사람을 변 화시키지 못한다. 자기 자신도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단지 복음 선포로 만이 이와같이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이 발생한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큰 기적은 바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이어서 선포되면 능력으로 역사한다. 복음이 선포되면 이와같이 복음은 바로 능력으로 역사한다. 이 복음 외에 다른 어떠한 길도 하나님의 구원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언제든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2.복음이 생명의 양식이다(요 6:). 사람이 사는 양식은 빵이나 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신 8:3).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이 사는 양식이다. 처음 예수 믿을 때만 복음이 선포되 고 필요하고 예수 믿은 다음에는 이제 다른 것으로 살 줄 생각하는데 그런게 아니고 사람 이 사는 양식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를영혼의 양식 이라고 하였는데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복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복음을 통해서 이므로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근거가 되었다. 처음 출생할 때만 복음을 필요로 하고 그리스도인 된 다음에 사는 길은 다른 길로가 아니 고 복음의 선포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활동을 위해 항상 양식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살 생명의 양식이 바로 복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출생시 그 출생의 근본이 된 복음을 양식으로 하여 자라가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유지한다. 그리스도인 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은 복음의 선포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왜 교회에서 사람들이 신 앙이 자라지 않는가 그건 그 사람들에게만 잘못이 있는게 아니라 설교가, 선포가 바로 복음으로 제시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될 때만 복음의 선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의 선포로만 유지된다. 그리스도 인의 삶으로 윤리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바른 행동을 요구할 때에도 율법적 요구로는 율법에 대한 자연인의 대응방식만 낳는다.그리스도인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된다. 저렇게 살아야 된다하고 그 삶의 방식을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구하면 그렇게 받아들 이고 그렇게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의 길을 갈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그렇게 율법 적 요구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율법에 대한 자연인이 하는 방식을 한다. 그래서 반감과 적개심을 유발한다. 어찌어찌 해야 한다는 당위를 요구할 때 복음없이 율법의 방식으로 하 면 반발과 굳어짐을 유발한다.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과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러분 들이 상대하는 그리스도인들도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하고 자꾸 강조를 하 면아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니까 지켜야 되겠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감을 유도한다. 그래서 제일 첫번째자기부터서 좀 잘해보지!하는 감정을 청중들에게서 유발한다.자기부터서 좀 잘하지 자기는 잘 못하면서!그래서 반발하고 굳어짐을 유발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인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아무 차이가 없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선포가 와서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강조를 들을 때에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해야 된다는 강조를 듣기 때문에 반발 한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계속해서 축적했다. 그래서 선지자가 배척되고 죽임을 당해 야 했다. 어떠한 행동 방식에 있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적으로 촉구 받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넘어서고 또 하고 싶은 욕망이 계속 발동하여 금지하는 것을 계속 넘어서려는 방식으로 인격이 형성되고 행동 방식이 결정된다. 언제든지 율법적인 설교만 하는 교회, 그 계명을 잘 안다. 그 계명을 지키고 그 계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하고 싶고 가고 싶어한다. 그것은 예수 안믿고 중생하지 안해서 그런 반응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선포에는 언제든지 그렇게 되어 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자꾸 강조 받으면 언제든지 그것을 기어이 이기고 해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어 있다. 인간은 당위의 존재이다. 어떻게 해야 된다는 윤리적인 존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당위의 존재 이다. 어떻게 해야 하고 넘어서면 안되는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알고 있으면서 계속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이룰려고 하는 욕망이 발동해서 마침내 욕망이 당위를 이겨내고 기어리 하고싶은 대로 하게 된다. 그것은 불신자요 중생을 안해서 그런게 아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율법의 반응이 어떤지 알면 설교를 바꿀 수 있다. 또한 그런 방식으로 인격이 형성되고 인간 방식이 결정된다. 구라파에서 특별하게 종교 때문에 형성된 국민성이 있다. 이태리 국민들! 그들은 2천년 동안 교황이 이태리 교구청의 교구장이었다. 그들은 미사에 간다.
그런데 이태리에 가 보라! 성범죄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성범죄 하면서도 언제든지 십자가는 긋고 가서 한다. 그래서 가장 의타적이고 어둡고 당위의 세계하고 자기의 실제 세계에서 사는 것과 언제든지 완전히 구분된다. 그래서 시실리 섬이 세계 마피아단의 총 본부이다. 1870년대에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나고 흥왕하기 시작하니까 대대적으로 마피아단을 미국으로 수출했다.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 주요한 도시들의 지하경제를 다 장악하고 있다. 그들도 미사에 참석하 고 헌금을 한다. 익명으로 해도! 그러면서 그들의 범죄가 대단하다. 60년대에 미국의 GM 이 2억의 흑자를 냈을 때, 1년간 미국에서 제일 큰 기업인 제너럴모터스가 2억 흑자를 냈 을 때, 미국의 마피아단이 20억의 흑자를 냈다고 했다. 마땅히 해야 할 당위를 계속적으로 요구 받으면 마음이 굳어져서 무관심하게 되고 파괴 만을 생산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되고 지속적으로 의를 행하도록 강조받 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없이 율법적인 요구만 강조받으면 마음이 굳어지고 무관심하게 되고 그걸 하지 않으려고 계속 핑계만 만들어내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능력과 은혜와 결부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요구되어야 한다. 구속의 은혜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할 때만 삶의 방식이 은혜로 이루어지고 힘을 얻는다. 우리가 사는 구원 얻은 것만 은혜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삶의 길도 다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죄를 떠나고 계속 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살아야 될 당위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강조하는 것인데, 그렇게 강조를 할 때에 구속의 은혜하고 복음하고 결부해서 복음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가르치지 않으면 바른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삶의 방식이 다 은혜로 이루어지 고 힘을 얻어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선포로만 이루어진다. 또 구속의 은혜 때문에 하면 안되는 것을 안하도록 촉구되어야 한다. 즉 복음의 틀 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이루어질 수 있다. 죄와 사망과 모든 허물들에서 죄로 구속되었으므로 그 죄 때문에, 그 구속 때문에 과거의 삶의 방식에로 돌아가면 안된다는 것을 촉구해야 한다. 그냥 과거의 죄에로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하면 알기는 안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옛날 육의 욕망이 얼마나 황홀하게 힘있게 호소하는데하지 말라. 하라그런 강조 가지고는 죄를 이길 힘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이중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교회 가서는 경건한척 의로운척 살면서 사회 나가 살 때에는 완전히 불신자의 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렇게 신문과 여론에서 이렇게 지탄을 받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제일 못믿을 사람 되어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의 방 식을 가르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침 받지 못했다. 그저 구원의 은혜만 늘 강조한다. 그러면 서 어떻게 살아야 될 삶의 길을 제시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결국은 헛된 이득을 취하기 위 해서 열심히 일할 때는 세상의 방식으로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의 방식만 말하지 말고 언제든지 구속과 연관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해 야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만 은혜의 역사로 인해 옛사람의 방식에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에서 놓여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믿어 새사람 되었다. 그러나 이 새사람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도 그대로 있다. 시기적으로 옛사람이 분명히 먼저이고 새사람이 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옛사람이 새사람된 후에 없어져버린 것이 아니고 옛사람과 새사람이 함 께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늘 함께 있다. 옛사람이 늘 함께 있다. 그래서 그냥 옛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은 역사가 늘 우리 속에 있다. 예수 믿었으니까 죄에서 떠난 것으로 알면 큰 잘못이다. 언제든지 옛사람에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우리 안에 늘 역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가 복음이 구원이 구속이 함께 선포되고 거기에서 삶의 길이 나오도 록 그렇게 할 때만 그 옛날의 방식에로 삶의 방식을 돌아가기를 포기한다. 내가 설교해 놨 으니 교인들은 내가 설교한 대로 살겠지! 천만에!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번의 설교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 줄 아는 것은 크게 착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을 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장로들은 부지런히 교인들을 심방하면서 선포된 말씀대로 살도록 늘 촉구하고 권면하고 권징하고 그렇게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그리스도인으로 절로 살지 않는다. 지금은 그 길이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 서울에 아현고개가 있었다. 물래방 앗간 지나서 이화대학교 올라가기 직전에 비탈길이 있었다. 거기 올라갈 때마다 차들이 시 커먼 연기를 뿜고 올라갔었다. 60년대 후반에! 아주 검은 연기를 뿜고 올라갔었다. 그런 길 에 사람이 수레를 끌고 올라가는데 뒤에서 세게 밀지 않으면 뒤로 뒷걸음질쳐서 다 물러가 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설교만 해주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냥 그대로 살겠지! 결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불도저처럼 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는다. 그것을 목사들이, 설교자들이 기억해야 한다. 이미 예수 믿었으니다 된걸로 알면 안된다. 그러니까 루터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인들은의인이 면서 동시에 죄인이다.의인이지만 아직도 죄인이다. 자기 본래 욕망대로는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는 경우들에도 구속 때문에 그 욕망을 포기 한다.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선행들과 당위도 자연인의 자연 본성대로는 결코 하고 싶지 않지만 구속의 은혜의 강권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선행을 바로 할 수 있게 된다. 시험을 할 때는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될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그냥 실제로 삶 의 현장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나는게 아니고 자연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까 목사들이 심리학을 좀 해야 할 것이다. 심리학이 참 무서운 것이다. 복음을 대치할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런 심리학 말고, 그리스도인의 새사람과 옛사람의 심리학! 그걸 잘 이해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법을 제시하면 삶의 길을 제시받은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 있어서 사회에 나가서 살 때에는 자연인의 본성으로 일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연인의 본성대로는 옛날의 방식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구속의 은혜의 강권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선행을 하게 된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설교를 그냥 그리스도인이니까 하라고 강조를 하면 언제든지 알리바이만 만들어낸다. 그걸 안하도록 할려고 하는.!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외식하게 되고 형식적이 된다. 종교개혁 때는 이 당위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일치됐다.
그런데 이 은혜의 강조가 약해지 고부터는 그리스도인이 언제든지 이와같이 외식을 하게 되어 있다. 특히 개혁교회가 윤리를 강조하는 교회이다. 루터교회는 윤리가 없다. 우리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세계 개혁교회는 언제든지 예배에 십계명을 읽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살 그의 법칙으로 십계명을 언제든지 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윤리가 늘 강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혁교회 장로교회들이 외식들만 남게 되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이처럼 복음이 양식으로 선포되고 제공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의 삶의 목표는 바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거룩이 다른 것이 아 니고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것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카도쉬 인데 그 어원을 따지면 카드라고 하는 끊다라는 말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어원풀이 해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거룩해지는 것은 바로 죄악을 버리는 것이다.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거룩해져야 한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고 싶지 않는 것이 자연인의 본성이다. 옛사람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의 요구는 심한 갈등과 반발을 일으킨다. 오해려 십자가가 제시되지 않고서는 왜 거룩해져야 하는지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깨달을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구원하신 근본 목표도 거룩한 백성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드실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표이다. 여러분들의 설교에 거룩 하라고 늘 강조를 하면 아마 3년 못가서 틀림없이 목사님들 봇짐을 싸들고 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해져야 하는데, 거룩하라고 늘 강조를 하면 3년 못갈거예 요. 틀림없이 비참하게 목사님 내쫓고 더 은혜로운 목사님 모셔놓고 아주 은혜롭게 잘하니 부흥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교회이다. 거룩하라고 강조하는데 거룩을 강조하는 목사는 쫓 겨나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했던 꼭같은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반복하게 되어 있다. 선지자들이 율법을 선포하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니까 듣고 싶지 않다.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켜야 하는데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반발이 생기고 굳어진다. 그러면서 적개심이 증오가 올라 온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전부다 죽임을 당해야 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도 목베임을 받아 죽었다. 예례미야도 자기 눈으로 직접 유다의 멸망을 지켜본 비운의 선지자였다. 느부 갓네살에게 항복하지 않으니까 느부갓네살이 다 잡아가고 자꾸 잡아가다 이제 놓아주었을 때 돌아왔는데너희들은 여기서 동요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 남아서 왕을 섬기고 포도원을 가꾸며 살라 고 했을 때 백성들이 믿지 않는다. 그래서 총독을 죽이고 애 굽으로 내려가기로 작정을 했다. 애굽에 내려가서도 예언을 했다.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결 국 예례미야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느부갓네살이 마지막 예루 살렘 멸망시키기 전에 포로로 데려왔던 사람인데 거기서 포로 중에 선지자가 됐다.
그런데 그 에스겔이 말하기를 이 백성이 금강석과 같이 마음을 굳게 하여 듣지 않는다고 했다. 아 무도 듣지 않는다. 들을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고서는 들어야 할터인데 포로 중에 잡혀와 있기 때문에 더 많이 굳어지고 강퍅해졌다. 그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방의 많은 신들을 섬길 때는 잘 살았는데 오히려 여호와만 섬기니까 우리가 이렇게 비참 하게 됐다. 왜 우리가 여호와만 섬기겠느냐 그러니까 예례미야를 쳐죽이고 반발했다. 에스 겔도 마찬가지였다. 포로중에서 그렇게 해도 듣지 않는다. 에스겔은 교회 전통에 의해서 돌 에 맞아 죽었다는 전통이 없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 안들어도 하나님의 백성 중에 선지자 가 있는 줄 알게 할려고 에스겔로 외치게 하였다. 그래서 선지자 노릇 했다. 그 백성이 결 코 듣지 않는다. 물론 영이 오기 전의 일이니까 안듣는다. 그러나 영이 오기 전에 그들이 있기 전에 안듣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이 해야될 당위 를 계속 반복하면 거룩해지고 죄를 버리기로 한 것이 아니라 목사를 쫓아내기로 하는 궁리 부터 한다. 모의를 하고 실제로 쫓아낸다. 시험한번 해보라. 용기 있으면! 어김없이 정확하 게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복음의 제시 없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아무리 강 조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인의 반응만 남게 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 십자가 제시 없이 거룩해져야 할 요구가 정당성을 받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 없이는 삶 의 길이 거의 자연인의 상태로 남게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교회 들어오는 데에만 복음이 필요하다. 예수의 피가 교회 들어오는 데만 필요한 것이다. 세례 받기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 한다. 삶의 길과 축복받는 이야기를 주로 한다. 못사니까! 이쪽 호 남지역은 소외지역이어서 많이 가난하다. 그리고 광주는 소비지역이어서 생산이 없다. 그러 니 먹는 것만 잘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복을 좀 받아볼려고 축복을 많이 강조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 그렇게 축복을 잘되는 줄 알아도 자연인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카톨릭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 표준으로 남는다. 그 카톨릭의 방식이 카톨릭에만 있는게 아니다. 개신교에도 마찬가지이다. 계속적인 복음의 선포가 이루어지지 안해서는 언제든지 자연인으로 산다. 교회가서는 미사하고 열심히 행하고 돌아와서는 완전한 자연인으로 살고! 내가 생각하기에 금세기에 일어난 최고의 기적이 있다면 그건 아마 이태리에서 일어난 정권의 변동과 마피아단의 소탕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이 이태리에서 일어 날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부터서 미국 CIA가 기민당으로 하여금 정권 을 잡기 위해서 40년 이상을 노력했다. 그러니까 기민당 정권이 사회당 정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서 개혁을 시작해서 마피아단과 연류되어 있는 정치인을 색출하는 그런 일이 생겼다. 그 교황청 자체가 마피아단하고 뒷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왜 죽었는 지 규명이 안나왔다. 그러나 교황청이 마피아단하고 거래하는 것을 척결을 조사 지시를 요 구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 나라에서 이렇게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나고 그런 것은 도저히 나로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금세기 말에 이태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로마교회가 그렇게 2천년동안 로마인들을 이태리 국민들을 그렇게 만들어 놨다. 성당에 가 서는 당위를 가르침 받고 밖에 나와서는 세상의 법으로 사는 것이 이태리이다. 그것이 카톨 릭의 mentality이다. 복음의 선포 없이는 그리스도인도 자연인의 상태에 안주하기를 좋아 하고 거기서 벗어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분 목사들이 언제든지 설교를 준비하실 때 예수 믿었으니까 거룩해진 거룩한 백성으로 알고 설교를 준비하면 큰 착각이다. 복음의 선포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되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한다. 여러분 목사 들이 아무리 축복설교를 많이 해도 광주에 그냥 공단이 생겨가지고 부자될리가 없다. 그러 니까 축복설교 떠나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의 선포는 사람들 마음에 기쁨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 이다. 자기의 바른 양식을 받으므로 생명이 풍성해져서 생명의 기쁨이 산출된다. 그것이 설 교의 기적이다. 안그러면 뭐할려고 교회 오는가 지금 TV프로그램을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려고 세 방송 사가 경쟁을 많이 하는가! 토요일, 주일에 서로 유머어 프로그램 만들어 기쁘게 할려고 노 력하는가! 그런 즐거움과 기쁨들을 놔두고 왜 교회에 가려고 하는가 또 스포츠 중계는 어떤가 그리고 케이블 TV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몇 개의 체널에서 150개 이상의 체널로 열려서 외국의 방송들이 직접 들어오게 될텐데 그러면 얼마나 기막힌 프로 그램들이 많이 제공 되겠는가 방송사별로 방송하는 시간을 따지면 2,300 시간 이상씩 방 송이 매일 된다고 할만큼 굉장히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 즐거움을 놔두고 교회에 왜 오겠는가 야구 시즌에 야구 중요한 게임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 와서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이 그런 즐거움을 기대하고 오는게 아니다. 바로 이 복음이 주는 생명의 양식으로부터서 오는 기쁨을 기대하고 온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산출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기쁨과 함께 평화가 우세하게 된다. 복음이 선포되니까 죄문제가 다 해결됐다. 꼭 회개기도 시켜야 죄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선포될 때 죄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합해서 하나되 었으니까 평화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솟아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설교의 기적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온다. 그것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교외에 오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평안 속에 사는 백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 평화가 세상적 평화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 때문에 전쟁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지니고 평안하게 살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 때문에 우리가 평안할 수 있다. 그것이 다 복음의 선포로 이루어진다. 전쟁 중에서도, 전쟁이 난다고 할 때도 그렇다. 주의 평안이 와 있으니까 그렇다. 하나님에게서 온 평화는 복음으로 조성되었다. 복음의 선포가 평안을 만들어 낸다. 복음은 바로 죄의 용서이고 하나님과의 화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받은 자들은 평화할 수 있다. 목사님들이 평안하게 살면 이 말이 별로 실감이 안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괴로우면 그것이 사는게 아니다. 마음의 평안이 최고다. 마음 고생 면 하는 것처럼 좋은게 없다. 그런데 사회 나가서 정말로 어려움 당하고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가져다가 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모시면 언제든지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잇다. 복음의 선포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온다. 하나님 을 모시면 언제든지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복음 선포가 이런 기적을 이룬다. 복음 선 포 없이는 이런 기적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적도 발생하지 않는다. 정말 기적을 행사하고 싶으면 복음을 선포하라. 복음이 선포되면 언제든지 성령님이 역사 하시게 되어 있다. 우리는 헤엄 칠 때 물이 있어야 헤엄을 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수영 선수라도 물이 없으면 수영을 못한다. 성령님도 복음없이 결코 역사하시지 않는다. 복음이 선 포될 때 꼭 성령님이 역사한다.
3.복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셨다(행 29:12; 요 3:10). 복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셨기 때문에 복음이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작정하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해 오셨다. 인류 역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구원을 마련해 온 역사이다. 그냥 무 의미한 역사로 진행해 온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마련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류 구원이 작정되고 인류의 역사에서 구원의 길이 예비되고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기로 하신 것이다. 이 일 이 인류에 의해 이해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 인류의 근본 생각은 사람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영웅들이 역사에 출현하였고 그들은 자신을 구원자로 자처하였다. 중동 지역에 거의 큰 역사 큰 나라가 일어 날 때마다 그 설립자들은 언제든지 자기들을 구원자로 자처하였다. 그 정복이 실은 인류를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안수르의 대왕들도 그러했고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대왕도 그러했고 메데 파사의 고레스도 그러했고 그리고 그 후에 알렉산더도 그렇다. 중동에 일어난 나라들 중에서 메데 파사가 제일 넓은 영토를 제일 오래 다스린 제국이다. 그리고 동양에서의 마지 막 제국이다. 이 나라가 200년 이상 400년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던 제국인데 333년 알렉 산더의 군대에 의해서 파사 군대가 망하고 세계 역사의 무대에 주인공의 손이 동양에서 서 양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 이후에는 동양에서 큰 나라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 다음 알렉산 더의 헬라제국, 그 다음 로마! 로마의 창설자요 실질적인 로마의 건설자인 시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왕들도 다 자기를 구세주로 작정했다. 그래서 자기를 퀴리오스, 주라 고 부르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들은 많은 정복을 수행하였고 그 정 복과 지배가 인류의 구원이 되는 줄 믿었다. 그들의 정복과 지배는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더 큰 질곡이어서 다른 해방자를 차례로 요구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압제가 너무 심하니까 고레스가 나라를 점령하고 다스릴 큰 나라를 세울 명분을 얻게 되었다. 고레스는 바벨론 왕 들처럼 하지 안했다. 유화정책을 써서 피민족들이 피압제자들이 고토로 돌아가고 그들의 종 교를 섬기도록 했다. 그렇게 하므로 오랜 200년 이상을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래도 완전한 해방이 못되었기 때문에 알렉산더에 의한 세계정복과 로마 황제에 의한 가이사에 의한 정복이 또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 해방자는 해방자가 아니고 압제자 였고, 영웅들과 황제들은 구원자가 아니라 파괴자 였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인 류를 구원해 내지 못한다. 인류 구원은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다. 창조주가 구원자가 되는 길은 사랑의 방식으로 이다. 창조주 자신이 사람이 되므로 인류를 구원하기로 한 것이다. 이 일이 불가해한 일이므 로 오랜 준비의 역사가 필요하였다. 왜 그렇게 구세주가 오는 길이 오래 걸렸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구원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해야 된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역사들의 마지막 때에 이와같이 구세주가 나타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하였으므로 긴 준비를 통하여 마침내 이루어냈다. 이 준 비의 그릇으로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조성되고 그 역사에서 구속주 오심이 예비되었다. 이스라엘은 구속주의 출산의 도구로 준비되고 단련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차매 한 여인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속주로 오시고 구원을 성취 하였다. 그 구속주가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고 죽으므로 죄의 세력을 상실하게 하였다. 죄 의 세력을 멸하므로 그는 생명을 도입하고 사망을 폐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사람들의 죄 를 제거하고 용서하여 하나님과 인류를 화해시켰다. 화해한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도 록 그렇게 지어졌는데 하나님 백성되기를 거부한 것이 반역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백성을 자기에게로 회복시키셨다. 이 회복 때문에 성령님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셨다. 이 일을 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이다. 성령님 오심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이고 승천뒤의 자연적이고 별도의 과정이 결 코 아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는 올 수 없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선포해서 예수 믿게 하면 다 성령님을 받게 되어 있다. 성령님 세례를 별도로 첨가적으로 받는게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거짓 신학이다. 복음의 선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제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구원을 이루었으므로 그에게만 생명이 있고 그에게만 구원이 있다. 구원과 함께 그 구원으로 사는 힘이 또한 그에게 있다. 그러니 예수 믿은 다음에는 우리 의 노력으로 살아야 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구원 얻은 후에도 우리가 사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제시 없이는 구원은 없고 구원받은 자들도 구원받은 자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복음의 선포 없이 구원얻어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복음은 선포되므로 복음이 되고 복음으로 역사한다. 복음이 선포되면 복음으로 역사한다. 선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복음으로 역사하지 못한다. 이미 2천년 전에 복음이 구원이 이루어졌어도 복음을 선포받지 못하면 복음이 없는 것과 같다. 복음이 선포되면 복음이 되고 복음으로 역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에 서 특별히 칼빈이 선포된 말씀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가 거기 있다. 우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그렇게 강조해도 그러나 선포된 말씀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 가 여기 있다. 복음이 선포되어야 일을 한다. 화란에서 칼빈의 설교를 발췌해 가지고 세 권 으로 설교집을 만들어 냈는데 그 제목이 '선포된 말씀'이다. 이처럼 복음이 복음이 되고, 구원이 구원이 되는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이 마련하셨기 때 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셨으므로 복음은 복음이다. 인간이 만들어 냈으면 그 복음은 복음이 되지 못한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종교도 결국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 뿐이다. 지금 이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제일 몹쓸 종교가 되고 불교가 얼마나 신사적인 종교로 부각되고 있는가! 카톨릭은 더 좋은 종교로 되어 있다. 그래도 개신교에는 복음이 있다. 복음이 선포되면 진짜 이 사회를 구원해 내는 종교는 기독교 뿐이다.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완전히 구원해 내기 때문에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마련하 셨고 또 완전히 구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이다. 앞에서 선포를 강조했는데 선포해야 할 이유를 이제 말해 보겠다.
4. 성경의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말씀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개인들에게도 말씀 하시 지만 민족에게 즉 자기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개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 르러 올 때 그들은 그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했다. 말씀을 듣고서도 믿어 순종에 이르지 않을 때는 언제나 심판과 징계가 왔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데 멸망이 반복되었다. 왜 믿지 안했으니까 그렇다. 듣지 안했으니까 심판 과 징계가 왔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실패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처음 인류에게 말씀을 베푸사 그들에게 사명을 지우셨다. 그리고 말씀하시므로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사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셨다. 그러나 처음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안했다. 그들은 그 말씀을 거부하였다. 말씀에 대한 마땅한 순종에서 말씀을 믿지 않으므로 반역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칼빈이첫 타락의 근본 원인은 믿지 않음이다. 불신이다. 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반역한 인류를 찾아 오셨다. 말씀하시고 심판하셨다. 그러나 그 심판은 구원의 약속이고 구원의 방식이 되었다. 하나님이 처음 타락한 인류들에게 심판하심은 그냥 심판으 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다 구원의 약속이고 구원의 방식이 되었다. 구원은 인류가 다 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인간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 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그 다음에는 그냥 축복을 선사해야 될걸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종교가 기복종교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로 돌아간 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하셨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한 민족을 택하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다. 이 민족이 이스라엘이어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했다. 언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언약을 맺고 말씀을 받았어도 계속적으로 말씀을 들어야 했다. 그 러니까 계속해서 선지자가 그들에게 있어야 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 은 말씀을 들음으로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음에 서 그 존재가 허락되고 유지되었지만 말씀을 믿지 않음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판과 멸망, 그리고 보존과 구출이 반복되는 역사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 음으로 심판하고 멸망에 이르렀다. 그래도 하나님이 다시 보존하고 구출하셨다.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망했을 때에도 다시 그들을 구출해 내서 정 치적인 단위로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되지 못했어도 민족으로는 보존되도록 그렇게 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멸망당하고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요구에 또 그렇게 살아야 할 줄 아는 단계에 저항이 가중되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가 반복되었다. 선지자들이 율법대 로 사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조하였다.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이 물론 멸망 과 구원의 약속이 반복되었지만 중심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다. 그렇게 강조받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강조된 율법 준수의 요구는 저항과 반발을 축적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은 멸망에로 귀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생명이고 듣지 않음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셨다. 율법의 길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사야서와 그리고 예레미야 서에서 특별히 31:31절과 33절에서 율법의 길로가 아니고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되는 길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다. 이 구원의 약속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은혜로 구원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구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지 멸망이 아니다. 바로 이 구원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 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5. 하나님은 그의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다. 복음 선포에서 믿음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길로가 아니고 복음의 선포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예수 믿게 하는 길은 의논하고 토론해 가지고 되지 않는다. 학식 있는 사람에게도, 부자에게도, 권력자들에게도 의논해 가지고 되지 않는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다. 복음의 선포 없이는 구원이 실현되지 않는다. 아무리 큰 구원이 이루어졌어도 선포 없이는 아무 표험이 없다. 복음의 선포가 구원을 실현하여 구원이 구원되게 한다. 그러니 얼마나 선포가 중요한가! 복음 선포자로 세워진 여러분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실현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일 수가 없다. 선 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가 되게 하고 구주로 역사하게 한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선포하고 제시하면 구주로 믿어지고 구주로 역사한다. 선포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을 적용하는 성령님도 복음의 선포 없이는 일할 수가 없다. 성령님은 독자적으로 일하지 않고 허공에서 역사하지 않는다. 복음의 선포가 성령님이 역사하는 지반이고 공간이다. 성령님 의 역사가 충만해지기를 원하면 복음을 선포하라. 성령님 받으라고 백 번 말해봐야 성령님받는 일 생기지 않는다. 성령님 받기 위해서 모여들고 박수치고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님 받게 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복음만 선포하면 된다. 성령님 받는 일이 복음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줄 아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한번도 성령님 받으라고 선포한 적이 없다. 그렇게 선포한 기록이 있는가 사도들이 성령님 받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 하지 않고 성령님 받으라고 선포했으면 그들이 사도들이 아니다. 선포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선포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성경도 선포 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한다. 모든 성경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목표하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선포를 통하여 효 력을 내고 예수의 구원이 선포되므로 성령님이 그 본래의 목표에 도달한다. 성경이 왜 쓰여졌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하기 위해서, 그로 인한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성경이 쓰 여졌다. 성경의 목표가 이것이다. 그러니까 선포되면 성경이 쓰인 목적에 도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서 성경이 성경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선포된 말씀 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이다. 복음이 선포되면 반드시 성령님이 역사하사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고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완전에 이른다. 복음 의 선포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라지 못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 복음의 선포 에 성령님이 역사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 받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 자라난다. 거룩해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책임은 선포를 책임맡은 자들에게 있다. 신앙이 충 실하게 자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이 있지 않다. 복음선포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복음을 충실하게 바로 선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음의 선포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령님의 인도 받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난다. 다른 길이 없다. 목사의 특권은 설교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있다. 목사가 존경받기를 원하면 복음을 선포 하라. 교인들이 목사를 목사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 를 가장 존경한다. 말씀은 선포되면 말씀으로 역사하고 복음은 선포되므로 복음으로 역사한다. 선포없이 기록된 말씀대로는 말씀으로 역사하지 못하며 구원사건 자체만으로는 구원이 되지 못한다. 말씀이 선포되고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입을 열어 전해야 한다.
6. 복음의 선포를 위해 하나님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세우셨다. 구원은 선포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자기의 구원을 그렇게도 알리시기 원하셨다. 그리고 구원에 이를 자들이 한정되었을지라도 전 우주에 선포되게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도록 작정되었다. 우리가 왜 복음을 선포하는가 왜 선교사들을 보내는가 동정과 자선에 의해서 그러는 가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이 복음이 선포되도록 작정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 파푸아 뉴기니에 사는 종족들이 인류의 마지막 식인종이라 고 한다. 문명에 접촉되지 안했고 복음이 전파되지 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대적인 관광단 지로 개발하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글자를 만들고 있다. 그들에게까지 왜 복음을 전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전우주에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도록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의 선포에는 선포자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복음의 선포자로 오셨다. 성령님은 전도자 성령님이다. 성령님의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복음 선포를 위해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선포되어야 하므로 성령님이 친히 이 복음의 선포를 맡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이루어 구원을 이루셨는데 그 복음의 선포자로 성령님이 오셨다. 성령님은 복음을 선포할 목적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가 성령님의 임무이다. 성령님은 다른 큰 기적을 행사하여 재미를 볼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다. 성령님이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들의 입을 빌린다. 천사가 말씀은 전해도 복음은 선포하지 못하였다. 왜 고넬료에게 나타난 천사가, 베드로를 찾아가라고 말할 수 있는 천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를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선포를 못하는가 천사에게는 복음의 선포가 허락되지 안했다. 복음의 선포는 사람에게서 나오도록 작정되었다. 복음은 사람들의 구원이므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음 전도자들로 사도 와 전도자들을 세우셨다. 사도들은 구원 사건의 목격자이고 증인이므로 구원을 힘있게 선포 하였다. 그들의 절박한 구원 제시는 큰 권능을 발휘하였다. 그들이 함께 했던 구원이었으므 로 그들의 선포가 그렇게 능력 있었다. 우리의 경험을 말할 때는 얼마나 힘있게 생생하게 말할 수 있는가! 들은 이야기는 별 힘이 없다. 그런데 사도들은 복음을 자기들이 그 사건의 목격자이고 증인이었으므로 힘있게 증거했다. 그들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의 선포 뿐이다. 통상 마가복음을 베드로의 설교라고 한다.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 행한 설교가 마가복음인데 마태와 누가도 다 베드로의 설교에 기초해 있다고 하는 것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이해이다. 베드로의 설교에 마태와 누가가 자 기들의 배운 사항을 복음으로 추가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사도들의 선포 뿐이다. 그 들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구주로 선포되었다. 십자가 죽음이 바로 구원으로 제시되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를 속량하기 위한 제사였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인류의 구원과 모든 문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십자가 죽음이 죄의 제거이고 사망의 해소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복음이었다. 지금은 이 선포하기가 쉽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예수의 죽음을,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가 예수의 죽음의 목격자들이 이 죽음이 바로 구원이라고 선포할 때 그걸 유대인들이 받을 수 있겠는 가 자기들 눈 앞에 얼마전에 자기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정죄를 받아서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자가 어떻게 구주로 구원으로 선포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쉬운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이다. 저주 받아 조롱 받아 죽은 자가 구 주이고 그것이 구원이라고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그 선포를 듣고 받을 수 있겠는가 아 몇년 전에 십자가에 죽을 때 나도 거기 있었는데 그걸 복음으로 받을 수 있는가 저주 받아 죽었다.나무에 달린 자마다 다 누구든지 저주 받은 자라 (신 21:23)는 말씀에 비추 어 확연히 저주받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 구원이고 복음이라고 선포할 때 쉽게 받을 수 있겠는가 세계 어디에도 그런 복음은 선포되지 못하였다. 예수의 죽음만이 죄의 해결 이고 모든 인생 문제들의 해답이었다. 예수 죽음을 통해 인류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모든 문제가 생겼는가 죽음과 함께 세상의 모든 문제가 왜 생겼는 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죽음으로 인류가 하나님께 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발생하였다.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므로 죽음과 고통, 질병, 슬픔이 생겨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이키는 일을 자신이 이루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그리스도가 되었다. 이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 고 해석되었다. 복음이 복음으로 한정된 것은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서이다. 요한복음에 의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은 사도들의 선포 뿐이다. 사도들의 선포로 복음을 한정했다. 이것이 사도들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선포는 로마 세계 전역에로 확장되었다. 로마 제국 내에 사는 모든 자 들이 다 복음 선포가 이르러 갈 대상이었다. 로마 제국은 복음이 선포될 길을 제공하였다. 문화인의 공식 언어인 희랍어로 복음이 선포되게 사회적 구조를 마련하였다. 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만들었으므로 산간 절벽을 넘지 않고 군대의 행진도로를 따라 쉽게 이동하 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또 군대 행진 도로를 따라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므로 사람들을 쉼게 만날 수 있었다. 도로를 따라 상업이 발달하였고 도시들 간에는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 였으므로 도로의 진행 방향들에서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쉽게 그들에게 복음을 선 포할 수 있었다. 또 로마의 군대 행진 도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다행히도 공용어인 희랍 어를 이해하고 사용하였다. 로마의 도로를 따라 희랍어로 복음을 쉽게 널리 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 지역은 로마의 군사로가 진행되는 범위까지 였다. 또 군사로가 진행된 범위까지 희랍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로마 제국 내의 모든 거주 민들을 그의 선포의 대상으로 삼았다. 실로 무모한 사업이었고 불가능을 시도함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의 특권과 지극한 열성으로 로마 제국 내 도로가 진행된 대부분의 지역을 복음으로 점령하였다. 사도는 교회를 설립하는 특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최초의 복음 선포자가 되었고 복음의 내용을 확정하였다. 사도의 해석과 제시가 복음의 내용과 본 뜻으로 확정되었다. 사도는 구원 사건을 본래 그 의미대로 파악하였고, 형성된 형태로 제시되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행적의 내용 뿐이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에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죽음이 구원인지 그 이유가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마가복음 10장 45절 에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 한곳 만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사건만 기록해 놓았 지 왜 이 사건이 구원이고 복음인지에 대한 제시가 없다. 바울과 후기 저자들, 베드로와 요 한이 해석한 것이 복음의 내용을 확정했다. 사도는 구원사건을 본래 그 의미대로 파악했고 형성된 대로 제시했다. 사도들 후에 하나님은 작은 능력의 전도자들을 계속해서 세우셨다. 그리하여 사도적 선 포는 계속되게 하셨다. 사도직을 계승하게 한 것이 아니고 사도적 선포가 계속되게 하였다.
로마교회, 영국교회는 사도권의 계승, 거기에 교회의 정당성이 성립하고 정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도적 선포가 계승되게 하였다. 그리하여교회는 확실히 세워졌고, 성 장하여, 작은 능력의 선포들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하기를 계속하였다. 지금 사 도와 같은 권세가 어디 있는가 바울과 같은 선포를, 베드로와 같은 선포를 할 사람이 어 디 있는가 작은 능력의 선포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도와 같은 선포가 아니어도 작 은 능력의 선포를 통해서도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한다. 사도 후의 전도자들도 사도들의 선 포를 계속해야지 다른 임무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사도들이 선포한 내용을 선포 하면 여러분들은 사도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에게 역사한 성령님은 작은 전도자들 에게도 전도자로 역사한다. 세상이 구원될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은 그의 사역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선포되어야 구원에 이 른다. 그 사역과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이 바로 인격을 뜻한다. 그러니까 천하인간에 구원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했다. 요새 폴리터라고 하는 영국의 로마카톨릭 신학자가 Lord name이라고 하는 책을 썼다. 그 말을 씨가 '예수 외에는' 그런 이름으로 번역을 했다. 거기 보면 예수로 통해서 기록대로만이 구원이 아니고 다른 길로도 다 구원의 길이다. 이게 다 하나님께로 가는 특별한 구원의 길이고 다른 길은 정상적인 구원의 길이다. 로마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채택하고 여 기까지 와 있다. 예수는 구주라는 이름이므로 그 이름은 바로 구원이 된다. 전도자에게 주어진 선포의 책 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이다.
7. 전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다. 그가 친히 마련하셨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가 마련한 미련한 해결의 방식이다. 한 사람이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죄가 속해지며 사망이 제거된다. 이 영생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어찌 한 사람이 많 은 인류를 대신해서 죽어 그들의 죄를 제거하는가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 을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지혜가 어리석은 방식을 산출하였다. 이 어리석은 구원의 방식 때문에 선포자에게 부끄러움을 준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고 고백하였다. 미련하여 부끄러움을 주는 방식이어도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 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전파해야 한다. 불신자들과 복음의 항거자들,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지혜와 정반대로 배 치되기 때문에 전도자가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고 담대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는 전혀 다른 지혜여 서 세상을 능히 구원해 낸다. 세상의 지혜는 구원이 필요없고 혹 필요할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올 필요가 없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마련하고, 인간의 지성이 해결한다. 모든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고 자기의 지혜 곧 지성으로 해답을 마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다르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 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로서 와야 한다. 또 구원의 방식은 지성의 활용 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구원이 참 구원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구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눈에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미련한 구원의 길이 세상을 능히 구원하고 사람의 지성을 갱신시킨 하나님의 구원은 죄 의 해소로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모든 문제 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로마도 그렇게 하였다. 로마의 정치, 곧 로마의 권력 행사 가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 방 식을 택하였다. 로마의 권력에서의 해방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는 정치로 해결될 줄 알았다. 현대 사회는 정치가 경제를 해결하므로 인류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알고 있다. 정치가 경제 문제를 바로 해결하면 인간의 모든 일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러나 정치에 의한 경제의 해결은 일시적인 해결이고, 완전한 해결이 아니다. 정치로 경제 문제를 해결해 도 인간사회의 죄악은 해소되지 못한다. 경제 문제의 해결도 없거니와 해결되었다고 할 때 다시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정치적 해결은 어느 일정 기간만 타당하고 그 해결이 지속될 수 없다. 또 현대 사회는 기술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믿고 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인간의 질병, 수명 등의 문제가 해결되고 식량과 생활의 편리함이 이루어져 자연이 주는 악에 서 해방될 줄 굳게 믿고 있다. 과학이 많은 인간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고통을 완화하 며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질병 문제는 그대로 남으며 죽음은 피할 수 없게 되었 고, 수명보다 더 빨리 죽을 확률이 더욱 높아졌다. 식량 생산을 크게 도왔지만 기근은 해소 되지 안했다. 생활의 편리함은 많이 증진되었지만 그로 인해 더 복잡함과 대형 사고를 크게 증대 시켰다. 전쟁은 일면 많이 억제되었어도 전면적인 살상과 파멸의 현실적인 가능성이 상존하게 되어, 큰 비극을 낳게 하였다. 기술 과학의 발달로 사회악은 해소되지 안했고 오 히려 더 커지게 되었다. 범죄는 대대적이 되며 범죄와 정상적인 삶의 길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대로 인간 곧 타락한 인간으로 남아 구원은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를 해결한다. 사람을 변화시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하나님의 해결은 근본적 해결이다.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고 죄악이 아니라 의를 세우며, 미움 이 아니라 사랑을 세운다.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한다. 죄와 사탄과 사망을 제거함으 로 이룬다. 하나님의 구원만이 완전한 구원이고 근본적 해결이다. 죄의 제거는 죄만의 제거 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의 제거이며 사망의 정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며 영생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옴이고 그 안에 거주하심이다. 성령님은 예우로 온 하나님의 임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므 로 완전한 구원이요 완전한 해결이다. 현생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세까지에 이르는 완전한 구원이다. 죄가 제거되었으므로 믿기만 하면 모든 구원이 구현된다.
8.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로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 이지만 그가 바로 나라 자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백성이다. 그리고 그 백성을 다스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된 별도의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행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속량된 백성이므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흘림으로 백성들을 생산 하였다. 백성들에게서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그들에게 거하기 위해서 영 안 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죄가 제거된 백성들에게 오사 거함이 하나님의 통치이고 나라이다. 이 거함과 다스림이 영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백성 을 위해 피 흘리고 그 피로 그들의 죄를 씻고 자기의 백성을 삼아 그들 안에 거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별도가 아니다. 새 백성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으 로 천지의 대권 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자기의 것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혹은 전체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권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 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세워지게 해야 한다. 모든 인류 사회의 생활이 다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질서 되어지고 진행되게 해야 한다. 정치, 경제, 문화, 학문, 학교, 가정, 예술, 노동과 군사 영역, 농사가 다 그리스도의 법으로 질서 지어지고, 그 법이 준행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사회 각 영역들에 세우면 죄악이 제 거되고 억제되며 그리스도의 법이 시행되어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영역이 된다. 그러나 이 노력은 죄와 파괴력과 합쳐지므로 바른 그리스도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구현할 수 없다. 언제든지 거기에는 왜곡과 뒤틀림 오류와 거짓이 개입히여 바른 하나님 나라의 모 습을 드러낼 수 없다. 언제든지 미완성이고, 불완전하여 부러진 동체와 같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만도 그러하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세워지고 현시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인류에게서 죄악을 완전히 제거할 때 구현되어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하나님이 새 인류에게 충만히 거주하심이 하나님이 뜻하신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거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대로 살아야 하고 그의 법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을 버릴 뿐 아니라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세워지 기 위해 죄악을 억제하고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음으로 그 생활에서 실현할 사명이다. 창조의 탐구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행되어야 한다. 일반 은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로 변화되어 그 은혜로 창조의 모든 영역을 탐구하며 그리스도인 분화 를 이룩해야 한다. 변화된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변화된 의식으로 사고하고 생활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 믿음은 구원만이 아니라 변화된 모든 생활 체계를 뜻한다. 이스라엘 같은 동일한 신앙 공동체를 모든 영역에 확대할 수 없고 모든 문화 활동 을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완전 확립을 위해 부단히 투쟁할 책임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과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 믿음과 구원, 성령님으로 사는 삶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강조 되고 그 삶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연장과 귀결로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는 밥만 먹고 세상 부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권 확립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이 것은 바로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의 열매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으로 사는 삶이다. 죄악만으 르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사회 각 영역에 세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선포는 구속의 귀결을 함께 강조해야 한다.
9. 복음의 준비도 복음으로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시작부터서 약속되고 준 비되었다. 그 약속과 준비가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진행되었다. 구원의 준비 없이 구원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장구한 역사에서 준비되어 이루어진 구원 이다. 이 구원의 준비가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의 준비의 역사 도 복음으로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준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에로의 준비이므로 이 준비도 복음으로 제시된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준비로서 기록되고 구원의 준비로서 진행되었다. 하나님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조성하여 한 국가가 되게 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일 이 아니다. 그들의 영화와 세계 통치가 이스라엘의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출생하여 세 계 민족들의 구원을 이룩하는데 그들의 존재 근거와 의의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진행되고 그를 목표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역사 와 삶의 모든 방식이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보면 복음이 된다. 구약에 포함된 구약의 내용들 이 일견해서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보여도 다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되었고,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구약은 축복의 교과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책이다.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교회의 책이 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을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해석하고 이해 하면 율법주의 유대교 밖에 다른 귀결이 없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도 특히 제사 제도를 그리스도 제사의 사전 표상으로 제시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무익하므로 폐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가 완전히 죄를 속량하였고 구약의 피 제사로는 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제사가 자기들의 죄를 해결하는 줄로 믿었다. 그 믿음이 그릇되었다. 레위 제사로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가리키는 사전 모형이었다. 레위 제사가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의 사전 모형이고, 예표 도 바로 이해되고 제시되면 복음이 된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전 모형으로 구약의 제사는 그 사명과 직임을 다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 제사의 준비와 사전 표상으로 제시되면 복음의 도에 서게 된다. 율법은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스 라엘은 율법을 지켜 온전해지므로 구원에 이를 줄 믿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는 것 이 율법 준수자들의 목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방 법만 더 많아지게 되었다. 범법 후에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동적으로 범하게 되고, 지키려고 노력한 만큼 더 엄하고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지킬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절망과 좌절만 맛보게 되 었다. 그와 정반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해져서 율법을 무시하고 악만 을 행하면 멸망 오에 다른 아무 길이 없었다. 그 길은 민족적 멸망에 이르러 결국은 국가가 사라지고 또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율법을 잘 지키기로 작정한 자들은 사력을 다해 노력하 고 노력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고 오히려 범함만 더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니 멸망 뿐이었다. 두 경우 다 멸망 뿐이니 결국은 율법은 자기들이 지킬 수 없고 율법의 완성자가 와서 율법을 완전히 지켜 자기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독촉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다. 처음부터 타락한 인류는 율법을 지 켜 의에 이를 수 없다.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지며 율법의 완성자를 믿는 길 외에 다른 길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 믿는 믿음을 독촉하고 빨리 그 믿음이 오도록 재촉하고 절규하게 한 것 밖에 없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만이 지킬 수 있었다. 율법 준수에 의가 성립하지 만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게 할 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고, 그 율법 준수자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의 독촉과 복음의 예비 단계로 주어졌다. 율법 준수는 결코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에 의해서만 성취되었다. 이렇게 율법도 복음의 예비 단계로 제시되면 율법 완성자르르 지시하므로 복음의 도에 들게 된다. 율법 자체가 복음이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의 예비 단 계이기 때문에 은혜를 가져온다.
10. 신약의 다른 부분들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 안에서 제시되 어야 한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획득되었고, 그 구속자가 파송하되, 자기 자리를 대신하도록 보혜사로서 보내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얼굴 앞 에 나타나 그의 속죄 사역을 보고하여 속죄 제사를 완성하므로 성령님을 청구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므로 성령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의 자동적이고 독자적인 과정이 아니다. 성령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는 불가능하고 또 생각할 수도 없다. 또 성령님의 활동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즉 주 예수의 구속 사역의 증거 와 그 적용이 성령님 사역의 전부이다.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성령님의 직임도 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적용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전혀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하고 강조하면 그 영은 성령님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영 이 나타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하면 복음이 되지 않는다. 성령님을 윈한 인간적인 노력만이 강조되므로 율법주의가 된다. 성령님 받기 위해서 믿음과 별도의 종교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하면, 그 노력은 은혜 영역이 아니고 도덕적 의를 이루는 것이므로, 그 도덕적 의의 정도가 성령님 받는 양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가 성령님을 배분하는데 이른다. 그러면 여기는 인간의 노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성령님이 아니라 인간의 영이 나타나고 역사한다. 이제는 인간적 노력과 정성이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자리에 이른다. 그러면 기독교의 틀은 다 벗지 안했어도 기독교이기를 그치고 율법주의 종교가 된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사역과 은혜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구하고, 주 예수와 분리하면 안된다. 구원 은혜에서 성령님을 분리하면 더이상 은혜가 아니라 무서운 인간의 계 율의 멍에를 지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내에서 제시될 때 복음이 되고 은혜가 된다. 즉 성령님의 사역은 기독론적으로 해석 될 때만 기독교 구원이 되고 신비주의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성령을 추구하는 데서는 신약의 성령님에 이르지 못한다. 거기서는 사람의 영을 만나고 인간의 자기 투사를 만난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종말에 관한 부분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 역사의 진행이 완료되면 재 림이 이루어지고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역사를 주재하고 구원 적용이 완료 되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재림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기독론의 연장이다. 약속이 실재 로서 구체화 되는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종말에 관한 부분들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사변과 공포만 조성된다. 종말에 관한 한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공포가 된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그치고 무서운 참혹한 신을 만난다. 더 이상 구속주는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종말에 관한 성경 부분들도 기독론적으로 해석 하고 기독론의 연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때만이 심판을 말하는 종말 설교가 복음이 된다. 그 외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성경의 중심, 곧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비추어서 해석되어 야 한다. 생활 규범에 관한 성경 본문들도 성경의 중심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열성이 나타나고 율법주의 망령이 되살아난다. 은혜의 종교가 생활 영역에 이르러서는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을 해결하는 자연 종교 내지 율법주의가 된다. 그리스도 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보상이고 그 수행자이다. 이처럼 생활의 법도도 다 그리스도의 은혜 와 그 구속 내에서, 또 그 은혜와 결부해서 제시해야만 복음이 된다. 11. 성경 주석은 그리스도를 현시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근본주의 전통 속에 살기 깨문에 글자에만 매이고 성경 전체의 문맥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을 주석할 때에 그 글자와 그 문장만 보지 전체의 중심에서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글자 풀이만 하므로 복음이 제시되지 않는다. 이렇게 글자 풀이만 하는 주석 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런 글자 풀이 주석으로는 은혜 를 가져오지 못하며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말씀을 제시해도 하나님의 말씀으 로서의 감동과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므로 그 주해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주석을 통한 말씀 선포에 성령님이 역사하는 길은 그리스도가 제시되는 데 있다. 주석은 성경의 중심에 의해서 수행되므로 그리스도가 제시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 며 그 생명이다. 그러므로 성경 주석은 그리스도와 연간하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수행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석에서 제시되면 언제든지 성령님이 역사하여 사람들로 생 명에 이르게 한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수단만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이다. 그가 백성을 구원하되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고, 백성의 하나님 되기 위해서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목표하고 구원 사역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주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곧 하나님의 나라가 제시되도록 수행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성경 주석이 그 목표에 이르러 유대 율법 종교가 되지 않고 기독교의 설교 곧 복음의 제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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