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미를 가져 오라 (창27:1-4)
본문
사람들은 저마다 복받기를 갈구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방법들을 찾아서 해매고 다닙니다. 인간의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때는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복에 대한 집념이 저렇게도 강한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 같은 인간의 욕구에 영합해서 오늘 종교까지도 수단을 쓰고 방법을 써서 야합을 하고 부채질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순수해야 할 종교하 혼탁해지고 인간주의로 빠져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축복은 그렇게 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맹목적이고 인간적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은 하늘에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아주 깨끗하게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천부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을 다투지 않고 뺏지 않고 싸우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은 아주 순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종교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산으로 데리고 가서 희생제물로 자신을 잡으려고 할 때 이삭은 순순히 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심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의 신앙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삭의 나이 27세였습니다. 다 늙어 힘이 없는 아버지를 밀치고 얼마든지 도망할 수도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순순히 응했다는 것은 그이 종교성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삭은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삭은 평생 누구의 피를 흘려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 축첩을 해본 일도 없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도 달랐습니다. 그는 40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20년 동안이나 아이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결혼 후 3년 동안 아이가 없으면 다른 여인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끝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야곱 형제를 얻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또 웃음을 선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웃음을 드렸습니다. 또 그 부모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이라는 말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고 기력이 쇠하여 시력이 떨어져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결산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려고 합니다. 그 기도는 유언적인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장자의 권한을 상속시켜 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모든 축복들이 그대로 내려가는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 중 맏이인 에서를 불러들였습니다. 이삭은 평소 큰 아들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에서는 언제나 씩씩했고 말이 없으며 늠름하고 남자답게 사냥을 잘했습니다. 특히 이삭은 아들 에서가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주면 그것을 기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몹시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 야곱은 여성적이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욕심도 많고 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가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에서를 불러들인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했습니다. “내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으니 가서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와라. 내가 네 별미를 먹고 축복해 주마.” 그 소리를 리브가가 엿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아버지의 그 복이 야곱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계략을 꾸밉니다.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나가서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을 에서처럼 위장한 다음에 아버지의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당시 이삭은 시력을 잃어서 분간을 못했습니다. 야곱이 형의 목소리로 위장을 한 것을 모르고 아버지 이삭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갑니다. 만들어 간 별미를 다 먹고 나서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
그때 축복한 내용이 28절과 29절입니다. 그것은 지상의 복과 영적인 복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양식의 복”입니다. 비옥한 토지와 풍성한 양식이 공급될 것을 축복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복으로 “통치권의 복”입니다. 만인이 너를 섬기고 네 종이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축복권”으로 네게 복을 비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장차 너는 만인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받아 낸 복의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완벽한 복인 셈입니다. 지상의 복과 하늘의 복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장자에게 주어질 복을 마음껏 주었습니다. 야곱은 감쪽같이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챘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복을 다 받고난 다음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미 일은 끝나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속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난 에서는 그만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애원을 합니다. “나에게 남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주십시오.” 세상에 남은 부스러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이삭이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축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다 끝났다.” 이것이 창세기 27장에 나타난 축복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의 신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축복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냐”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종교마다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기복주의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복을 받고 싶어 하니까 종교가 여기에 영합을 해서 온갖 인간적인 수단을 가미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자꾸만 순수성을 잃게 되고 인간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축복의 세 가지 원칙을 살펴보겠습니다.
1. 축복은 꼭 별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과연 별미를 꼭 먹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해주려면 그냥 해줄 것이지 자식에게 꼭 별미를 얻어먹고 축복을 해주어야 합니까 아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 축복해 주었으면 이런 실수도 없었을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에게 꼭 별미를 얻어먹어야 하겠습니까 이삭의 대답은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주장입니다. 바로 여기에 축복의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이삭의 대답은 “축복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거나 거기에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축복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축복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삭의 축복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아주 지당합니다. 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을 해주려면 먼저 아들에 대한 더 깊은 애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한 것입니다. 아들이 나가서 땀을 뻘뻘 흘리고 수고를 하여 사냥해서 만든 별미를 먹으면 아들에 대한 정이 더 깊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솟아나게 될 것인데 그때 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어야 그 기도가 뜻이 있고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이 주장하는 축복에 대한 철학입니다. 얼마나 지당한 이론이고 공감되는 생각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무엇인가 받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선물을 받아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행복합니까 그래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마음을 주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주고 베푸는 사람이 이렇게 사랑르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사람은 도로 헤아려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인가 한번 받아 먹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쏠립니다. 선거 때만 되면 돈 붕투가 난무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받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지게 되고 관심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17:8)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했습니다. 이삭이 그래서 아들에게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아들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우러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권자인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축복은 한번 선포되면 다시 거둘 수 없습니다. 에서가 땀을 흘리며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이미 야곱이 자기에게 주어질 축복의 기도를 가로채간 뒤였습니다. 이미 기회는 모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이삭이 속은 줄 알고 대단히 분노합니다. 이삭의 분노한 모습을 33절은 “이삭이 심히 떨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본노했으면 몸을 그렇게 떨었겠습니까 에서가 곁에서 웁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받아가고 남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에서가 측음했습니다. 불쌍했습니다. 그렇지만 축복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선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측은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축복은 한번 선포되면 도로 거둬들일 수 없다” 이것이 이삭이 말하는 축복의 신학입니다. 말하자면 축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주었다 뺏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야곱이 괘씸합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가로챘습니다. 속일 것이 따로 있지 축복의 기도를 사기쳐서 가져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을 무효로 하고 다시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한번 주어지면 내가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가두시지 않는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복이나 천국의 복이나 은혜는 내가 버리지 않는 한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상대해서 은혜를 입으려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변화가 많습니다. 기분에 따라서, 편의에 따라서 주었다 뺏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 복이 영원한 복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고집스럽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힘을 씨지 않았습니까 그분들은 모두 이 같은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축복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갖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가 통곡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이 어떤 복인데 사기를 당합니까 에서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에서는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너무나 소홀히 여겼습니다. 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장자권이 어떤 것입니까 당시 장자권은 한 종족의 치리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또한 장자에게는 모든 신령한 복들이 하늘로부터 약속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이 장자권을 가지고 후에 얼마나 많은 복을 받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지파를 형성했고 백성들 모두를 지배하였으며 결국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그런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이 팔아먹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복인데 그렇게 헐값에 팔아먹습니까 그렇게 해서 장자권을 잃어버린 후에 울면서 부스러기 축복이라도 달라고 애원을 하니 그게 무슨 꼴입니까 한끼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그 소중한 것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면 울어도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화는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준 보화는 그것이 귀한 것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권리가 있고 또 소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을 받아 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복은 그냥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복은 “진정으로 빌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모두 복이 아닙니다. 입으로 하는 감사, 입으로 하는 사랑, 입술로 말하는 칭찬은 깊이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천하고 무게가 없으며 그래서 어떤 때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입으로 말하는 사랑은 얼마 못 가서 모두 변하고 나뉘고 미워하고 원수로 변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축복은 진정한 마음으로 빌어 주어야 그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의 마음도 기쁘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그 마음에서 진정한 축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어야 진정으로 복을 받고 사랑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원수를 맺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서로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불화하고 원수 맺어서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고 많은 사람과 불화하고 원수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격언을 보면 “정성을 다해서 빈 축복은 이루어지지 않는 수가 있어도 무서운 마음으로 빈 저주는 금방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헤아림이 나에게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준 기쁨이 다시 돌아올 때는 감사한 일이지만 내가 저주한 것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보화는 아는 사람만이 가지게 되고 누리게 되고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에 대한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순순히 응했다는 것은 그이 종교성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삭은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삭은 평생 누구의 피를 흘려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 축첩을 해본 일도 없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도 달랐습니다. 그는 40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20년 동안이나 아이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결혼 후 3년 동안 아이가 없으면 다른 여인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끝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야곱 형제를 얻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또 웃음을 선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웃음을 드렸습니다. 또 그 부모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이라는 말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고 기력이 쇠하여 시력이 떨어져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결산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려고 합니다. 그 기도는 유언적인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장자의 권한을 상속시켜 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모든 축복들이 그대로 내려가는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 중 맏이인 에서를 불러들였습니다. 이삭은 평소 큰 아들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에서는 언제나 씩씩했고 말이 없으며 늠름하고 남자답게 사냥을 잘했습니다. 특히 이삭은 아들 에서가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주면 그것을 기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몹시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 야곱은 여성적이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욕심도 많고 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가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에서를 불러들인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했습니다. “내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으니 가서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와라. 내가 네 별미를 먹고 축복해 주마.” 그 소리를 리브가가 엿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아버지의 그 복이 야곱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계략을 꾸밉니다.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나가서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을 에서처럼 위장한 다음에 아버지의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당시 이삭은 시력을 잃어서 분간을 못했습니다. 야곱이 형의 목소리로 위장을 한 것을 모르고 아버지 이삭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갑니다. 만들어 간 별미를 다 먹고 나서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
그때 축복한 내용이 28절과 29절입니다. 그것은 지상의 복과 영적인 복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양식의 복”입니다. 비옥한 토지와 풍성한 양식이 공급될 것을 축복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복으로 “통치권의 복”입니다. 만인이 너를 섬기고 네 종이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축복권”으로 네게 복을 비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장차 너는 만인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받아 낸 복의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완벽한 복인 셈입니다. 지상의 복과 하늘의 복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장자에게 주어질 복을 마음껏 주었습니다. 야곱은 감쪽같이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챘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복을 다 받고난 다음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미 일은 끝나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속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난 에서는 그만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애원을 합니다. “나에게 남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주십시오.” 세상에 남은 부스러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이삭이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축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다 끝났다.” 이것이 창세기 27장에 나타난 축복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의 신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축복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냐”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종교마다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기복주의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복을 받고 싶어 하니까 종교가 여기에 영합을 해서 온갖 인간적인 수단을 가미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자꾸만 순수성을 잃게 되고 인간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축복의 세 가지 원칙을 살펴보겠습니다.
1. 축복은 꼭 별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과연 별미를 꼭 먹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해주려면 그냥 해줄 것이지 자식에게 꼭 별미를 얻어먹고 축복을 해주어야 합니까 아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 축복해 주었으면 이런 실수도 없었을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에게 꼭 별미를 얻어먹어야 하겠습니까 이삭의 대답은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주장입니다. 바로 여기에 축복의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이삭의 대답은 “축복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거나 거기에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축복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축복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삭의 축복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아주 지당합니다. 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을 해주려면 먼저 아들에 대한 더 깊은 애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한 것입니다. 아들이 나가서 땀을 뻘뻘 흘리고 수고를 하여 사냥해서 만든 별미를 먹으면 아들에 대한 정이 더 깊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솟아나게 될 것인데 그때 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어야 그 기도가 뜻이 있고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이 주장하는 축복에 대한 철학입니다. 얼마나 지당한 이론이고 공감되는 생각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무엇인가 받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선물을 받아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행복합니까 그래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마음을 주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주고 베푸는 사람이 이렇게 사랑르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사람은 도로 헤아려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인가 한번 받아 먹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쏠립니다. 선거 때만 되면 돈 붕투가 난무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받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지게 되고 관심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17:8)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했습니다. 이삭이 그래서 아들에게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아들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우러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권자인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축복은 한번 선포되면 다시 거둘 수 없습니다. 에서가 땀을 흘리며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이미 야곱이 자기에게 주어질 축복의 기도를 가로채간 뒤였습니다. 이미 기회는 모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이삭이 속은 줄 알고 대단히 분노합니다. 이삭의 분노한 모습을 33절은 “이삭이 심히 떨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본노했으면 몸을 그렇게 떨었겠습니까 에서가 곁에서 웁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받아가고 남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에서가 측음했습니다. 불쌍했습니다. 그렇지만 축복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선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측은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축복은 한번 선포되면 도로 거둬들일 수 없다” 이것이 이삭이 말하는 축복의 신학입니다. 말하자면 축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주었다 뺏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야곱이 괘씸합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가로챘습니다. 속일 것이 따로 있지 축복의 기도를 사기쳐서 가져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을 무효로 하고 다시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한번 주어지면 내가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가두시지 않는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복이나 천국의 복이나 은혜는 내가 버리지 않는 한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상대해서 은혜를 입으려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변화가 많습니다. 기분에 따라서, 편의에 따라서 주었다 뺏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 복이 영원한 복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고집스럽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힘을 씨지 않았습니까 그분들은 모두 이 같은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축복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갖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가 통곡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이 어떤 복인데 사기를 당합니까 에서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에서는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너무나 소홀히 여겼습니다. 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장자권이 어떤 것입니까 당시 장자권은 한 종족의 치리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또한 장자에게는 모든 신령한 복들이 하늘로부터 약속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이 장자권을 가지고 후에 얼마나 많은 복을 받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지파를 형성했고 백성들 모두를 지배하였으며 결국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그런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이 팔아먹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복인데 그렇게 헐값에 팔아먹습니까 그렇게 해서 장자권을 잃어버린 후에 울면서 부스러기 축복이라도 달라고 애원을 하니 그게 무슨 꼴입니까 한끼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그 소중한 것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면 울어도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화는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준 보화는 그것이 귀한 것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권리가 있고 또 소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을 받아 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복은 그냥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복은 “진정으로 빌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모두 복이 아닙니다. 입으로 하는 감사, 입으로 하는 사랑, 입술로 말하는 칭찬은 깊이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천하고 무게가 없으며 그래서 어떤 때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입으로 말하는 사랑은 얼마 못 가서 모두 변하고 나뉘고 미워하고 원수로 변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축복은 진정한 마음으로 빌어 주어야 그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의 마음도 기쁘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그 마음에서 진정한 축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어야 진정으로 복을 받고 사랑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원수를 맺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서로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불화하고 원수 맺어서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고 많은 사람과 불화하고 원수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격언을 보면 “정성을 다해서 빈 축복은 이루어지지 않는 수가 있어도 무서운 마음으로 빈 저주는 금방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헤아림이 나에게도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준 기쁨이 다시 돌아올 때는 감사한 일이지만 내가 저주한 것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보화는 아는 사람만이 가지게 되고 누리게 되고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에 대한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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