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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인간 (고전9:14)

본문

복음의 무게를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복음과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근래 세상은 마지막 때임을 말해 주는 많은 징조들로 인하여, 즉 정치적인 혼란뿐 아니라 처처에 전쟁의 기운과 기근, 그리고 잇 달아 일어나고 있는 각종 대형 사고들로 인하여 극도의 어지러움을 겪고 있습니다. 가을 낙엽과도 같이 쉽게 떨어져 내린 여러 대의 비 행기 사고, 바닷물의 온도를 상승시킴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기상이 변을 초래하게끔 만드는 엘리뇨 현상,''엘리뇨 현상으로 인하여 지금 극지방에는 빙산이 계속적으로 녹고 있다고 함.'' 지구의 허파 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에서의 계속적인 불로 인한 밀림의 훼손 등등 지금 지구촌은 각종 재해와 기상이변으로 인해 극 도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한 조사기관의 보고에 의하면 내년에는 엘리뇨 현상으로 인하여 아시아 일대에 심각한 기상이변과 재난 이 초래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활을 하시다 보면 그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주님의 오심이 가까왔다는 징조로써 이 모든 것들이 바 로 우리로 하여금 지금은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임을 알려 주는 것들 인 것입니다. 이러한 난세(亂世)에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복음을 의지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귀함과 구원의 기회에 대한 감사함을 더욱 깊이 느껴 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음을 받은 자 들로서, 복음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 말씀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에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된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하나님의 일의 성취자 가 된다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 은 복음에 대한 책임감을 느낌으로써 그 복음을 책임져야 될 사람 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어깨에 지어진 복음의 무게 를 점점 가면 갈수록 더욱 깊게, 무겁게 느껴야 됩니다. 이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이 복음을 이루어 나아갈 증인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제 복음의 무게를 느끼십시다. 복음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복음을 위하여 인간은 누구나 다 무력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어 릴 적에는 성장과정을 통해 온갖 것을 배우고 경험하다가 장성한 자 가 되어서는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그러한 위치에 이르게 됩니다. 즉,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그러한 위치에 이 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사명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누구나 예외없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인간 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신 앙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명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뜻의 이룸, 즉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번에는 신앙인의 삶을 구원적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온갖 것을 배우고 체험함으로써 구원의 반석 위 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명적 의미도 있는데, 이 것을 특별히 구원적 측면에서 바라본 이유는 우리가 값없이 구원함 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값없이 구원(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으로 인하여 값없이 구원함을 받았기에 이 복음이 또 우리를 통하 여 값없이 남에게 전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적 측면은 우리 가 사랑의 이룸이라는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광이 자 위업입니다. 또한 복음을 이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 령을 이루는 것입니다. 잠시 복음과 인간과의 관계와 복음의 증인임 을 자초했던 사람들의 흔적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복음을 위하여 존재 한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고,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것은 절대진리입니다. 성경 말씀의 목적과 의미 자체를 한 마디 로 말하자면 "복음은 인간을 위하여 있고, 인간은 복음을 위하여 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복음)은 인간을 위하여 있고, 인간은 말씀(복음)을 위하여 있다. 이 절대적 가치관을 현실화시킨 사람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신의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바로에게 신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칭하였거든"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이유 도 바로 이러한 복음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를 위하여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 하여 있다."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위하여 있고, 인간은 복음을 위하여 있다."라는 이 말씀은 절대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절대적 가치관으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나 자신의 구원만을 위 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단순히 우리 자신의 구원적인 측면만으로 우리가 바라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명이 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값없이 구원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모든 자가 공유해야 하는 만인에게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값없이 전해져야만 됩니다. 복음과 인간이 하나되는 과정은 그 나라와 그 의의 회복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것은 신앙의 행위에 아주 절대적 기준이 됩니다. 복음과 인간이 하나되는 과정은 그 나라와 그 의의 회복을 이루는 과정이다. 여기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그 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룸의 주인공인 우리를 뜻합니다. 복음의 보편성 복음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은 어제 나 오늘이나 현실 속에서 real time으로 살아 움직이며 하나님을 증 거한다.'' 믿음의 선진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 신 이유도 믿음의 선진들이 이루었던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모든 자들이 다 같이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였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으로써 복음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내려주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받은 모든 자들이 다 그리스도 안 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격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복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운영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두 가지의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뜻의 성취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구원입니다. 여기서 뜻의 성취는 영광의 차원이며, 구원은 사랑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만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권리와 축복은 복음을 받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에게 주어진 과업이 또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정인을 위한 것 이 아니요,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그리스도의 복음은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수용의 틀이 넓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증인인 우리가 불신자들을 대할 때에 그 복음에 우리의 편견이나 사고가 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편견이나 사고가 복음에 섞이게 되면 복음의 보편성이 훼손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판단하는 위치가 아닌 사랑으로써 불신자들을 바라봐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의 보편성은 "방법적인 것을 다 동원해서 불신자들에게 접근해라."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의 보편성이 뜻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우리가 복음을 생각해야 됨을 의미합니다. 제가 복음의 절대적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보편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절대진리 에서 우리나 불신자나 똑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불신자나 우리나 다를 바 없는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과 생명의 구도를 확립하라."라고 말씀드리 고 싶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모 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우리가 진실의 우물을 파고 파 서 밑바닥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절대적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진실은 신앙의 틀 안에서만이 발견됩니다. 복음의 보편성이란 온갖 것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 니고, 복음의 개념을 축소시키기 위해서 보편성이란 말을 사용한 것 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복음을 생각해야 된다는 의 미에서 사용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 죽 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인이 다 함께 누릴 수 있는 복음을 전 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증인이 된 우리가 먼저 죽음과 생명의 구도 를 확립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될 때에는 우리 자신의 것이 전해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즉, 복음을 전할 때에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전해지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음과 생명의 구도의 틀을 확립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 을 전하는 입장에서 우리나 불신자나 모두가 다 주님 앞에 죽을 죄 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복음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이란 불신자들에게 방법적인 것을 다 동원해서 접근한 다는 그런 의미가 아닌 사랑이라는 넓은 수용의 틀로 접근한다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자기의 것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 가 알아야 될 것은 교회에 새신자들이 오거나 또 다른 교회의 성도 들이 타교회를 방문할 때 우리가 폐쇄적인 자세가 아닌 바른 자세로 그들을 맞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틀은 넓은 수용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 에게 접근해야 됩니다. 복음과 복음이라는 폐쇄적인 틀로서의 접근 은 참으로 어리석은 접근방법입니다. 잠시 복음의 특성을 구약과 신 약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본 복음적 특성 구약의 복음은 절대적이며, 특수성을 띱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복음 은 법이며(절대성), 인류 역사의 구원을 위한 원대한 계획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에 앞서서 준비된 역사였기(특수성)때문입니다. 구약의 복음은 법(절대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틀 안에 서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이며(특수성), 하나님의 법으로서 수용의 틀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의 수용의 틀 자체가 유한한 이유는 율법이 라는 틀 자체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약의 복음은 법이 아닌 사랑입니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긍휼로써 만인 에게 접근하는 보편성을 지닌 역사이기에 수용의 틀이 무한합니다. 복음에 보편성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 이기 때문에, 수용의 틀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죄인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사람에게도 사랑의 틀로 접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신앙인이나 불신자나 모 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렇 기 때문에 "우리가 유별나서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았다."가 아닌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나는 선민이야."라고 하 며 다른 민족보다 자기의 민족을 우월시했던 그러한 형태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구원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값없이 은혜로 받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받은 것이, 구원의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 이 아닙니다. 구원적 측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에게 값없 이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나는 구원받았어."라고 떠들만 한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사명을 이룰 그때 우리는 참으로 귀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구원적 측면에서 바라보 면 이것은 순수 사랑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되기 때문에, 값없이 와 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며, 결국은 여기서 복음의 보편성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은 수용의 틀이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신자나 다른 어떠한 사람을 대할 때에 그들 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편견이나 판단 이 복음에 섞이지 않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죽음 과 생명의 구도를 확립한 상태에서 불신자들에게 접근할 때 하나님 앞에 "네가 전도를 제대로 하고 있구나."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틀 안에서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구원의 틀 안에 있다 하지만 언제 주님을 배반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적 측면에서 절대진리, 즉 하나님은 절대적 생명의 가치이며,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가치임 을 바라보게 되면 사랑밖에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나 우리나 다 주님 앞에 죽을 죄인이니까 구원적 측면에서 자기 자신 을 바라보면 불쌍한 죄인인 자기자신을 값없이 구원해 주심을 깨닫 고 절로 사랑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사랑이 전해지는 역사, 이것이 바로 구원적 측면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그 위에 사명적 측면이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원하시는 역사, 이것은 사명적 측면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내가 특별나게 잘나서, 귀중해서 택함을 받은 것 이 아닙니다. 구약의 틀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준비의 과정의 틀 입니다. 즉, 구약은 하나님의 법을 확립시키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 시기 전에 인간의 육을 바로잡음으로써 영에서 풀리게 하는 그런 역 사를 대비케 하는 준비의 틀이란 것입니다. 신약의 틀은 인류역사 의 완성의 틀입니다. 복음과 인간은 하나이다.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 셨다.'', 마가복음 1장 1절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까지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생명의 빛은 우리의 빛,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은 땅에서 난 자였습니다. 육에다 생령을 넣음으로써 탄 생된 존재였기 때문에 육이 타락하자마자 이 생령이 죽음으로 인하 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체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 와가 사단의 꾀임에 빠져 타락한 까닭에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실패가 아닌가"라고도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 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요, 사단을 멸 망시키기 위한 계획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아담과 하와가 사단 의 꾀임을 받아 타락한 그 순간은 하나님의 역사의 실패의 순간이 아니라 사단을 멸망시키기 위한 계획의 시작의 순간이었다.'' 아담 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였기에 사단이 자기를 꾀었을 때에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둘째 아담은 이기는 영으로 오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담은 땅에서 나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신 분이 십니다. 땅에서 난 자와 하늘에서 난 자는 본질자체도 다르거니와 가지고 있는 것도 다름으로써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땅의 것을 가지고 창조한 아담에게는 그 안에 생령, 살아 있는 영을 넣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움직이게 하셨으나 하늘에서 난 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늘에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둘째 아담은 새로운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에게 넣어 주 신 것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나신 분으로서 본질자체도
첫째 아담과 다르거니와 그 안에 가지고 있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 대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 를 펼 칠 수 있으나 아담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 담은 나님이 창조하신 순리대로만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놓으셨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 나게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되었습니다. 둘째 아담은 피로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피는 영과 육을 압도 합니다. ''피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동질성을 의미한다.'' 영육을 압 도할 수 있는 영, 곧 성령님이 지금 우리 안에는 거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복음이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된 존재로서 지금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창조함을 받은 순리대로 살아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 순리는 깨졌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 말씀으로 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 자체가 우리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데 우리가 어찌 사단에게 질 수 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순리대 로 살아가게끔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 서 이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기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사람이 물과 성령님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물은 원래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의 그 근본적인 뜻과 계획과 섭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가 죄로 인하여 타 락한 우리 안에 어떻게 담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이 담길 수 없기에 피로써 자리를 만들어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물을 수용할 수 있게끔 해 주신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계획과 섭리를 의미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는 틀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동질성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물과 피로 하나된 상태에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담김으로 인해 서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복음(말씀)을 이루는 영으로서 성취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육 안에 생령을 담게 하신 것같이 새롭 게 창조함을 받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담기게끔 하셨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인간들이 말씀대로 쓰임 받게 하기 위해서 복음의 생명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먼저 피로써 말씀이 거할 자리 를 마련하신 다음에 말씀의 운동성인 성령님을 임하게끔 하셔서 우리 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는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 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성령님이 곧 복음이 며, 복음이 우리와 하나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에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 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뜻합니다. 왜 우리가 첫 열매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서 하나님 앞 에 유업을 달성하는 그 목적을 받은 자가 바로 성령님을 받은 우리이 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첫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유업의 달성은 성령님을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첫 열 매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에 기록된 "첫 열매가 되게 하 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복음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복음으로 태어 났다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만인을 향해 사랑으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 게 하신 그 목적 자체를 사명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한 몸을 복음을 위해서 던져야 된다는 답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말은 "말씀(복음)으로 새롭게 창조함을 받았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순리대로 살아가게끔 창조된 생명체가 아 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운동성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는 역사, 성취하는 역사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단 순히 순리대로 움직이는 역사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이루는 역사입니다.
디모데 후서 1장 10절에는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 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망을 압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복음 안에,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 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린도 전서 9:14116)" 복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될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신약은 복음의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는 선민이야"라고 큰소리치며 말하는 그런 입장이 아닙니다. 복음을 보편성의 입장에서 바라보아 야 함은 인간 자체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죽음과 생명의 구도 앞에 서 죽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받은 구원이 기에 구원적 측면에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를 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가 구원함 을 받았으니 당신도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라고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신자나 우리나 모두가 다 죄인이기에 "우리는 다 천당갈 사람이고 너희들은 다 지옥갈 사람들이니까 정신좀차려라. "라고 야단칠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전도를 이런 식 으로 했었습니까 전도할 때는 자기의 것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상(賞)의 의미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린도전서 9:17118)" 바울이 말하는 "상"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의 의미를 천국의 보화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이 굳건해지고, 또 자신 이 더욱더 구원으로서 다져진다는 것을 발견했기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도는 자신의 신 앙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행위는 참으로 신성하고 귀한 행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는 것이 "상"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처럼 위대한 영광은 없습니다.
"…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 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다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같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또한 복음의 증인으로서 많은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배설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 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에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인 것입니다. 결국 진리 위의 사랑, 그 위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상"의 의미가 단순히 천국의 보화만을 바라보고 투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가치적인 면에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봉 사의 권리를 놓고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바라보 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수 가치의 정점을 바라보는 사람 은 바울처럼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 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 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값없 이 전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같은 권리가 없어서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 묶인 자요, 매인 바 된 자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한 그 안에서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절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 안에 묶여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상"인 것이다. "상"의 의미를 꼭 천국의 보화를 바라보고 투자하는 그런 개념으로 생각지 마시고 복음을 위해서 쓰임 받는 그 자체가 "상"임을 깨달으 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 라.(고린도전서 9:23)"'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을 사명적 측면과 구원적 측면 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구원적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진리의 구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기에 사랑만 나와야 된다. 즉, 수용의 틀을 무한히 하여 모든 자에게 끊임없이 긍휼로써 접 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은 만인에게 주어진 빛이며 높 이 들리워진 빛이기 때문에 만인이 보고 만인이 쬐임을 받을 수 있다. 구원적 측면에서 복음은 보편성을 지닌다. 우리가 복음을 전 할 때 우리 자신의 편견이나 사고가 복음에 섞이게 되면 복음의 역 사의 보편성 자체에 훼손을 초래한다. 사명적 측면에서 생각하면 복음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 것 같 이 복된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상"인 것이다. 나를 구원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 루어진다고 하니 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인가 복음은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간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모세가 바울에게 신이라 칭 함을 받은 수 있었던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 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 하였거든"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복음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은 절대적인 법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틀 안에서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이며, 유 한한 수용의 틀을 가진다. 그러나 신약은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공 유하는 것이며, 보편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긍휼로써 만인에게 접근 하는 역사로서 수용의 틀이 무한하다. 우리는 피로써 새롭게 창조함 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로써 우리를 새롭게 낳으셨다. 피는 우리의 영과 육을 압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 육 안에 생령을 담으신 것같이 피 안에 성령님을 담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 피 안에 하나님의 동질성이 흐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동질성을 만드는 그 피 안에 성령님을 집어넣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다시 진흙으로 빚어서 우리 육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요, 피로써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 피가 영육을 압도한다. 육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성화의 전부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 을 이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앙의 역사 자체의 끝도 그것 이 아니지만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 을 죄인이기 때문에 끝까지 긍휼만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 의 뜻을 이루어 가는 역사,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장 1절 1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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