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냄받은자의실체 (마10:16-22)
본문
어느 집에 아주 어린 꼬마 하나가 엄마에게 물어보기를 "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저 책은 누구의 것인가요" 하고 물었더랍니다. 어머니는 이 어린아이를 손목을 잡고 늘 교회 다녔지만 어린 것이 뭘 알랴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생각하고 퍽이나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이건 하나님의 책이야." 이 꼬마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면 하나님께 돌려보냅시다" 그러더랍니다. 나는 한 번도 엄마가 저 책을 보는 것을 못 봤으니까.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읽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받고 중생함을 받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고백하면서 이 말씀, 얼마나 사랑했느냐구요. 혹, 집에 가서 그 얹어 놓은 성경책에 먼지나 앉지 않았는지 한 번 털어 보세요. 제가 옛날에 심방을 많이 할 때 그 가정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은 제가 앉았다가 "성경을 찾으세요" 이렇게 하거든.
그런데 그 심방 받는 집 부모가 성경책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온통 집을 뒤지면서 "여기 있었는데 여기 있었는데" 이런 꼴을 보게 될 때 저는 목사로써 한 대 뺨을 맞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내가 목사가 어찌 신통치 않으면 교인들이 이 집에 성경이 있긴 있다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는구나, 그런 아픔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를 못하면 필연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유명한 칼 바르트는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리고 내 운명도 알게 되는 것이올시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유명한 성서 신학자인 오토 파이퍼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 교수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하는 말씀이 "자네들 그 종교 개혁을 마틴 루터가 일으킨 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일세" 라고 점잖게 말씀하십니다. 학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게 아니면 누가 한 거냐 도대체 그럼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노교수께서는 다시 천천히,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루터가 그 갈라디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말씀이 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그 사람을 폭발시켜서 루터는 그 진리를 전파하지 않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네." 종교개혁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한 것이라고 아주 신중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교롭게 제가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바로 마틴 루터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때에 루터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께서는 다른 것은 전부 참고하게 하고 오로지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한 학기 내내 Page by page, 읽고 토론하고 연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 주석을 두 번 썼습니다. 처음에 쓴 것은 좀 작고 뒤에 쓴 것은 아주 큰데 신구약 성경보다도 큽니다. 이 갈라디아 주석을 읽어 나가노라면 루터가 얼마나 갈라디아서에서 불같은 은혜를 받았는지 엄청난 생명력을 경험했는지를 우리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주는 진리, 이 생명력이 그를 포로해서, 그를 사로잡아서 마침내 종교개혁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가 나를 잡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말씀 마태복음 10장은 흔히 소명장, 사명장, 이렇게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부르신거죠. 부른 다음에는 바로 그들 속에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능력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보내십니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고 보내십니다. 그래서 이걸 이렇게 정리합니다. Calling, Giving, Sending.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올시다.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 다음엔 보내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있습니다. 내가 부름 받았어요. 그리고 내게 능력을 주셨어요. 그리고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내 삶의 현장은 바로 My Mission Field, 그곳이 바로 내 선교 현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내가 너를 보낸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들의 입에 말을 주리라. 순종만 하라. 그러면 내가 나를 위하여 역사할 것이다" 이렇게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오묘하고 두고두고 생각해야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와 같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성경 읽을 때마다 이 말씀에 불만이 있습니다.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줄 알면서 왜 보내는지. 생각해 보세요. 세상은 이리고 너희는 양이다. 아니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면 살라는 겁니까 죽으라는 겁니까 그런 줄 알면서도 보내신다니 이런 엄청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은 마치 이리와 같애요. 물어 찢고 싸우고. 그러나 양과 같은 사람들을 보냅니다. 여러분. 양이 뭡니까 양은 무능합니다. 양은 뿔도 없습니다. 사나운 이빨도 없습니다. 날개도 없습니다. 독도 없습니다. 양은 순진하고요 그리고 약하고 순종형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인도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이런 말씀이 있는데 실지적으로 상상을 해보세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목자가 인도하는데 양은 따라갑니다. 상상해보세요. 어느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때립니까 아니 코를 끼웠습니까, 목을 맸습니까, 발을 맸습니까 그냥 목자가 가면서 "따라와" 하면 졸랑졸랑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목자를 믿고 따라 가더라 이거예요. 이게 양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저를 여러분이 목사라고 부릅니다. 목사라는 말이 본래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양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내가 이제 가는 길로 여러분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따라와야 되는데 말이에요 가끔가다 보니까 염소가 있더라구요. 이 놈은 말을 안 들어.
그런데 양이 목자를 따라 갈 때는 코를 끼는 게 아니에요. 막대기로 때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앞서가면 좋은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믿고 따라가는 것이에요. 자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인데 오늘 여기 주신 말씀은 "너희는 양이다" 그랬어요. 처음도 양이고 마지막도 양이다.
그런데 요새는 이상해서 둔갑들을 잘하더라구요. 처음에는 양이다가 그 다음에는 고양이가 됐다가 그 다음에 여우가 됐다가 마지막에는 늑대가 되는 거라구요. 양이 그래 늑대를 만난다고 늑대가 되고 사자를 만났다고 호랑이가 되서 되겠습니까 양은 시종일관, 처음부터 양이고 죽을 때도 양으로 죽는 거예요.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올시다. 그래서 "너희는 양이다" 말씀하셨구요. 이리 가운데 살아도 너희는 양이다. 영원히 양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자세히 보면은 "뱀과 같이" 지혜는 뱀과 같이 하라. 또한 비사로서 무궁무진한 진리를 담아서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은 뱀을 볼일이 없지만 어렸을 때 뱀을 무척 많이 보았습니다. 뱀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다름이 아닙니다. 뭐 시골에 살았으니까 집안에도 뱀이 있구요. 어쩌다가 방에 들어가면 뱀이 있고 또 저는 어렸을 때 풀을 많이 베러 다녔는데 풀을 베러 다니면은 하루도 뱀을 안 보는 날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뱀을 보며 뱀과 함께 삽니다. 이 생태학적으로 보면 뱀은 중요합니다. 요새 이 철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걱정입니다만은 어쨌든 이 뱀이 많고 많아야 되는데 자 이 뱀을 자세히 보면은 그 색깔은 예쁩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짐승 중에 뱀처럼 열악한 여건에 있는 짐승이 없어요. 보세요. 하다못해 귀뚜라미도 발이 있는데 자 발이 있고 머리가 있고 또 그 다음에는 날개가 있든지 뿔이 있고 다들 뭔가 있는데 뱀은 기다란 막대기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걸 만일에 여건을 놓고 생각한다면 창조주에게 항의할만한 거예요. 왜 나는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철저하게 열악한 환경에 있지만은 뱀은 지혜로워요. 그 불편한 몸을 가지고 못 가는 데가 없어요. 헤엄도 잘 치고요, 나무도 잘 타고요, 그 숲속에 달릴 때 보면은 번개처럼 달립니다. 자, 여러분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습니까 왜 나는 날개가 없나, 나는 왜 발톱이 없나, 나는 왜 뿔이 없나……. 다 없어도 좋아요.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런가 하면 세상에 살지만은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 비둘기는 굶어 죽어도 먹어서는 안될 것은 안 먹어요. 아주 순결합니다. 그래서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에요.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 순결을 지켜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또 걱정도 하지 마라. 너희가 현장에 가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내가 일러주리라.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데 미리 들려주지도 않고 미리 알게 하지도 않고, 현장에 가서 부딪치면 그때에 들려주리라.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전도해 보셨습니까 오늘 여러분 혹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자라질 않나,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나' 생각하십니까 전도 안해서 그렇습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게 되면 믿음도 얻고 용기도 지혜도 얻게 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그 나이 많은 장로님의 아들 한 분이 있는데, 그게 오십 이세에 낳은 첫아들이에요. 너무 귀하게만 키웠는데 고등학생인데 아 이놈이 교회를 잘 안 다녀요.
그런데 장로님이 만날 때마다 걱정이 되서 "아, 곽목사님, 제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지도해 주세요" 하고 늘 얘기 하지만은 뭐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 앉아서 책을 보면서 앉았는데 뒤에서 듣던 목소리가 들려요. 가만히 제가 몰래 보니깐 바로 그 녀석이 탔더라구요. 그는 나를 못 봤고 나는 그를 보았는데 자기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전도를 하는데요,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나 전도를 잘하는지 바로 그 녀석이 말입니다. 아 그래서 가만히 듣고 보다가 차에서 내릴 때 가까이 가서 제가 어깨를 한번 탁 치니까 절 쳐다보아요. "아이 목사님" 그래서 내가 "야 너 전도 참 잘하더라. 목사 같더라 얘." 그랬더니 하는 말이 너무 재밌는 얘길 해서 잊질 않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예수를 잘 믿는 줄 나도 몰랐습니다"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전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줍니다요. 여러분, 봉사해 보세요. 뜨거운 가슴을 줍니다. 근데 우리가 언제나 문제가 있지요. 머리(Murrey)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의 사도행전 연구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교인들은 잘못하는 게 있다. 성경에 사도행전에는 충만 자체를 위해서 기도한 흔적이 없다" 그랬습니다. 근데 우리는 충만 기다리다가 파장 보거든요. 현장에 가야 충만이 있지 안방에서 충만이 있는 게 아니에요. 골방에 충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핍박받는 그 현장에 가서 딱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하면 그 때에 요새말로 팍팍 주시는 겁니다 아주 그냥. 거기에 충만함이 있는 거예요. 충만 기다릴라 그러지 마세요. 보냄 받은 자란 기쁜 마음으로 믿고 나가고 거기에 충만함과 용기가 있는 것이지요. 저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늘 감사하게, 참 감동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만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문이 바로 이겁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의 맛을 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주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그처럼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 뜨거운 불타는 사랑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셨던 거거든요. 우리를 사랑하는 그 불타는 사랑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는데 나도 그 같은 불타는 사랑을 가지게 해 주세요.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우리 가슴에 주님의 가슴에 있었던 사랑,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같은 뜨거운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오로지 충성, 오로지 사랑,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지어 갑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견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 충성하며 자기를 이기고 주께서 사랑하신 자를 사랑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 정체와 실체를 지켜서 사랑과 충성으로 일관하는, 이제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기쁘게 하는 생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하여 그리고 그의 능력을 받아서 그의 은혜 가운데 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아인슈타인 박사가 제자들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무궁무진한 지식, 그 엄청난 탐구열, 그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물 컵에다 손가락을 넣었다가 꺼내서 물 한 방울 달랑 떨어지는 걸 보이면서 "내 지식은 이것만도 못하다. 저 바닷물에 요 물 한 방울만도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라고 말씀을 했구요. 또 묻기를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성공 비결을 말해 주었습니다. 성공을 S라고 할 때 S=X+Y+Z라고 공식으로 말했습니다. X는 말을 많이 하지 말어. 말이 많으면 생각이 복잡해지고 말의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돼. 그러니까 말을 적게 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 두 번째는 Y는 생을 즐기는 사람이 되라. 무슨 일을 하던지 기쁜 마음으로 Enjoy 하는 마음으로 하라. 연구도 Enjoy 하는 거예요. 즐기는 거예요. 거기에 비결이 있고 Z는 한가한 시간을 가져라. 일한다고 일에 빠져 버리고 연구한다고 연구에 미쳐버리지 마라. 한가한 시간을 가져서 내가 누군가, 내 정체에 대해서 항상 생각할 줄 알고 자기자신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보냄 받은 사람들, 우리는 바로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능력 받고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나의 나됨을 다시 한 번 물으세요. 그러면 내가 가야할 길이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 길에서 떠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정력을 다 쏟아 버리면 항상 주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주의 크신 뜻을 이루어 갈 때 그 속에서 우리 또한 무한한 행복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저희를 부르심을 압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능력도 주셨고 그리고 우리 생활 현장으로 보내주신 것을 압니다. 자비하신 주여, 보냄받은 자의 확실한 정체의식, 확실한 현장의식, 확실한 실체의식을 가지고 오늘도 살게 하셔서 저희를 보내신 자, 또 저와 함께하는 자, 저의 안에 역사하시는 자의 능력을 매일같이 체험하면서 감사와 체험으로 일관한 그런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데 그 심방 받는 집 부모가 성경책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 온통 집을 뒤지면서 "여기 있었는데 여기 있었는데" 이런 꼴을 보게 될 때 저는 목사로써 한 대 뺨을 맞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내가 목사가 어찌 신통치 않으면 교인들이 이 집에 성경이 있긴 있다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는구나, 그런 아픔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를 못하면 필연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유명한 칼 바르트는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리고 내 운명도 알게 되는 것이올시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유명한 성서 신학자인 오토 파이퍼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 교수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하는 말씀이 "자네들 그 종교 개혁을 마틴 루터가 일으킨 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일세" 라고 점잖게 말씀하십니다. 학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게 아니면 누가 한 거냐 도대체 그럼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노교수께서는 다시 천천히,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루터가 그 갈라디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말씀이 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그 사람을 폭발시켜서 루터는 그 진리를 전파하지 않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네." 종교개혁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한 것이라고 아주 신중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교롭게 제가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바로 마틴 루터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때에 루터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께서는 다른 것은 전부 참고하게 하고 오로지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한 학기 내내 Page by page, 읽고 토론하고 연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루터는 갈라디아 주석을 두 번 썼습니다. 처음에 쓴 것은 좀 작고 뒤에 쓴 것은 아주 큰데 신구약 성경보다도 큽니다. 이 갈라디아 주석을 읽어 나가노라면 루터가 얼마나 갈라디아서에서 불같은 은혜를 받았는지 엄청난 생명력을 경험했는지를 우리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주는 진리, 이 생명력이 그를 포로해서, 그를 사로잡아서 마침내 종교개혁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가 나를 잡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말씀 마태복음 10장은 흔히 소명장, 사명장, 이렇게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부르신거죠. 부른 다음에는 바로 그들 속에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능력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보내십니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고 보내십니다. 그래서 이걸 이렇게 정리합니다. Calling, Giving, Sending.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올시다.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 다음엔 보내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있습니다. 내가 부름 받았어요. 그리고 내게 능력을 주셨어요. 그리고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내 삶의 현장은 바로 My Mission Field, 그곳이 바로 내 선교 현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내가 너를 보낸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들의 입에 말을 주리라. 순종만 하라. 그러면 내가 나를 위하여 역사할 것이다" 이렇게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오묘하고 두고두고 생각해야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와 같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성경 읽을 때마다 이 말씀에 불만이 있습니다.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줄 알면서 왜 보내는지. 생각해 보세요. 세상은 이리고 너희는 양이다. 아니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면 살라는 겁니까 죽으라는 겁니까 그런 줄 알면서도 보내신다니 이런 엄청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은 마치 이리와 같애요. 물어 찢고 싸우고. 그러나 양과 같은 사람들을 보냅니다. 여러분. 양이 뭡니까 양은 무능합니다. 양은 뿔도 없습니다. 사나운 이빨도 없습니다. 날개도 없습니다. 독도 없습니다. 양은 순진하고요 그리고 약하고 순종형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인도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이런 말씀이 있는데 실지적으로 상상을 해보세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목자가 인도하는데 양은 따라갑니다. 상상해보세요. 어느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때립니까 아니 코를 끼웠습니까, 목을 맸습니까, 발을 맸습니까 그냥 목자가 가면서 "따라와" 하면 졸랑졸랑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목자를 믿고 따라 가더라 이거예요. 이게 양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저를 여러분이 목사라고 부릅니다. 목사라는 말이 본래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양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내가 이제 가는 길로 여러분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따라와야 되는데 말이에요 가끔가다 보니까 염소가 있더라구요. 이 놈은 말을 안 들어.
그런데 양이 목자를 따라 갈 때는 코를 끼는 게 아니에요. 막대기로 때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앞서가면 좋은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믿고 따라가는 것이에요. 자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인데 오늘 여기 주신 말씀은 "너희는 양이다" 그랬어요. 처음도 양이고 마지막도 양이다.
그런데 요새는 이상해서 둔갑들을 잘하더라구요. 처음에는 양이다가 그 다음에는 고양이가 됐다가 그 다음에 여우가 됐다가 마지막에는 늑대가 되는 거라구요. 양이 그래 늑대를 만난다고 늑대가 되고 사자를 만났다고 호랑이가 되서 되겠습니까 양은 시종일관, 처음부터 양이고 죽을 때도 양으로 죽는 거예요.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올시다. 그래서 "너희는 양이다" 말씀하셨구요. 이리 가운데 살아도 너희는 양이다. 영원히 양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자세히 보면은 "뱀과 같이" 지혜는 뱀과 같이 하라. 또한 비사로서 무궁무진한 진리를 담아서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은 뱀을 볼일이 없지만 어렸을 때 뱀을 무척 많이 보았습니다. 뱀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다름이 아닙니다. 뭐 시골에 살았으니까 집안에도 뱀이 있구요. 어쩌다가 방에 들어가면 뱀이 있고 또 저는 어렸을 때 풀을 많이 베러 다녔는데 풀을 베러 다니면은 하루도 뱀을 안 보는 날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뱀을 보며 뱀과 함께 삽니다. 이 생태학적으로 보면 뱀은 중요합니다. 요새 이 철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걱정입니다만은 어쨌든 이 뱀이 많고 많아야 되는데 자 이 뱀을 자세히 보면은 그 색깔은 예쁩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짐승 중에 뱀처럼 열악한 여건에 있는 짐승이 없어요. 보세요. 하다못해 귀뚜라미도 발이 있는데 자 발이 있고 머리가 있고 또 그 다음에는 날개가 있든지 뿔이 있고 다들 뭔가 있는데 뱀은 기다란 막대기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걸 만일에 여건을 놓고 생각한다면 창조주에게 항의할만한 거예요. 왜 나는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철저하게 열악한 환경에 있지만은 뱀은 지혜로워요. 그 불편한 몸을 가지고 못 가는 데가 없어요. 헤엄도 잘 치고요, 나무도 잘 타고요, 그 숲속에 달릴 때 보면은 번개처럼 달립니다. 자, 여러분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습니까 왜 나는 날개가 없나, 나는 왜 발톱이 없나, 나는 왜 뿔이 없나……. 다 없어도 좋아요.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런가 하면 세상에 살지만은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 비둘기는 굶어 죽어도 먹어서는 안될 것은 안 먹어요. 아주 순결합니다. 그래서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에요.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 순결을 지켜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또 걱정도 하지 마라. 너희가 현장에 가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내가 일러주리라.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데 미리 들려주지도 않고 미리 알게 하지도 않고, 현장에 가서 부딪치면 그때에 들려주리라.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전도해 보셨습니까 오늘 여러분 혹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자라질 않나,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나' 생각하십니까 전도 안해서 그렇습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게 되면 믿음도 얻고 용기도 지혜도 얻게 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그 나이 많은 장로님의 아들 한 분이 있는데, 그게 오십 이세에 낳은 첫아들이에요. 너무 귀하게만 키웠는데 고등학생인데 아 이놈이 교회를 잘 안 다녀요.
그런데 장로님이 만날 때마다 걱정이 되서 "아, 곽목사님, 제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지도해 주세요" 하고 늘 얘기 하지만은 뭐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는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 앉아서 책을 보면서 앉았는데 뒤에서 듣던 목소리가 들려요. 가만히 제가 몰래 보니깐 바로 그 녀석이 탔더라구요. 그는 나를 못 봤고 나는 그를 보았는데 자기 친구들하고 같이 앉아서 전도를 하는데요,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나 전도를 잘하는지 바로 그 녀석이 말입니다. 아 그래서 가만히 듣고 보다가 차에서 내릴 때 가까이 가서 제가 어깨를 한번 탁 치니까 절 쳐다보아요. "아이 목사님" 그래서 내가 "야 너 전도 참 잘하더라. 목사 같더라 얘." 그랬더니 하는 말이 너무 재밌는 얘길 해서 잊질 않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예수를 잘 믿는 줄 나도 몰랐습니다"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전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줍니다요. 여러분, 봉사해 보세요. 뜨거운 가슴을 줍니다. 근데 우리가 언제나 문제가 있지요. 머리(Murrey)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의 사도행전 연구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교인들은 잘못하는 게 있다. 성경에 사도행전에는 충만 자체를 위해서 기도한 흔적이 없다" 그랬습니다. 근데 우리는 충만 기다리다가 파장 보거든요. 현장에 가야 충만이 있지 안방에서 충만이 있는 게 아니에요. 골방에 충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핍박받는 그 현장에 가서 딱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하면 그 때에 요새말로 팍팍 주시는 겁니다 아주 그냥. 거기에 충만함이 있는 거예요. 충만 기다릴라 그러지 마세요. 보냄 받은 자란 기쁜 마음으로 믿고 나가고 거기에 충만함과 용기가 있는 것이지요. 저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늘 감사하게, 참 감동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만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문이 바로 이겁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의 맛을 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주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그처럼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 뜨거운 불타는 사랑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셨던 거거든요. 우리를 사랑하는 그 불타는 사랑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는데 나도 그 같은 불타는 사랑을 가지게 해 주세요.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우리 가슴에 주님의 가슴에 있었던 사랑,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같은 뜨거운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오로지 충성, 오로지 사랑,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결론을 지어 갑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견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 충성하며 자기를 이기고 주께서 사랑하신 자를 사랑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 정체와 실체를 지켜서 사랑과 충성으로 일관하는, 이제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기쁘게 하는 생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하여 그리고 그의 능력을 받아서 그의 은혜 가운데 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아인슈타인 박사가 제자들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무궁무진한 지식, 그 엄청난 탐구열, 그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아인슈타인은 말하기를 물 컵에다 손가락을 넣었다가 꺼내서 물 한 방울 달랑 떨어지는 걸 보이면서 "내 지식은 이것만도 못하다. 저 바닷물에 요 물 한 방울만도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라고 말씀을 했구요. 또 묻기를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성공 비결을 말해 주었습니다. 성공을 S라고 할 때 S=X+Y+Z라고 공식으로 말했습니다. X는 말을 많이 하지 말어. 말이 많으면 생각이 복잡해지고 말의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돼. 그러니까 말을 적게 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 두 번째는 Y는 생을 즐기는 사람이 되라. 무슨 일을 하던지 기쁜 마음으로 Enjoy 하는 마음으로 하라. 연구도 Enjoy 하는 거예요. 즐기는 거예요. 거기에 비결이 있고 Z는 한가한 시간을 가져라. 일한다고 일에 빠져 버리고 연구한다고 연구에 미쳐버리지 마라. 한가한 시간을 가져서 내가 누군가, 내 정체에 대해서 항상 생각할 줄 알고 자기자신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보냄 받은 사람들, 우리는 바로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능력 받고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나의 나됨을 다시 한 번 물으세요. 그러면 내가 가야할 길이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 길에서 떠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정력을 다 쏟아 버리면 항상 주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주의 크신 뜻을 이루어 갈 때 그 속에서 우리 또한 무한한 행복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저희를 부르심을 압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능력도 주셨고 그리고 우리 생활 현장으로 보내주신 것을 압니다. 자비하신 주여, 보냄받은 자의 확실한 정체의식, 확실한 현장의식, 확실한 실체의식을 가지고 오늘도 살게 하셔서 저희를 보내신 자, 또 저와 함께하는 자, 저의 안에 역사하시는 자의 능력을 매일같이 체험하면서 감사와 체험으로 일관한 그런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