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새날이로구나 (고후5:16-17)
본문
새해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달력도 계획도, 마음도, 기분도, 모두가 새롭습니다. 금년에는 잘 해야지 하고 다짐도 새롭게 합니다. 사실 1월 1일이라고 해서 다른 시간보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보통 시간과 똑같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은 원형으로 된 문자판에 의해서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계 바늘이 끊임없이 반복하여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게 돌겠지 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해라고 해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꾸준히 흐르는 시간을 그냥 계속해서 흐르도록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을 토막토막 끊어 놓으신 것입니다. 즉 1년을 4등분으로 해서 춘하추동으로 구분해 놓으셨고, 1년을 12달로 나누어 놓으셨으며, 365일을 1주기로 돌고 나서는 새로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을 만들어 놓으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늘 새롭게 각오하고, 새롭게 다짐하고, 새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구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해서 새롭게 각오도 하고 또 새롭게 다짐도 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새로워집니다. 정신도, 몸도, 영도, 생활도, 모두 새로워집니다. 이렇게 새로워진 우리가 새해에는 더욱더 새로워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금년에는 네 가지 면에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생각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가장 복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나쁜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똑같은 도구도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면 인류 공익을 위해서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옳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면 엄청난 재해를 불러오는 저주의 도구로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마음도 생활도 선해집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을 만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육신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생각 속에 온갖 잡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옳은 생각과 옳은 마음을 간직하여야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금년에는 무엇보다도 생각을 새롭게 하는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시각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옳게 보고, 바르게 보고, 정확히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매사를 옳게 볼 때 오해가 없고 편견이 없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되면 정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시각의 굴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낙오하였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축복도 보는 것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기 전에 먼저 환상부터 주셨습니다. “네 자손을 땅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약속 당시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서 별을 보여 주시면서 “보라 저 무수한 별들만큼 네게 자손을 주겠다.” 그리고 그를 광야로 데리고 가서 “보라 저 무수한 노래만큼 내가 네게 자손을 주겠다.”하고 약속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환상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풍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밤만 되면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내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거야.”하며 장래 이루어질 환상을 그려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밤만 되면 즐거웠을 것입니다. 또 낮이 되면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도 뜨겁거나 피곤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꿈을 꾸며 광활한 대지 위를 걸어갑니다. 먼 지평 위에 널려 있는 모래와 돌멩이들이 모두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기에 뜨거운 낮이 되어도 즐거웠을 것입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보였을 것이고, 대낮의 대지 위에 널려 있는 그 수많은 모래들은 또한 자손들의 수많은 머리로 보였을 것이니 가히 이런 광야의 생활이 그에게는 꿈의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각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현실적인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영롱한 환상부터 마음속에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청결한 마음, 깨끗한 시각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시각부터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공부방에 성화를 걸어 준다고 합니다. 그 성화를 바라보게 되면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해 주고, 성스러운 시각을 조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의 사진을 보면서 또한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알프스 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폴레옹의 사진을 보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감도 갖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각의 교정입니다.
그런데 탈선하는 아이들의 방에는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공부방에 걸린 사진들과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여자 사진이 걸려 있을 것이고, 음란 기사로 가득 찬 잡지책들이 꽂혀 있을 것이고, 건전치 못한 퇴폐 음반들과 비디오 테이프들이 널려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서 과연 어떤 생각과 상상들이 떠오를 것입니까 경건한 가정과 세속적인 가정과의 차이는 그 집안의 장식물들을 통해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벽에 어떤 그림이 걸려 있고 진열장에 어떤 것이 놓여 있는지 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봄으로써 타락을 하였습니다. 롯의 아내가 보지 말아야 할 곳을 봄으로써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딸이 음란의 거리를 기웃거릴 때 강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보지 말아야 할 여체를 유심히 바라보았기 때문에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한밤중에 밖으로 불러내서 은구슬 금구슬을 뿌려 놓은 것과 같은 환상적인 밤하늘의 뭇 별들을 보이면서 약속을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환상을 주시려고, 꿈을 갖게 하시려고, 꿈의 영상을 환상 속에서, 생각 속에서 익어 가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지니고 환상을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셋째는 언어를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말의 공해 시대입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TV룰 켜 놓아도, 라디오를 틀어 놓아도, 언제나 우리는 쏟아져 나오는 언어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다 말이 아닙니다. 책이 다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어 생활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서양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Good morning” “좋은 아침입니다.”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입버릇처럼 무의식중에 기지개를 켜면서 내뱉는 말이 “아이고 죽겠다.”입니다. 하는 일이 조금만 어려워도 내뱉는 말이 “죽고 싶다.”입니다. 부부가 다투어가 너무 쉽게 내뱉는 말도 “우리 갈라서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은연중에 자신에게 암시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 암시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말을 하는데 진지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최면 학에서 잠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 “잠이 온다. 잠이 온다.”하고 암시를 주면 곧 잠이 오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같은 암시를 최면 학에서는 힌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장가가 나온 것입니다. 자라, 자라 하면 아이가 금방 잡니다. 또 “너는 바보다.”하고 어린아이에게 자주 힌트를 주면 그 아이는 진짜 자신을 바보로 믿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마다 소망 적인 자기 암시의 설교를 하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긍정적인 신앙인들 이 되어 가지만 세상 적인 어두운 면만을 자꾸 들추어내면 성도들은 “그러니 나만이라도 바로 살자.”하고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 정도쯤이야.”하고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의 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보는 꿈과 영롱한 환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삭막한 땅과 삼킬 듯한 메마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불가능”입니다. 그들은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신앙인들 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매사에 불평이나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핑계하고 탓을 하다 보면 그의 생활에서 밝음과 소망이 사라지고 맙니다.
넷째는 옳은 의식을 갖는 일입니다. 성경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골3:9).”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그 사람의 생활을 지배합니다. 의식 구조가 잘못 되어 있으면 구태 의연해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첨단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아직도 구태 의연한 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되면 자유로운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옛날의 구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쓸데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아직도 조상 제사에 연연해서 어중간한 위치에서 서 있는 사람, 아이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작명소를 기웃거리는 사람, 정초만 되면 점치는 골목을 배회하는 사람,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사주와 택일을 놓고 고심하는 사람들, 아직도 남존여비의 사상에 찌든 채 부인을 천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묏자리에 연연하는 분 등 이 같은 정신들은 반드시 새로워져야 하고 고쳐져야 할 낡은 사고 방식과 의식 구조들입니다. 새 시대는 새 사람을 요구하고 새 정신과 새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해에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옳은 생각, 옳은 언어, 옳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래야 삶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바뀌고, 신앙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새 아침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요구입니다.
첫째는 생각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가장 복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나쁜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똑같은 도구도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면 인류 공익을 위해서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옳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면 엄청난 재해를 불러오는 저주의 도구로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마음도 생활도 선해집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을 만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육신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생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생각 속에 온갖 잡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옳은 생각과 옳은 마음을 간직하여야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금년에는 무엇보다도 생각을 새롭게 하는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시각이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옳게 보고, 바르게 보고, 정확히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매사를 옳게 볼 때 오해가 없고 편견이 없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되면 정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시각의 굴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낙오하였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축복도 보는 것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기 전에 먼저 환상부터 주셨습니다. “네 자손을 땅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마도 그 약속 당시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서 별을 보여 주시면서 “보라 저 무수한 별들만큼 네게 자손을 주겠다.” 그리고 그를 광야로 데리고 가서 “보라 저 무수한 노래만큼 내가 네게 자손을 주겠다.”하고 약속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환상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풍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밤만 되면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내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거야.”하며 장래 이루어질 환상을 그려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밤만 되면 즐거웠을 것입니다. 또 낮이 되면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도 뜨겁거나 피곤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꿈을 꾸며 광활한 대지 위를 걸어갑니다. 먼 지평 위에 널려 있는 모래와 돌멩이들이 모두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기에 뜨거운 낮이 되어도 즐거웠을 것입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보였을 것이고, 대낮의 대지 위에 널려 있는 그 수많은 모래들은 또한 자손들의 수많은 머리로 보였을 것이니 가히 이런 광야의 생활이 그에게는 꿈의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각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현실적인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영롱한 환상부터 마음속에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청결한 마음, 깨끗한 시각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시각부터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공부방에 성화를 걸어 준다고 합니다. 그 성화를 바라보게 되면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해 주고, 성스러운 시각을 조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위인들의 사진을 보면서 또한 지혜와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알프스 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폴레옹의 사진을 보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감도 갖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각의 교정입니다.
그런데 탈선하는 아이들의 방에는 어딘가 문제가 있습니다. 공부방에 걸린 사진들과 꽂혀 있는 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여자 사진이 걸려 있을 것이고, 음란 기사로 가득 찬 잡지책들이 꽂혀 있을 것이고, 건전치 못한 퇴폐 음반들과 비디오 테이프들이 널려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서 과연 어떤 생각과 상상들이 떠오를 것입니까 경건한 가정과 세속적인 가정과의 차이는 그 집안의 장식물들을 통해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벽에 어떤 그림이 걸려 있고 진열장에 어떤 것이 놓여 있는지 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봄으로써 타락을 하였습니다. 롯의 아내가 보지 말아야 할 곳을 봄으로써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딸이 음란의 거리를 기웃거릴 때 강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보지 말아야 할 여체를 유심히 바라보았기 때문에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한밤중에 밖으로 불러내서 은구슬 금구슬을 뿌려 놓은 것과 같은 환상적인 밤하늘의 뭇 별들을 보이면서 약속을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환상을 주시려고, 꿈을 갖게 하시려고, 꿈의 영상을 환상 속에서, 생각 속에서 익어 가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지니고 환상을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셋째는 언어를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말의 공해 시대입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TV룰 켜 놓아도, 라디오를 틀어 놓아도, 언제나 우리는 쏟아져 나오는 언어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 다 말이 아닙니다. 책이 다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어 생활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서양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Good morning” “좋은 아침입니다.”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입버릇처럼 무의식중에 기지개를 켜면서 내뱉는 말이 “아이고 죽겠다.”입니다. 하는 일이 조금만 어려워도 내뱉는 말이 “죽고 싶다.”입니다. 부부가 다투어가 너무 쉽게 내뱉는 말도 “우리 갈라서자.”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은연중에 자신에게 암시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 암시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말을 하는데 진지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최면 학에서 잠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 “잠이 온다. 잠이 온다.”하고 암시를 주면 곧 잠이 오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같은 암시를 최면 학에서는 힌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장가가 나온 것입니다. 자라, 자라 하면 아이가 금방 잡니다. 또 “너는 바보다.”하고 어린아이에게 자주 힌트를 주면 그 아이는 진짜 자신을 바보로 믿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마다 소망 적인 자기 암시의 설교를 하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긍정적인 신앙인들 이 되어 가지만 세상 적인 어두운 면만을 자꾸 들추어내면 성도들은 “그러니 나만이라도 바로 살자.”하고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 정도쯤이야.”하고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의 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보는 꿈과 영롱한 환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삭막한 땅과 삼킬 듯한 메마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불가능”입니다. 그들은 끝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신앙인들 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매사에 불평이나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핑계하고 탓을 하다 보면 그의 생활에서 밝음과 소망이 사라지고 맙니다.
넷째는 옳은 의식을 갖는 일입니다. 성경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골3:9).”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그 사람의 생활을 지배합니다. 의식 구조가 잘못 되어 있으면 구태 의연해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첨단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아직도 구태 의연한 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되면 자유로운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옛날의 구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쓸데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아직도 조상 제사에 연연해서 어중간한 위치에서 서 있는 사람, 아이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작명소를 기웃거리는 사람, 정초만 되면 점치는 골목을 배회하는 사람,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사주와 택일을 놓고 고심하는 사람들, 아직도 남존여비의 사상에 찌든 채 부인을 천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묏자리에 연연하는 분 등 이 같은 정신들은 반드시 새로워져야 하고 고쳐져야 할 낡은 사고 방식과 의식 구조들입니다. 새 시대는 새 사람을 요구하고 새 정신과 새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해에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옳은 생각, 옳은 언어, 옳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래야 삶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바뀌고, 신앙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새 아침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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