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5)
본문
어떤 신학생이 방언을 하는 것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아무 리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생 체면에 안되겠다 싶어, 창 세기 일장을 전부 히브리어로 외웠답니다. 그리곤 이걸 계속 반복을 하면서 방언으로 대채를 했다는 것이지요. 특히 짧은 방언은 창세기 일장 일절을 계속 외워댔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절) 이 구절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은 이 구절로 시작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절) 이 구절을 넘지 못하면 성경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을 믿음으로 절절히 고백하지 못하 면 성경 전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일장 일절은 그 야말로 알 수 없는 것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태초'도 모르고, '하나님' 도 모르고, '천지'도 우리 인간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초' 우주의 시작을 우리 인간은 모릅니다. 최근에야 달의 생성년도를 45억 2천만년 정도로 추정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계시해준 만큼만 인간이 알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요. 성경은 계시 의 책입니다. 계시(啓示)는 열어준 만큼만 본다는 뜻이니까 우리 인간 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천지' 또한 인간이 모르는 영 역 중의 하나입니다. 창조의 비밀은 유전공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신비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1장 1절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단순합니다. 전부 '하나님이 하 셨다'입니다. 이성의 언어로 다 알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고 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우주와 천지만물과 인생의 주인 은 하나님이라고. 그런 까닭에 천지 창조의 창세기 1장은 과학의 언어 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입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태초'라는 영원의 시간을 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라는 우주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태초'도 '천지'도 '창조'도, 다 하나님이란 주어가 없으면 무의미 한 것입니다. 문장에서 주어가 없으 면 문장 자체가 되지 않듯이 말이지요. 그 하나님이 혼돈에 질서를 주 신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무질서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것입니다. 공허의 세 계에 내용을 채우는 것이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1절의 창조(바라)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완벽한 하나님의 창조를 말합니다. 21절의 창조는(아사) 생물 창조입니다. 이미 창조된 물질로 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27절의 창조(야찰)은 인간창조 때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의 사물을 완벽하 게 조성하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의 위치가 좀 독특합니다. 6일간의 천지창조 과 정과 내용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태초에 하나님 이 이 처럼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이렇게 끝을 맺어야 하는 것 아닙니 까 그런에 창세기에서는 거꾸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장 1절 서두에 딱 이 말을 갖다 놓습니다. 창조의 과 정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결론을 이야기해 놓습니다. 아직 혼돈과 공허 가 있고 빛이 창조 되기도 전인 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 다고 합니다.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창조는 전부 1장 1 절의 규정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1장 1절에 귀속 되지 않는 창조물은 제대로 된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의 창조가 끝나면 꼭 후렴 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 았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입니다. 인간이 보기에가 아 닙니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요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들은 욕망이요, 이기심이요, 파괴요, 착취로 그 결말을 맺습니다. 선악과도 그렇고 바벨탑도 그렇습니다. 창조자, 제 품 설계자가 보기에 최상의 제품이라야, 최상의 상태입니다. 좋았더라!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얼굴이 잘난 사람, 학식이 빼어난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사회적 명망성이 있는 사람, 유우머가 있는 사람, 키가 훤칠한 사람입니까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보기에 좋은 사람은 어떤 사 랍입니까 '하나님의 보시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에서 '좋았더라'(토브)는 위대한, 놀라운, 완벽한, 아름다운이란 뜻이 모두 있습니다. 단순히 아 름다운 것 이상입니다. 목적에 딱 맞는 다는 합목적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칼은 모양만 좋아서는 안됩니다. 칼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세탁기는 모양만 화려해서는 안됩니다. 때를 깨끗이 빨 수 있어야 합니다. 목적에 맞아야 보기가 좋은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아름다 움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을 때 최고로 빛이 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나서 하나님 보시기에 추 합니다. 그 첫 번째 증상은 무질서요, 두 번째 증상은 허무입니다. 좋지 않은 인간의 군상들이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즉 무질서와 허무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은 세계는 무질서요, 허무입니다. 이것이 우주와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우주는 무질서해지지 않았지만, 인간은 무질서 해 졌습니다. 만약에 우주 마져 무질서해졌다면 큰일이 났을 것입니다. 태양계 안의 별들이 다 충돌 폭발해 버렷을 것이고, 태양게와 수 많은 다른 행성계가 충돌해 우주는 대폭발로 흔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낚시를 하고, 우리가 잠을 자고, 무리가 무관심한 중에도 우주는 질서를 지켜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우주를 아 름다운 질서(cosmos)로 표현했습니다.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결국 무질서는 추한 것이요, 질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질서하고 빈 상태는 '허무'입니다. 혼돈과 무질서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허무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목적이 없으면 허무입니다. 방향이 없으면 허무입니다. 가치가 없으면 허무합니다. 중심이 없 으면 허무 합니다. 허무한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리 없습니다. 허무주의를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시대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 면 허무는 추한 모습입니다. 최소한 양보해서 본다 하더라도 허무는 '존재의 멸절을 느끼는 인간의 표현'일 뿐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꾸 허무 하 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가슴에는 매울 수 없는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허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다 키워 놓은 엄마들은 왜 이렇게 가슴이 허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을 만났더니 잘나가는 재벌그룹 부장인 데 갑자기 사 표를 냈다고 합니다.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숨막 히고 질식할 것 같아 퇴직을 했다고 합니다. 정리해고 된 사람은 줄줄 이 생기고 또 그런 압력이 보이지 않게 가중되고 있고 그래서 나가라는 사람이 없어도, 굳이 자신이 써야할 사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쓰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농촌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농사나 짓 겠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허무 하다고 합니다. 일전에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지금은 생활 전선에서 열심인 분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논리가 서고 자신이 있었는 데, 지금은 누구를 만나든 자신이 없고, 지금은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이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공황 상태이지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목숨 걸던 일이 좌절되거나 사라지면 허무를 느 낍니다. 열정의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빈 것이지요. 이게 허무입니다. 인간의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질서가 질서로, 중심 이 중심으로, 초점이 초점으로 잡히지 않으면 인간은 우왕좌왕하고 불 안해 합니다. 방황합니다. 여기에서 허무가 싹트는 것입니다. 심리적, 문학적, 철학적인 의미에서 허무는 찬양받을 것인지 모르지만, 신앙에 서 '허무'는 극복해야할 대상이며 추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없음'이 기 때문입니다. 무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의 흔들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명성이 흐릿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이 사실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환기 시켰지요. 여인은 다시는 목 마르지 않는 물, 그런 물이 있 으면 달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의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의 가슴에는 여전히 공허와 허무가 남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목마름과 갈 증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었습니다. 추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사람이 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내 던져 버리고 동네로 내려갔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여인의 모습은 분명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생동하는 모습, 확고한 모습, 아 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방향을 잃으면 추해 보입니다. 실업자로서 길을 나서면 갑자기 방향을 잃습니다. 오라는 곳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 료하고 무질서한 나만 남는 것입니다. 되는 대로 쏘다닙니다. 발길이 닫는 대로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란 방향을 찾는 것입니다. 가 야할 곳, 열심을 내야할 곳, 직업과 부업, 본래의 목적과 수단의 것들 이 명확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얼굴이 잘난 사람, 학식이 빼어난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사회적 명 망성이 있는 사람, 유우머가 넘치는 사람, 키가 훤칠한 사람입니까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보기에 좋 은 사람은 어떤 사랍입니까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을 향해 초점, 중심이 서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사람입니다. 말씀원칙으로 살자하니 답답하고, 거룩한 투쟁으 로 괴롭고, 희생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니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다움을 위한 노력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지는 행위입니다. 노력에는 아름다워지는 노력과 추해지는 노력이 있습니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제일 아릅답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생각만 해도 입 가에 흐뭇한 미소를 흘릴 수 있는 사람, 인간에 대한 인간의 한 없는 낙관을 가질 수 있는 사람 그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업자는 아닌지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리해 고나, 감원, 퇴출, 명예퇴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실업자로 남아 있다면 순전 히 자발적인 실업자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생선은 썩은 생선입니다. 아름답지 못합니다. 추합니다.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의 복음일꾼, 사랑의 증거자, 제자 모두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생 기 발랄하고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구원, 그 한 문제에 일평생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성결, 그 한문제로 일평생 고민할 수는 업습니다. 이제는 일을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도 구가 될 때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제 이번 수련회에서 바울 서신을 통해 바울 신앙의 아름다움을 경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생하게 활동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 바울 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98년 한해의 반을 보내며 열심히 투쟁하고 울고 웃으며 신앙의 꽂을 피워왔던 것을 뒤새기고 결산하는 시간입니다. 열심히 달 려왔던 믿음의 길을 중간 결산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과연 나는 지난 반 해의 삶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았는가 최선을 다해 왔는가 지금 즉시 하나님이 부르셔도 아름다운 사람인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고 돌아보는 풍성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문) 주님, 창조의 질서에 맞아야 아름다운 인간인데, 창조 당시에 하나님과 긴 밀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던 그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목적 이 있고, 갈 길이 있고, 방향이 있고, 하나님의 일이 있는 생동감 있는 당신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지금도 계속하셔서, 새롭게 완성하시는 창조의 사역 이 저희 가운데 계속되게 하여 주십시오.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몰라서 헛 된 것에 매달렸습니다. 욕망을 고, 유행을 고, 평판을 았습니다. 세상의 평가를 고, 이기심을 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쉼과 여유를 갖고 돌아 보고자 합니다. 이 여 름의 쉼이 참된 발견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기도드립니다.
그런데 방언을 아무 리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생 체면에 안되겠다 싶어, 창 세기 일장을 전부 히브리어로 외웠답니다. 그리곤 이걸 계속 반복을 하면서 방언으로 대채를 했다는 것이지요. 특히 짧은 방언은 창세기 일장 일절을 계속 외워댔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절) 이 구절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성경은 이 구절로 시작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절) 이 구절을 넘지 못하면 성경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을 믿음으로 절절히 고백하지 못하 면 성경 전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일장 일절은 그 야말로 알 수 없는 것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태초'도 모르고, '하나님' 도 모르고, '천지'도 우리 인간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초' 우주의 시작을 우리 인간은 모릅니다. 최근에야 달의 생성년도를 45억 2천만년 정도로 추정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계시해준 만큼만 인간이 알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요. 성경은 계시 의 책입니다. 계시(啓示)는 열어준 만큼만 본다는 뜻이니까 우리 인간 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천지' 또한 인간이 모르는 영 역 중의 하나입니다. 창조의 비밀은 유전공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신비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1장 1절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단순합니다. 전부 '하나님이 하 셨다'입니다. 이성의 언어로 다 알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고 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우주와 천지만물과 인생의 주인 은 하나님이라고. 그런 까닭에 천지 창조의 창세기 1장은 과학의 언어 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입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태초'라는 영원의 시간을 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라는 우주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태초'도 '천지'도 '창조'도, 다 하나님이란 주어가 없으면 무의미 한 것입니다. 문장에서 주어가 없으 면 문장 자체가 되지 않듯이 말이지요. 그 하나님이 혼돈에 질서를 주 신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무질서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 것입니다. 공허의 세 계에 내용을 채우는 것이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1절의 창조(바라)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완벽한 하나님의 창조를 말합니다. 21절의 창조는(아사) 생물 창조입니다. 이미 창조된 물질로 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27절의 창조(야찰)은 인간창조 때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의 사물을 완벽하 게 조성하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의 위치가 좀 독특합니다. 6일간의 천지창조 과 정과 내용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태초에 하나님 이 이 처럼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이렇게 끝을 맺어야 하는 것 아닙니 까 그런에 창세기에서는 거꾸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장 1절 서두에 딱 이 말을 갖다 놓습니다. 창조의 과 정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결론을 이야기해 놓습니다. 아직 혼돈과 공허 가 있고 빛이 창조 되기도 전인 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 다고 합니다.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창조는 전부 1장 1 절의 규정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1장 1절에 귀속 되지 않는 창조물은 제대로 된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의 창조가 끝나면 꼭 후렴 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 았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입니다. 인간이 보기에가 아 닙니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요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들은 욕망이요, 이기심이요, 파괴요, 착취로 그 결말을 맺습니다. 선악과도 그렇고 바벨탑도 그렇습니다. 창조자, 제 품 설계자가 보기에 최상의 제품이라야, 최상의 상태입니다. 좋았더라!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얼굴이 잘난 사람, 학식이 빼어난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사회적 명망성이 있는 사람, 유우머가 있는 사람, 키가 훤칠한 사람입니까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보기에 좋은 사람은 어떤 사 랍입니까 '하나님의 보시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에서 '좋았더라'(토브)는 위대한, 놀라운, 완벽한, 아름다운이란 뜻이 모두 있습니다. 단순히 아 름다운 것 이상입니다. 목적에 딱 맞는 다는 합목적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칼은 모양만 좋아서는 안됩니다. 칼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세탁기는 모양만 화려해서는 안됩니다. 때를 깨끗이 빨 수 있어야 합니다. 목적에 맞아야 보기가 좋은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아름다 움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을 때 최고로 빛이 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나서 하나님 보시기에 추 합니다. 그 첫 번째 증상은 무질서요, 두 번째 증상은 허무입니다. 좋지 않은 인간의 군상들이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는 아름답지 못합니다. 즉 무질서와 허무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은 세계는 무질서요, 허무입니다. 이것이 우주와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우주는 무질서해지지 않았지만, 인간은 무질서 해 졌습니다. 만약에 우주 마져 무질서해졌다면 큰일이 났을 것입니다. 태양계 안의 별들이 다 충돌 폭발해 버렷을 것이고, 태양게와 수 많은 다른 행성계가 충돌해 우주는 대폭발로 흔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낚시를 하고, 우리가 잠을 자고, 무리가 무관심한 중에도 우주는 질서를 지켜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우주를 아 름다운 질서(cosmos)로 표현했습니다.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결국 무질서는 추한 것이요, 질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질서하고 빈 상태는 '허무'입니다. 혼돈과 무질서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허무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목적이 없으면 허무입니다. 방향이 없으면 허무입니다. 가치가 없으면 허무합니다. 중심이 없 으면 허무 합니다. 허무한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리 없습니다. 허무주의를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시대도 있었고 문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 면 허무는 추한 모습입니다. 최소한 양보해서 본다 하더라도 허무는 '존재의 멸절을 느끼는 인간의 표현'일 뿐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꾸 허무 하 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가슴에는 매울 수 없는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허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다 키워 놓은 엄마들은 왜 이렇게 가슴이 허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을 만났더니 잘나가는 재벌그룹 부장인 데 갑자기 사 표를 냈다고 합니다.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숨막 히고 질식할 것 같아 퇴직을 했다고 합니다. 정리해고 된 사람은 줄줄 이 생기고 또 그런 압력이 보이지 않게 가중되고 있고 그래서 나가라는 사람이 없어도, 굳이 자신이 써야할 사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쓰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농촌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농사나 짓 겠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허무 하다고 합니다. 일전에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지금은 생활 전선에서 열심인 분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분명했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논리가 서고 자신이 있었는 데, 지금은 누구를 만나든 자신이 없고, 지금은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이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공황 상태이지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목숨 걸던 일이 좌절되거나 사라지면 허무를 느 낍니다. 열정의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빈 것이지요. 이게 허무입니다. 인간의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질서가 질서로, 중심 이 중심으로, 초점이 초점으로 잡히지 않으면 인간은 우왕좌왕하고 불 안해 합니다. 방황합니다. 여기에서 허무가 싹트는 것입니다. 심리적, 문학적, 철학적인 의미에서 허무는 찬양받을 것인지 모르지만, 신앙에 서 '허무'는 극복해야할 대상이며 추한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없음'이 기 때문입니다. 무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중심의 흔들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명성이 흐릿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이 사실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환기 시켰지요. 여인은 다시는 목 마르지 않는 물, 그런 물이 있 으면 달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의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의 가슴에는 여전히 공허와 허무가 남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목마름과 갈 증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었습니다. 추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으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사람이 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내 던져 버리고 동네로 내려갔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여인의 모습은 분명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생동하는 모습, 확고한 모습, 아 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방향을 잃으면 추해 보입니다. 실업자로서 길을 나서면 갑자기 방향을 잃습니다. 오라는 곳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 료하고 무질서한 나만 남는 것입니다. 되는 대로 쏘다닙니다. 발길이 닫는 대로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란 방향을 찾는 것입니다. 가 야할 곳, 열심을 내야할 곳, 직업과 부업, 본래의 목적과 수단의 것들 이 명확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얼굴이 잘난 사람, 학식이 빼어난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사회적 명 망성이 있는 사람, 유우머가 넘치는 사람, 키가 훤칠한 사람입니까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보기에 좋 은 사람은 어떤 사랍입니까 하나님의 질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을 향해 초점, 중심이 서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사람입니다. 말씀원칙으로 살자하니 답답하고, 거룩한 투쟁으 로 괴롭고, 희생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니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다움을 위한 노력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지는 행위입니다. 노력에는 아름다워지는 노력과 추해지는 노력이 있습니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제일 아릅답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생각만 해도 입 가에 흐뭇한 미소를 흘릴 수 있는 사람, 인간에 대한 인간의 한 없는 낙관을 가질 수 있는 사람 그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업자는 아닌지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리해 고나, 감원, 퇴출, 명예퇴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실업자로 남아 있다면 순전 히 자발적인 실업자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생선은 썩은 생선입니다. 아름답지 못합니다. 추합니다.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의 복음일꾼, 사랑의 증거자, 제자 모두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생 기 발랄하고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구원, 그 한 문제에 일평생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성결, 그 한문제로 일평생 고민할 수는 업습니다. 이제는 일을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도 구가 될 때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제 이번 수련회에서 바울 서신을 통해 바울 신앙의 아름다움을 경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생하게 활동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 바울 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제 98년 한해의 반을 보내며 열심히 투쟁하고 울고 웃으며 신앙의 꽂을 피워왔던 것을 뒤새기고 결산하는 시간입니다. 열심히 달 려왔던 믿음의 길을 중간 결산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과연 나는 지난 반 해의 삶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았는가 최선을 다해 왔는가 지금 즉시 하나님이 부르셔도 아름다운 사람인가 이런 물음에 대답하고 돌아보는 풍성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문) 주님, 창조의 질서에 맞아야 아름다운 인간인데, 창조 당시에 하나님과 긴 밀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던 그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목적 이 있고, 갈 길이 있고, 방향이 있고, 하나님의 일이 있는 생동감 있는 당신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지금도 계속하셔서, 새롭게 완성하시는 창조의 사역 이 저희 가운데 계속되게 하여 주십시오.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몰라서 헛 된 것에 매달렸습니다. 욕망을 고, 유행을 고, 평판을 았습니다. 세상의 평가를 고, 이기심을 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쉼과 여유를 갖고 돌아 보고자 합니다. 이 여 름의 쉼이 참된 발견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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