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를 원하나이다 (막10:46-52)
본문
6.25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포탄이 날으는 최전선에서 미군군목 한 사람이 참호마다 뛰어다니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있었던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면서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군인에게 이 군목이 기도하기 앞서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때 이 흑인병사 한 사람이 한 얘기가 아주 유명한 스토리가 되어서 전 세계에 회자되었습니다.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이 흑인병사는 군목을 쳐다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Give me tomorrow!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삼중고의 인생을 살아간 헬렌 켈러는 어느 방문객이 와서 볼 수 없으니 아무래도 답답하시겠네요. 이 말을 듣고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볼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 눈을 가지고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야 훨씬 낫지요. 두 눈을 가지고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는 훨씬 낫지요. 오늘 본문에는 소경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또 하나의 소경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소경은 여러분 자신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를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보낸다. 나는 너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너를 보내노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죽음 저 건너편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교회당에 출석하면서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예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얼마나 답답하세요 제가 코미디언 우리 구봉서씨하고 미국의 전도집회를 위해서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옆에 나란히 앉아서 여행을, 긴 여행을 같이 했는데 제가 자꾸 조니까 저를 깨우더라구요. "목사님, 바이블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성경퀴즈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세요" 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자마자, 나타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요. "네 그렇지요" 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제일 일성, 첫마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하고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에이, 목사님 틀렸어요.틀리다니요 성경에 분명히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랬습니다.에이, 아니예요" 그래요. "그럼 뭐라 그랬습니까" 구봉서씨가 말하기를 "너 나 보이니너 나 보이니" 그랬대요. 예수님 보이세요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내 인생의 미래가 보이십니까 오늘 본문의 이 소경은 예수님 만났을 때 그 앞에 엎드려서 이런 절절한 고백을 쏟아냈습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제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보기를 원하나이다.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보게 된다는 것은 치유지요. 이 치유의 조건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눈이 뜰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할 필요를 가르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고 우리 인생의 영원한 세계를 보고 내일을 보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의 이름은 바디매오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그랬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히브리 말로는 '바' 라는 말이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 저의 아들을 말하려면 바이동원 그러면 이동원의 아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리고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를 하면 예루살렘에서 부터 사해 바다쪽을 향해서 내려가는 동안에 광막한 유대 사막이, 광야가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광야를 다 내려가면 아름다운 도시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여리고입니다. 다른 곳에서부터 이스라엘로 들어오려면 여리고는 옛날부터 이 가나안땅의, 팔레스타인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도시였습니다. 사막에 둘러싸여 있지만은 사막지대에서는 비교적 수목이 우거진 도시, 향나무도 있고 뽕나무도 많고 장미나무도 있고 종려나무도 우거진 도시-여리고의 사연중에 성경에 보면 이 도시에서 예수님 만난 사람, 나무위에 올라가서 예수님 만난 사람 생각나죠 누구 녜, 삭개오. 나무가 많은 도시, 냄새가 좋은 도시입니다. 여리고란 말은 냄새라는 뜻입니다. 향그러운 냄새. 어떤 사람은 이 도시를 가리켜서 The City of Rose, 장미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소경, 그는 얼마나 답답한 인생이었을까요 그는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이 거지였다고 말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고대 세계에서는 소경은 의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활 능력이 없으니까. 자기 삶을 헤쳐갈 수 있는 그런 생존의 능력이 없으니까 소경은 자동적으로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내가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어요.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서 예수님앞에 나와 엎드리면서 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선생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기의 불쌍함을, 자기의 비참함을, 존재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가 구주라는 사실. 이것이 복음이지요. 예수는 구주이시다. 구원의 주님이시다. 예수가 구원이시다. 이것이 Good News요,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메시지가 복음으로, Good News로 내게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 감격으로 내게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구원이 필요하다. 구세주가 필요하다. 나는 죄인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독일의 아우츠비츠의 참담한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유대인 예이 옐 디무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사람은 1961년 유명한 전범 재판, 히틀러 나치의 잔당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히틀러의 참모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증인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예이 옐 디무르라는 사람에게 옆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똑똑히 봐 주십시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좀 더 다가가셔서 똑바로 보시지요. 예이 옐이 한참 아이히만을 쳐다보다가 졸도를 해 버렸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해 버렸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그에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졸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 때문에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하셨습니까 그것도 아니올시다. 그러면 왜 그랬습니까 이 때 이 사람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놀란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의 동료들을 어떻게 저 비참한 가스실로 몰라내도록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일수가 있었겠는가 그 사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앞에 그날 놀란 것입니다. 나도 저 아이히만이 될 수가 있다.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살고 있다. 그 사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내 속에도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고 살인의 광기가 있고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는 아이히만을 나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앞에 놀랐습니다.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 안에도 이런 광기가 있고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고 그리고 미움이 있고 그리고 온갖 증오심으로 포박된 죄인의 모습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죄인, 내가 내 속에 있는 죄성과 부패성을 발견하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절망의 몸에서,이 불안의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보세요. 자신의 삶의 처지를 보세요. 똑바로 보세요. 자기 불쌍한 처지를 인식하는 사람이라야 예수앞에 나와서 엎드리면서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오! 구세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의 그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눈을 뜨는 첫 번째 스탭입니다. 두 번째 정말 눈을 뜨기를 원하신다면
둘째로는 예수님이 치유자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치유자다.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자, 본문의 47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 사람들은 그에게, 소경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시다. 이렇게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가 오시고 있다. 예수가 우리 도성에 방문하셨다. 나사렛 예수다.
그런데 이 소개를 듣고 그가 막상 예수님을 불렀을 때 사용한 타이틀은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잘 아시는 것처럼 나사렛이란 지명은 팔레스타인에서는 편견으로 가득찬 지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자주 섞였고 또 혼혈 결혼도 유행했고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속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가 있느냐 나사렛 예수라는 이 말 속에는 상당한 경멸과 편견이 섞인 그런 호칭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소개를 받고도 막상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불렀다고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류의 메시야가 되고 구원주가 되고 사람의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구원자로 오신다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마도 예수님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만큼 그는 성경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었다고 우리는 가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메시야가 오시면 그는 그의 나라를 이루시게 될 것이다. 메시야의 나라가 열리기 시작할 때 그 메시야 왕국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그 때에 메시야가 오시고 그가 통치하시게 되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사람들의 눈을 띄웠다. 귀를 열었다.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바뀌였다. 운명이 변하고 그의 가치관이 새로워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변하고 있다. 사람을 바꾸고 있는 예수, 예수! 그분은 메시야일지 모른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1장을 보시면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요. 사람을 보내면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그 질문이 뭐냐하면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때로는 마음이 흔들렸고 회의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다려야 할 분이 당신입니까 당신이 메시야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을 하셨어요 '그래 나는 메시야야'라는 직접적인 대답을 하시기 보다도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를 통해서 소경의 눈이 열리고 귀머리가가 듣고 있다고 말하라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메시야가 오시면 소경의 눈을 연다, '소경이 눈을 연다'라는 것은 메시야적 기적 사역의 한 증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메시야라면 내 눈도 열수가 있을거야. 그래서 그는 어떻게 말합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치유자로 믿었다는 증거를 본문안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끝나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선포하십니까 5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가라, 네 무엇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다. 그의 눈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시키면서 예수님이 선언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이 기름부어 주셔서 보내주신 분, 나를 고치고 내 육체도 고치고 내 마음도 고치고 내 영혼을 변화시켜 주시는 분 내 삶의 통치자 그리고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나의 희망이요, 구원이신 예수, 예수는 메시야다! 믿었습니다. 믿었습니다. 왜 교회에 나와도 인생이 바뀌지 않아요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신뢰해 보십시오. 예수님만은 나를 바꿀 수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바꿀 수 없었던 나, 나도 나를 바꿀 수 없었던 내 절망과 내 부조리와 내 문제를 안고 예수앞에 엎드려 보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당신을 믿나이다. 당신이 나의 구세주 그리고 나의 치유자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치유자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눈을 뜨는 두 번째 스탭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리고 내 인생이 바뀌려면
셋째로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 구도자가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구도할 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또 이 믿는 자들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도 어느 때는 그 기도의 장애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하려면 인내심이 물러가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 소경 바디매오는 단 한번의 부르짖음으로써 그 기도가 응답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바로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자, 다시 본문의 정황을, 상황을 살펴보시면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런데 이 현재, 바로 이 타이밍, 이 순간에서 그가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자,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자, 그가 불렀지만 아직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직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직도 그의 육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여전히 어둠이었습니다. 자, 거기에다가 장애요인이 발생합니다. 자, 그 다음 48절에 보시면 이 장애물은 누구였습니까 수 많은 무리들,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던 수 많은 무리들, 그 많은 사람들이 장애요인으로 등장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잠잠하라!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구도의 열망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 주님앞에 나오고 있다면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 나오기 바랍니다. 자, 48절에 인상적인 두 개의 단어-그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던 태도, 저는 이 태도를 믿음의 태도라고 말해요. 아직 확실한 믿음은 아니였지만 그가 확실한 믿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믿음의 징후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단어들, 한 두 개의 단어가 발견됩니다. 48절에 보시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어떻게 해요 “더욱 심히"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그리고 심히 소리를 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르짖은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짖었을 때 그 때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단 한번의 구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노력해 봤는데 안 되더라구요, 안 깨달아지더라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제가 기도했는데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구요. 성경은 단 한번의 기도에 꼭 응답이 된다는 그런 약속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그런데 그 구하라는 말이 한 번만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구하라, 찾으라! 한번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찾으라. 희랍어의 현재 텐스는 지속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찾으라, 계속해서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한 번만 두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라. 아니, 한 번만 딱 두드려서 문이 착-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동판매기처럼 우리가 동전만 집어 넣으면 착-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우리의 구도를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실까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한 가지는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진지성을, 구도의 진지성을 테스트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장애요인이 발생했지만 그러나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물러가지 않는 배경속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알아, 주님은 마침내 나를 도와주실거야, 그 분은 나를 만나 주실거야, 나는 그 분이 나를 기어히 만나주실 것을 믿는다. 이것이 믿음아니예요 단 한번의 기도에 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내 환경이 달라지지 않아도 나는 믿어. 주님은 마침내 내 기도를 응답하실거야! 이런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받더라구요. 우리 주변에 보시면 기도의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사람들, 기적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계속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기도는 그래서 질이 아니라, 질 뿐만이 아니라 양도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많이 기도를 해야합니다. 엎드려야 합니다. 계속 엎드려야 합니다. 주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자, 주님도 가르치시길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그렇습니다. 단 한번의 기도에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하늘이 개이지 않아도 그 먹구름 속에서 우리는 계속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장애물은 극복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빛이 보일것입니다. 그리고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물러가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겉옷을 버리고 달려갑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용기, 그 인내심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믿음의 징후,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눈이 띄어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나아오고 있는, 접근하고 있는 이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예수님의 반응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머물러 서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4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드디어 두 번째 부르짖음을 듣고 그 분은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했는데. 아직 계속 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십자가가. 마지막 가시는 길입니다. 그는 십자가가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의 진상을 확실히, 분명히 알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모멸이요, 그리고 고통인가를 아시는 그 분 아시고 걸어가고 있는 그 분, 사람이 고통을 체험할 때 보다도 고통을 예견하고 바라볼 때가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속에는 십자가로 꽉 차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걸음 걸음 사이 속에서도 들려오는 이 사람의 부르짖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듣고 가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러와! 내가 그를 부른다고 전하라. 불러라. 그 분은 이 고통의 순간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우리의 신음소리를 외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우리의 고통에 더 민감해 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상에 매달렸을 때도. 자, 그 고통의 절정속에서도 그는 그 핏방울을 뿌리고, 흘리는 고통의 한복판속에서도. 사람이 정말 고통스러우면은 고통스럽다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대요.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고통의 절정에서 그는 옆에 매달린 강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메시야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 소리를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청난 고통의 절정속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거야. 염려하지 말라. 그는 결코 우리의 고통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세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묘사되어 있는 그 분, 이 땅에서 삶을 살면서 허우적거리며 우리가 부르짖음의 소리를 토할 때 그는 저 하늘에서도 듣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분은 지금 영광중에 계십니다. 천사들에게 둘러싸여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아마 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옆에 있는 천사들에게 쉬이- 저 땅에서 들려오고 있는 내 어린양의 고통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네가 가서 봐야겠다. 그는 이 땅의 골짜기를 그리고 이 땅의 걸음을 옮겨가면서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내 작은 신음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그는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불러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는 멈추어 서셨고, 부르셨고
둘째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중요한 순간입니다. 구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으니까요. 그는 집을 구할 수도 있었고, 돈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이 절실한 타이밍에 그는 자기 인생의 가장 절실한 근본적인 것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뭘 구했습니까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 눈을 떠서 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새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뵙고 싶습니다. 눈을 떠서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성경은 말하기를 저가 곧 보게 되어 그 순간 어둠은 순식간에 걷히고 빛이 밝아옵니다. 때로 한 순간 이런 경험이 일어 날 수 있어요. 여러분, 구원의 체험은 지속적인 추구의 과정을 요구할 수가 있지만 어느 날 한 순간에 눈이 열릴 수가 있습니다. 한 순간, 바로 한 순간에 눈이 열려 버려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울의 체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길을 가고 있었던 사울, 그는 정오의 격렬한 태양속에서 한 음성을 듣고 쓰러집니다. 빛 가운데서 쓰러집니다. 그리고 한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순간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 만난 경험을 나중에 사도행전 26장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날 눈을 떠서 보게 하셨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셨고 사단의 권세에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시고, 영생의 기업을 주시고 그리고 이방인의 전도에 소명을 맡기셨다. 그 순간 두 가지 눈이 떴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예수가 구세주라는 눈이 떴고, 사명의 눈을 떴습니다. 자기의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할 일. 예수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찬송가 불러보면, 찬송가 책을 쭉 들쳐보면 페니 크로스비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의 대부분은 이 여인이 작사한 찬송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소경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6개월만에. 아주 뛰어난 달란트와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무력해졌고 그의 달란트는 감추어져 있었고 그는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교회에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교회의 집회에, 뉴욕의 어떤 전도집회에 참석했다가 찬송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찬송가가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반복되는 찬양, 몇 번씩 반복되는 찬양을 듣다 찬양의 가사가 이 여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보다 복음이 어디있어요 주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요, 이것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과거를 씻어 버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이 몸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님 나를 쓰실 수가 있다구요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너,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그 순간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가 보이기 시작해요.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주님으로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구원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미션의 눈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다. 그는 일어나자 마자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 작사했던 것이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너는 도망가고 있었느냐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지친자 부르신다 쉬라신다 쉬라신다. 자기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는 붓을 들어 작사를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의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8000곡.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할 일이. 그는 육체의 빛보다도 더 강렬한 빛을 체험하기 시작했고 그의 미래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가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이렇게 기도할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을까요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주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놀라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할 필요를 가르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고 우리 인생의 영원한 세계를 보고 내일을 보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의 이름은 바디매오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그랬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히브리 말로는 '바' 라는 말이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 저의 아들을 말하려면 바이동원 그러면 이동원의 아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리고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를 하면 예루살렘에서 부터 사해 바다쪽을 향해서 내려가는 동안에 광막한 유대 사막이, 광야가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광야를 다 내려가면 아름다운 도시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여리고입니다. 다른 곳에서부터 이스라엘로 들어오려면 여리고는 옛날부터 이 가나안땅의, 팔레스타인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도시였습니다. 사막에 둘러싸여 있지만은 사막지대에서는 비교적 수목이 우거진 도시, 향나무도 있고 뽕나무도 많고 장미나무도 있고 종려나무도 우거진 도시-여리고의 사연중에 성경에 보면 이 도시에서 예수님 만난 사람, 나무위에 올라가서 예수님 만난 사람 생각나죠 누구 녜, 삭개오. 나무가 많은 도시, 냄새가 좋은 도시입니다. 여리고란 말은 냄새라는 뜻입니다. 향그러운 냄새. 어떤 사람은 이 도시를 가리켜서 The City of Rose, 장미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소경, 그는 얼마나 답답한 인생이었을까요 그는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이 거지였다고 말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고대 세계에서는 소경은 의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활 능력이 없으니까. 자기 삶을 헤쳐갈 수 있는 그런 생존의 능력이 없으니까 소경은 자동적으로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내가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어요.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서 예수님앞에 나와 엎드리면서 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선생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기의 불쌍함을, 자기의 비참함을, 존재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가 구주라는 사실. 이것이 복음이지요. 예수는 구주이시다. 구원의 주님이시다. 예수가 구원이시다. 이것이 Good News요,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메시지가 복음으로, Good News로 내게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 감격으로 내게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구원이 필요하다. 구세주가 필요하다. 나는 죄인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독일의 아우츠비츠의 참담한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유대인 예이 옐 디무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사람은 1961년 유명한 전범 재판, 히틀러 나치의 잔당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히틀러의 참모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증인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예이 옐 디무르라는 사람에게 옆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똑똑히 봐 주십시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좀 더 다가가셔서 똑바로 보시지요. 예이 옐이 한참 아이히만을 쳐다보다가 졸도를 해 버렸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해 버렸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그에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졸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 때문에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하셨습니까 그것도 아니올시다. 그러면 왜 그랬습니까 이 때 이 사람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놀란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의 동료들을 어떻게 저 비참한 가스실로 몰라내도록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일수가 있었겠는가 그 사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앞에 그날 놀란 것입니다. 나도 저 아이히만이 될 수가 있다.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살고 있다. 그 사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내 속에도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고 살인의 광기가 있고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는 아이히만을 나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앞에 놀랐습니다.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 안에도 이런 광기가 있고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고 그리고 미움이 있고 그리고 온갖 증오심으로 포박된 죄인의 모습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죄인, 내가 내 속에 있는 죄성과 부패성을 발견하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절망의 몸에서,이 불안의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보세요. 자신의 삶의 처지를 보세요. 똑바로 보세요. 자기 불쌍한 처지를 인식하는 사람이라야 예수앞에 나와서 엎드리면서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오! 구세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의 그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눈을 뜨는 첫 번째 스탭입니다. 두 번째 정말 눈을 뜨기를 원하신다면
둘째로는 예수님이 치유자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치유자다.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자, 본문의 47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 사람들은 그에게, 소경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시다. 이렇게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가 오시고 있다. 예수가 우리 도성에 방문하셨다. 나사렛 예수다.
그런데 이 소개를 듣고 그가 막상 예수님을 불렀을 때 사용한 타이틀은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잘 아시는 것처럼 나사렛이란 지명은 팔레스타인에서는 편견으로 가득찬 지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자주 섞였고 또 혼혈 결혼도 유행했고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속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가 있느냐 나사렛 예수라는 이 말 속에는 상당한 경멸과 편견이 섞인 그런 호칭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소개를 받고도 막상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불렀다고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류의 메시야가 되고 구원주가 되고 사람의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구원자로 오신다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마도 예수님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만큼 그는 성경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었다고 우리는 가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메시야가 오시면 그는 그의 나라를 이루시게 될 것이다. 메시야의 나라가 열리기 시작할 때 그 메시야 왕국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그 때에 메시야가 오시고 그가 통치하시게 되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사람들의 눈을 띄웠다. 귀를 열었다.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바뀌였다. 운명이 변하고 그의 가치관이 새로워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변하고 있다. 사람을 바꾸고 있는 예수, 예수! 그분은 메시야일지 모른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1장을 보시면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요. 사람을 보내면서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그 질문이 뭐냐하면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때로는 마음이 흔들렸고 회의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다려야 할 분이 당신입니까 당신이 메시야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을 하셨어요 '그래 나는 메시야야'라는 직접적인 대답을 하시기 보다도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를 통해서 소경의 눈이 열리고 귀머리가가 듣고 있다고 말하라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메시야가 오시면 소경의 눈을 연다, '소경이 눈을 연다'라는 것은 메시야적 기적 사역의 한 증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메시야라면 내 눈도 열수가 있을거야. 그래서 그는 어떻게 말합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치유자로 믿었다는 증거를 본문안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끝나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선포하십니까 5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가라, 네 무엇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다. 그의 눈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시키면서 예수님이 선언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이 기름부어 주셔서 보내주신 분, 나를 고치고 내 육체도 고치고 내 마음도 고치고 내 영혼을 변화시켜 주시는 분 내 삶의 통치자 그리고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나의 희망이요, 구원이신 예수, 예수는 메시야다! 믿었습니다. 믿었습니다. 왜 교회에 나와도 인생이 바뀌지 않아요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신뢰해 보십시오. 예수님만은 나를 바꿀 수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바꿀 수 없었던 나, 나도 나를 바꿀 수 없었던 내 절망과 내 부조리와 내 문제를 안고 예수앞에 엎드려 보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당신을 믿나이다. 당신이 나의 구세주 그리고 나의 치유자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치유자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눈을 뜨는 두 번째 스탭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리고 내 인생이 바뀌려면
셋째로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 구도자가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구도할 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또 이 믿는 자들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도 어느 때는 그 기도의 장애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하려면 인내심이 물러가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 소경 바디매오는 단 한번의 부르짖음으로써 그 기도가 응답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바로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자, 다시 본문의 정황을, 상황을 살펴보시면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런데 이 현재, 바로 이 타이밍, 이 순간에서 그가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자,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자, 그가 불렀지만 아직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직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직도 그의 육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인생은 여전히 어둠이었습니다. 자, 거기에다가 장애요인이 발생합니다. 자, 그 다음 48절에 보시면 이 장애물은 누구였습니까 수 많은 무리들,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던 수 많은 무리들, 그 많은 사람들이 장애요인으로 등장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소경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잠잠하라!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구도의 열망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 주님앞에 나오고 있다면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 나오기 바랍니다. 자, 48절에 인상적인 두 개의 단어-그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던 태도, 저는 이 태도를 믿음의 태도라고 말해요. 아직 확실한 믿음은 아니였지만 그가 확실한 믿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믿음의 징후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단어들, 한 두 개의 단어가 발견됩니다. 48절에 보시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어떻게 해요 “더욱 심히"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그리고 심히 소리를 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르짖은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짖었을 때 그 때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단 한번의 구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노력해 봤는데 안 되더라구요, 안 깨달아지더라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제가 기도했는데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구요. 성경은 단 한번의 기도에 꼭 응답이 된다는 그런 약속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그런데 그 구하라는 말이 한 번만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구하라, 찾으라! 한번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찾으라. 희랍어의 현재 텐스는 지속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찾으라, 계속해서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한 번만 두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라. 아니, 한 번만 딱 두드려서 문이 착-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동판매기처럼 우리가 동전만 집어 넣으면 착-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우리의 구도를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실까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한 가지는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진지성을, 구도의 진지성을 테스트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장애요인이 발생했지만 그러나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물러가지 않는 배경속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알아, 주님은 마침내 나를 도와주실거야, 그 분은 나를 만나 주실거야, 나는 그 분이 나를 기어히 만나주실 것을 믿는다. 이것이 믿음아니예요 단 한번의 기도에 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내 환경이 달라지지 않아도 나는 믿어. 주님은 마침내 내 기도를 응답하실거야! 이런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받더라구요. 우리 주변에 보시면 기도의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사람들, 기적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계속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기도는 그래서 질이 아니라, 질 뿐만이 아니라 양도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많이 기도를 해야합니다. 엎드려야 합니다. 계속 엎드려야 합니다. 주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자, 주님도 가르치시길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그렇습니다. 단 한번의 기도에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하늘이 개이지 않아도 그 먹구름 속에서 우리는 계속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장애물은 극복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빛이 보일것입니다. 그리고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물러가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겉옷을 버리고 달려갑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용기, 그 인내심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믿음의 징후,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눈이 띄어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나아오고 있는, 접근하고 있는 이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예수님의 반응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머물러 서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4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드디어 두 번째 부르짖음을 듣고 그 분은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했는데. 아직 계속 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십자가가. 마지막 가시는 길입니다. 그는 십자가가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의 진상을 확실히, 분명히 알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모멸이요, 그리고 고통인가를 아시는 그 분 아시고 걸어가고 있는 그 분, 사람이 고통을 체험할 때 보다도 고통을 예견하고 바라볼 때가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속에는 십자가로 꽉 차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걸음 걸음 사이 속에서도 들려오는 이 사람의 부르짖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듣고 가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러와! 내가 그를 부른다고 전하라. 불러라. 그 분은 이 고통의 순간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우리의 신음소리를 외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우리의 고통에 더 민감해 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상에 매달렸을 때도. 자, 그 고통의 절정속에서도 그는 그 핏방울을 뿌리고, 흘리는 고통의 한복판속에서도. 사람이 정말 고통스러우면은 고통스럽다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대요.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고통의 절정에서 그는 옆에 매달린 강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메시야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 소리를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청난 고통의 절정속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거야. 염려하지 말라. 그는 결코 우리의 고통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세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묘사되어 있는 그 분, 이 땅에서 삶을 살면서 허우적거리며 우리가 부르짖음의 소리를 토할 때 그는 저 하늘에서도 듣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분은 지금 영광중에 계십니다. 천사들에게 둘러싸여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아마 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옆에 있는 천사들에게 쉬이- 저 땅에서 들려오고 있는 내 어린양의 고통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네가 가서 봐야겠다. 그는 이 땅의 골짜기를 그리고 이 땅의 걸음을 옮겨가면서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내 작은 신음소리에도 멈추지 않고 그는 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불러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는 멈추어 서셨고, 부르셨고
둘째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중요한 순간입니다. 구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으니까요. 그는 집을 구할 수도 있었고, 돈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이 절실한 타이밍에 그는 자기 인생의 가장 절실한 근본적인 것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뭘 구했습니까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 눈을 떠서 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새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뵙고 싶습니다. 눈을 떠서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성경은 말하기를 저가 곧 보게 되어 그 순간 어둠은 순식간에 걷히고 빛이 밝아옵니다. 때로 한 순간 이런 경험이 일어 날 수 있어요. 여러분, 구원의 체험은 지속적인 추구의 과정을 요구할 수가 있지만 어느 날 한 순간에 눈이 열릴 수가 있습니다. 한 순간, 바로 한 순간에 눈이 열려 버려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울의 체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길을 가고 있었던 사울, 그는 정오의 격렬한 태양속에서 한 음성을 듣고 쓰러집니다. 빛 가운데서 쓰러집니다. 그리고 한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순간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 만난 경험을 나중에 사도행전 26장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날 눈을 떠서 보게 하셨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셨고 사단의 권세에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시고, 영생의 기업을 주시고 그리고 이방인의 전도에 소명을 맡기셨다. 그 순간 두 가지 눈이 떴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예수가 구세주라는 눈이 떴고, 사명의 눈을 떴습니다. 자기의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할 일. 예수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찬송가 불러보면, 찬송가 책을 쭉 들쳐보면 페니 크로스비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의 대부분은 이 여인이 작사한 찬송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소경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6개월만에. 아주 뛰어난 달란트와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무력해졌고 그의 달란트는 감추어져 있었고 그는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교회에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교회의 집회에, 뉴욕의 어떤 전도집회에 참석했다가 찬송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찬송가가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반복되는 찬양, 몇 번씩 반복되는 찬양을 듣다 찬양의 가사가 이 여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보다 복음이 어디있어요 주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요, 이것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과거를 씻어 버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이 몸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님 나를 쓰실 수가 있다구요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너,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그 순간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가 보이기 시작해요.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주님으로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구원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미션의 눈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다. 그는 일어나자 마자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 작사했던 것이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너는 도망가고 있었느냐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지친자 부르신다 쉬라신다 쉬라신다. 자기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는 붓을 들어 작사를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의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8000곡.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할 일이. 그는 육체의 빛보다도 더 강렬한 빛을 체험하기 시작했고 그의 미래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가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이렇게 기도할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을까요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주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놀라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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