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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의 복음 (행13:24-41)

본문

본문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에 설교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나 7장의 스데반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긴 설교를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중심 내용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언제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의 사건으로, 혹은 옛날 이야기로, 혹은 어떤 지식을 제공하자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사건과 우리의 생명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가 오시고 저가 죽으셨다--이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며,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라고 구원을 주제로, 구원을 설교의 목적으로 하여 설파하고 있습니다.
무릇 모든 설교가 다 그러합니다. 반드시 설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설교의 주제는 구원입니다.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 목적이요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 설교에 걸쳐 역사적 사실 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코 어떤 추상적인 진리나 그가 깨달은 어떤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가 통했다든가 우주적인 이치를 발견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저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요, 저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을 다시 간추려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역사는 알고 있는데 그 뜻은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역사 이해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예언자의 이런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 그들을 40년이나 광야에 두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출애굽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자는 것이냐, 그 말씀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말하는 구속사적 의미, 그것의 현재적 의미, 어쩌면 영원한 의미,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말하면 역사적 사건을 Christian View,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관찰하는 것이요, 좀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적 역사 의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사건을 바로 이해하자, 그래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 사건 안에서 성서적 증거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하신다,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 사건을 계시로 받아야 한다--이것을 깨우쳐줍니다. 옛날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설교 방향이요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옛날 스토아 철학에서는 역사는 하나의 원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Cycle line이라고 했어요. 불교에서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역사를 둥글게 보는 것입니다. 윤회적 사건으로, 돌고 도는 것이라고 봅니다. 흥망성쇠라는 것도 돌고 도는 것이다--아닌게아니라 그럴싸해요.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많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엊그제의 원수가 오늘은 우방이 아닙니까? 저는 특별히 옛날에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625때 전쟁에 나가 총 좀 쏘았거든요. 중공군하고 마주서서 총을 쏘아보았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중국을 오갑니다. 중국에 가서 천안문 광장에 서보니 기분이 이상합디다. 또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가서 서보니 또 어떻습니까? 역사가 이렇게 바뀝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우방이 되고, 오늘의 우방이 내일은 원수가 되며, 어제 잘살던 나라가 오늘은 비참해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 비참해진 나라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땅히 뭔가를 깨달아야지요.
옛날의 그 찬란했던 문화가 이제는 고고학적 자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로마는 망했고, 왜 베르사이유궁은 망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시황은 무엇을 생각하며 죽었을까요?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역시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돌고 도는 것은 순간입니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무한히 도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는 사이클 라인이 아닙니다. 직선적입니다.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듯이 환생을 한다느니 전생이 어떻고 후생이 어떻고 하는 것은 생각이지 성경말씀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전생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요. 시작도 끝도, 알파와 오메가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의식에는 창조, 섭리, 심판이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항상 바르게 계시해주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이런 차원에 다시한번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예언한 바에 대한 성취로 나타납니다. 예언은 있고 성취가 없다면 그 예언은 바람맞은 것입니다. 요사이 보아하면 예언하는 사람은 많은데 성취가 없어요. 이렇다저렇다 많이들 예언하는 것 같은데 맞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지나간 일은 곧잘 맞추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것은 안맞아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취가 있어야 예언이 예언입니다. 성취를 지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취가 사건으로,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야만 그 예언의 예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성취(fulfilment)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서 구약성경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예표가 있습니다. 미리 보여준 표가 있어요. 제사가 있지요, 성전이 있지요, 예배, 제사드리는 의식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등대가 있고 제단이 있고 제물이 있고 제사 음식이 있어요. 상징들입니다. 예표입니다. 예표에는 실재가 있어요. 실재가 없는 예표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점을 잃은 역사 의식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상징이 있습니다. 상징에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이 있어야 상징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반지라는 것이 사랑의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이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보면서 아, 그거 좋구나, 나도 하나 사서 껴야겠다--이러면 됩니까?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은 준 사람이 있고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준 사람이 없는 결혼반지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한낱 백화점 상품에 지나지 않아요. 누가 주었느냐--그 실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야 그것을 담은 상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없다면 그 많은 상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림자라는 것은 본체가 있어요. 본체 없는 그림자는 환상일 뿐입니다. 안식일이라든가 율법이라든가 시내 산 이야기 같은 것이 전부 그림자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그림자입니다. 가나안땅이 그림자입니다. 요단강이 그림자입니다. '요단강'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은 어디까지나 그림자입니다.
그 실재는, 그 본체는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한 그림자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그 모든 그림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본체가 있습니다. 본체 없이 그림자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사도 바울이 깨닫고 증거하는 바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쳐보았지만 이 율법, 이 구약, 이 예언, 이 상징, 이 예표, 이 그림자가 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율법을 하는 유대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이렇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서 이런 결론을 얻게 됩니다. 26절 말씀--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구원의 말씀'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말씀(호 로고스 테스 소테리아스 타우테스)--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로고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말은 옛날에는 '도(道)'라고도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로고스'라는 말은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냥 '사랑'이라고 해도 되지마는 좀더 확실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아가페'라고 합니다. 헬라말이지만 아가페라는 이 말도 괜찮은 말입니다. 일반적인 사랑 mK이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을 말할 때에는 아가페라고 하는데 참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말씀이라는 말로 쓰기는 쓰지만 특수한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사도 바울은 '로고스'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엔 아르케 엔호 로고스'라고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사도 요한은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육체를 입어서 세상에 오신 예수, 육체를 입어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가 예수이고, 육체를 입기 전의 예수, 선재하신 예수 그가 로고스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말씀'이라고 표현했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 말씀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요한이 신학적으로 여기서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점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로고스'라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로고스다'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수를 보는 신학적 고백입니다. 이것은 헬라철학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개념은 다릅니다.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는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입니다. 역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을 강해할 때에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로고스는 창조주 로고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로고스입니다. 헬라철학의 로고스와 완연히 다른 것입니다. '이 구원의 말씀을' 보내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는 잘 통하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적절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적절합니다. 그들에게 쓰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헬라사람들에게 쓰일 때는 '로고스'입니다.

O-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기피했느냐--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헬라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신도 왕도, 좀 훌륭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헬라사람들에게는 신의 아들이라는 말은 범상한 얘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서는 그 표현이 적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로고스'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자, 이제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본체되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내셨고, 오셨고, 육신을 입으셨고, 이 땅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이 긴 이야기를 딱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렸다--바울은 이렇듯 슬프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거기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희미하게 듣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언하는대로 이렇게 귀하신 분이 오셨는데, 구원을 위하여 오셨는데, 저들은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큰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큰 사건이 예루살렘에 나타났습니다. 27절에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예리하고 총명하게 이를 설명합 mK니다. '알지 못하므로(27절)'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무식이 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그것은 다 무식해서입니다. 요새도 보면 어른들은 그저 잔소리가 입에 붙어서 학생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지만, 공부는 스스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왜요? 공부 안하면 장차 얼마나 비참해진다는 것을 알면 공부 안하겠습니까?
그런데 공부하라고 듣기는 들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 실감이 나느냐, 돋보기 안경을 써야 실감이 납니다. 그러니 문제이지요. 그 때에 가서야 '옛날에 좀더 열심히 할 걸'하고 후회합니다. 또 요새 보니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합니다. 좀 수월하게 여행하려면 영어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의사소통이라도 조금 되어야 할 터인데, 이거 뭐, '헬로' 한마디밖에 못하니 죽을 지경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대학은 나왔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했는데 '헬로'밖에 못합니까?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에 열심히 좀 해둘 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에야 영어학원에 가봐야 소용없어요. 결국은 공부 안하는 것도 다 무식한 소치입니다. 똑똑한 것 같지만 완전히 무식한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모든 죄가 다 그렇습니다. 모든 실수가 다 그렇습니다. 모든 가난이 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가끔 사회적인 문제도 무식한 소치로 생깁니다. 이게 이렇게 되면 망한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왜 하겠습니까? 결국은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무식하니 좀 봐주세요, 그런 얘기 아닙니까? 몰라서 그런 짓 하는 것이지 알고야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후로 예루살렘은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루살렘궁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말입니다. 그럴 줄 알았더면 죄를 지었겠습니까? 몰라서 그렇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정말입니다. 지식이 없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꽤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한번 본문 27절을 읽어봅시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난센스가 아닙니까? 안식일마다 외는 말을 몰랐다 합니다. 외기는 곧잘 하는데 뜻을 모릅니다. 성경은 많이 외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는대로, 우리 교회에서는 성경 암송대회니, 성경 많이 외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별로 안합니다. 외면 뭘합니까? 뜻도 모르는 것을요. 안그렇습니까? 한 절을 알아도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외는 게 능사입니까? 그저 달달달 외는 것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저는 연전에 정말 놀라운 사람을 보았습니다. 성경을 신약성경은 다 외고, 시편과 잠언을 다 외웁니다. 줄줄 외어요. 제가 시험을 보게 했는데, 과연 줄줄 외어요. 20곳을 체크했는데 전부가 맞아요. 컴퓨터도 키보드를 눌러야 내용이 나오지요.
그런데 이 경우는 누르지 않아도 절로 나옵니다. 기가막히게 머리가 좋은 것입니다. 전과 7범으로 안양교도소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기는 외는데 뜻을 모릅니다. 외는 게 능사가 아니예요. 물론 외어야지요. 본문에 보니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성경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합니다. 이 아니 난센스입니까? 성경공부는 그렇게 많이 하는데 행동은 그 모양입니다.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의 성경 H&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성경을 외웁니다. 성경책은 회당에만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외는 것이라고 다 외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의 우리처럼 자유롭게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잘 외는데 뜻을 몰랐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모름지기 우리는 성경을 보고, 공부하고, 외고, 많이 읽기도 해야겠지만 뜻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야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바로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당신들은 성경을 모르고 예수도 모릅니다. 성경을 외면서도 뜻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또한 인간의 잔학성, 죄악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성이 십자가 사건에 표출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 있습니까?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까? 본문에 사도 바울이 증거합니다. 빌라도는 죄가 없음을 알았다,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저들이 죽여달라고 했다, 합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죄인도 아니요,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래, 하나님의 아들을 죽입니까? 메시야를 죽입니까? 정 메시야라는 것을 모르겠으면 '당분간 좀 두고 봅시다'라고 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기어이 당장 죽여달라고 소리를 지릅니까? 사람들이 어찌 그리 잔인합니까? 인간의 잔학성이 그대로 십자가 사건에 표출된 것입니다. 가야바나 바리새인들이 남보다 특별히 잘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이 성경 전문가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죄악성이 그대로 여기서 표출됩니다.
그리고나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신학을 전개합니다. 이 사건 속에 -서 하나님은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언한 성경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내려오시는 순간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또한 내가 이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열두 영(營)도 더 되는 천사가 내려와서 다 진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에 그렇게 하면 이 일은 있으리라고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십니다. 결국은 잔학한 행위, 이 무서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보다 높은 곳에 있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큰 역사가 여기에 나타났다, 초월적인 역사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 사실을 역사 중심에 두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썩지 아니할 자를 예언합니다. '다윗은 죽어 썩어 무덤에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다. 이것은 다윗이 미리 예언한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감을 받아서 예언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합니다. 죽음과 부활이 바울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살고, 죄로 죽고 죄사함받는 역사로 삽니다. 죄로 죽고 은혜로 사는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 속에서 확정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죄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씀하는 바 골자입니다.
오늘의 본문 39절에서 사도 바울은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자, 이것이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첫번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니라'--이것이 다음의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됩니다. 바울은 첫 설교부터 시작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하는 것을 주제로 내놓습니다. 모세의 율법, 그것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도덕적인 법과 제사법으로 나누어집니다. 도덕적인 법의 죄값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이룰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결론적으로 죽이는 법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제사를 지내서 사함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예표를 만들어 주시고, 상징을 만들어주시고, 예언적인 사건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본체는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것은 순간적이고 찰나적이고 그림자적입니다. 본체가 아닙니다.
이제 예수의 사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죄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의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다는 말입니다. 내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시고 자기 의로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옷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덮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약속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경고를 합니다. 40절에 보니,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합니다. '삼가라'-예언 fD의 말씀 속에 보면, 복음은 전해지고 구원은 받겠지만 그 복음을 멸시해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전해진다고 다 구원받는 게 아니요, 다 믿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해질 때에 믿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고, 완악한 마음이 있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다, 그런고로 너희는 삼가라, 혹이라도 그 은혜에 미치지 못할까 조심하라,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꿈에 하늘나라에 갔답니다.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딱 섰는데 하나님께서 심문을 하시더랍니다. '너는 일평생 항상 진실하게 살았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못살았습니다.' '깨끗하게 살았느냐?'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정직하게 살았느냐?' '정직하지도 못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제는 틀렸구나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내심 지옥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연 광채가 비추이더니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이 사람은 진실하지도 못하고 깨끗하지도 못하고 정직하지도 못했습니다.
전부 그대로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믿었고, 내가 저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쳤습니다. 제가 저 사람을 변호하겠습니다.' 그럴 때에 하늘문이 활짝 열리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보니 꿈이더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해버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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