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시1:1-6)
본문
우리 문화는 복 에 대하여 말할 때 대개 도덕성과 결부시키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다든지, 사업이 잘 된다던가, 자녀가 휼륭 하다든지 하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결과만 좋으면 그 과정이나 수단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는 복 은 늘 도덕성을 가 진 개념을 사용됩니다. 복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악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 악과 복은 동시에 누릴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편 1편은 악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대표 적인 성경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든 말든, 인간이 플라스틱 백처럼 소모되든 말든, 다른 사람이 다치든 말든, 원칙을 깨뜨리든 말든, 내가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소기의 목 적을 달성하면 곧 그것이 나에게 복을 갖다주는 것이라는 풍조가 팽배한 현대인에게 시편 1편은 하나의 경종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말씀은 마치 X선 광선처럼 작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을 얻으려는 현대인의 허구성을 우리에게 다음 내용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의 삶(1:1-3) 가, 복 있는 삶은 불의를 거부함으로써 시작됩니다(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 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삶은 악이나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자 재로 선을 택하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삶이 곧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정을 거부하고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의를 거부하고 공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불의에 속한 사람은 다릅니다. 불의에 속한 사람은 불의의 노예입니다. 불의의 노예가 된 사람은 선을 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자유(요8:36) 를 모르고 사는 사람 들입니다. 불의의 노예가 되어 참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을 누리 지 못합니다. 복을 누리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삶이 악화되는 과정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악인의 행실의 악화 악인은 그 행위가 갈수록 악화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악인의 행실을 설명하며 꾀 길 및 자리 등을 말씀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 시문의 성격으로 보아 단순한 동의어로 불 수 도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모두 악인의 행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단어들은 악인의 행 실이 어떻게 악화되어 가고 있는 가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악인이 처음에는 악한 꾀 를 좇아 행합니다. 꾀는 숨겨진 것들로 비밀리에 이행하는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 성경 에는 잘 나와 있지 않으나 히브리 원어에는 이런 꾀를 좇아가는 사람을 꾀를 좇아 걷는다(달라 크) 라고 1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처음 악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주로 비밀리에 악한 꾀를 좇 아 걷기 시작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천천히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악한 꾀 를 좇아 걷게 되면 그 다음 그 길 에 서서 공공연히 죄를 짓는 자리에까지 가게 됩니다. 이를 자리 에 앉는다는 말로 시편 기자는 표시했습니다. 따라서 악을 택하는 사람은 악의 노 예가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행실이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런 길을 거부합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재물과 명예를 준다 해도 그것이 도덕 적으로 내리막길을 가는 것이라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는 이와 같이 도 덕적으로 내리막길을 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더 사모하는 사람들을 어느 때보 다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업가가 그와 같은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한다고 합시다. 그는 내리막 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고 피고용인들에게 복 을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반면에 피고 용인은 일하는 동안 내리막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고 사업체의 번영을 위하여 땀을 흘리며 일할 것입니다. 결국 내리막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는 의사들, 교육자들, 정치인들, 사업인들,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국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인격의 타락 악인은 그 행실만 악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그 인격까지 타락됩니다. 시편 기 자는 악인 , 죄인 및 오만한 자 라는 말로써 도덕적으로 내리막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설명했 습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히브리 시문의 반복법(평형법)에 따라서 악한 사람들을 여러번 반복해서 언급했다고 보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단어들이 악한 상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동의 어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의미로 보아서는 강한 데서 더 악한 데로 발전되어 가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악인 은 거짓된 자, 불의한 자, 정함이 없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인 은 하나님의 의의 과녁 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소돔 사람의 악함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 습니다(창13:3). 이는 적극적으로,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에 오만한 자는 공개적으로 악을 공공연하게 행하는 자를 설명할 때 쓰인 말임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잠21:24).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고, 아무리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아무리 많은 명예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인격이 악하고,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교만이 넘쳐흘러서 오만함을 나타내게 될 때 성경은 그 가 복 없는 자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는 언제 악을 행할지 모르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차지해야 할 마음의 공허를 메우기 위하여 하나님 이외 다른 우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활은 성경에서 말 하는 복 있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세
상은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서 이를 행복한 삶이라고 외치 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기준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으십니다. 그리고 어느 날 공의를 실현시키실 때 가차없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 복 있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체험될 수 있습니다(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에서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삶을 악으로부터 떠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2절에서는 그는 복 있는 삶을 여호와의 율법 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왜 그는 여호와의 율법과 복 있는 삶을 결 부시켰을까요 대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 하면 복과 결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 속박, 또는 정죄 하는 요소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세히 따져볼 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율법은 율법서(토라)를 의미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계명들이 되고 넒은 의미로는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들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항도 있으나 오히려 자유케 해주시고 복을 주시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율법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도 알려 주십니다. 복된 삶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 이에 순종할 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길로 들어서지 않고, 율법을 통하 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은 삶은 물론 거룩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했던 삶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복된 삶을 지금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성품이 변화하여 여호와의 뜻을 순종할 수 있을까요 시편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처 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1.여호와의 율법서를 즐거워하라 율법서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우리의 속사람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그 하나님의 뜻에 회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 인격이 율법서를 즐거워한다면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왜 즐겁지 않겠습니까
2.여호와의 율법서를 주야로 묵상하라. 저속한 잡지의 내용들을 자신의 머리 속에 채우는 사람들은 저속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율법서를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율법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중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뜻을 좇아 살아가기 를 원하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서를 즐거 워하지 않고 묵상하기도 거부하는 복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잠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비록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함으로 그 뜻대로 생활하여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만일 내 삶의 패턴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나와서 당신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후자의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도움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시3:5).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다. 복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실을 맺음으로써 입증됩니다(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나무의 종류에는 열매가 열리는 것도 있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 드시 둘 중에 한 가지 열매를 맺고 삽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열매이든 육신의 열매이든 열매를 반 드시 맺게 마련입니다(갈5:19_23).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공급원이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무가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서 사시사철 싱싱하게 자라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우리 인격의 뿌리를 내리면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은 최소한도 다음 세 가지를 나타내게 됩니다.
1.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단지 한 계절에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시사철 다 열립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한두 개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풍성히 열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복된 생활입니까 기쁠 때만, 축복 받았을 때만, Q.T할 때만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 전반을 통하여 열매가 열리는 생활은 실로 복된 생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삶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2.약동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나무의 경우, 풍성한 열매가 열릴 때 그 줄기나 잎도 같이 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공급원이 될 때 열매만 열리지 않고 나의 인격 자체도 성숙하게 됩니다.
3.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있습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도 중요하나 그 나무가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안정성을 갖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여호와께로부터 그 양분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어떤 세파에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강인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가 한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신서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복된 삶은 여호와께 우리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풍성한 열매와 약동하는 생명력과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나타날 때 입증됩니다. 그런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라고 시편 기자는 요약했습니다. 앤더슨이라는 구약 주석 가는 이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 을 의미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삶을 버리고 또 다른 삶을 어떻게 감히 택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쾌락을 누린다 해도, 또한 재물과 명예가 당신에게 아무리 많이 주어진다 해도 과연 그것을 이 복된 삶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혹시 문화적으로 복 을 정의하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삶은 불의를 거부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이요 하나님께 공급을 받아 결실을 맺는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이하는 모두가 복 있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이런 삶을 추구해야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 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삶은 악이나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자 재로 선을 택하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삶이 곧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정을 거부하고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의를 거부하고 공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불의에 속한 사람은 다릅니다. 불의에 속한 사람은 불의의 노예입니다. 불의의 노예가 된 사람은 선을 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자유(요8:36) 를 모르고 사는 사람 들입니다. 불의의 노예가 되어 참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을 누리 지 못합니다. 복을 누리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삶이 악화되는 과정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악인의 행실의 악화 악인은 그 행위가 갈수록 악화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악인의 행실을 설명하며 꾀 길 및 자리 등을 말씀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 시문의 성격으로 보아 단순한 동의어로 불 수 도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모두 악인의 행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단어들은 악인의 행 실이 어떻게 악화되어 가고 있는 가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악인이 처음에는 악한 꾀 를 좇아 행합니다. 꾀는 숨겨진 것들로 비밀리에 이행하는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 성경 에는 잘 나와 있지 않으나 히브리 원어에는 이런 꾀를 좇아가는 사람을 꾀를 좇아 걷는다(달라 크) 라고 1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처음 악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주로 비밀리에 악한 꾀를 좇 아 걷기 시작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천천히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악한 꾀 를 좇아 걷게 되면 그 다음 그 길 에 서서 공공연히 죄를 짓는 자리에까지 가게 됩니다. 이를 자리 에 앉는다는 말로 시편 기자는 표시했습니다. 따라서 악을 택하는 사람은 악의 노 예가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행실이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런 길을 거부합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재물과 명예를 준다 해도 그것이 도덕 적으로 내리막길을 가는 것이라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는 이와 같이 도 덕적으로 내리막길을 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더 사모하는 사람들을 어느 때보 다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업가가 그와 같은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한다고 합시다. 그는 내리막 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고 피고용인들에게 복 을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반면에 피고 용인은 일하는 동안 내리막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고 사업체의 번영을 위하여 땀을 흘리며 일할 것입니다. 결국 내리막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는 의사들, 교육자들, 정치인들, 사업인들,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국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인격의 타락 악인은 그 행실만 악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계속 가면 그 인격까지 타락됩니다. 시편 기 자는 악인 , 죄인 및 오만한 자 라는 말로써 도덕적으로 내리막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설명했 습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히브리 시문의 반복법(평형법)에 따라서 악한 사람들을 여러번 반복해서 언급했다고 보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단어들이 악한 상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동의 어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의미로 보아서는 강한 데서 더 악한 데로 발전되어 가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악인 은 거짓된 자, 불의한 자, 정함이 없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인 은 하나님의 의의 과녁 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소돔 사람의 악함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 습니다(창13:3). 이는 적극적으로,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에 오만한 자는 공개적으로 악을 공공연하게 행하는 자를 설명할 때 쓰인 말임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잠21:24).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고, 아무리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아무리 많은 명예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인격이 악하고,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교만이 넘쳐흘러서 오만함을 나타내게 될 때 성경은 그 가 복 없는 자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격의 소유자는 언제 악을 행할지 모르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차지해야 할 마음의 공허를 메우기 위하여 하나님 이외 다른 우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활은 성경에서 말 하는 복 있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세
상은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서 이를 행복한 삶이라고 외치 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기준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으십니다. 그리고 어느 날 공의를 실현시키실 때 가차없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나, 복 있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체험될 수 있습니다(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에서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삶을 악으로부터 떠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2절에서는 그는 복 있는 삶을 여호와의 율법 에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왜 그는 여호와의 율법과 복 있는 삶을 결 부시켰을까요 대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 하면 복과 결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 속박, 또는 정죄 하는 요소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세히 따져볼 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율법은 율법서(토라)를 의미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계명들이 되고 넒은 의미로는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들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항도 있으나 오히려 자유케 해주시고 복을 주시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율법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도 알려 주십니다. 복된 삶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 이에 순종할 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길로 들어서지 않고, 율법을 통하 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은 삶은 물론 거룩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했던 삶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복된 삶을 지금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성품이 변화하여 여호와의 뜻을 순종할 수 있을까요 시편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처 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1.여호와의 율법서를 즐거워하라 율법서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우리의 속사람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그 하나님의 뜻에 회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 인격이 율법서를 즐거워한다면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왜 즐겁지 않겠습니까
2.여호와의 율법서를 주야로 묵상하라. 저속한 잡지의 내용들을 자신의 머리 속에 채우는 사람들은 저속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율법서를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율법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중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뜻을 좇아 살아가기 를 원하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서를 즐거 워하지 않고 묵상하기도 거부하는 복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잠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비록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함으로 그 뜻대로 생활하여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만일 내 삶의 패턴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나와서 당신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후자의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도움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시3:5).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다. 복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실을 맺음으로써 입증됩니다(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나무의 종류에는 열매가 열리는 것도 있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 드시 둘 중에 한 가지 열매를 맺고 삽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열매이든 육신의 열매이든 열매를 반 드시 맺게 마련입니다(갈5:19_23).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공급원이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무가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서 사시사철 싱싱하게 자라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우리 인격의 뿌리를 내리면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은 최소한도 다음 세 가지를 나타내게 됩니다.
1.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단지 한 계절에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시사철 다 열립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한두 개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풍성히 열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복된 생활입니까 기쁠 때만, 축복 받았을 때만, Q.T할 때만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 전반을 통하여 열매가 열리는 생활은 실로 복된 생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삶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2.약동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나무의 경우, 풍성한 열매가 열릴 때 그 줄기나 잎도 같이 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공급원이 될 때 열매만 열리지 않고 나의 인격 자체도 성숙하게 됩니다.
3.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있습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도 중요하나 그 나무가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안정성을 갖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여호와께로부터 그 양분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어떤 세파에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 강인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가 한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신서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복된 삶은 여호와께 우리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풍성한 열매와 약동하는 생명력과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이 나타날 때 입증됩니다. 그런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라고 시편 기자는 요약했습니다. 앤더슨이라는 구약 주석 가는 이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 을 의미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삶을 버리고 또 다른 삶을 어떻게 감히 택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쾌락을 누린다 해도, 또한 재물과 명예가 당신에게 아무리 많이 주어진다 해도 과연 그것을 이 복된 삶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혹시 문화적으로 복 을 정의하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삶은 불의를 거부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삶이요 하나님께 공급을 받아 결실을 맺는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이하는 모두가 복 있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이런 삶을 추구해야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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