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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를 원하나이다 (마2:29-34)

본문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실 때에 길 가에서 구걸하는 두 거지를 만났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소경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바디메오라고 했습니다. (막10: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그런데 이 당시 이들 소경들은 다른 육신에 병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대개가 다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소경들도 틀림없이 구걸하는 거지 생활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에게 오늘, 현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어제도 그날이고, 오늘도 어제나 다 변함이 없이 비참함 뿐이었습니다. 또 이들에게 미래가 있다해도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아무리 몸부림 쳐도 변화가 없습니다. 애를 써도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제자신들의 병이 낫게 되는 기대는 완전히 포기하고 그저 그들의 생각은 오늘,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아 구걸을 많이 해서 한 푼이라도 더 얻을 수 있어서 한 끼 밥이라도 먹을까하는 기대 뿐입니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며 바라보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자비로운 손길 뿐입니다. 여러분, 이 소경이 누구라고 생각됩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 모두가 다 이 같은 것이라고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 없는 인생 뿐인 인생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무슨 인생에게 좋은 기대할만한 미래가 있습니까 이런 말씀에 대하여 모르는 소리 말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 말하는 목사 네가 미래가 없지 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느냐 따질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 말이 아닙니다. 해 아래 있는 인생치고 이 소경같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밖에 있는 인생은 다 그러합니다. 먼저 소경아닌 인생이 있습니까 인생이 그 지식을 자랑하나 그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보지 못합니다. 참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지 못하는 원시치 못한 지극한 근시적인 안목만을 가지고 비판 평가하는 어리석은 아이 같은 인생 아닙니까 육신의 눈이 보인다고 세상의 지식의 눈이 있다고 영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것은 영으로라야 봅니다. 오늘 짧은 시간만 맞추어서 아무리 준비를 했다고 할지라도 인생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존재가 사람만이 있는 것 아닙니다. 또 자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존재의 그 종류의 수조차도 셀 수 없이 크고 넓고, 많은 존재가 있습니다. 인생이 알면 얼마나 알며, 보면 얼마나 보겠습니까 인생들이 하는 일이란 또 무엇입니까 제법 세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 같고, 국가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니 대단히 큰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구걸하는 행위아닌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으로서 무슨 의로운 일을 하며, 거룩한 일을 합니까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다 남의 덕을 보고서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구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떠난 인생이 과연 이 소경같은 구걸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다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위하기 위해서 남에게 해나 주고, 남을 밟아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로 알고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잘난 자로 보지 맙시다. 다 구걸하는 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지극히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생의 자치를 알아 참 인생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 없는 인생 가운데 어디 있습니까 다 인생을 의지하여 사는 구걸하는 인생입니다. 또 이 인생에게 바라볼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 소경들도 낫기를 포기하고 살아갔습니다. 아예 그들의 눈이 띄어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인생들이 죄문제, 사망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문제인데, 이를 생각하고 해결해야하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는 인생이 죽음을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마치 수술하여 회생할 시기를 넘긴 암환자의 배를 의사가 포기할 때에 그 배를 다시 덮으면서 위로하고 집에가서 편안히 쉬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인생은 차라리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덜 괴로울 것입니다. 나을 소망이 없으니, 잊고, 차라리 하루 하루 살아서 숨쉬는 것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큰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일생에 없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름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잊고 사는 이 소경들에게 갑자기 많은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구걸의 동정을 받을 기회가 생긴 것으로 알고서 사람들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소경들에게는 혁명적인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이 지나가면 병신 노릇을 더 잘하므로 더 큰 동정을 받으려고 했었는데, 오늘은 다릅니다. 그런 기대감은 다 사라졌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에 돈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어떤 것으로 기억됩니까 생일이 귀하고, 결혼일은 귀한 줄 알지만, 과연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일생에 가장 귀하고 복된 시간은 예수님을 만난 그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어두워 찾아갈 수도 없고, 또 어디에 계시는지 만날 수도 없는데 오늘 이 여리고를 떠나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장님의 눈도 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는 그 능력의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그 소경들에게 사라졌던 포기했던 소망이 살아납니다. “이분만 만나면 우리는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 이분을 만나면 눈이 띄어질것이라”는 확신과 소망과 큰 기대를 가지고서 주님을 부르짖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보고 싶은 열정은 어떤 누구 보다도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못 만난 것은 소경이요, 가난하고 멸시받는 거지라서 누가 저희들에게 관심이나 가져줍니까 “아, 예수님을 만나 보았으면 한이 없겠는데.그러나 우리같은 거지를 소경을 그 선하신 주님이 만나주시겠나” 하고 안타까와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지금 저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십니다. 여러분,이 주님께서 이 곳을 지나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은 이 소경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죄 가운데에서 소망없이 세월만을 보내야하였는데, 그러다가 말 인생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 멸망에 들어가야하는 우리 처지 아닙니까 이 미래를 모르는 인생이지만, 이를 또 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래서 다 포기하고 낙심하면서. 나 같은 자가 어떻게 구원을 입겠으며, 하나님이 계신들 어떻게 내게까지 관심이나 가지겠는가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입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이런 일이 또 있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그 높고 크신 이 하나님께서 세상도 나도 버릴 수 밖에 없어 버린 나를 위해, 글세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못난 죄인 소경되고, 구걸하는 나에게 관심만 가져 주어도, 감사 감사하겠는데, 모든 사람 가운데서도 천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으셨으니, 이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러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면서 이 소경들을 만나려고 지나가셨습니다. 이 소문을 들었을 때에 소경들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주님은 지나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리고는 세상입니다. 세상 현실 현실 가운데서 지나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현실은 그냥 주시는 현실이 아닙니다. 이 현실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느냐, 아니면, 그냥 지나가버리고 마느냐 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이 기회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언제나 찾아오시는 주님은 아닙니다. 재림의 주님은 영광의 주님으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오늘이 기회입니다. 이 소경들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20: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점잖게 지성적으로 기도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주 절박한 때에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이를 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사고가 나서 자기가 죽게되었습니다. 이때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에 넥타이 고쳐 매고, 목소리를 점잖게 내면서 정중하게 “선생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요청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때에 무슨 점잔이나, 지성이 필요합니까 살려달라고 고함이라도 질러야할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경들이 고침을 받은 것은
첫째로, 주님을 사모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가 왔을 때에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 없이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여러분의 머리에만 남아 있다면, 이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의 교양으로만 남아 있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결정적인 기회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가 지나가십니다. 계속하여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새벽기도에서 들으실 수도 있고, 예배 시간에도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의 전체에서 성령님으로 역사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불치병으로, 고난으로, 사고로 괴로워 할 때에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이 때에 은혜의 주님이 지나가십니다.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찾아야합니다. 만나야합니다. 이 소경이 구원을 받은 것은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만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마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그들은 이 소경들이 주님을 만나러 오는 데에 오히려 방해를 했습니다. 이들은 소경보다는 주님을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먼저 안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계속 따라 다닌 자들입니다. 세리장이요 키가 작은 사람이었던 삭개오가 여리고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을 때에도 그는 자기 앞에 가리고 있는 무리들 때문에 주님이 가리워져서 나아가지 못한 것 같이, 오늘 신앙의 첫걸음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믿는 자들이 신앙의 본이 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어야하는것이 마땅하지만, 오히려 방해세력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앞선 자들은 이를 조심해야합니다. 말이나 행위를 함부로 하면 안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가 함부로 하는 말에도 믿음이 어린 사람들, 이제 신앙에 대하여 첫 걸음을 걸으려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힘을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이제 신앙걸음을 하는 분들, 여러분들은 사람 보고 신앙생활을 하면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믿음에 앞섰다고 하는 분들의 지도를 받아야하지만, 그들이 주님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도 그것을 사람이라 그렇다고 이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만을 더 의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소경들 보십시오. 31절에 이들은 주님을 만날려고 하는데 방해하는 세력들에게 막히지 않습니다. 더욱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막힘이 있을 때에 우리는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핑계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러나 이 소경들은 달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이번 기회에 주님을 놓치면 다시는 못 만날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기회가 또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가시는 주님을 만나는데에 결사적이었습니다. 방해가 있을 때에 막히지 않고, 할 수 없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더욱 더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신앙생활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교회 몇 번 나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 져 주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드렸습니까 사람이 감동되어도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어려운데, 과연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옆에서 봐도 진정한 마음으로 뜻과 정성과 생명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까 그들은 주님께 무엇이라고 부르짖습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자기들에게 무엇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할 말이 많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충성하니까, 이렇게 자기는 유능하니까 하나님께서 뭘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할 턱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힘쓰지 않으면 하나님이 곤란하것으로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당당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하겠습니까 그러나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아무 소망도 없는 자신임을 아는 사람은 오직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뿐입니다. 이는 주님께 응답받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진정으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겸손을 가집니까 아니면, 내가 할 수도 있는데 단지 하나님께서 더 도음을 주십사고 협조를 구하는 정도입니까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돌아보시고, 은혜 베푸십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긍훌을 구합시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 긍훌만을 구합시다. 우리 나라에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합시다. 진정으로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한다고 하는 것이 사고 치는 것 뿐이지 않습니까 주님 함께 하지 않으면 사망 외에는 없습니다. 이를 깨달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 가운데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부른 사람은 몇이 되지 않습니다. 이 바디메오는 어떻게 이를 알았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알리신 것입니다. 진실을 가진 자는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마찬 가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오시겠다고 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또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으로 인정한 이 고백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마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께서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이 바디메오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바디메오가 몇 번이고 부르짖을 때까지 침묵하셨습니까 그냥 그 눈을 뜨게 해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까지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디메오가 주님을 만났으나 그 눈이 고침을 받는 것만을 얻어갔다면 그것이 무슨 큰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까지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오래동안 침묵하시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우리들로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바디매오의 신앙고백을 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두 소경은 눈 뜨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이전에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 같이 우리가 소경이 아닌데, 어떻게 보기를 간구하라고 하느냐고 하시렵니까 소경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소경이 있습니다. 또 세상의 학문을 배우지 못해서 문맹, 컴퓨터모르는 사람, 컴맹,이라는 지식의 소경이 있습니다. 또 본문에 말하는 영안의 눈이 어두워 있는 소경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선천적인 실명보다 후천적으로 실명된 사람들은 더 어려워합니다. 사실 눈을 감고 한 시간만 생활 해 보면 눈이 어두운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알 것입니다. 또 지식에 소경이 되어 답답한 것도 소경인데 이것도 대단히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못 먹어도, 배워야하고,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정말 사른들이 이런 것들은 소경으로 인식하면서 영안의 눈이 어두워 인생의 미래, 영원에 대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여기에 대해서는 소경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도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을 쓰지 않고 설교 시간에 딴짓하는 것은 이 영안이 어두운데 대해서 소경은 하나도 답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어두움은 영원한 어두움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할 것은 이 어두움입니다. 진정 갑갑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도를 알지 못한데 대한 것이어야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지고 마음의 눈을 밝혀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지금 보입니까 몸으로 일하는 충성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경이 무슨 일을 합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습니까 신앙의 지도자가, 구역장이, 교사가 하나님 말씀 배우는 일에 등한히 하고 이 말씀을 아는 일을 시시하게 여기면 그 영적으로 어두음으로 어떻게 아직 어두운자를 바로 인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행위에, 우리의 충성에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의 뜻을 알아야 주님의 뜻 대로 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보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나라의 그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주님의 그영광과 그 위엄을 보여주시옵소서. 나의 약함과 나의 허물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로 보지 못하면 바로 행하지 못합니다. 비둘어진 생각하나, 비둘어진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지 모릅니다. 소경들은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소경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신앙의 앞선자들의 방해가 있어도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사람 보지 않고 더 강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더 간 절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들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이제 구걸이 아닙니다. 병 낫기를 원했습니다. 보기를 원했습니다. 육신의 눈을 고침을 받으면서 그들은 영안의 눈까지 고침을 받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님께서 민망히 여기실 때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아직은 심판의 때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때입니다. 얼마든지 지나가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주님을 찾고 만납시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병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 병, 우리의 인격의 병 까지 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 바디메오같이 전심으로 주님께 매달리며 구하는 믿음있는 자를 보겠느냐 주님께서 탄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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