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의 체험 (마17:1-9)
본문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셔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중요하기 때문에 공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또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고백을 해서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고,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실 것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 때도 베드로가 주여 그리마옵소서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는 일을 말렸다가 호되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난 다음에 또 예수님은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된 모습, 곧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이제까지의 어떤 이적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시도 베드로는 이 사건에대하여 그 후에 기록한 베드로후서에서 (벧후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벧후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우리가 오늘 소망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요, 영원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이런 신비로운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높은 산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변화산이라고 별명을 지었습니다. 우리 기독자가 이 변화산의 체험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바로 못합니다. 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고난 후의 받으실 영광이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주를 인해 고난을 당할 제자들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과 그 권능으로 오실 주님을 볼 자들이 있다고 16:28절에 말씀하셨는데, 이를 맛 보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변화산의 체험이 있는 신자는 그 신앙생활에 소리가 안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묵묵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을 감사함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이 변화산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옛날 달구지에 기름 안 칠하면 굴러가면서도 삐그득 삐그덕 소리가 나듯이 시끄럽습니다. 금방 표가 납니다. 그 심령에 천국 문이 활짝 열려있는 있지 않으면 신앙걸음을 고난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천국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그 영광과 우리가 누릴 영광의 구원에 대하여 맛을 본 사람, 구경한 사람은 이 고난의 십자가의 길이 그에게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이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비주의가 되면 안됩니다. 기독교는 신비를 말하지만,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신비가 우리 신앙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성경에 따라서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신비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벧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했습니다. 이 변화상에서 체험한 영적인 체험 보다 더 확실한 체험인 예언의 말슴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성경말슴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인자로서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 말 구유까지 낮아지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을 전하시는 인간예수만을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들에게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했고,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또 곧 바로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옳은 것이지만,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다. 또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하지만, 이것을 신아고백을 한 베드로 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증거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 그 영광의 모습을 세 제자들에게만 변화산에서 보여주시고는 이를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했습니다.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변화산의 모습과 같은 인자의 모습을 밧모섬에서도 보았는데 그는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분으로 성경은 말씀하며, 우리는 어떤 분으로 믿습니까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고 했습니다. 왜 말구유에 까지 낮아지시며, 낮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 출생하셨습니까 메시야이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왕자로 나셨으리라 동방박사들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낮은 위치에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왕궁에서 나셨으면, 일반 평민이 그 분을 뵈올려고 해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양간 말 구유에 나셨으니, 문도 없으니 아무나 만날 수 있고, 만나서 경배하고,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교만한 자, 잘난 자, 왕궁에 있는 자가 그 교만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림의 주님은 이런 인자가 되신 예수님이시지만, 부활, 승천하여, 그 권능으로 다시 오실 주님은 초림의 주님이 아닙니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 때는 영광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 때에는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 대에는 인자가 아니라, 왕권을 가지고 오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모습을 늘 그려야합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 까지 낮아지신 인자가 되신 주님의 그 비하 가난하고 병든 자, 죄인을 찾아 구원하신 긍휼과 사랑의 주님의 모습. 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길을 오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제물되신 예수님 그러나 이 예수님 만을 믿는 사람은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항상 감상에 젖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비참해지셨나 하는 여기만 있으면 안됩니다. 이제 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음을 믿어야합니다. 믿습니까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마귀와 죽음과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십니다. 이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광의 몸으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이제 이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는 죄인을 찾으려고 오신 초림의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그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임할 것입니다. 그 때에 당에 있는 자들이 다 볼 것이요, 주님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영광의 주님이 우리 구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왕중의 왕으로 계십니다. 아직도 십자가에 계신 약하신 주님 은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내게 이 주님이 약합니까 강합니까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그 왕이 강하다면 그 신하들이 왕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각오합니다. 그러나 왕이 비실비실하면 어떤 신하가 그 왕을 위해 자기의 것을 내어 놓겠습니까 자기 것을 챙기는 일이나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주님, 승리의 주님으로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으로 인식될 때에 우리의 믿음도 담대해지고,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어도 헛되지 않은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목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주님의 빛나는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는 왜 이런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실 때에 데리고 간 제자는 몇입니까 셋입니다. 이들이 증인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에 우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어떻게 한다고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기 까지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러나 이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 어떤 것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중인들의 중거를 기록해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을 때에 이는 본 것 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사는데 그 물건을 보여 주고, 이것을 언제 오면 팔겠다고 말로 한 것하고, 실제로 계약서를 쓴 것 하고 어떤 것이 더 확실합니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도록 해 주었지만, 이는 얼마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한 계약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말슴입니다. 이 예언의 말슴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슴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한 증거를 믿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말슴을 확실하게 믿는 자는 본 것 보다 더 확실합니다.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그 때에 변화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또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하실 일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예언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 아니라, 모세가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은 그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율법을 다 이루시려는 순종이요, 또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는 지도자였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택한 자를 구속하시는 역사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함께 나타난 것은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선지자들의 예언된 것이요, 그 예언을 따라 이루려하는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여주었을 때에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베드로가 또 여기에 나섭니다. (마17:4) 베드로가 예숚게 여짜와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정신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변형되신 이 주님을 보았을 때에 우리라도 다 그럴 것입니다. 요한은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 원하시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있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9:34에는 그가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잘못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교제가 있을 때에 그 자리를 떠나기 싫어합니다. 세상에는 지저분한 사건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을 때에 우리들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고, 그냥 초절된 믿음으로 염세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세상을 떠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책임지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가실 때에 귀신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온 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를 낫게하신 사건이 처음있었습니다. 이 귀신들린 세상, 주님을 알지 못하여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형제, 부모, 이웃가 있지만, 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산 밑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야하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른 것을 몰랐습니다. 날마다 찬송 부르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기도원을 배회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들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잊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폐단이 여기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론에 대한 교훈을 많이 들었고, 천국상급에 대하여 많은 말씀들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 자신의 성화를 이루는 일에는 아주 힘을 씁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그 이유를 잊어버립니다. 그저 나만 구원얻었으면 되었고, 나는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니 안심이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우리의 성화는 결국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개인의 신앙생활의 경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기에 있다는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를 불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에 우리를 쓰시려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대속의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세상으로 다시 내려 가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걸음을 걷기 위해 사명 감당하기 위해 은혜 받았으니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오늘에 세상으로 가는 일은 잘하는데 오히려 은혜 받는 일이 적은 것이 우리 교회의 폐다닝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부르신다는 찬송과 같이 해야합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17:5)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합니다. (마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았을 때에 오직 에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고보면, 주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몸과 세상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한 찬송 같이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 이 분 외에 더 사모하고, 더 바라보고, 더 사랑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시73편 말슴에 시편기자가 변화를 받고보니 (씨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합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아야 변화가 됩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변화를 입어서, 우리 신앙 걸음에 삐그덕 소리가 나지 않아야합니다. 예수믿는 가정은 믿지 않는 가정과는 달라야 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도 변화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제직들, 우리 교사들, 구역장들이 변화를 입어야합니다. 신비로운 신앙의 체험을 해서 이 변화를 입읍시다.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므로 우리들 모습도 간 곳 없고, 세상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합니다. 이 주님은 지금 영광의 주님으로 계십니다. 아직은 우리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지만, 심판의 주로 영광의 주로 오실 때에는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변화를 받고, 은혜를 입는 일이 중요하지만, 이것은 쓰임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은혜 받는 일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가서 세상을 다시 변화시켜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소원입니다.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우리가 오늘 소망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요, 영원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합니다. 그래서 이런 신비로운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높은 산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변화산이라고 별명을 지었습니다. 우리 기독자가 이 변화산의 체험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바로 못합니다. 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고난 후의 받으실 영광이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주를 인해 고난을 당할 제자들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과 그 권능으로 오실 주님을 볼 자들이 있다고 16:28절에 말씀하셨는데, 이를 맛 보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변화산의 체험이 있는 신자는 그 신앙생활에 소리가 안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묵묵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을 감사함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이 변화산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옛날 달구지에 기름 안 칠하면 굴러가면서도 삐그득 삐그덕 소리가 나듯이 시끄럽습니다. 금방 표가 납니다. 그 심령에 천국 문이 활짝 열려있는 있지 않으면 신앙걸음을 고난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천국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그 영광과 우리가 누릴 영광의 구원에 대하여 맛을 본 사람, 구경한 사람은 이 고난의 십자가의 길이 그에게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이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비주의가 되면 안됩니다. 기독교는 신비를 말하지만,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신비가 우리 신앙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성경에 따라서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신비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벧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했습니다. 이 변화상에서 체험한 영적인 체험 보다 더 확실한 체험인 예언의 말슴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성경말슴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인자로서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 말 구유까지 낮아지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을 전하시는 인간예수만을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들에게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했고,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또 곧 바로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옳은 것이지만,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다. 또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하지만, 이것을 신아고백을 한 베드로 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증거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 그 영광의 모습을 세 제자들에게만 변화산에서 보여주시고는 이를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했습니다.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변화산의 모습과 같은 인자의 모습을 밧모섬에서도 보았는데 그는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분으로 성경은 말씀하며, 우리는 어떤 분으로 믿습니까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고 했습니다. 왜 말구유에 까지 낮아지시며, 낮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 출생하셨습니까 메시야이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왕자로 나셨으리라 동방박사들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낮은 위치에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왕궁에서 나셨으면, 일반 평민이 그 분을 뵈올려고 해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양간 말 구유에 나셨으니, 문도 없으니 아무나 만날 수 있고, 만나서 경배하고,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교만한 자, 잘난 자, 왕궁에 있는 자가 그 교만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림의 주님은 이런 인자가 되신 예수님이시지만, 부활, 승천하여, 그 권능으로 다시 오실 주님은 초림의 주님이 아닙니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마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 때는 영광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 때에는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 대에는 인자가 아니라, 왕권을 가지고 오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모습을 늘 그려야합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 까지 낮아지신 인자가 되신 주님의 그 비하 가난하고 병든 자, 죄인을 찾아 구원하신 긍휼과 사랑의 주님의 모습. 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길을 오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제물되신 예수님 그러나 이 예수님 만을 믿는 사람은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항상 감상에 젖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비참해지셨나 하는 여기만 있으면 안됩니다. 이제 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음을 믿어야합니다. 믿습니까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마귀와 죽음과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십니다. 이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광의 몸으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이제 이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는 죄인을 찾으려고 오신 초림의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그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임할 것입니다. 그 때에 당에 있는 자들이 다 볼 것이요, 주님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영광의 주님이 우리 구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왕중의 왕으로 계십니다. 아직도 십자가에 계신 약하신 주님 은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내게 이 주님이 약합니까 강합니까 어떻게 주님을 믿습니까 그 왕이 강하다면 그 신하들이 왕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각오합니다. 그러나 왕이 비실비실하면 어떤 신하가 그 왕을 위해 자기의 것을 내어 놓겠습니까 자기 것을 챙기는 일이나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주님, 승리의 주님으로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으로 인식될 때에 우리의 믿음도 담대해지고,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어도 헛되지 않은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목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주님의 빛나는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는 왜 이런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실 때에 데리고 간 제자는 몇입니까 셋입니다. 이들이 증인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에 우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어떻게 한다고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기 까지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러나 이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 어떤 것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중인들의 중거를 기록해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을 때에 이는 본 것 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사는데 그 물건을 보여 주고, 이것을 언제 오면 팔겠다고 말로 한 것하고, 실제로 계약서를 쓴 것 하고 어떤 것이 더 확실합니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도록 해 주었지만, 이는 얼마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한 계약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말슴입니다. 이 예언의 말슴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슴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한 증거를 믿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말슴을 확실하게 믿는 자는 본 것 보다 더 확실합니다. (마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그 때에 변화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눈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또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하실 일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예언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 아니라, 모세가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은 그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율법을 다 이루시려는 순종이요, 또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는 지도자였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택한 자를 구속하시는 역사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함께 나타난 것은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선지자들의 예언된 것이요, 그 예언을 따라 이루려하는 것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여주었을 때에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베드로가 또 여기에 나섭니다. (마17:4) 베드로가 예숚게 여짜와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가 정신 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변형되신 이 주님을 보았을 때에 우리라도 다 그럴 것입니다. 요한은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 원하시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있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9:34에는 그가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잘못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교제가 있을 때에 그 자리를 떠나기 싫어합니다. 세상에는 지저분한 사건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을 때에 우리들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고, 그냥 초절된 믿음으로 염세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세상을 떠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책임지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가실 때에 귀신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온 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를 낫게하신 사건이 처음있었습니다. 이 귀신들린 세상, 주님을 알지 못하여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형제, 부모, 이웃가 있지만, 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산 밑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야하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른 것을 몰랐습니다. 날마다 찬송 부르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기도원을 배회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들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잊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폐단이 여기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론에 대한 교훈을 많이 들었고, 천국상급에 대하여 많은 말씀들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 자신의 성화를 이루는 일에는 아주 힘을 씁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그 이유를 잊어버립니다. 그저 나만 구원얻었으면 되었고, 나는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니 안심이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우리의 성화는 결국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개인의 신앙생활의 경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기에 있다는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를 불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역사에 우리를 쓰시려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대속의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세상으로 다시 내려 가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걸음을 걷기 위해 사명 감당하기 위해 은혜 받았으니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오늘에 세상으로 가는 일은 잘하는데 오히려 은혜 받는 일이 적은 것이 우리 교회의 폐다닝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부르신다는 찬송과 같이 해야합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17:5)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합니다. (마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았을 때에 오직 에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고보면, 주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몸과 세상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한 찬송 같이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 이 분 외에 더 사모하고, 더 바라보고, 더 사랑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시73편 말슴에 시편기자가 변화를 받고보니 (씨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합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아야 변화가 됩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변화를 입어서, 우리 신앙 걸음에 삐그덕 소리가 나지 않아야합니다. 예수믿는 가정은 믿지 않는 가정과는 달라야 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도 변화되어야겠습니다. 우리 제직들, 우리 교사들, 구역장들이 변화를 입어야합니다. 신비로운 신앙의 체험을 해서 이 변화를 입읍시다.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므로 우리들 모습도 간 곳 없고, 세상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합니다. 이 주님은 지금 영광의 주님으로 계십니다. 아직은 우리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지만, 심판의 주로 영광의 주로 오실 때에는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변화를 받고, 은혜를 입는 일이 중요하지만, 이것은 쓰임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은혜 받는 일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가서 세상을 다시 변화시켜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소원입니다.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댓글목록 0