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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것 (전7:1-10)

본문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보다 좋은 것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보다 좋은 직장,보다 좋은 사람,보다 좋은 환경,보다 좋은 배우자 또 같은 값이면 보다 좋은 학교를 찾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본문 에서 전도자 솔로몬은 보다 좋은 것들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7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입니다. 두번째,"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기 전에 표면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그러면 다 죽자 라고 결심하지는 마십시오 세번째,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입니다. 네번째,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입니다. 다섯번째,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입니다. 이 말씀을 짧게 줄이면 "책망이 노래보다 낫고"입니다. 여섯번째, "끝이 시작보다 낫고" 입니다. 일곱번째,"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고"입니다.
1.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갖는 명예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아름다운 이름은 하나님께 드러난 나 자신의 실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진 존재 새롭게 된 나를 말합니다. 그것이 좋은 이름인 것입니다.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재산을 대표 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재물입니다. 재산입니다. 부요함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재물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이 더 낫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이름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그 이름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나의 존재와 인격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어떤 인격과 어떤 존재로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것은 재물의 추구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전도서 기자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성경에 보면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선택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 나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옥합을 깨뜨려서 그 속에 있던 보베로운 기름을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이 행동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실망을 주었습니까 아니 그 보배롭고 비싼 기름을 가지고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면 얼마나 소중하게 쓸 수 있는데 헛된 일에 왜 낭비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여인을 나무라는 여인들을 나무라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이 기억되리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서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 준 사람들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라는 말의 뜻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 라는 뜻입니다. 높은 아버지에서, 그렇게도 도도했고, 지체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많은 사람의 아버지"로 바뀌었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삭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아버지, 즉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로,신앙의 아버지로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래는 사라로 바뀌었습니다. 사래 란 말의 뜻은 다투는 여자 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여주인 이라는 뜻의 사라 로 바뀌었습니다 남과 더불어 함께 살지 못하고 다투기를 좋아하고 시샘하기를 좋아하던 그런 여자가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주모로서의 사명을 다하면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여자로 바뀐 것입니다. 야곱도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이란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뀐 것입니다. 남의 발뒤꿈치를 잡고 살던 야곱이 변해서 하나님과 정정 당당하게 겨루어 승부를 내고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큰 자 라는 이름을 가졌던 사울이 작은 자 바울로 바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큰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가 됩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고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는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큰 자였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존재로 변하여 새사람,새롭게 된 피조물,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말의 뜻은 예수 안에서 변화되어 새로워진 존재 새롭게 된 내가 되는 것이 세상의 부귀 영화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혐오감과 증오심을 일으키는 이름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인류 사회와 교회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 이름이 오고,오는 세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이름이냐,즉 어떤 이름을 남겼느냐입니다.
우리가 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로마 총독으로서 최후의 순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도 좋다고 최종적인 심판을 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기독교 역사와 신앙 고백이 형성된 이래로 전세계 교회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으로 고백해 왔고 앞으로도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고백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얼마 만큼 물질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까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런 사실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이름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예수님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그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더 존귀하고 아름답고 숙연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 이름으로 구원받고 이 이름으로 기도하고 이 이름을 전파합니다. 이름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인격입니다. 이름은 존재입니다. 이름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이름을,어떤 삶을 남기고 계십니까 빌립보서 2장 6-10절 말씀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 이름보다 이 세상에서 더 존귀하고 놀랍고 위대하게 추앙되는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이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신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도 본문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보배로운 기름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름다운 이름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민족 집단 공동체 속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야 합니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떤 이름을 남기느냐 어떤 흔적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치 있는 이름은 가치 있게 살 때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복음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그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보배로운 기름을 구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추구함이 낫다고 증언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오늘 어떤 삶입니까 여러분은 보배로운 기름을 구하십니까 아름다운 이름을 구하십니까 오늘 삶의 길을 걸어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배로운 기름을 구하고 있지만 성겅은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구합니다." 여러분은 자손들에게 이웃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까요 여러분의 이름이 불리워질 때 그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혹 의도적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잊어 버리고 싶어하지는 않을는지요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영향력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자손들에게 몇 푼의 돈보다도 아버지의 소중하고, 신실하고,정직했던 삶의 내용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아버지는 가난했어요,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정직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주님을 사랑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교회에서 기억되었어요." 여러분은 이름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부요함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증언합니다.
2."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 입니다. 두 가지가 같은 내용이므로 이것들을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이 말은 죽음 자체가 더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출생 이후에 살게 될 세상과 죽은 다음에 살게 될 세상을 비교해 보니 태어나는 것 보다는 죽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세상은 시한부요 잠깐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저도 가고 여러분도 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웃고 사는 시간보다 근심 가운데 빠져 사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그곳은 영원한 세계로서 눈물도,한숨도,죽음도,아픔도,고충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솔로몬은 죽음에 임박해서 세상 사람이 가는 모든 길로 나도 간다 고 증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은 나의 길 입니다. 그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나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는 죽음의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초상집에서 듣습니다. 그래서 만약 양혼을 준비하고 죽음 저 건너편에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죽음 저 건너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면 그래서 죽음 저 건너편을 향해서 우리가 위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소망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중에서 죽음을 축하하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장례식 찬송을 부르면서 여러분도 동일한 감정을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례식 찬송 가운데 즐겁다는 낱말이 많이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솔직히 좀 미안합니다. 초상집에서 자꾸만 즐겁다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또한편으로 생각해 봅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확실한 소망 때문에 이 구원받은 기쁨을,하나님을 만날 이 기쁨을,당당히 선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종교가 부활과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를 제외하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리고 모든 문화가 출생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축하할 수가 있는 것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만이 가지는 위대한 위력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육체를 버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내가 찬양하고 기도한 그 주님 앞에 얼굴을 맞대고 영광스럽게 서게 되는 그 만남이라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22절-23절 말씀에서 "나도 삶을 즐길 수 있다. 내게는 삶도 가치있고 보람있지만 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열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는 더 좋은 것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죽음 부활의 위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잔치집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잔치를 즐기고 파티를 즐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고 증언합니다. 떠들석한 잔치집에서 우리는 망각을 합니다. 망각은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괜히 들뜹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합니까초상집에 가는 사람마다 철학자가 됩니다. 우리는 초상집에 가서 생각합니다. 바로 이 생각이 귀합니다. 나도 죽을터인데 죽음 저 건너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서 이 초상집을 통해서 교훈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죽음을 통해서 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내 사랑하는 이웃들과 친척들과 가까이 지냈던 이들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죽음을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다면 초상집은 내 삶 속에 놀라운 가르침을 준 것입니다. 잔치집에서 한바탕 먹고 나왔지만 끝나고 나니까 남은 것은 배탈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다녀와서 우리가 깨달은 엄숙한 인생의 자각이 있습니다. 그것은"사람이 한 번 죽는 것도 정한 이치이고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는 이유는
1. 초상집에 가면 인생의 의미와 한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2.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3.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3."슬픔이 웃음보다 낫고"'3절' 웃어야 할 때는 웃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티없이 맑은 웃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까 그러나 모든 웃움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필요없이 웃어야 하는 순간들, 억지로 웃어야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웃음의 그 배후에는 가면이 있습니다. 이런 웃음보다는 슬픔이 차라리 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슬픔 속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우리는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가장 진실하게 치료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흘릴 수 있는 눈물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눈물을 감사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울면서 치료받습니다. 눈물은 치료입니다.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우십시오,눈물이 메마른 것을 슬퍼하십시오,내눈에서 눈물이 마르는 날,우리는 삶의 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슬픔속에는 진실이 있고 치료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성경 기자는 어떻게 설명합니까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마음의 병이 있어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면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울립니다. 그것이 치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치료방법이 개발되기 훨씬 오래 전에 전도서 기자는 이 놀라운 하늘의 지혜를 통해서 인생의 진실을 얼마나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성경에는 예수님의 웃음에 대해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약성경에 세 번이나 예수님의 눈물이 기록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우리 주님의 눈물, 이 눈물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인생의 진실 앞에 부딪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미없이 웃으면서도피합니다. 많은 경우에 필요 없는 웃음들은 일종의 도피입니다. 의미없이 웃는 사람을 보십시오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도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걸이 아닙니다. 슬픔은 우리를 현실 앞에 부딪치게 합니다. 신앙은 결코 현실을 도피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을 직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워 승리할 것인가를 가르침니다. 여기에 성경에 위대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좋은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좋지 않은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은 기쁨보다도 슬픔의 사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은 승리보다도 패배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은 내가 그렇게도 존경하는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이삭,모세 등 위대한 영웅들이 형편없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이사실을 보여 주면서 성경은 "너도 그렇게 실패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패하는 순간에 절망하지는 말아라,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이렇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라고 교훈합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은 웃음보다 낫습니다.
4."책망이 노래보다 나고"'5절'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5절' 이 말씀을 읽고 나서 "이제부터 우리 교회에서 성가대를 없애고 책망만 하기로 시작하십시다"라고 결심하는 분이 계시다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래는 찬양과는 본질적으로 다름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노래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덕이 될 수 없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세속적인 노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우매한 사람들의 노래보다는 지혜 있는 사람들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얼마나 더 소중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서로 교제할 때 그것이 진정한 교제가 되려면 어디까지 와야 하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정상적인 성도의 교제, 가장 깊은 의미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해 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계에 이르기 전에 책망부터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다음에 피차에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깊은 신앙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책망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오를 수 있다면 그 교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성도의 교제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모일 때마다 서로 죄를 고하며 병낫기를 위해서 서로 기도하라" 우리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서로의 잘못을 고하며 서로가 서로를 고치는 그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때 책망 먼저 하려고 하면 오히려 인간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통해서 아니 일반적인 상식을 통해서 그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 이렇게들 말합니다. "제가 참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저를 좀 책망해 주십시오"
그런데 책망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고는 소중한 것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교제하는 목표는 너와 내가 서로 신뢰하면서 서로의 약점을 이야기하고 고쳐 주는 그 단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책망보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 기분은 좋습니다. 그러나 무모하고 부당한 칭찬은 올바른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충고나 책망이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는 양약이 된다고 잠언은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5."끝이 시작보다 낫고" '8절상' 우리 한국 민족처럼 시작을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시작을 얼마나 거창하게 벌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고 교훈합니다. 차라리 시작은 소리없이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거창하게 벌입니다. 한국 교회를 보면 참 재미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개척 교회들을 보면 조그마한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름을 아주 거창하게 답니다. "아세아교회세계 선교교회", "극동 중앙교회", 세계로 교회" 이 세상에서 제일 흔한 교회 이름을 아십니까 "제일교회" 시작이 다 그래요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씨를 뿌리는것도 중요하지만 결실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농사가 잘되었어도 벼 이삭이 올라와 벼꽃이 피었을 때 바람이 한 번 불고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마라톤의 경우도 아무리 처음에 출발을 잘해서 선두를 달렸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결승점에서 선두로 들어가야 일등이지 출발을 잘했다고 일등은 아닌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해서 교회를 섬겼고 자기책임을 다했어도 마지막 결승점인 심판대 앞에까지 즉,우리를 영접하시고 상 주시는 주님 앞까지 꾸준히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실 때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천국에 대한 비유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처럼 시작됩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를 향해서 어떠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하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끼치고 있는 막강한 그리고 위대한 영향력을 보십시오.우리는 어디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까 우리는 언제나 시작보다 끝에 더 소중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결산할 것인가 나는 책임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 나는 내 일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우리는 시작보다도 끝에 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의 서곡보다 삶의 마지막을 중시해야 합니다. "왕년에 내가"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현재는 별 볼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마무리지어질 때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드러낼 것입니까 지혜자는 "끝이 시작보다 낫고" 라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말론적인 종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말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은 끝이 온다"는 이 심각성 앞에서 오늘을 결단할 때 오늘 우리의 삶은 가장 진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삶의 특성을 "종말론적인 삶" 이라고 말합니다.
그이야기는 밤낮 종말이 온다는 것만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삶은 결산되어야 할 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삶은 그저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산된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 온 삶을 결산할 엄숙한 시간이 다가온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오늘을 살아라. 이 마지막의 빛 앞에서 현재를 살아라" 이것이 기독교의 멧세지입니다. 6."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고 " '8절하' 이 말씀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참을 수 없고 하던 일의 끝을 맺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일은 내가 아니면 안 되지" 라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더 잘되지" 라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일을 끝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보다 좋다고 전도자는 말한 것입니다. 차라리 입 꾹 다물고 참는 쪽이 유익하고 좋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러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떠나야겠는데 그 당시 사무엘 선지자가 그곳에 있지 않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선지자를 대신해서 자기가 스스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막 끝났을 때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이 왕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라고 묻자 사울은 "기다리다 사무엘 선지자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대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시대가 끝났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경박하게 처신하고 경거 망동하는 왕이라면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여러분 내가 상처받았을 때에 폭발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폭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능적이고 일상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삶을 배운 지혜로운 사람은 교만하기보다 차라리 인내합니다. 인내는 감정의 폭발이 아닙니다. 인내는 의지의 덕입니다. 성경은 왜 인내의덕을 강조 합니까 성경이 강조하는 모든 덕 가운데는 인내의 덕보다 더 강조된 덕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내의 덕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띠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래 참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또한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참는 순간 우리는 그분을 닮습니다. 야고보서 1장1절-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인생은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시험으로 가득차 있습니다.그러나 시험을 만날 때 본문은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왜입니까 3절과4절 말씀 "이는 너희 맏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 인격의 중요한 부분으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래서 인내를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시련을 허용하십니다. 삶의 모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은 "나" 라는 인격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주 예수의 아름다우신 형상을 닮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폭발하는 것보다 인내하는 것이 더 낫다" 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지혜로운 삶의 교훈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시작을 추억하십니까 아니면 영광스러운 완성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쉽게 폭발하십니까 아니면 참으며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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