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롬1:16-7)
본문
이 본문에서는 복음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복음의 능력은 첫째는 구원이요, 둘째는 의롭다 함입니다. 즉 복음이 이루는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과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은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요절입니다.여기서부터 로마서의 본 론이며 동시에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씀의 골자입니다. 복음에 있어서 소극적으로는 구원이 있고,적극적인 의미로는 의롭다 함을 받아 서 의인이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겨우 구원만 받고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면 정 말 부끄러운 일입니다.나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야 하나님 앞에 설수 있지,죄인 그 대로 건져만 놓으면(구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말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찾아 내라고 야단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릴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보따리를 찾아 주어야 먹고 살지 찾아 주지 않고 생명만 건져 주면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즉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살려 주고,그 다음의 문제까지도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구원 다음에는 의롭다 하시는 은혜가 있어야 하나님 전에서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1.복음의 구원의 능력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승전가의 트럼펫을 부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첫마디가 승리를 선포하는 자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의 서론은 첫째 나이며, 둘째는 복음입니다.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복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남의 이야 기를 하는 것처럼 맥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복음에 대한 설명은 내생애,내 신앙의 간증으로 시작 되어야 합니다.내 가 믿는 예수,내가 믿는 복음,내가 경험한 복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말했고,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그런 희미한 내용을 가지 고는 복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로서가 아니라 나의 생활 속에서 나의 운명을 건 그러한 경험으로 복음은 설명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하고 자신이 믿는 복음을 시작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여기서 나와 복음의 관께를 말하고 있습니다.생생하고 뚜렷하 게 자기 신앙을 복음 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해방과 승리의 소식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자대로보면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그럼 기쁜소식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통신 수단이 아주 불편했습니 지금은 전보, 텔레비젼,팩스,전화,컴퓨 터 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2,000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 습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통신 수단은 불과 몇십년 안된 것입니다.옛날 에는 통신수단이 비둘기 봉화불 마라톤 등이었습니다.마라톤의 유래는 승리의 소 식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군사적인 목적으로 어떤 소식을 전할 때, 위험을 피해 멀리 빨리 뛰는 훈 련을 하던 것이 마라톤과 그 밖의 운동경기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교통과 통신이 불편 할 때에는 아들과 남편들이 전쟁에 나가면 죽었는 지, 살았는지, 우리편이 이기는지 패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서너 달 씩 혹은 일 년씩 소식을 전혀 모른 채 기다리면 승리했을 경우 한 병사가 승전의 소식을 가지고 성위에 올라가 나팔을 불면,온 성의 사람들은 성 문 앞 광장에 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번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면,모든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릅니다. 바로 이 때에 전해지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전재에서 지면 노예가 되고 멸망하지만, 승리하면 자유인이요,더 큰 영토에 노 예를 부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소화합니다. 세상의 복음은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 식이자만 바울이 말한 복음은 예수의 소식입니다. 말씀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셨으며,동시에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부활하시며,승천하시고 재림하신다는 소식입니다.철저하게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종말론적인 예수입니다.
2.복음의 의롭게 하는 능력 복음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역사적인 사건 이면서 능력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전해지는 곳마다 능력의 역사가 나타남을 사 도 바울은 보았습니다.또한 우리 믿는 사람들도 다 이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14년가 목회를 하면서 복음의 능력을 수없이 많이 보고 경험했습니다.죄를 이기는 능력,겸손해 지는 능력,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능력, 이런 것들을 매일 매일 시간시간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윤리강령이나 상식적으로 밖에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 닙니다. 복음을 능력으로 알고,그렇게 체험하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복음에는 세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은 과거의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죄첵으로부터 구원합니다. 둘째는 미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제 하는 종말적 구원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복음 이외에 어떤 것도 이런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셋째는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사는 생활 속에서 복음의 능력 을 경험하며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과 진노와 근심과 절망,이 모든 것으로부터 게속 구워 을 받습니다. 이상의 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의 소극적의미는 무엇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며, 복음의 적극적 의미는 영생이며, 복음의 현재적 의미는 승리입니다.즉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고통도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근심도 이깁니다.미움도 사랑 도 이깁니다.이런 것이 바로 복음으로 인한 승리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 하바국 2장 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의에 의한 의인과 둘째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인 의인입니다. 사도바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후자를 택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더 잘해석하며,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함과 같으니 라고 해야 합니다.(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해서는 안됨 아브라함이나,모세나,다윗이나 그 누구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자기 행위로서는 절대로 의롭게 될수가 없습니다.이것이 바울의 철저한 신학입니다. 그러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become과 justify는 서로 다릅니다. 이 말은 사실 우리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우리 말로는 칭의,또는 득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의인이란 뜻이 아니 고,의인이 된다는 뜻도 아니며,오직 의롭다함을 인정하고,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의롭다함이란 말은 영어로 justification이라고 하는데 이말은 바울 만 썼던 단 어로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66번 나옵니다.그리고 다른 곳에는 고전 6:11과 딛 3:7에서 사용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마틴루터를 비롯해서 종교 개혁자들은 justification by faith(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다)에 아주 운명을 걸고 철저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이것만이 복음이고, 또 복음을 설명하는 단어가 이것 뿐인것처럼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라틴 문화권의 사람 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고,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이해 할 수 있는 표현은 없 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 노예제도 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이해 하기가 곤란합니다.우리가 보지 못하고 말도 자주 듣지 못하 기 때문입니다.제사에 관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당시에 맞는 언어와 제도는 현재의 것과 대치되어 우리가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새롭게 쓰여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신학자들이 하고 목 회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 라고 말 합니다. 이 말은 의로워진다는 말도 아니고, 의인이 된다는 말도 아니며, 의인으로 만든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의인으로 취급된다, 혹은 의인으로 간주한다, 또는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절대로 의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죄인을 죄인이 아닌 것으로 인정하고,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받는 자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무자격자를 자격있는 자로 받아들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1. 법적인 선언입니다. 비록 내가 잘못한데가 있다 해도 여러가지를 참조해서 "이 사람은 의인이다"하 고 말하면 의인이 됩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를 하게 됩니다.이것을 믿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즉 분명한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다라고 판결이 나면 이제부터는 죄인이 아 닙니다.그러나 하나님이 죄인으로 인정하면 죄인입니다. "평생 의를 행해도 의인은 될수 없고, 죄는 한 번만 지어도 죄인이다"라는 유명 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열번 잘하다가도 한번 죄를 지으면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서 선언해 주시는 길 밖에 없습니다.하나님 은 예수를 조건으로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즉 예수를 믿는다는 조건으로 의인으 로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2.개선된 관계입니다. 개선된 새로운 관계는 두려워하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무자격자에서 자격있는 자로 여기는 관계로 개선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처녀가 결혼을 하면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 사람 자체가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어제와 오늘 똑 같은 사람이지만 달라진 것은 관계입니다. 전혀 모 르던 사람을 아버지,어머니라 부르고,전에는 남남이었던 사람을 사랑하는 남편으 로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이 새로운 관계가 바로 칭의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조건은 바로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정을 내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할 때에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대 답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들이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믿습니까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 니" 이렇게 믿음 만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행함의 반대 용어입니다. 행함으로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바로 십자가를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요,단순한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충족된 의로서의 하나님 자신이 지불한 댓가이며,하나님 자신의 희생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빚을 졌다고 합시다.빚이 많이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하는 말 이 "아, 안됐군요. 고생이 많습니다. 빚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시오!"하고 위로하고 많은 사랑을 표현하고 갔습니다.이런경우 동정과 위로와 사랑의 말로 근 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우선 돈을 주고,증서를 찾아 주면서 당시능다 걱정 말아요,내가 빚을 다 갚았 소하면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의롭다함의 댓가로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마틴루터는 이 본문을 해석할 때,"하나님의 의의 진노가 십자가 위에 일시에 꽝 하고 내려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될 때 예수께서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고 부르짖게 되었다고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의롭다함을 얻은 의인은 어떤 상태이냐는 것입니다.이 문제에 대해서 마틴루터가 제일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그래서 오직믿음으로만(sola fide) 란 말을 주제로 삼고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 냐하는 것이 루터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즉 계속적인 의인 이요,계속적인 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동시에 의인입니다. 즉 내가 나를 생각할 때에는 계속 죄인입니다.그러나,내가 십자가를 볼 때는 계 속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분 명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항상 십자가와 함 께 살고, 마지막 세사을 떠날 때도 십자가에 의지해서 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의를 내세워서는 안됩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의,주님의 십자가와 대결하려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정말로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 의 의를 무시하고 내세울 만한 자신이 있으신 분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보십시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내가 "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은 살리라
1.복음의 구원의 능력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승전가의 트럼펫을 부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첫마디가 승리를 선포하는 자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의 서론은 첫째 나이며, 둘째는 복음입니다.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복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남의 이야 기를 하는 것처럼 맥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복음에 대한 설명은 내생애,내 신앙의 간증으로 시작 되어야 합니다.내 가 믿는 예수,내가 믿는 복음,내가 경험한 복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말했고,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그런 희미한 내용을 가지 고는 복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로서가 아니라 나의 생활 속에서 나의 운명을 건 그러한 경험으로 복음은 설명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하고 자신이 믿는 복음을 시작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여기서 나와 복음의 관께를 말하고 있습니다.생생하고 뚜렷하 게 자기 신앙을 복음 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해방과 승리의 소식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자대로보면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그럼 기쁜소식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통신 수단이 아주 불편했습니 지금은 전보, 텔레비젼,팩스,전화,컴퓨 터 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2,000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 습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통신 수단은 불과 몇십년 안된 것입니다.옛날 에는 통신수단이 비둘기 봉화불 마라톤 등이었습니다.마라톤의 유래는 승리의 소 식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특히 군사적인 목적으로 어떤 소식을 전할 때, 위험을 피해 멀리 빨리 뛰는 훈 련을 하던 것이 마라톤과 그 밖의 운동경기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교통과 통신이 불편 할 때에는 아들과 남편들이 전쟁에 나가면 죽었는 지, 살았는지, 우리편이 이기는지 패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서너 달 씩 혹은 일 년씩 소식을 전혀 모른 채 기다리면 승리했을 경우 한 병사가 승전의 소식을 가지고 성위에 올라가 나팔을 불면,온 성의 사람들은 성 문 앞 광장에 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번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면,모든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릅니다. 바로 이 때에 전해지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전재에서 지면 노예가 되고 멸망하지만, 승리하면 자유인이요,더 큰 영토에 노 예를 부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소화합니다. 세상의 복음은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 식이자만 바울이 말한 복음은 예수의 소식입니다. 말씀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셨으며,동시에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부활하시며,승천하시고 재림하신다는 소식입니다.철저하게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종말론적인 예수입니다.
2.복음의 의롭게 하는 능력 복음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건만이 아닙니다.역사적인 사건 이면서 능력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전해지는 곳마다 능력의 역사가 나타남을 사 도 바울은 보았습니다.또한 우리 믿는 사람들도 다 이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14년가 목회를 하면서 복음의 능력을 수없이 많이 보고 경험했습니다.죄를 이기는 능력,겸손해 지는 능력, 죽은자를 살리는 능력,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능력, 이런 것들을 매일 매일 시간시간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윤리강령이나 상식적으로 밖에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 닙니다. 복음을 능력으로 알고,그렇게 체험하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복음에는 세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은 과거의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죄첵으로부터 구원합니다. 둘째는 미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제 하는 종말적 구원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복음 이외에 어떤 것도 이런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셋째는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사는 생활 속에서 복음의 능력 을 경험하며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과 진노와 근심과 절망,이 모든 것으로부터 게속 구워 을 받습니다. 이상의 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의 소극적의미는 무엇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며, 복음의 적극적 의미는 영생이며, 복음의 현재적 의미는 승리입니다.즉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고통도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근심도 이깁니다.미움도 사랑 도 이깁니다.이런 것이 바로 복음으로 인한 승리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7)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 하바국 2장 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의에 의한 의인과 둘째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인 의인입니다. 사도바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후자를 택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더 잘해석하며,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함과 같으니 라고 해야 합니다.(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해서는 안됨 아브라함이나,모세나,다윗이나 그 누구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자기 행위로서는 절대로 의롭게 될수가 없습니다.이것이 바울의 철저한 신학입니다. 그러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become과 justify는 서로 다릅니다. 이 말은 사실 우리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우리 말로는 칭의,또는 득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의인이란 뜻이 아니 고,의인이 된다는 뜻도 아니며,오직 의롭다함을 인정하고,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의롭다함이란 말은 영어로 justification이라고 하는데 이말은 바울 만 썼던 단 어로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66번 나옵니다.그리고 다른 곳에는 고전 6:11과 딛 3:7에서 사용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마틴루터를 비롯해서 종교 개혁자들은 justification by faith(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다)에 아주 운명을 걸고 철저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이것만이 복음이고, 또 복음을 설명하는 단어가 이것 뿐인것처럼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라틴 문화권의 사람 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고,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이해 할 수 있는 표현은 없 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 노예제도 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이해 하기가 곤란합니다.우리가 보지 못하고 말도 자주 듣지 못하 기 때문입니다.제사에 관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당시에 맞는 언어와 제도는 현재의 것과 대치되어 우리가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새롭게 쓰여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신학자들이 하고 목 회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은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 라고 말 합니다. 이 말은 의로워진다는 말도 아니고, 의인이 된다는 말도 아니며, 의인으로 만든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의인으로 취급된다, 혹은 의인으로 간주한다, 또는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절대로 의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죄인을 죄인이 아닌 것으로 인정하고,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받는 자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무자격자를 자격있는 자로 받아들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1. 법적인 선언입니다. 비록 내가 잘못한데가 있다 해도 여러가지를 참조해서 "이 사람은 의인이다"하 고 말하면 의인이 됩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를 하게 됩니다.이것을 믿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즉 분명한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다라고 판결이 나면 이제부터는 죄인이 아 닙니다.그러나 하나님이 죄인으로 인정하면 죄인입니다. "평생 의를 행해도 의인은 될수 없고, 죄는 한 번만 지어도 죄인이다"라는 유명 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열번 잘하다가도 한번 죄를 지으면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서 선언해 주시는 길 밖에 없습니다.하나님 은 예수를 조건으로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즉 예수를 믿는다는 조건으로 의인으 로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2.개선된 관계입니다. 개선된 새로운 관계는 두려워하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무자격자에서 자격있는 자로 여기는 관계로 개선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처녀가 결혼을 하면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 사람 자체가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어제와 오늘 똑 같은 사람이지만 달라진 것은 관계입니다. 전혀 모 르던 사람을 아버지,어머니라 부르고,전에는 남남이었던 사람을 사랑하는 남편으 로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이 새로운 관계가 바로 칭의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조건은 바로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정을 내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할 때에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대 답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들이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믿습니까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 니" 이렇게 믿음 만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행함의 반대 용어입니다. 행함으로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바로 십자가를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요,단순한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충족된 의로서의 하나님 자신이 지불한 댓가이며,하나님 자신의 희생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빚을 졌다고 합시다.빚이 많이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하는 말 이 "아, 안됐군요. 고생이 많습니다. 빚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시오!"하고 위로하고 많은 사랑을 표현하고 갔습니다.이런경우 동정과 위로와 사랑의 말로 근 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우선 돈을 주고,증서를 찾아 주면서 당시능다 걱정 말아요,내가 빚을 다 갚았 소하면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의롭다함의 댓가로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마틴루터는 이 본문을 해석할 때,"하나님의 의의 진노가 십자가 위에 일시에 꽝 하고 내려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될 때 예수께서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고 부르짖게 되었다고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의롭다함을 얻은 의인은 어떤 상태이냐는 것입니다.이 문제에 대해서 마틴루터가 제일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그래서 오직믿음으로만(sola fide) 란 말을 주제로 삼고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 냐하는 것이 루터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즉 계속적인 의인 이요,계속적인 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동시에 의인입니다. 즉 내가 나를 생각할 때에는 계속 죄인입니다.그러나,내가 십자가를 볼 때는 계 속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분 명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항상 십자가와 함 께 살고, 마지막 세사을 떠날 때도 십자가에 의지해서 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의를 내세워서는 안됩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의,주님의 십자가와 대결하려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정말로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 의 의를 무시하고 내세울 만한 자신이 있으신 분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보십시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내가 "라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은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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