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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력 (눅22:54-62)

본문

배는 복원력이 있어서 뒤집히지 않는 다고 합니다. 정서가 안정 된 사람은 복원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도 복원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낼 때, 브레이크 없는 차 같 이 질주하면서 화를 냅니다. 언제 멎을 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분은 죄를 지을 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 같이 죄 를 짓습니다. 언제 멎을 지 모릅니다. 성숙한 사람은 복원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복원력이 강한 배는 45도 가량 기울어도 본래 모습대로 되돌아옵니다.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거장들은 복원력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실 패자들은 복원력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실패 장면입니다. 수제자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 을 갔습니다. (마26:56, 막14:51) 마가는 한 젊은 제자가 알몸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상황이 급박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멀찍이서 나마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점이 그래도 수제자로서의 체면을 사렸지요. "예수를 잡 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54절)
그런데 보세요. 멀찍이서 따라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장 무서 운 예수 일당으로 모는 겁니다.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 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 느니라 하니"(56절) 예수와 함께 다니는 걸 봤다는 겁니다. 한 발걸음 더 나가 이제는 아예 구체적인 증거까지 잡았다는 눈치입니다. "한 시쯤 있다가 또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 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9절) 최근에 이영희 선생이 한겨레 신문에 '못다 이룬 귀향'이란 자신 의 인생역정을 기고했습니다. 1964년 박정권이 군사 구테타를 하 고 반공을 국시로 삼고 엄청난 탄압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 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가 밤중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인데, 신 문조서에 보니 "북한에 있는 친척'이라는 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자 갑자기, 남북 이산 가족 친척 일당 공작원, 고정간첩 일망타진' 뭐 이런 글귀가 눈앞을 스치더란 거지요. 그렇지 않아 도 비딱하게 보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데, 가족 난 에 주절주절 썼더라면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려 종신형을 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해져서, 무조건 "없음"이라고 똑똑하 게 썼다는 거지요. 그 이후 30년 동안 조사를 받을 때마다, 북한 에 네 분의 형님과 누님이 있는데도 '매번 없음"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지성인이니 소신이니 뭐 이런 것 다 도망가고, 그저 살아 야겠다는 생각만 나는 거지요.
오늘 베드로도 똑 같은 상황입니다. 예수가 체포되던 당시 서슬 퍼런 권력이 예수 일당이면 무조건 잡아들이려는 그런 시절이었 습니다. 갈릴리 출신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릴 형편입니다. 유대 북부 지방인 갈릴리 사람들은 잘 사투리가 섞여 있어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투리는 히읏발음(후음)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금방 갈릴리 출신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9절) 이제 여기서부터 베드로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30년 동안 거짓말을 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듯이, 베드로 도 엉겁결에 시작한 부인이 이제는 맹세와 저주로까지 발전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보고는 베드로의 실패라 하고, 가룟 유다 보고는 가룟 유다의 배반과 죄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베드로도 가룟 유다 못지 않게 죽을죄를 지은 것입니다. 베드로 의 죄를 한번 보세요. 그 죄가 얼마가 엄청난 것인지. 과연 가룟 유다 보다 가벼운 죄인지.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 라' 하더라" (57절)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60절) 일관되게 세 번씩이나 확인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평 소에 주님을 부를 때에, 랍비, 선생님,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그를' '그 사람'(마26:72)으로 부릅니다. 이게 예수 팔 아먹은 거 하고 뭐가 다릅니까 한 술 더 떠서 예수 모른다고 맹 세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합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하니 닭이 곧 울더라 " (마26:74) 마태 복음에서는 예수를 저주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유대인의 맹세는 '만약 에 내가 거짓 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주를 내리 시고 또 저주를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맹세코 예수라는 자를 내가 모른다고 합니다. 저주는 이 보다 더 강도가 셉니다. 보복하거나 징벌할 때 저주를 퍼붓습니다. 살인자에게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창4:11) 예수를 극악 무도한 살인자쯤으로 매도하고 욕을 하는 겁니다. 저 혼자 살자고, 스승을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저주하고 욕을 해 댑니다. 이게 예수 팔아먹은 가룟 유다하고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래도 가룟 유다는 아예 예수를 배반할 마음을 먹고, 깨끗하게 적과 내통하면서 팔아 버렸습니다. 처음과 끝이 똑 같습니다. 시 세말로 사나이답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수를 사랑한다고 하 면서 저주합니다. 체포당한 예수님 근처에 얼씬거리며, 나라도 지 켜봐야지. 나라도 주님을 버리지 말아야지. 이렇게 맘먹고 나선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다가 윽박지르니까, 그 작은 협박에 180도 로 맘을 돌려 저주하고 욕을 퍼부어 대는 겁니다. 정말 끔찍한 인간성의 파탄입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똑 같이 침몰했습니다. 하나도 다를게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원력에 있었습니다. 자 보세요. 베드로의 전환과 복원력을! 누가는 아주 세밀하게 관 찰을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은 다 놓쳤던 장면중의 하 나입니다. "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 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60절) "그때에 예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다"(공동 번역,61절) "네가 지금 갈릴리 사투리니 예수 일당이니 뭐 그런 말을 하는 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고, 아닌 밤에 홍두깨지 무슨 소린지 당채 모르겠네 정말!" 이렇게 딱 잡아떼고 예수를 저주까지 하던 그 때에,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몸을 뒤로 돌려 베드로를 똑 바로 쳐다봤다는 것입니다. 닭은 세 번 울고, 예수는 체포되어 결박 지 어진 몸으로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 참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예수께서 그 처참한 꼴을 직접 보시지 않았다면, 그 래도 체면에 좀 설 텐데, 그 맹세, 그 저주 다 들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눈동자가 베드로를 깨운 것입니다. 누가 기자는 닭이 울자 베드로가 목놓아 울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뒤돌아보시자 말씀이 생각나 울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예수님의 눈초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인간이 어째 저렇게 생겼 나, 이런 동정의 눈빛이었을까요 분노에 가득찬 노기 어린 눈빛 이었을까요 너무 불쌍해 울음섞인 눈빛이었을까요 어쨋든 베 드로는 이 예수님의 그 눈빛을 보고는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망 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듯,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천둥처럼 울렸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부인을 해댈 수가 없 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를 저주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우리는 범죄에 빠질 때, 밖으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그 냥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아서 계속 범죄의 강도를 높여 가서는 안 됩니다. 바다에 배가 떠 있다고 해 보세요. 처음에는 작은 파도에 작은 움직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복원력이 없으면, 계속되는 작은 파도에 배는 점점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부인에서 배반으로, 배반에서 맹세로, 맹세에서 저주로 침몰의 깊이는 더 깊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될 수는 없지요. 파도가 치면 치는 대 로 그대로 다 당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뛰쳐나가야 합니다. 범죄의 자리를, 범죄의 환경을 뛰쳐나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 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1-62절) 누가 기자의 표현이 제일 강렬합니다.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합니다. 아프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 뼈아픈 통곡이 베드로를 복원 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질 때, 실패 할 때, 이 통곡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아픈 통곡이 바로 복원력을 일으킵니다. 실패의 순간에 , 죄악의 순간에 우리는 목놓아 울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상한 심령으로 목놓아 울어야 합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고 상한 심령 으로 목놓아 울면, 주님의 긍휼과 사랑이 몰려옵니다. 복원력이 생기깁니다. 때문에 복원력은 무릎에서 나옵니다. 복원력은 상한 심령에서 나옵니다. 복원력은 통곡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오도록 했 습니다. 맨 처음 천사는 금덩어리를 찾다가 "아니야, 이런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있어." 하고 버렸습니다. 다이아 몬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천국에는 많았습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바칠 귀중한 물건을 찾느라 세상을 두루 살폈지만 안타깝게 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죄인의 울부짖 음이 들렸습니다. 살그머니 가서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죄로부터 구해 주신 하나님께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옳지, 이제야 찾았다!" 천사는 금으로 만든 상자에 다 눈물 방울을 담아 하늘로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가 장 귀한 것을 찾아 왔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통곡의 기도입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2절) 이것입니다. 베드로의 통곡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통곡이 복원 력을 일으킨 것입니다. 베드로의 복원의 발단은 예수님의 눈초리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 니면,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닭울음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의 직접적인 모습이든, 징조나 싸인이든 침몰하는 배를 복원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주님의 눈초리든, 주님의 말씀이 든 다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베드로는 복원력을 발휘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 이 아닙니다. 주님의 모습, 주님의 말씀이 결정적인 침몰의 순간 에 생각이 나야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합니다. 가득!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어설프게 채우고 있 으면 희미하게 복원력을 발휘할 뿐입니다. 더 험한 파도를 만난 배는 더 큰 복원력을 가지고 있어야 안전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가득 채워야합니다. 말씀의 사람, 말씀의 사람, 가득 찬 말씀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이 복원의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복원력이 없 었던 것이지요. 말씀이 생각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회개도 없었습니다. 잘못 한 줄을 알았지만, 회개할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알았을 뿐 만 아니라,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알고 목매달아 죽음으로서 침몰했지요. 이렇게 아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는 생명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가장 강한 자는 복원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복원력은 무릎을 꿇을 때 나옵니다. 죄에 대한 처절한 회개,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이게 하나님의 사람 을 복원시킵니다. 때문에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원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의 강자라도 신앙의 파도는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 치고, 실패의 파도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믿음의 복원력입니다. 파도를 맞지 않고 서는 항해할 수 없습니다. '가장 고요하려면 시체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체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파도 를 만납니다. 먼바다로 나갈수록 파도는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원력을 가진 배라면 기우뚱하기는 하지만 침몰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복원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직도 죄의 파도를 만나 좌초할 것 같습니까 아직도 작은 파도에도 뒤뚱거리고 침 몰 위기까지 갑니까 참된 복원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와 통곡하며, 예 전의 베드로로 회복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복원력이 있습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꿋꿋이 항해해 나갑니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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