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롬1:16-17)
본문
며칠사이 우리는 또한번 세상을 경악케하는 엄청난 사건을 두건이나 경험했습니다. 너무 여러번 놀랐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리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듯 합니다. 한낮 도심지 한복판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하여 열명이 넘는 인명이 죽어갔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졸지에 모든 세간살이와 집을 잃는 일이 벌어졌는가하면, 공사장에서 커다란 철강기둥을 들어 올리다 줄이 끊어져 6명이나 되는 사람이 순식간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두가지 사건 모두 아주 사소한 잘못이 엄청난 결과를 갖게한 사건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대형사건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만한 구멍하나가 결국 커다란 댐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것도 사실 남들에게 보이기에 왜소해 보이고 부끄러워 할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엄청난 힘과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향유하며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모든자들에게 빚진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빚은 다름아닌 복음의 빚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 즉 복음의 말씀은 상당히 부끄럽거나 치욕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부끄럽게 여겨지거나 치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그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있어서 예수는 잘 알고 있는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질적인 죄인을 구세주라고 떠받들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매해 보이고 한심해 보였으며 조롱받기 딱 알맞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배우고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행해서 얻어지는 그런 만족이 아니라 나의 능력은 필요없고 누군가에 의해서 전적으로 선택되어져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은 진정 바보같은 사람들로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이 하층계급이나, 노예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조건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고학력자들 중에서 기독교보다는 불교가 선호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스스로 성불하고 싶다는 그런 배운자들의 교만이 이를 상당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 복음은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요. 오히려 대단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선포였으며, 인간의 통제를 훨씬 벗어나 있는 것이며, 심지어 교회나 성직자들의 설교로 부터도 현저히 독립되어 있는 것 입니다. 때문에 이 복음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서 이 능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뒤나미스라는 단어로서 이것은 오늘날 영어에서 다이나마이트, 혹은 다이나믹이라는 말로 변형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즉 역동적인 힘으로서 엄청난 폭발로 순식간에 그 힘이 퍼져가는 그런 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이나마이트처럼 엄청난 힘으로 번져나가는 위대한 구원의 힘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능력의 복음을 사도바울은 부끄러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능력은 다름아닌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모든 이라는 말은 조금의 차별도 없이 어떤 사람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관계없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라면 그 지위와 학력과 능력과 신체적 조건과 이 모든 것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의 양자로 입적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들은 외모로 보고 판단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바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적으로 나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떠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받아들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거기가 구원의 장소가되며, 미래의 심판으로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고 더 나아가 죄악과 심판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얻어지는 현재적 평안과 희락 그리고 미래적인 소망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구원이라는 의미는 이미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말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개념은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순전히 타인에 의해서 해결함을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나 메시야 그리고 신약의 소테르라는 개념은 바로 이것 우리의 능력밖에 있는 죄로부터의, 심판으로 부터의 해방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역에 의해 거저 받게 되었다는 것이며, 오직 인간의 노력이 철저히 배제된 가운데에서 우리는 단지 그 사역을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신인 동형론적인 사상에서 사람이 능히 신이 될 수 있고 또한 신이 사람과 같이 생활해 나간다는 사상속에 살던 희랍인들에게나 하나님 주신 율법을 더욱 철저히 분석하고 그것만 충실히 지키면 하나님께서 능히 자신들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 주시리라는 철저한 율법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구원될 수 없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특히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하는 생각은 진정 어리석어보이고 부끄러울 만큼 조롱당할 수도 있는 그런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들의 그 우매함을 초월하셔서 전적으로 당신의 권한아래 구원의 계획과 섭리를 두시고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들어 쓰셔서 그들의 현명함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들어 사용하시고 영광받으심으로 오히려 능력있어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것을 하나님의 의 즉 디카이오쉬네 데우라고 말합니다. 17절말씀을 살펴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원래 희랍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읽혀지는 이 의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사용되는 법정용어였습니다. 법정용어로서의 이 의는 아주 재미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현상이 어찌되었든 상관없이 법정에서 선고되는 대로 그것은 정의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 보시는 입장에서의 정당함, 정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름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의로와보이고 정당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건대 그것이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보여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불의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만인이 지극히 의로운 일로 보는 객관적인 정의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일는 없겠죠 만약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불의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믿는다는 하나님은 혹시 잘못된 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만 보시는 정의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들이 보는 정의의 판단기준과는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정의의 판단기준은 누가 얼마나 올바른 일을 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오직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부어주신 복음이 자리잡고 있는가에 그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복음이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없으며, 반대로 그 복음이 우리의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비록 조금은 부족하게 살았을 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처럼 객관적이지 못한 정의의 기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도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담긴 은혜로운 판단 기준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옳다고 생각은 하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고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남들이 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판단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기꺼이 행하는 사람또한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자가 하나님의 의의 판단기준에 합당한 사람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악은 그 근원부터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있어서 매 순간 우리의 행동하나하나가 과연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즐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우리의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간이 행하는 정의를 보면 정녕 하나님앞에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합격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그 복음을 소유한 자만을 의로운 자라고 불러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는 실로 한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한없는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의로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주시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피나는 노력으로 의로움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라 칭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기독교문학가인 김수경은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풍성히 베푸신 이 복음을 우리 속에 받아 두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살펴보면 바울은 하낙국 2장4절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리라는 말은 희랍어의 자오라는 단어로서 이것은 영어의 얼라이브 즉 살아간다라는 의미보다는 생명력을 갖게된다. 혹은 존재할 수있다는 의미를 아주 강하게 갖는 말입니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서 살아가는 교만한자들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죽을 지라도 오직 의인들은 그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보존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했고, 사도바울 또한 바로 이런의미에서 하나님앞에서는 믿음만이 의인으로 칭함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결단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게, 즉 구원을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믿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합니다. 과연 이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원문 말씀을 살펴보면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직접 번역해보면 믿음으로 부터 나와서 믿음으로 간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쪽의 믿음이라는 말은 실천적 의미에서의 믿음 즉 우리의 믿음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요 두번째 믿음이라는 단어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궁극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실천적 의미에서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올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라는 말씀은 비록 우리가 믿고자하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확실한 실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어떤 확실한 대상에대한 절대적인 의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믿음에는 확실한 믿음의 대상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제주도 내에 있는 모든 미신이나, 무당들의 신방행위를 한데 뭉퉁그려서 무속신앙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그 귀신이 틀림없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한번에 500만원 천만원을 들여서 신방을 차리곤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자신들을 확실히 지켜줄 확실한 대상이 없으면 그들은 결단코 어떤 관심도 그 속에 쏟아붇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믿음역시 확실한 대상 하나에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확실한 대상이 흔들리기 때문에 아직도 여기서 이소리 저기서 저소리를 속삭여대면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듯 속절없이 헤메이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라다볼 때 과연 우리의 믿음의 대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은 제외된 채 재물, 명예, 안락, 지식, 권세등 여러가지들이 대신 그 자리를 메꾸고 있는지요. 결국 이런 여러가지들이 우리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 되셔야 할 그 분의 자리를 강점하고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아직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모든 현상들에대한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기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체험해 보지 목한 수 만가지의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 수 많은 현상들을 당연한 일일것이라는 확고한 기대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은 믿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많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시고 장렬하게 전사하셨다는 사실을 실제로 당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 시대에 그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삶과 업적을 그대로 믿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는 다고 말한다는 것은 비록 지금 내게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그대로 될 것을 기대하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 믿는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어떤 것도 감수하고 전적으로 의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떤 친구가 빚보증을 서 달라고 왔다는 가정을 해 봅시다. 그 때 “사실 내가 자네를 확실히 믿기는 하네만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런가”라고 한다면 이미 그 속에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나는 자네를 못믿네 하는 것보다 더욱 음흉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그 친구를 확신한다면 보증을 서 주어야 하겠죠 실제로 우리주변에서 그렇게 친구를 믿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일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불이익도 감수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모든 것을 옳게 이루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내고 또한 평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자기 의지와도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신뢰는 전적인 신뢰여야만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모든 어려움도 감수하되 오직 전적인 신뢰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최선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헌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성경읽는일, 기도하는 일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댓가를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모든 일들이 너무 감사하여서 그 모든 일들을 믿는 성도로서 그 감사의 발로로서 이 모든 최선을 오직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전혀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자가드린 거금의 연보보다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렙돈의 연보를 더욱 가치있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헌신들을 드리냐에 촛점을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정한 마음과 정성으로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는가를 더욱 중요하게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대상들은 과연 재물이 아니었던가요 아니면 명예, 부귀, 권세가 아니었습니까 진정 믿음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해 참도힌 믿음에 도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규정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무한한 새 삶과 새생명이 있습니다. 그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 믿음에 도달하려 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과연 무엇을 믿느냐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고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 있느냐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 즉 복음의 말씀은 상당히 부끄럽거나 치욕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부끄럽게 여겨지거나 치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그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있어서 예수는 잘 알고 있는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질적인 죄인을 구세주라고 떠받들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매해 보이고 한심해 보였으며 조롱받기 딱 알맞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배우고 학식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행해서 얻어지는 그런 만족이 아니라 나의 능력은 필요없고 누군가에 의해서 전적으로 선택되어져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은 진정 바보같은 사람들로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이 하층계급이나, 노예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조건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고학력자들 중에서 기독교보다는 불교가 선호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스스로 성불하고 싶다는 그런 배운자들의 교만이 이를 상당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 복음은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요. 오히려 대단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선포였으며, 인간의 통제를 훨씬 벗어나 있는 것이며, 심지어 교회나 성직자들의 설교로 부터도 현저히 독립되어 있는 것 입니다. 때문에 이 복음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서 이 능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뒤나미스라는 단어로서 이것은 오늘날 영어에서 다이나마이트, 혹은 다이나믹이라는 말로 변형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즉 역동적인 힘으로서 엄청난 폭발로 순식간에 그 힘이 퍼져가는 그런 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이나마이트처럼 엄청난 힘으로 번져나가는 위대한 구원의 힘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능력의 복음을 사도바울은 부끄러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능력은 다름아닌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모든 이라는 말은 조금의 차별도 없이 어떤 사람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관계없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라면 그 지위와 학력과 능력과 신체적 조건과 이 모든 것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의 양자로 입적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들은 외모로 보고 판단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바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적으로 나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떠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받아들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거기가 구원의 장소가되며, 미래의 심판으로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고 더 나아가 죄악과 심판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얻어지는 현재적 평안과 희락 그리고 미래적인 소망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는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구원이라는 의미는 이미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말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개념은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순전히 타인에 의해서 해결함을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나 메시야 그리고 신약의 소테르라는 개념은 바로 이것 우리의 능력밖에 있는 죄로부터의, 심판으로 부터의 해방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역에 의해 거저 받게 되었다는 것이며, 오직 인간의 노력이 철저히 배제된 가운데에서 우리는 단지 그 사역을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신인 동형론적인 사상에서 사람이 능히 신이 될 수 있고 또한 신이 사람과 같이 생활해 나간다는 사상속에 살던 희랍인들에게나 하나님 주신 율법을 더욱 철저히 분석하고 그것만 충실히 지키면 하나님께서 능히 자신들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 주시리라는 철저한 율법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구원될 수 없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특히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하는 생각은 진정 어리석어보이고 부끄러울 만큼 조롱당할 수도 있는 그런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들의 그 우매함을 초월하셔서 전적으로 당신의 권한아래 구원의 계획과 섭리를 두시고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들어 쓰셔서 그들의 현명함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들어 사용하시고 영광받으심으로 오히려 능력있어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것을 하나님의 의 즉 디카이오쉬네 데우라고 말합니다. 17절말씀을 살펴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원래 희랍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읽혀지는 이 의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사용되는 법정용어였습니다. 법정용어로서의 이 의는 아주 재미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현상이 어찌되었든 상관없이 법정에서 선고되는 대로 그것은 정의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 보시는 입장에서의 정당함, 정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름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의로와보이고 정당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건대 그것이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보여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불의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만인이 지극히 의로운 일로 보는 객관적인 정의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일는 없겠죠 만약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불의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믿는다는 하나님은 혹시 잘못된 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만 보시는 정의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들이 보는 정의의 판단기준과는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정의의 판단기준은 누가 얼마나 올바른 일을 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오직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부어주신 복음이 자리잡고 있는가에 그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복음이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없으며, 반대로 그 복음이 우리의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비록 조금은 부족하게 살았을 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처럼 객관적이지 못한 정의의 기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도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담긴 은혜로운 판단 기준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옳다고 생각은 하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고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남들이 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판단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기꺼이 행하는 사람또한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자가 하나님의 의의 판단기준에 합당한 사람이겠습니까 더군다나 악은 그 근원부터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있어서 매 순간 우리의 행동하나하나가 과연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즐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우리의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간이 행하는 정의를 보면 정녕 하나님앞에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합격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그 복음을 소유한 자만을 의로운 자라고 불러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는 실로 한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한없는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의로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주시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피나는 노력으로 의로움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라 칭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기독교문학가인 김수경은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풍성히 베푸신 이 복음을 우리 속에 받아 두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살펴보면 바울은 하낙국 2장4절을 인용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리라는 말은 희랍어의 자오라는 단어로서 이것은 영어의 얼라이브 즉 살아간다라는 의미보다는 생명력을 갖게된다. 혹은 존재할 수있다는 의미를 아주 강하게 갖는 말입니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서 살아가는 교만한자들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죽을 지라도 오직 의인들은 그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보존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했고, 사도바울 또한 바로 이런의미에서 하나님앞에서는 믿음만이 의인으로 칭함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결단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게, 즉 구원을 소유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믿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기록합니다. 과연 이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원문 말씀을 살펴보면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직접 번역해보면 믿음으로 부터 나와서 믿음으로 간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쪽의 믿음이라는 말은 실천적 의미에서의 믿음 즉 우리의 믿음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요 두번째 믿음이라는 단어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궁극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실천적 의미에서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올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라는 말씀은 비록 우리가 믿고자하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확실한 실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어떤 확실한 대상에대한 절대적인 의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믿음에는 확실한 믿음의 대상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제주도 내에 있는 모든 미신이나, 무당들의 신방행위를 한데 뭉퉁그려서 무속신앙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그 귀신이 틀림없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한번에 500만원 천만원을 들여서 신방을 차리곤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자신들을 확실히 지켜줄 확실한 대상이 없으면 그들은 결단코 어떤 관심도 그 속에 쏟아붇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믿음역시 확실한 대상 하나에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확실한 대상이 흔들리기 때문에 아직도 여기서 이소리 저기서 저소리를 속삭여대면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듯 속절없이 헤메이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라다볼 때 과연 우리의 믿음의 대상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은 제외된 채 재물, 명예, 안락, 지식, 권세등 여러가지들이 대신 그 자리를 메꾸고 있는지요. 결국 이런 여러가지들이 우리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 되셔야 할 그 분의 자리를 강점하고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아직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모든 현상들에대한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기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체험해 보지 목한 수 만가지의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그 수 많은 현상들을 당연한 일일것이라는 확고한 기대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은 믿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많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시고 장렬하게 전사하셨다는 사실을 실제로 당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 시대에 그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삶과 업적을 그대로 믿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는 다고 말한다는 것은 비록 지금 내게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그대로 될 것을 기대하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 믿는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어떤 것도 감수하고 전적으로 의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떤 친구가 빚보증을 서 달라고 왔다는 가정을 해 봅시다. 그 때 “사실 내가 자네를 확실히 믿기는 하네만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런가”라고 한다면 이미 그 속에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나는 자네를 못믿네 하는 것보다 더욱 음흉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그 친구를 확신한다면 보증을 서 주어야 하겠죠 실제로 우리주변에서 그렇게 친구를 믿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일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불이익도 감수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모든 것을 옳게 이루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내고 또한 평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자기 의지와도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신뢰는 전적인 신뢰여야만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모든 어려움도 감수하되 오직 전적인 신뢰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최선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헌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성경읽는일, 기도하는 일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댓가를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모든 일들이 너무 감사하여서 그 모든 일들을 믿는 성도로서 그 감사의 발로로서 이 모든 최선을 오직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전혀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자가드린 거금의 연보보다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렙돈의 연보를 더욱 가치있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헌신들을 드리냐에 촛점을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정한 마음과 정성으로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는가를 더욱 중요하게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대상들은 과연 재물이 아니었던가요 아니면 명예, 부귀, 권세가 아니었습니까 진정 믿음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해 참도힌 믿음에 도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규정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무한한 새 삶과 새생명이 있습니다. 그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 믿음에 도달하려 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과연 무엇을 믿느냐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고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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