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왕과 보이지 않는 왕 (히11:23-28)
본문
지혜의 임금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고 하였습니다. 저 애굽의 고센 땅에 이주하여 살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은 요셉을 잘 알았던 애굽의 바로 왕 시대에는 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애굽의 통치자가 나타났을 때, 저들은 곤고한 날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들에게 나타난 애굽의 새 임금 바로는 참으로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린 큰 이유는 애굽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의 축복을 받아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출 1:7). 이스라엘 백성의 왕성이 애굽 왕 바로에게는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출 1:9)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나중에 자신을 도전하여 싸우고 애굽을 떠날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서운 왕명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의 왕명은 지상에 자리잡은 여러 시대의 교회도 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I. 죽음의 왕명(殺人令) 애굽의 새 왕 바로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어명을 공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왕명(王命)이었습니다. 첫 번째 왕명은 고역령(苦役令)이었습니다(출 1:11). 애굽의 감독들을 세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저들을 괴롭게 하라는 명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 … 괴롭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억누르다’, ‘압박하다’, ‘혹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국고성을 건축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고역 때문에 부부생활을 못하게 함으로 그 자손의 번성을 제지하고, 창성함에서 오는 힘의 단결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저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했다 고 하였습니다(출 1:12). 그 결과 바로는 근심에 근심을 더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애굽의 왕명은 더 엄한 고역으로 이스라엘에게 가해지고 말았습니다(출 1:13-14). 그러나 고역령의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더 큰 축복의 창성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애굽)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왕명은 살남아령(殺男兒令)이었습니다(출 1:16). 애굽의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助産)할 때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선민의 번성을 차단하려는 사탄적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바로의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남자)을 살리고 말았습니다(출 1:17). 그 큰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는(출 1:17) 것입니다. 나중에 저들은 왕에게 불려 가서 답하기를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출 1:19)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무서운 바로 왕의 살남아(殺男兒)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은혜를 히브리 산파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1 하나님을 두려워 한 자들이었습니다(출 1:17).
2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출 1:20). 3 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이었습니다(출 1:21).
4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셨습니다(출 1:21). 저들은 보이는 애굽의 군주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우주의 군주(통치자)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애굽의 보이는 군주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애굽 왕 바로의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을 살려 내었습니다(출 1:17). 그들은 죽음의 왕명을 따르지 아니하고 생명의 왕명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고 말았습니다(출 1:20). 세 번째 왕명은 모든 애굽의 신민에게 내린 공개적인 살인 명령이었습니다(출 1:22). 바로는 모든 신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명하기를,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를 낳거든 하수(나일강)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탄의 발악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역사 가운데 사람의 영육을 멸하는 여러 류의 명령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Ⅱ. 항명하고 사는 사람들
1. 소극적 항명 우리는 지금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에게 선민 멸종의 왕명이 공포된 것을 보았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낳는 남자는 모조리 죽임의 대상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헤롯 왕이 베들레헴 근동을 중심하고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를 다 죽이라고 어명을 내린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마 2:16). 헤롯 왕의 그 어명 가운데는 어린 아이 예수가 포함된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 산파들의 항명적 태도를 보았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하는 장면을 봅니다. 출애굽기 2장 2절에는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준수함’이란 단어 ‘토브’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 그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는 그때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은 모세를 두고 ‘아름다운 아이’, ‘준수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그 부모는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저들 부모는 하나님의 영지 작용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된 목적과 섭리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이 부분의 말을 더 확실히 하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로 (인하여) 모세가 석 달 동안 숨겨졌더라 고 함이 옳습니다. ‘석 달 동안 숨겼다’는 말은 1 석 달 동안 모세의 출생 소식을 숨겼다는 뜻이고
2 석 달 동안 집안의 어떤 은밀한 곳에서 모세가 숨겨진 채로 지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왕의 어명(王命)에 대한 항명이요, 항명적 행동입니다. 저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23).
2. 적극적 항명 다음에 저들은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출 2:3). 그리고 그 부모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모세를 담은 갈 상자의 행방을 따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미리암은 자기 동생을 담은 갈 상자의 행방을 따랐습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눈에 보여졌고, 마침내 그는 바로의 궁실에서 자라는 결과를 만났습니다(출 2:4-10). 모세를 담은 ‘갈 상자’는 ‘갈대 배’인데, 이 말은 노아의 ‘방주’(창 6:14)란 단어(켄;)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방향 조절기가 없는 배를 뜻합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한 운행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와 형제는 모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갈대 배에 담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맡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바로의 왕명을 어긴 항명적 행동입니다. 왜냐 바로는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죽이지 않고 살려 갈대 배에 그 아이를 담아 하나님께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들 부모는 참으로 죽을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닌가 군주의 명을 어긴 백성이 아닌가 살아 남을 수 없는 배역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닌가 성경은 저들의 소행에 대하여 말하기를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다 (히 11:23)고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항명입니다. 어쩌자고 그리하였을까 왜 그리하였을까 무슨 힘으로 그리하였을까 혈육의 힘이고 애정인가 아니면 단순한 순간의 반항인가 민족적 반항심의 발로인가
Ⅲ. 항명의 이유는 보이지 않는 왕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왕명을 거절한 힘은 믿음이었습니다. 저들은 믿음으로 모세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은 아들 모세에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빛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바로 왕의 명을 어기게 해 버렸습니다.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 히브리 산파들도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까닭에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을 죽이라는 왕명을 무서워 하지 않고, 항명적 행동으로 그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모세의 부모도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가리켜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같이 그 앞에서 보이고, 그 앞에서 생각하고, 그 앞에서 판단하고, 그 앞에서 말하고, 그 앞에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상의 본체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자였습니다(출 3:14). 영원자존자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기 아들 모세를 저들에게 보내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피조물인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유한한 바로 왕의 명령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악한 바로 왕의 악명(惡命)보다,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명령을 믿었습니다. 무능한 바로 왕의 명령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육(肉)인 바로 왕의 명령보다, 영(靈)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땅에 사는 바로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신 권세 높은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하였습니다(롬 13:1-4). 그러나 이 말씀은 보이지 아니하는 의의 왕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이루어지는 순종과 복종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하부(下部)의 권세는 상부(上部)의 권세에 순응함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순종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주 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엡 6:1). 주 밖에 있는 부모가 주의 뜻을 거스리는 명령을 할 때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가정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같이 해야 된다고 하는 최우선적인 권세가 앞서 있음을 봅니다(엡 5:22-25). 이 모든 사랑과 순종은 피차 그리스도를 경외함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엡 5:21). 구약의 저 용감한 주의 청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명에 항명하고 말았습니다(단 3:16-18). 사도들은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며, 유대교권주의자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습니다(행 5: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 산파들은 왕명을 좇아 살았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왕명을 보는 것같이, 듣는 것같이 믿고 행동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므로 보이는 애굽 왕 바로의 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왕명을 어긴 애굽에서 망하거나, 약하거나, 추방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저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왕명을 좇았습니다. 모세를 받았을 때 보이는 임금의 명령도 아랑곳없이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려내고 말았습니다. 그 확실하고 분명한 내용은 저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실존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왕명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위기를 처리하는 결단적 행동의 힘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는 축복의 힘이 있습니다. 오늘의 절망을 내일의 소망으로 상승시키는 성화적 위력을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힘을 공급받는 믿음만이 보이는 세계의 현실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대로만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I. 죽음의 왕명(殺人令) 애굽의 새 왕 바로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어명을 공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왕명(王命)이었습니다. 첫 번째 왕명은 고역령(苦役令)이었습니다(출 1:11). 애굽의 감독들을 세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저들을 괴롭게 하라는 명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 … 괴롭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억누르다’, ‘압박하다’, ‘혹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국고성을 건축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고역 때문에 부부생활을 못하게 함으로 그 자손의 번성을 제지하고, 창성함에서 오는 힘의 단결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저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했다 고 하였습니다(출 1:12). 그 결과 바로는 근심에 근심을 더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애굽의 왕명은 더 엄한 고역으로 이스라엘에게 가해지고 말았습니다(출 1:13-14). 그러나 고역령의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더 큰 축복의 창성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애굽)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왕명은 살남아령(殺男兒令)이었습니다(출 1:16). 애굽의 바로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助産)할 때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선민의 번성을 차단하려는 사탄적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바로의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남자)을 살리고 말았습니다(출 1:17). 그 큰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는(출 1:17) 것입니다. 나중에 저들은 왕에게 불려 가서 답하기를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출 1:19)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무서운 바로 왕의 살남아(殺男兒)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은혜를 히브리 산파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1 하나님을 두려워 한 자들이었습니다(출 1:17).
2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출 1:20). 3 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이었습니다(출 1:21).
4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셨습니다(출 1:21). 저들은 보이는 애굽의 군주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우주의 군주(통치자)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애굽의 보이는 군주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애굽 왕 바로의 왕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을 살려 내었습니다(출 1:17). 그들은 죽음의 왕명을 따르지 아니하고 생명의 왕명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고 말았습니다(출 1:20). 세 번째 왕명은 모든 애굽의 신민에게 내린 공개적인 살인 명령이었습니다(출 1:22). 바로는 모든 신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명하기를, 고센 땅에 사는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를 낳거든 하수(나일강)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탄의 발악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역사 가운데 사람의 영육을 멸하는 여러 류의 명령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Ⅱ. 항명하고 사는 사람들
1. 소극적 항명 우리는 지금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에게 선민 멸종의 왕명이 공포된 것을 보았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낳는 남자는 모조리 죽임의 대상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헤롯 왕이 베들레헴 근동을 중심하고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를 다 죽이라고 어명을 내린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마 2:16). 헤롯 왕의 그 어명 가운데는 어린 아이 예수가 포함된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 산파들의 항명적 태도를 보았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하는 장면을 봅니다. 출애굽기 2장 2절에는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준수함’이란 단어 ‘토브’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 그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는 그때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들은 모세를 두고 ‘아름다운 아이’, ‘준수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그 부모는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저들 부모는 하나님의 영지 작용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된 목적과 섭리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이 부분의 말을 더 확실히 하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로 (인하여) 모세가 석 달 동안 숨겨졌더라 고 함이 옳습니다. ‘석 달 동안 숨겼다’는 말은 1 석 달 동안 모세의 출생 소식을 숨겼다는 뜻이고
2 석 달 동안 집안의 어떤 은밀한 곳에서 모세가 숨겨진 채로 지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왕의 어명(王命)에 대한 항명이요, 항명적 행동입니다. 저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23).
2. 적극적 항명 다음에 저들은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출 2:3). 그리고 그 부모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모세를 담은 갈 상자의 행방을 따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미리암은 자기 동생을 담은 갈 상자의 행방을 따랐습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눈에 보여졌고, 마침내 그는 바로의 궁실에서 자라는 결과를 만났습니다(출 2:4-10). 모세를 담은 ‘갈 상자’는 ‘갈대 배’인데, 이 말은 노아의 ‘방주’(창 6:14)란 단어(켄;)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방향 조절기가 없는 배를 뜻합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한 운행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와 형제는 모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갈대 배에 담아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맡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바로의 왕명을 어긴 항명적 행동입니다. 왜냐 바로는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죽이지 않고 살려 갈대 배에 그 아이를 담아 하나님께 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들 부모는 참으로 죽을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닌가 군주의 명을 어긴 백성이 아닌가 살아 남을 수 없는 배역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닌가 성경은 저들의 소행에 대하여 말하기를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다 (히 11:23)고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항명입니다. 어쩌자고 그리하였을까 왜 그리하였을까 무슨 힘으로 그리하였을까 혈육의 힘이고 애정인가 아니면 단순한 순간의 반항인가 민족적 반항심의 발로인가
Ⅲ. 항명의 이유는 보이지 않는 왕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왕명을 거절한 힘은 믿음이었습니다. 저들은 믿음으로 모세를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은 아들 모세에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빛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이 바로 왕의 명을 어기게 해 버렸습니다.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 히브리 산파들도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까닭에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을 죽이라는 왕명을 무서워 하지 않고, 항명적 행동으로 그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모세의 부모도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가리켜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같이 그 앞에서 보이고, 그 앞에서 생각하고, 그 앞에서 판단하고, 그 앞에서 말하고, 그 앞에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상의 본체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자였습니다(출 3:14). 영원자존자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기 아들 모세를 저들에게 보내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피조물인 바로 왕의 명령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유한한 바로 왕의 명령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악한 바로 왕의 악명(惡命)보다,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명령을 믿었습니다. 무능한 바로 왕의 명령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육(肉)인 바로 왕의 명령보다, 영(靈)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땅에 사는 바로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신 권세 높은 하나님의 명령을 믿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하였습니다(롬 13:1-4). 그러나 이 말씀은 보이지 아니하는 의의 왕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이루어지는 순종과 복종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하부(下部)의 권세는 상부(上部)의 권세에 순응함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순종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주 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엡 6:1). 주 밖에 있는 부모가 주의 뜻을 거스리는 명령을 할 때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가정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함같이 해야 된다고 하는 최우선적인 권세가 앞서 있음을 봅니다(엡 5:22-25). 이 모든 사랑과 순종은 피차 그리스도를 경외함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엡 5:21). 구약의 저 용감한 주의 청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명에 항명하고 말았습니다(단 3:16-18). 사도들은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며, 유대교권주의자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습니다(행 5: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 산파들은 왕명을 좇아 살았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왕명을 보는 것같이, 듣는 것같이 믿고 행동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므로 보이는 애굽 왕 바로의 명을 어기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들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왕명을 어긴 애굽에서 망하거나, 약하거나, 추방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저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왕명을 좇았습니다. 모세를 받았을 때 보이는 임금의 명령도 아랑곳없이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려내고 말았습니다. 그 확실하고 분명한 내용은 저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실존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왕명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힘이 있습니다. 위기를 처리하는 결단적 행동의 힘이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는 축복의 힘이 있습니다. 오늘의 절망을 내일의 소망으로 상승시키는 성화적 위력을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힘을 공급받는 믿음만이 보이는 세계의 현실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원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대로만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