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내용 (행13:17-41)
본문
어떤 집에 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급한 나머지 119를 불러야 되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급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딸에게 묻습니다. "야 야! 119가 몇번이고" 딸이 대답하기를 "어머니 119가 119아닙니꺼" 어머니는 더 큰소리로 "지금이 장난칠 때가 아니다. 내가 119가 몇번인지 안묻나 119가 몇번이고"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다고 할 때 웃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는 우리 자신도 이런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중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정작 자 신의 집 전화번호를 모르고 지낸 때가 있습니다. 수화기를 든 후 다이얼을 누르 려고 할 때 잠시 생각해야 합니다. 기억을 추스런 다음에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지난 번 폭우에 집이 떠내려 가고 산사태로 일가족이 목 숨을 잃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강도 낙동강도 범람의 위험수위에 다다랐습니다. 그런 물난리 가운데 제일 고통스러운 일은 마실 물이 없었다는 겁니다. 파키스 탄도 전 국토의 3분의 2가 물에 잠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일 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질에 걸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드리면서도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모르고 신앙 생활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이 행한 설교의 내용을 중심하여 '복음의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행13:14에 기록처럼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들이 이 두 선교사에게 말하기를 15절 에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는 내용이 17-41절의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에 대한 설교는 7장 에 나타나는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가지 일에 대하여 대단히 궁금해 했는데 그것은 구약의 말씀 과 그리고 메시야에 관한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의 궁금증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단순하게 풀어가며 설명하 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개종한 자들이 메 시야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쉽게 알아듣게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고 백처럼 그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하기를 원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작정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혜의 말로 권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의 나타남과 그 권능으로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로 권했 기에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잘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고전2:1-8). 바울이 복음에 대하여 요약하는 내용은 대략 다섯가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17-19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 조상들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나 타내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택하심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신7:7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 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다른 민족 중에 가장 적 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의 후손이며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희 망이 있어서 선택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이방인과 비교해 볼 때 별반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이란 항상 범죄하기를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종자입니다. 아담의 후손에게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유 대인들이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점철된 기록 뿐입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보세요. 그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인간적인 결정을 합니다. 그것은 사라의 몸 종 하갈을 통하여 후손을 얻겠다는 지극히 이방인적인 결정이 그것입니다. 이삭도 위험이 부딪치자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자 신의 생명을 보전할려고 했습니다. 야곱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한 개인 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체나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구출되어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소망 이 있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간 이후 이들이 모여준 결정과 행동은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 갈 지 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금붙이를 모아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숭배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셨건만 이들은 이방 신 애굽의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이 모습이 가관이지 않습니까 이런 백성 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보세요.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 들과 다른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영광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가장 진귀한 복음입니다. 두 번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은 17절 하반부에 기록한대로 "애굽 땅에 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 당대의 가장 강대한 나라가 애굽입니다. 이 애굽에서 거대한 한 민족이 도망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당대의 가장 강대한 군대를 이길 수도 없거니와 이스라엘 민족의 생각 속에는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노예근성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애굽이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애굽 을 이길 힘도 그리고 그곳을 벗어날 의지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살린 단 말입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 은 자기 백성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기를 나그네 된 자기 백성을 높였다고 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높였다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원합니다. 우리는 출애굽 할 때 로 되돌아 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을 때 누구도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재앙에 이어 계 속되는 재앙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은 대단했습니다. 하나님 이 과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의식이 눈뜨기 시작 했습니다. 우리는 애굽인들과는 다른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장자가 죽는 엄청난 재난의 예언이었습니다. 이 예언을 무시 한 자는 죽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명령 앞에서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통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통곡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습니다. 집집마다 죽음의 사자가 처음난 것은 다 죽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애굽 백성들은 유대인의 가정에 대하여 두려움과 존경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부럽고,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었습니다. 애굽인들은 금은패물 귀중한 것을 유대인들에게 갖다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렇게 높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니까 압제하던 애굽인들에게 선물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 있었던 유대인들만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높이십니다. 우리의 지위를 높여 주십니다. 종교개혁가 칼빈도 하나님이 높여 주셨습니다.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 할 때 그의 목회가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 시민들로 하여금 개신교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했고 특별히 행정관들 에게는 그들의 삶이 본이 되도록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 중에 혹 옳지못한 사람이 있어면 이들을 조사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더 나아 가서 파문까지 시켰습니다. 결국 제네바의 고위 시민들 가운데는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외국인인 주제에 터줏대감들인 자신들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생각 하여 칼빈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칼빈에게 주었던 권한들을 취소하 였습니다. 결국 칼빈은 그곳 제네바에서 목회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 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마틴 부쳐(Martin Bucer)를 만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별히 타협과 조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후 칼빈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서 이전보다 훨씬 조화롭게 사역했습니다. 칼빈에 의한 일 방적인 개혁도 그렇다고 평신도들에 의한 월권도 아닌 서로의 협조와 견제로 개혁이 진행되어 갔습니다. 오늘에 와서 수많은 칼빈주의 교회를 볼 때 칼빈의 개혁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칼빈의 능력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 께서 그를 높여 그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그 크신 권능으로 자기에게 주신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천국까지 인도하여 가십니다. 그 의 크신 사랑은 택한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롬8:28-39). 세 번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은 19절에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 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었 습니다. 하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모든 원수 들을 멸하시는 능력을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일곱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2.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악상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8-21절).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세요. 이들에게서 어떤 선한 일을 찾을 수 있는지요. 어떤 위대한 선생을 찾을 수 있는지요. 그런 사람은 없다라는 결론 뿐입니다. 로마서 3:10절 이하의 기록처럼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다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익한 일을 쫒아 갑니다. 모든 사람의 목구멍은 무덤처럼 썩은 것을 집어 먹습니다. 썩은 것을 먹은 그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독입니다. 독사의 독처럼 사람을 죽입니다. 상처를 줍니다. 저주 가 가득합니다. 그들의 발은 피흘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파멸과 고생 뿐입니다. 그들은 평강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롬3:10-18). 롬5:12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 라"는 말씀처럼 어떤 누구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류의 또 다른 설명은 엡2:1-4에 나타납니다. 인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세상의 풍속을 따르기를 본질적으로 좋아합니다. 공중 권세잡은 마 귀의 궤책을 따르기를 더 좋아하는 인류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보도 매 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어떤 범죄로 부터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범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마산 교방동에서 10살된 아이의 새끼 손가락을 절단한 강도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힘을 쏱았습니다. 그런데 놀 랍게도 범인은 멀리있지 않았습니다. 범인은 그 아이를 보호해야 할 아버지였습니다. 몇푼의 돈을 보험회사로 부터 받아내기 위하여 그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그 아버지를 욕할 수 없는 것은 그도 아담의 후예라는 겁니다. 달 리 말하면 우리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범죄한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이 엄청난 은총 앞에서 감격할 것 밖에 없습니다.
3.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었습니다(22-23절).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다윗이 비록 엉성하고 부족하며 죄를 지었지만 그를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어떻 게 살았는지 성경을 통하여 상세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구원의 하나님 은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펼칠 때 나타나는 제자들의 엉성한 모습에서 실망을 금 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마다 그들의 오매불망 한가 지 의문은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회복되느냐는 지상의 관심사만 표명하였기 때 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의 세례를 받으라고 했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도행전이었는데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된 복음의 확장운동은 심령으로 심령으로 퍼져 갔습니다. 여전히 미련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안주하였고 늘어난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며 관리하느냐가 주된 관심이 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님께서는 이들에게 핍박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하여 흩어 지게 하셨습니다. 각처로 흩어진 그들이 세운 교회 가운데 하나가 안디옥 교회 였습니다. 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파송받은 바울이 행한 설교의 내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인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오묘한 무엇을 보는 듯 합니다. 핍박자를 변화시켜 전도자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아멘 밖에는 다른 어떤 감탄의 말이 없습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 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느니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씨입니까 다윗 의 씨,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구체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약속이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현실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약속이 전연 불가능한 가운데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욧점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이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또 다른 진수입니다. 복음의 욧점은 복음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욧점은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신 다는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강도라도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 이며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복음의 욧점은 누구든지 예수믿으면 구원 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이루어ㅈ비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표를 바꿀 수 없습니다. 독일의 거국적인 조직 아 래 시행된 유대인 말살정책도 유대인의 씨를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여진다는 예언은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스라엘은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하여 다시 유대로 모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 고 나라를 독립하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아래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4.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관하여 말했습니다(24-39절). 바울의 메세지 요점은 예수는 구세주이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어셨다는 내용 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본문 24-27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잘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는대로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요1:29). 예수님의 인격과 사 역은 무엇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가는 그것입니다. 27-29절에서는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의 평가가 아닙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무죄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도 능력이 많으심에도 불구하 고 자신을 위하여서 어떤 기적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 가 나음을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는 사죄의 은총 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괴로워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문을 당하 였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참으심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30-37절에서는 그의 살아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나심으로 무덤의 권세를 이기심이 증명되었습니다. 그가 살아나심으로 모든 자들의 부활 의 첫 열매가 되심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33-34절에서는 통치와 권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에 왕이 되십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죄인을 선택하였습니다. 38-39절에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모든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소식입니다.
5.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이 복음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26, 40-41절). 복음은 우리에게 증거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복음의 말씀을 받지 않거나 믿지 아니하는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 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복음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만약 복음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에 따르는 불이익은 그 자신이 받아야 합니다. 막16:16에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 를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증거된 말씀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보다 더 이상 가치있는 무엇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한 복음으로 들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절망의 때에도 돌 아가서 위로받아야 할 곳은 복음 뿐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희망이 없지만 복음은 우리를 사랑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런 타락하고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우리를 통하여 영원한 목적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집시다. 복음의 말씀이 있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91년 6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내용에 큰 감동을 받았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 사는 제프와 마리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가졌을 때 그들의 아이가 행복하게 자랐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학교에 가고 수영도 하고 스케이트를 타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두달 반이나 일찍 1.6 Kg의 아이로 그것도 호흡도 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꿈이 산산이 깨어지는 현실 앞에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희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남편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산 모 마리였답니다. 그 아이는 최신의 의료기술로 생명은 연장했어나 새롭게 들려 주는 의료진의 통보는 천천벽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는 선천적으로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엄마나 아빠를 포기하 지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갔습니다. 아이에게 쥬스를 줄 때마다 쥬스라는 손가락 문자를 입에갖다 대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자 아이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쥬스를 달라는 것이 었습니다. 엄마는 뛸 듯이 기뻣습니다. 아이와 엄마의 의사소통이 시작된 겁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는 아이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특별히 희망 이란 힘이 얼마나 힘있는 지를 배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은 절 망으로 가득할 가정을 소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삶에 열정이 무엇이며 용기가 무엇인지를 지체부자유자로 태어난 아이를 통하여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 어떤 형편에 처하였든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계획 하신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복음의 내용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권능의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새롭게 도전하시기를 믿음의 장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는 이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살았습니다. 구원의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며 그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희 망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토마스 목사가 죽음을 불사하고 이 땅에 들어와서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복을 전해야 합니다. 아펜젤러와 언드우드 목사가 복음을 잔했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주의 군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일 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질에 걸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드리면서도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모르고 신앙 생활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이 행한 설교의 내용을 중심하여 '복음의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행13:14에 기록처럼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들이 이 두 선교사에게 말하기를 15절 에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는 내용이 17-41절의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에 대한 설교는 7장 에 나타나는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가지 일에 대하여 대단히 궁금해 했는데 그것은 구약의 말씀 과 그리고 메시야에 관한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의 궁금증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단순하게 풀어가며 설명하 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개종한 자들이 메 시야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쉽게 알아듣게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고 백처럼 그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하기를 원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작정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혜의 말로 권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의 나타남과 그 권능으로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로 권했 기에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잘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고전2:1-8). 바울이 복음에 대하여 요약하는 내용은 대략 다섯가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17-19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 조상들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나 타내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택하심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신7:7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 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다른 민족 중에 가장 적 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의 후손이며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희 망이 있어서 선택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이방인과 비교해 볼 때 별반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이란 항상 범죄하기를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종자입니다. 아담의 후손에게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유 대인들이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점철된 기록 뿐입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보세요. 그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인간적인 결정을 합니다. 그것은 사라의 몸 종 하갈을 통하여 후손을 얻겠다는 지극히 이방인적인 결정이 그것입니다. 이삭도 위험이 부딪치자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자 신의 생명을 보전할려고 했습니다. 야곱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한 개인 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체나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구출되어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소망 이 있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간 이후 이들이 모여준 결정과 행동은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 갈 지 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금붙이를 모아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숭배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셨건만 이들은 이방 신 애굽의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이 모습이 가관이지 않습니까 이런 백성 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보세요.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 들과 다른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영광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가장 진귀한 복음입니다. 두 번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은 17절 하반부에 기록한대로 "애굽 땅에 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 당대의 가장 강대한 나라가 애굽입니다. 이 애굽에서 거대한 한 민족이 도망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당대의 가장 강대한 군대를 이길 수도 없거니와 이스라엘 민족의 생각 속에는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노예근성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애굽이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애굽 을 이길 힘도 그리고 그곳을 벗어날 의지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살린 단 말입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 은 자기 백성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기를 나그네 된 자기 백성을 높였다고 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높였다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원합니다. 우리는 출애굽 할 때 로 되돌아 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을 때 누구도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재앙에 이어 계 속되는 재앙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은 대단했습니다. 하나님 이 과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의식이 눈뜨기 시작 했습니다. 우리는 애굽인들과는 다른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장자가 죽는 엄청난 재난의 예언이었습니다. 이 예언을 무시 한 자는 죽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명령 앞에서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의 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통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통곡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습니다. 집집마다 죽음의 사자가 처음난 것은 다 죽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애굽 백성들은 유대인의 가정에 대하여 두려움과 존경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부럽고,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었습니다. 애굽인들은 금은패물 귀중한 것을 유대인들에게 갖다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렇게 높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니까 압제하던 애굽인들에게 선물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 있었던 유대인들만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높이십니다. 우리의 지위를 높여 주십니다. 종교개혁가 칼빈도 하나님이 높여 주셨습니다.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 할 때 그의 목회가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 시민들로 하여금 개신교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했고 특별히 행정관들 에게는 그들의 삶이 본이 되도록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 중에 혹 옳지못한 사람이 있어면 이들을 조사하여 성찬예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더 나아 가서 파문까지 시켰습니다. 결국 제네바의 고위 시민들 가운데는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외국인인 주제에 터줏대감들인 자신들의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생각 하여 칼빈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칼빈에게 주었던 권한들을 취소하 였습니다. 결국 칼빈은 그곳 제네바에서 목회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 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마틴 부쳐(Martin Bucer)를 만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별히 타협과 조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후 칼빈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서 이전보다 훨씬 조화롭게 사역했습니다. 칼빈에 의한 일 방적인 개혁도 그렇다고 평신도들에 의한 월권도 아닌 서로의 협조와 견제로 개혁이 진행되어 갔습니다. 오늘에 와서 수많은 칼빈주의 교회를 볼 때 칼빈의 개혁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칼빈의 능력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 께서 그를 높여 그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그 크신 권능으로 자기에게 주신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천국까지 인도하여 가십니다. 그 의 크신 사랑은 택한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롬8:28-39). 세 번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은 19절에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 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었 습니다. 하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모든 원수 들을 멸하시는 능력을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일곱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2.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악상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8-21절).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세요. 이들에게서 어떤 선한 일을 찾을 수 있는지요. 어떤 위대한 선생을 찾을 수 있는지요. 그런 사람은 없다라는 결론 뿐입니다. 로마서 3:10절 이하의 기록처럼 의인은 없나 니 하나도 없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다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익한 일을 쫒아 갑니다. 모든 사람의 목구멍은 무덤처럼 썩은 것을 집어 먹습니다. 썩은 것을 먹은 그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독입니다. 독사의 독처럼 사람을 죽입니다. 상처를 줍니다. 저주 가 가득합니다. 그들의 발은 피흘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파멸과 고생 뿐입니다. 그들은 평강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롬3:10-18). 롬5:12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 라"는 말씀처럼 어떤 누구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인류의 또 다른 설명은 엡2:1-4에 나타납니다. 인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세상의 풍속을 따르기를 본질적으로 좋아합니다. 공중 권세잡은 마 귀의 궤책을 따르기를 더 좋아하는 인류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보도 매 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어떤 범죄로 부터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범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마산 교방동에서 10살된 아이의 새끼 손가락을 절단한 강도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힘을 쏱았습니다. 그런데 놀 랍게도 범인은 멀리있지 않았습니다. 범인은 그 아이를 보호해야 할 아버지였습니다. 몇푼의 돈을 보험회사로 부터 받아내기 위하여 그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그 아버지를 욕할 수 없는 것은 그도 아담의 후예라는 겁니다. 달 리 말하면 우리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범죄한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이 엄청난 은총 앞에서 감격할 것 밖에 없습니다.
3.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었습니다(22-23절).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다윗이 비록 엉성하고 부족하며 죄를 지었지만 그를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어떻 게 살았는지 성경을 통하여 상세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구원의 하나님 은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펼칠 때 나타나는 제자들의 엉성한 모습에서 실망을 금 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마다 그들의 오매불망 한가 지 의문은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회복되느냐는 지상의 관심사만 표명하였기 때 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의 세례를 받으라고 했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도행전이었는데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된 복음의 확장운동은 심령으로 심령으로 퍼져 갔습니다. 여전히 미련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안주하였고 늘어난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며 관리하느냐가 주된 관심이 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님께서는 이들에게 핍박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하여 흩어 지게 하셨습니다. 각처로 흩어진 그들이 세운 교회 가운데 하나가 안디옥 교회 였습니다. 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파송받은 바울이 행한 설교의 내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인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 오묘한 무엇을 보는 듯 합니다. 핍박자를 변화시켜 전도자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아멘 밖에는 다른 어떤 감탄의 말이 없습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 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느니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씨입니까 다윗 의 씨,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구체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약속이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현실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약속이 전연 불가능한 가운데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욧점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이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또 다른 진수입니다. 복음의 욧점은 복음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욧점은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신 다는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강도라도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 이며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복음의 욧점은 누구든지 예수믿으면 구원 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이루어ㅈ비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표를 바꿀 수 없습니다. 독일의 거국적인 조직 아 래 시행된 유대인 말살정책도 유대인의 씨를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여진다는 예언은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스라엘은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하여 다시 유대로 모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 고 나라를 독립하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아래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4.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관하여 말했습니다(24-39절). 바울의 메세지 요점은 예수는 구세주이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어셨다는 내용 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본문 24-27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잘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는대로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요1:29). 예수님의 인격과 사 역은 무엇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가는 그것입니다. 27-29절에서는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의 평가가 아닙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무죄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도 능력이 많으심에도 불구하 고 자신을 위하여서 어떤 기적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 가 나음을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찔림으로 우리는 사죄의 은총 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괴로워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문을 당하 였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참으심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30-37절에서는 그의 살아나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나심으로 무덤의 권세를 이기심이 증명되었습니다. 그가 살아나심으로 모든 자들의 부활 의 첫 열매가 되심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33-34절에서는 통치와 권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에 왕이 되십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죄인을 선택하였습니다. 38-39절에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모든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소식입니다.
5.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요점은 이 복음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26, 40-41절). 복음은 우리에게 증거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복음의 말씀을 받지 않거나 믿지 아니하는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 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복음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만약 복음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에 따르는 불이익은 그 자신이 받아야 합니다. 막16:16에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 를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증거된 말씀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보다 더 이상 가치있는 무엇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한 복음으로 들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절망의 때에도 돌 아가서 위로받아야 할 곳은 복음 뿐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희망이 없지만 복음은 우리를 사랑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런 타락하고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우리를 통하여 영원한 목적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가집시다. 복음의 말씀이 있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91년 6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내용에 큰 감동을 받았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 사는 제프와 마리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가졌을 때 그들의 아이가 행복하게 자랐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학교에 가고 수영도 하고 스케이트를 타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두달 반이나 일찍 1.6 Kg의 아이로 그것도 호흡도 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꿈이 산산이 깨어지는 현실 앞에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희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남편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산 모 마리였답니다. 그 아이는 최신의 의료기술로 생명은 연장했어나 새롭게 들려 주는 의료진의 통보는 천천벽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는 선천적으로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엄마나 아빠를 포기하 지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갔습니다. 아이에게 쥬스를 줄 때마다 쥬스라는 손가락 문자를 입에갖다 대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자 아이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쥬스를 달라는 것이 었습니다. 엄마는 뛸 듯이 기뻣습니다. 아이와 엄마의 의사소통이 시작된 겁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는 아이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특별히 희망 이란 힘이 얼마나 힘있는 지를 배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은 절 망으로 가득할 가정을 소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삶에 열정이 무엇이며 용기가 무엇인지를 지체부자유자로 태어난 아이를 통하여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 어떤 형편에 처하였든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계획 하신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복음의 내용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권능의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새롭게 도전하시기를 믿음의 장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는 이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살았습니다. 구원의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며 그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희 망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토마스 목사가 죽음을 불사하고 이 땅에 들어와서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복을 전해야 합니다. 아펜젤러와 언드우드 목사가 복음을 잔했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주의 군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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