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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왕과 보이지 아니하는 왕 (히11:23-28)

본문

I. 왕명을 받은 모세 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던 한 사람 모세는 ‘갈대 배’ 안에서 극적인 구출을 받아 애굽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 된 사람입니다. 그 이름 모세는 ‘물에서 건져 냄’을 뜻하는 이름으로 바로 왕의 공주에 의해서 지어진 것입니다(출 2:10). 물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구속사적 섭리였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실에서 장성하면서 애굽의 학문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동족 히브리인과 싸움하던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이 탄로가 된 후 바로 왕이 그를 죽이고자 하는 뜻밖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그의 삶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디안 광야 목동 생활이었습니다(출 2:11-15). 미디안에서의 그의 목자 생활은 장차 이스라엘 선민의 목자적 구원 운동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모세가 목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생애를 극적으로 변화시켜 버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저 유명한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양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던 어느 날, 그는 참으로 엄청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나무는 불꽃 속에서 타 버리지 아니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광경 앞으로 이끌림 당하였고, 어찌하여 불꽃 중에 있는 저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모세야, 모세야!” 하는 자기 이름을 불러 주는 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4)라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모세에게 들려 온 음성은 더 이상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걸음은 멈추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또 들려 오는 음성이 너의 선 곳은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모세에게 계속이 되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고 자기 정체를 알려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야 모세의 인격은 떨렸고, 두려움으로 그 얼굴을 가리우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실로 엄청난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 3:7-10)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선민 해방령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찾아오신 분을 가리켜 ‘여호와의 사자’(출 3:2), ‘여호와’(출 3:4), ‘하나님’(출 3:1), ‘조상의 하나님’(출 3:16)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뢴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1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불꽃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출 3:2).
2 모세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인격적 음성을 발하시는 분이었습니다(출 3:4). 3 조상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출 3:6).
4 선민 역사의 현장을 통찰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선민 고난의 참상은 ‘보고’, ‘듣고’, ‘알고’(출 3:7), ‘기억하고’(출 2:24), ‘권념’(출 2:25)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친히 역사의 현장에 ‘내려 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려고’(출 3:8) 모세를 지목하여 찾아오신 분입니다(출 3:10). 그리고 모세에게 명령하신 분입니다. 선민의 출애굽 운동을 하명하신 분입니다. 나중에 모세는 다시 하나님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계신 자 곧 영원 자존자 로 알게 되었습니다(출 3:14). 히브리서 11장 27절에는 그 하나님을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는 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 (τν γρ ρατον ρν = the invisible One ) 곧 ‘눈에 안 보이는 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없거나 계시지 않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실존 자체이시면서 우리의 육체적 시각 작용으로는 감각을 할 수 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살아 계신 영원 자존적 인격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현상적 모습은 볼 수 없으신(골 1:15)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원한 왕이시고, 죽지 않고, 보이지 않으신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7). 모세는 그 놀라운 장면을 가리켜 이 큰 광경 (출 3:3)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류의 큰 광경은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창 22:). 사무엘에게도 있었습니다(삼상 3:). 엘리야엘리야에게도 있었습니다(왕상 18:, 왕하 2:).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다니엘에게도 있었습니다(단 6:-9:). 이사야에게도 있었습니다(사 6:).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있었습니다(마 17:, 계 1:). 물론 세계적 선교사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행 9:).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내신 하나님 자기 현존 계시의 ‘큰 광경’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이 큰 구원 계시의 광경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전부를 폭로해 주시고 말았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으로 나타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었습니다(요 1:14, 18).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의 화육강세, 무죄의 삶과 기적, 십자가 대속의 죽음, 부활, 승천, 보좌에 앉으심, 성령님으로 다시 오심, 그 결과 교회를 세우심 등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개하는 ‘큰 광경’입니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는 이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의 큰 일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큰 광경’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기 계시의 큰 광경을 신구약 성경에 기록함으로 말세를 만난 신자들은 ‘큰 광경의 노다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보라 지금은 은혜의 날이라고(고후 6:2) 하였습니다.
Ⅱ. 믿어 버린 모세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 11장 27절에 믿음으로… , 11장 28절에 믿음으로… , 11장 29절에도 믿음으로… 라고 연발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큰 광경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해 버렸습니다. ‘믿음’의 방법이 아니고는 그 놀라운 큰 광경을 글로, 말로, 어떤 과학적 수단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 큰 광경의 실상을 믿어 버렸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나타냄)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크리스천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생애의 활동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큰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눈이 보았고, 그 귀가 들었고, 그 인격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설명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사색이나 논리나 분석이나 종합 따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지식이었습니다. 아예 모세를 새롭게 변화시켜 버린 생명의 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이 지식만이 그 ‘큰 광경’을 수용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자기 구원의 계시, 곧 이 큰 광경들을 ‘성경’을 통하여 보고, 받고, 느끼고, 확신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내증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에게 자신의 존재와 부권(父權)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어린아이는 그 아버지 어머니를 태산처럼 믿고 즐기고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자라서는 더더욱 그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와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효행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에게 임한, 스스로 자존하신 왕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존재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하신 명령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히 11:6).
Ⅲ. 왕명대로 행동한 모세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전 애굽의 보화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5-26절에는 도리어 자기의 동족과 함께 고난과 능욕을 받기를 더 좋아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보면 믿음으로 그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는 출애굽의 거사를 단행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8절에는 출애굽 전날 밤에 저 유명한 유월절을 창조해 내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 ‘스스로 계시는 자’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왕의 존재와 명령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왕명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진리를 따라 행동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 번연(J. Bunyan)이 쓴 〔천로역정〕에 기독도와 신실(신앙)이 나옵니다. 저들은 이 세상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해 길을 가는 중에 ‘헛된 전람’(vainity Fair)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헛된 사치품들을 많이 파는 장소였습니다. 집들, 땅들, 직업들, 장소들, 영광들, 관직들, 소유권들, 나라들, 왕국들, 정욕의 대상들, 쾌락의 대상들, 기생들, 창녀들, 처자들, 주인들, 종들, 생명(영혼)들, 피, 몸들, 은금, 진주, 보석… 등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기독도와 신실에게 어떤 사람이 “너희는 무엇을 사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들은 엄숙히 “우리는 진리를 사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저들은 이 두 사람을 업신여기며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신실은 거기에서 심한 핍박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이 행동화 할 때 오는 일들입니다. 저들은 진리를 위하여 용감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역사는 이 사실을 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진리를 위하여 죽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복음 진리를 위하여 죽은 자들의 수효는 다 셀 수 없을 정도가 아닌가! 모세는 그가 받은 왕명이 진리인 줄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믿음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의 영화를 거절한 것입니다. 동족과 고난을 함께 하였습니다. 종된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고난이지, 출애굽운동이 무슨 고난인가 해방의 길, 자유의 길, 가나안의 길이 왜 고난인가 참 이상한 말처럼 생각되지 않은가 그럼에도 성경은 종된 애굽의 고역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하나님 섬기러 가는 길은, 또 다른 면에서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새로운 고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짐(멍에)은 쉽고 가볍다고 하였습니다(마 11:28-30). 그 이유는 감격과 감사의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는 내가 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께서 이미 대신 짊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짊어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왕 예수를 믿고, 섬기고, 따르는 특수한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왕명에 전 인생의 승부를 걸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왕 예수의 왕명을 우리의 기업으로 여기고, 그 왕명을 좇아 행동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 이유는 ‘상 주시는 분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히 11:26). 그 왕명에는 영화로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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