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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까지 안 가셔도 됩니다 (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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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부터 오늘을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매우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 질병의 증세를 묘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확실히 정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며 우리의 감성을 혼란시키며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력을 둔화시킵니다. 사고력을 감퇴시킵니다. 삶의 효율성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증폭시킵니다. 슬픔을 가중시키고 불안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으로 위험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신체의 메커니즘, 자기 방어현상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고혈압, 심장마비, 위궤양, 불면증, 알코올중독 각종 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유형의 현대인들의 질병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80%이상의 원인 제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 매니지(manage)되면 삶의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도 할 수가 있지만 잘못 매니지(manage)되면 삶의 모든 성취를 한꺼번에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궁금하다. 그것이 스트레스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트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소위 여가의 문화를 그동안 발전시켜 왔습니다. 각종 문화활동, 소위레크리에이션(recreation), 인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취미활동, 사교활동, 여행, 등산, 바캉스, 베케이션(vacation)혹은 다양한 신체적인 엑스사이즈(excise)프로그램들 이 모든 것은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에, 치료에, 건강함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만으로 인간은 근본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병원에 문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불란서의 한 유명한 정신과 진료실에 한 남자가 우울증을 호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동안 같이 대화를 나눈 후에 이런 처방으로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 불란서에 아주 인기 있는 코메디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일에만 몰두하거나 일에 중독되지 마시구요. 요즈음 우리 그리발디라는 유명한 연극 배우가 있는데 그런 연극도 보시고 그런 재미있는 연극 속에서 한 번 빠져 보시면서 삶의 리듬을 좀 바꾸어 보시죠. 환자는 매우 무표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병원의 진료실을 빠져 내려가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독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그리발디가 나인걸요. 그 그리발디가 바로 나 자신인걸요. 저는 병원의 존재, 의사 선생님의 존재, 의약품의 존재를 결코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사 그리고 병원, 의료 이것은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정신 건강과 본질적인 정신의 치유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특별한 의사 한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조그만 땅덩이에 가난과 그리고 정치적인 여러 혼란 속에서 시달리고 있었던, 소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 당시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이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여러분 내게로 오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에게 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민중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Good News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거리의 사람들, 여러분과 저에게도 유효하지 못한 약속이라면 저는 오늘로 교회 문을 닫겠습니다. 목회를 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유효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하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합니다. 자, 이런 여러가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의 처방은 있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처방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 처방은 단순한 두 가집니다.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치유의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처방은 내게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Come onto me.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이 짊어지고 다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인생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수고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세깁니다. 인간이 처음 인간이 죄를 범했을 때 그때 수고가 찾아 왔습니다. 범죄한 첫 번째 사람 하와에게 이브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제부터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자식을 낳는 것이 처벌이 아니예요. 수고가 처벌이었습니다.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 자매님이 아이를 낳으실 때 아주 유쾌하게 기분좋게 지금부터 아이를 낳자 원, 투, 쓰리……그리고 유쾌하게 출산을 했을지 모릅니다.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할 것이라 이 수고는 단순한 노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말합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평가합니다. 노동은 타락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에덴의 동산 안에서 처음 사람들은 경작하며 일하며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노동이 잘못이 아니예요. 그러나 죄가 왔을 때 타락이 왔을 때 달라진 것은 뭐냐 하면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토스토엡스키는 그의 작품의 주인공의 입술을 빌려서 자주 이런 말을 되풀이합니다.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따라서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식은 없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구약의 이사야서를 읽어보시면 이사야라는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즉 예수가 오신다는 사실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할 것이다 질고라는 말은 질병, 고통 이런 의미들을 다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가 즉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가 우리의 질고, 우리의 질병,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치유와 안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특정 종교를 과소평가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이것은 저의 체험이었기 때문에 제가 자주 간증 삼아서 이 말을 되풀이합니다. 20대 초에 저는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는 내적으로 잠들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종종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저는 절을 자주 찾았고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불당에 가서 법당에 가서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부처님의 그 얼굴이 너무나 평화스럽고 청정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 갑자기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일어났어요. 저 평화스럽고 저 고요한 저 법열의 청정한 얼굴의 부처님이 나라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실까 방황하며 고통스러워하며 이런 고민하고 있는 나라는 젊은이의 좌절과 절망을 이해하실까 그러면서 갑자기 그 순간 갑자기 그 순간 저하고는 별로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기독교,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 그림자도 없었던 우리집안, 따라서 기독교와 나와는 아주 상관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기독교의 예수의 그림자가 제 머리 속에 클로즈 업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예수, 편안하지 못한 얼굴, 이지러진 얼굴, 절규하고 있는 목소리, 고통 당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예수가 갑자기 생각나면서 제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예수라면 혹시 나를 이해할지 모르지. 나의 좌절을, 내 고통을, 내 방황을 이해할 지 모르지. 맞습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시사 짤막한 인생을 살면서 좌절과 배신과 고통과 오해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의 절정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죽으신 예수, 그 분은 나를 이해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 분은 나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인격이 내 마음속에 찾아온 이래로 내 인생을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사람의 짐을 날마다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 앞에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예수 믿는 것도 또 하나 내 인생의 짐을 더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를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종교가 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단순한 종교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싫어하셨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3장에 보시면 예수님 당시의 대표적인 종교인 바리새 종교를 향해서 예수님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 위에 지워 주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 말씀 속에는 종교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지 모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종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도 예수 만나지 못하고 예수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 생활하면 교회 생활하는 것도 짐이예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에게 교회 생활은 자유의 표현의 한 장에 불과합니다. 종교를 짐으로 생각해서 자기 가정의 종교를 버리고 어느 날 떠나갔던 그리고 인생의 긴 방황 끝에 돌아와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쓴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틴에이저 시절에 신앙을 떠나갔습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신앙론이란 글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 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다. 내가 18세 되던 나이 내 친구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는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예수가 안식이고 그 예수가 자유의 대답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이 처방을 드립니다. 예수 앞에 오시기 바랍니다. 내게로 오라. 오늘 본문에는 두 번째 처방이 있어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두 번째 처방을 주십니다. 그것은 내게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배우라. 어떤 사람들은 배우라 이 말만 들어도 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엔조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배우라, 저같은 사람은 배우라. 사실 저도 공부를 그렇게 잘 했던 사람은 아니예요. 그래서 배우라 그러면 스트레스가 생겨요. 제가 워낙 특공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공대는 특별히 공부 못 하면서 대가리만 큰 사람을 특공대라고 합니다. 내게 배우라. 내게 배우라.
그런데 내게 그냥 배우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니까 더 스트레스가 생겨요. 멍에를 메고. 혹시 우리가 이런 오해를 할까봐 다음 절에서 예수님을 친절하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멍에는 쉽다. 쉽다 란 단어는 사실은 더 정확하게 옮기면 내 멍에는 편리하다 잘 맞는다 그런 뜻입니다. 잘 맞는다. 우리가 양복점에 가면 우리 사이즈를 측정합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가서 가봉을 합니다. 그리고 양복을 입게 됩니다. 첫 양복을 입어볼 때 양복점의 주인이나 재단사나 혹은 같이 오신 손님들이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양복이 잘 맞으시네요. 영어로 fitting well. 잘 맞으시네요. 참 잘 맞으시네요.
그런데 그런 뜻이예요. 멍에가 쉽다는 말이 멍에가 잘 맞는다. 멍에는 본래 소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에도 농사가 있고 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멍에를 만듭니다. 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은 멍에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소의 사이즈를 측량합니다. 그 다음에 소의 사이즈에 따라서 멍에를 만들어요. 종종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나의 멍에를 구멍을 두 개 뚫어서 한 멍에 안에 두 개의 소를 함께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랬을 때 이 멍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말씀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어렸을 때의 아버지였던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목수.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이 일하고 있던 목공소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목공소에서 만드는 멍에는 잘 맞습니다. 잘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 멍에가 무엇인지 잘 아시는 분이예요. 아버지를 도와서 일을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멍에는 쉽다. 내 멍에는 잘 맞는다. 또 소가 두 마리가 함께 일하게 될 때 참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다른 소가 빨리 리더를 결정한다고 해요. 저는 소가 우둔한 줄 알았어요. 저는 제 아내 함께 사는 제 아내, 여자가 성이 우 씹니다. 좀 신경질 나면 성씨가 우씨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를 하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씨라 그렇다. 소 우씨라 그렇다. 제가 이렇게 제 아내를 종종 핍박을 합니다.
그런데 소가 그렇게 미련한 동물만은 아니라고 그래요. 두 마리가 함께 일하면 빨리 리더를 결정한대요. 빨리 리더를. 자, 그리고 한 마리는 따라 갑니다. 자 두 마리의 소가 일할 때 편안한 멍에를 걸머지고 또한 소 방향을 정확하게 하는 소를 따라 갈 때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마리 소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목적지를 향해서 편안한 멍에를 지고 효과적으로 일하는 소. 소 중의 하나가 리더쉽을 쥐든 아니면 주인이 뒤에서 이 두 마리의 소를 리더하든. 여러분, 더군다나 이 소를 리더하는 그 주인이 편안한 분일 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일 때 그 분의 리더쉽을 따라서 목적지를 향해서 편안한 멍에를 걸머지고 밭을 갈며 일하는 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주님은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그리고 내 짐은 가벼울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소들은 그 멍에를 결코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멍에는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나를 돕는 도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마치 새들이 하늘을 나르고 있는 새들이 날개를 부담스러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 날개가 있어서 새들은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가 있습니다. 소들은 멍에가 있어서 편리하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분좋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소들을 제대로 부릴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주인은 결코 소들을 일 가운데로 일 중독환자처럼 몰아넣지 않습니다. 적당한 휴식과 일에 리듬을 균형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쉬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쉼이란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 다시 일하기 위해서 쉰다 그런 뜻이예요. 이것은 무한정한 휴식이 아니예요. 무위도식의 휴식이 아닙니다. 동양종교 속에 혹은 TM이란 명상이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를 어떤, 무기력한 어떤 그 다른 일과 상관없이 휴식 그 자체에만 빠져 들어가게 만드는 그런 의미의 휴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성취해야 할 과제를 위해서 적당한 여유를 갖고 쉬게 하는 안식 이런 안식을 제공하면서 우리 인생을 목표를 향해서 인도해 주시는 놀라우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전기를 읽고 있습니다.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가 종교적인 숱한 논쟁을 벌이고 또 캐톨릭에 정치적인 프레셔(pressure)를 받고 그리고 언제자기 목숨이 날아갈 지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의 긴장 속에서도 마틴 루터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런 부분이 저에게 아주 깊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던 동료 가운데 필립 멜랑크톤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마틴 루터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번 주말에는 모여서 섭리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가 토론을 벌입시다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루터가 이런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멜랑크톤에게 섭리의 역할은 섭리자에게 맡기고 이번 주말에 자네와 나는 낚시질이나 갑시다. 얼마나 여유가 있어요. 그러자 멜랑크톤이 깜짝 놀래갖고 아니 지금 이 위험한 마당에 당신은 어떻게 그런 여유를 가질 수가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다시 마틴 루터는 메모지로 답변을 해 왔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여유일 뿐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여유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히브리서 12장 2절과 3절이란 메모를 남겼어요. 히브리서 12장 2절을 아십니까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예수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을 참으셨다 십자가 얼마나 스트레스예요 나를 죽음에 몰아넣는 잔혹한 고문의 형틀인 십자가,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도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과 수욕을 견딜 수 있었던 예수님의 내적인 정신의 저력, 그것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찾을 수가 있지. 십자가 건너편에 있는 그 영광의 내일, 그 즐거움의 미래를 바라보시면서 오늘의 십자가를 견딜 수가 있었던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다음절에는 너희도 피곤하고 낙심치 않기 위하여 이 주님을 생각하라 피곤하고 낙심치 않기 위하여 이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십자가를 넘어서 견디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 분이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하신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여유와 안식 속에서 걸어갈 수 있는 인생의 모습이 될까요 우리 교인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아는 것처럼 저는 노래를 잘 못 부릅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가사를 읊조립니다. 가사의 은혜를 받으시라고 늘 말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종종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TV에서 유행가도 듣는 편입니다. 흘러간 옛 노래도 가끔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래들은 굉장히 마음속에 와 닿는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훨씬 지나간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해바라기가 부른 노래 가운데서 이런 노래를 듣고 저는 성령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곧장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말고 누가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줄 수가 있었겠는가!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주 함께 간다면 좋겠네 내가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 이리 저리 둘러보아도 제일 좋은 건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님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오늘 오후 4시에는 시인과 촌장 하덕규 형제가 와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 하덕규 형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젊은 대학생들에게 지하운동하는 조하문 이런 형제들과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저항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던 그가 이 저항운동 속에서도 안식과 위로를 얻지 못했던 이 형제가 예수 만나고 예수님 영접하고 그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수 만나고 나서 그가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 가운데서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자유 자유 자유 껍질 속에 울고 있었네 내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질인지 모르고 자유 자유 자유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다네 내가 애타게 찾고 있었던 것이 뭔지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네 내가 목마르게 찾았던 자유 자유 자유 이런 자유를 그리워 하십니까 이런 행복을 얻고 싶습니까 이런 안식을 그리워 하십니까 우리에게 이런 자유와 행복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분,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사 우리 곁에 다가오시면서 오늘 이렇게 약속하시는 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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